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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은 주로 갈릴리 지방을 건너다니시며 주변에 복음을 전했고 갈릴리는 내륙에 위치한 호수이기 때문에 풍랑이 갑자기 일어나고 호수 가운데서 풍랑을 만나는 것은 상당히 자주 겪는 일이라고 한다. 여하튼 이 날도 호수를 건너다가 예수께서는 고물에 주무시고 계셨고 제자들은 노를 젓는 중에 갑자기 일어난 풍랑으로 인하여 혼비백산(魂飛魄散)하는 갈릴리 어부 출신들의 어줍잖은 믿음을 우리가 보게 된다. 이 사건 역시 마8:23~27; 막4:35~41에서 같이 다루고 있는 걸 본다.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이들이 모두 이런 사정을 전혀 모르는 농사꾼들이나 공무원 출신이 아닌 대부분 고기를 이곳 갈릴리에서 잡아먹으면서 뼈가 굵고 자라온 어부 출신인데도 이처럼 호들갑을 떠느냐 하는 것이다. 아주 이런 일을 처음 겪는 사람들처럼 주님 앞에서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라는 엄살을 부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오히려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는 책망을 듣고 있는 것이다.
이 사람들에게 예수께서 인간적으로 말씀하신다해도 “이 친구들아 이런 일 한 두 번 겪어봐 왜 그렇게 엄살들인가? 거기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까지 가지고 있다고 하면서 그 믿음은 또 어디다 두고 호들갑을 떠는 건가?” 하실 만도 하다. 그런데 사실 이 이야기는 우리 자신들의 이야기이다. 오늘 이 말씀을 들으면서 각자의 믿음을 점검하는 시간이 되고 오늘 주님으로부터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는 책망을 듣지 않는 나와 여러분 되시기를 바란다.
Ⅰ.인생은 언제나 평탄하지 만은 않다.(22~23)
“하루는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저희에게 이르시되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매 이에 떠나, 행선 할 때에 예수께서 잠이 드셨더니 마침 광풍이 호수로 내리치매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어 위태한지라”
우리 모두는 언제나 바람이 몰아치는 갈릴리 바다를 행선 하는 것 같은 인생을 살고 있다. 왜냐 하면 이 세상은 예고 없이 많은 풍랑 같은 어려움을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생명을 위협하는 질병의 바람, 경제를 사정없이 뒤흔드는 사업이나 직장의 파탄 같은 파경과 명태나 퇴출의 풍랑, 가정의 탈선하는 형제나 자녀로 인한 교육 문제의 태풍, 갈릴리의 폭풍보다 더 많은 종류의 인생의 바람 앞에 우리는 언제나 노출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점이 있다면 신앙의 사람들은 “큰 물결 일어나 나 쉬지 못하나, 이 풍랑 인연하여서 더 빨리 갑니다”(503:2) 라는 고백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음이 없는 사람은 “아이고 나죽었다!”고 탄식할 뿐이다.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 가나안 바로 밑에 있는 바란 광야의 가데스 바네아에서 정탐꾼을 약속의 땅에 들여보냈을 때도 불신의 사람 열 사람은 한결 같이 거기는 좋은 땅은 분명한데 올라갔다가는 다 죽는다는 보고로 모든 소식을 기다리던 같은 불신의 사람들을 혼란시켜 울고불고 그야말로 난리 그 자체였다. 그 일에 부딪혀 보기도 전에 “…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망하게 하려 하는고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민14:2b~3)고 팔자타령부터 한다. 그런 가운데 여호수아와 갈렙은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민14:8b~9)고 백성을 진정시키려 하지만 불신의 사람이 많은 가운데 그 소리는 너무나 작게 들렸다. 언제나 죄가 관영 하는 이 땅에서는 진리와 비 진리의 문제보다는 사람의 수가 우선한다. 오늘 나 자신이 그 자리에 함께 있었다면 나는 과연 어느 편이었을 것 같은가? 예수께서 육신으로 계실 때 바리세인들은 주님께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면 우리는 저희가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데 참여하지 아니하였으리라“(마23:30)고 할 것이라고 하겠지만 너희는 더할 것이다라는 무서운 말씀을 하신다.
같은 상황을 두고도 믿음의 눈으로 보는 것과 즉 하나님을 의식하는 눈과 거친 세상의 파도를 바라보는 눈은 이렇게 하늘과 땅의 차이를 보는 것이다.
오늘도 꼭 같다. 당시의 정탐꾼의 신불신(信不信)의 비율이 10:2(5:1) 이었던 것처럼 믿음의 사람은 소수고 불신의 사람은 언제나 많다. 이래서 여호수아와 갈렙이 훌륭하다고 하는 것이다. 오늘은 어떤가 마지막 시대가 되어갈수록 이 비율은 더 차이가 날 것이다. 이것이 바뀌어야 하는데 언제나 상황은 그렇지를 못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믿음의 사람들이 이기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들 편이시기 때문이며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믿는가?
Ⅱ.믿음이 바로 되지 못하면 세속적인 절망에 사로잡힌다.(24)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막4:38b) “그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 가로되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마8:25)
23절 하반 절에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어 위태한지라” 배는 교회로도 비유되고 가정으로도 비유된다. 사랑과 기쁨과 감사로 가득해야 할 이 교회와 가정에 고난의 풍랑으로 인하여 원치 않는 물이 가득 고이므로 평화와 감사의 장소가 아니라 불편한 장소가 되고 위태한 장소가 되어 버리는 이 마지막 시대의 교회들과 가정을 보는데 이 것은 함께 계신 주님을 의식하지 못하고 풍랑만을 의식하는데서 오는 부작용이다.
1.하나님은 졸거나 주무시는 분이 아니다. 비록 예수께서 옆에서 육신적(肉身的)으로 곤하셔서 주무시고 계시지만 주님은 이 우주를 운행하시는 분이시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 하시리로다”(시121:4) 우리가 고통스러워 할 때에도 주님은 “그래 내가 다 알고 있다” 말씀하실 것이다. 어떤 쪽에서 우리는 위기의 순간에는 주님을 깨워야 한다고 이 말씀을 많이 강조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의 주님은 주무시는 분이 아니시고 이 세상에 아니 이 우주 한 구석에서 일어 나는 어떤 일도 모르심이 없으신 분이시다. 믿는가? 다만 주님은 우리의 풍랑을 주님의 손에 믿음으로 맡기기를 바라시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님을 찾기 전에 절망부터 해놓고 보고 “주여, 주님!” 몇 번 불러 보다가는 ‘아이고 주님은 나의 기도는 듣지 않으시나 봐 아니 뭐 내가 주님 앞에 잘한 것이 있어야지!’ 라고 지래 짐작해 버리고 이럴 때면 과거를 떠올리며 ‘그래 그렇기 때문에 듣지 않으시는 거야!’ 라고 낙심해 버린다. 그렇기 때문에 평소에 주님께 충성해야 한다. 그러면 확신도 크기 때문이다.
병들어 있는 히스기야처럼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통해서 “… 너는 집을 처치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 하셨나이다” 할 때도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진실과 전심으로 주 앞에 행하며 주의보시기에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 하고 심히 통곡하더라”(왕하20:3)고 기도한다. 우리의 행함이 하나님 앞에 의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위기의 순간에도 확신을 더해 주기 때문이다.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처럼 절대로 졸렬하신 분이 아니다. 그 풍랑 이는 뱃전에 변변찮은 제자들이었지만 그들의 요청에 즉시로 응답하시는 주님을 뵙는다.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 이유는 의심하며 믿음으로 구하지 못하기 때문이거나(약1:6~7)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할 때만 경계되고 있다.(약4:3) 주님은 우리의 위기의 순간에 믿음으로 부르짖는 것을 외면하실 분이 절대로 아니시다. 그렇기 때문에 풍랑 가운데 절망하는 것은 믿음의 사람의 자세가 아니다.
2.주님은 그의 백성을 결코 내버려두시는 분이 아니다.
마가복음에 본문을 보면 “… 제자들이 깨우며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4:38)라고 하소연하는 제자들을 볼 수 있다.
히스기야에게 너는 죽고 살지 못하리라 하시던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하여 “…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사38:5)고 말씀하셨고
출애굽기 2:23b~25에 “… 이스라엘 자손은 고역으로 인하여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역으로 인하여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한지라, 하나님이 그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 언약을 기억하사, 이스라엘 자손을 권념(굽어살핌)하셨더라” 고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은 절대로 자신의 백성의 고난과 역경을 그대로 버려 두시는 분이 아니심을 확신할 필요가 있다. 또 다른 풍랑을 만난 제자들이 힘겹게 노를 졌고 있을 때 주님은 친히 그들을 찾아 오셨던 사건도 역시 복음서에서 읽게 된다.(요6:16~21; 마14:22-27; 막6:45-52)
지금도 고난의 파도 속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백성이 있는가? 하나님께서 버려 두지 않으심을 확신할 필요가 있다. 제자들은 이 우주의 운행 자를 옆에 모시고도 하소연하기를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라는 옅은 믿음을 나타낼 뿐이었다. 그래서 여기에 대한 주님의 응답이 바로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는 안타까움이셨고 마태복음에서는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마8:26)고 책망하심을 듣게 된다.
Ⅲ.풍랑을 잔잔케 하신 것은 주님께는 대단한 것이 아니다.
이 사건은 제자들의 놀람으로 마감이 되고 있다. “저희가 두려워하고 기이히 여겨 서로 말하되 저가 뉘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매 순종하는고 하더라” “…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고 하더라”(마8:27)
이것은 한마디로 여태 것 주님을 겉으로 알았고 헛되게 따라 다녔다는 이야기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제자들보다도 더 확실히 주님을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주님은 우리 일상에 주님을 사랑하시는 자들에게 이런 신비를 경험케 하신다. 어떤 일이 우리 자신들에게는 감당하기 어렵지만 이 우주를 운행하시는 주님께는 아무 것도 아닌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주님은 믿음을 요구하신다. 그 일을 주님의 손에 믿음으로 들려 드리기를 바라시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세상이라는 고난의 바다는 헤쳐나가기 결코 힘겨운 것이 아니다. 다만 조건이 있다면 주님을 창조주와 구세주로 나의 모든 삶의 능력으로 인생의 최고의 가치로 생명의 목표로 확실히 믿고 신뢰하는 것이 필요할 뿐이다. 우리 주님은 이를 위해서 세상에 33년을 육신으로 사셨고 친히 경험하시고 십자가를 지셨다. 그러고 선언하시는 말씀이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요16:33) 요한 사도는 그의 만년에 다시 확언하기를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요일5:4~5) 라고 이 약속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우리에게 아무리 어려운 문제처럼 보이는 것도 주님께는 아주 작은 일일뿐이다. 죄진 우리들에게 이를 가능케 하기 위해서 우리의 죄를 해결하시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음을 명심하자. 죄를 해결해 주심으로 능력의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셨다. 할렐루야!
Ⅳ.모든 것은 우리 믿음의 문제일 뿐이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을 주님께서는 왕으로 이 땅에 보내셨다.(벧전2:5, 9; 계5:10, 20:4, 6, 22:5) 주님의 최후의 명령도 정리하면 “나의 의롭고 진리 된 다스림을 가지고 가서 선포하라 그러면 세상이 너에게 순종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너희들의 왕권을 수행하는데 친히 함께 하겠다.” 라고 말씀 하셨다. 그 말씀이 바로 주님의 승천하시기 전의 명령이다.(마28:18~20) 그러므로 신앙의 사람들은 왕이다. 그러나 포로가 되어 있는 왕은 권세와 힘을 발하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왕의 신분을 가졌어도 세상의 포로가 되어 있다면 왕의 자리는 부끄럽고 짐스러울 뿐이다. 한가지 더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왕권은 자신의 권위를 행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을 위해서만 쓰여져야 한다. 그 예로는 사울과 솔로몬이다. 솔로몬은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조차도 나중에는 정략적인 화해를 위하여 사용되고 만다.
믿음이 바로 되어 있으면 왕의 당당함이 나오고 그렇지 못하면 포로처럼 초라한 모습으로 육신의 필요만을 구하는데 급급할 뿐이다.
세상의 바다에서 풍랑은 믿음의 사람이건 불신의 사람이건 당연히 만날 수밖에 없는 어려움이다. 그러나 꼭 같은 사건일지라도 보는 눈에 따라서는 본문의 믿음 없는 제자들처럼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라고 탄식할 수가 있고 주님과 함께 사는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그저 지나야 하는 낙동강 하구의 여울[옛날 부산에서 배를 타고 여수를 가거나 오면 반드시 낙동강 하구에서 여울을 만나 배가 심하게 요동한다.]일 뿐이다. 멀미를 계속적으로 하는 사람은 없다. 멀미를 하면서도 계속 배를 타게되면 차차 멀미에 익숙해져서 나중에는 마침내 하지 않게 된다. 우리의 믿음의 삶이 그와 다를 바가 없다.
다만 우리의 믿음이 제대로 되지 못하면 겉으로는 같은 눈을 가졌어도 풍랑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크게 보일 수밖에 없고 그런 사람들 대부분은 주님을 만왕의 왕으로 믿고 섬기고 산다고 하면서도 세상 적인 성공을 위해서는 평생을 투자하면서도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는 하나님의 역사만을 기대하면서 태만하다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는 문제가 있고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면서도 여전히 세상의 습관을 버리지 못한다면 광야에서 죽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고 하신 것이다.
우리 인생의 만나는 어떠한 풍랑과 같은 일도 주님의 손에 들려 졌을 때는 아무 것도 아님을 명심하자. 그리고 풍랑을 만날 때는 언제나 자신이 주님을 얼마나 바로 섬기고 있는가 스스로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제대로 된 그리스도인은 주변에 일어나는 문제를 자신의 책임으로 짊어진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오히려 그 반대다. 오히려 남을 정죄 하는데 빠르고 책임을 다른 사람들 속에서 찾으려고 하는데 이것은 또 다른 죄성이다.
모든 것은 우리 각자의 믿음의 문제다. 만약에 우리가 신앙하고 살았다고 자위하며 살았는데 주님 앞에 이른 마지막 때에 주님께서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고 책망하신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오늘도 우리 각자가 만나는 작은 풍랑은 우리 자신의 믿음을 새롭게 세울 기회임을 깨닫고 주님과 자신의 관계를 다시 새롭게 하여 나의 모든 문제는 주님의 문가 되도록 우리 삶을 온전히 주님께 맡기는 나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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