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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종배 전도자
막 6:45~52 2003-05-26
유령인가 하여 소리지르니...  
우리는 지난주에 이어 또 하나의 제자들의 풍랑 사건을 다루고 있다. 차이가 있다면 지난번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모신 가운데 만났던 풍랑이었고 오늘 본문의 말씀은 주님께서 따로 기도하고 계시다가 제자들이 풍랑으로 괴로워하는 것을 아시고 찾아오신 차이가 있다. 이 사건 역시 누가복음을 제외한 마14:22~33; 요6:15~21에서 같이 다루고 있는 내용이다.

요한 복음의 이 말씀이 연결되어지는 문맥을 보면 오늘 본문의 배경이 아주 명백하게 기록되고 있는 것을 보는데 저물어 가는 갈릴리의 언덕에서 주님께서는 어린아이의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남자만 5천명이 넘는 숫자를 기적의 떡으로 먹이고 나자 그 기적의 떡을 배불리 먹은 사람들이 예수를 임금 삼으려는 기미를 보시고 오늘에 연결되어지는 내용을 연이어서 읽게 된다.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타고 앞서 건너편 벳새다로 가게 하시고, 무리를 작별하신 후에 기도하러 산으로 가시다, 저물매 배는 바다 가운데 있고 예수는 홀로 뭍에 계시다가”(45~47) 우리의 생각으로는 예수께서 저들의 임금 삼음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오히려 복음 사역이 더 쉬울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구태여 그것을 거부하고 자신을 옹위 하는 군중을 흩어 보내시는 동안에 제자들을 먼저 건너편으로 배 태워 보내신다.

많은 군중을 흩어 보내시고 제자들을 먼저 보내신 주님은 우리 생각 같아서는 그만한 능력을 가지셨으면 뭐 기도가 필요하겠는가 싶지만 타고 건너실 배도 없는 가운데 산에 가셔서 홀로 기도하고 계신 모습을 본다. 그리고 기도 중에 풍랑으로 고난 당하는 제자들을 아신 것 같다.

오늘 우리가 생각하고자 하는 주안점은 위험과 절망 속에 그 제자들을 구원하러 오신 주님을 유령으로 취급했다는 것이고 오늘 우리도 짐짓 이런 안타까운 신앙의 삶을 살 수 있다는 경계의 교훈이다. 기도하시다가 풍랑으로 괴로워하는 제자들을 구원해 주시려고 물위로 걸어오시는 주님을 자신의 이성적으로 이해되지 않는다고 유령이라고 소리를 지르는 제자들의 모습은 주님께서 보시기에 얼마나 서운하셨을까? 하는 안타까움이고 오늘 우리는 어떤가 하는 것이다.

오늘 이 사건을 성경으로 늘 대하며 신앙한다고 하면서도 때로 주님은 나에게 있어서 실재적이고 임마누엘이 되시는 주님이라고 입술로는 고백하면서 이 풍랑 만난 제자들처럼 주님을 있으나 마나 한 존재로 무시하거나 인정치 않는 우리 자신들이 아닌지 깊이 이해하고 그러한 자세를 바로 돌이킬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겠다.

Ⅰ.주님은 괴로움을 당하는 인생들을 찾아 오셨다.(47~48)

“저물매 배는 바다 가운데 있고 예수는 홀로 뭍에 계시다가, 바람이 거스리므로 제자들의 괴로이 노 젓는 것을 보시고 밤 사경 즈음에 바다 위로 걸어서 저희에게 오사 지나가려고 하시매”

인생은 그 자체로 문제 투성이이다. 에덴의 범죄이후의 인생에게 문제가 없는 인생은 없다. 예레미야 선지자의 고백처럼 “너희 허물이 이러한 일들을 물리쳤고 너희 죄가 너희에게 오는 좋은 것을 막았느니라”(렘5:25) 인간에게 올 수 있는 모든 좋은 것은 죄로 인하여 차단되고 어려움과 불운만이 가장 쉽게 찾아오는 인생, 그래서 인생은 불쌍한 존재이다. 여기서 에레미야가 강조하는 사실은 다른 사람의 허물과 죄 때문이 아니라 “너희 죄가 너희에게 오는 좋은 것을 막았느니라”는 것이다. 이를 가리켜 욥은 고백하기를 “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났나니 불티가 위로 날음 같으니라”(욥5:7) 고난이 더 자연스러운 인생… 얼마나 가련한가!

의지적으로는 의롭게 살고 싶은 인생도 아담으로 인하여 이 세상에 들어온 죄는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범할 수밖에 없는 범죄의 환경을 만들어 버렸고 여기에서 누구도 예외가 있을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바울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3:23) 라는 한탄과 함께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1~24)는 탄식을 하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러한 인생들끼리 불쌍히 여기라고 당부하시는 것이다.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4:32)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체휼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벧전3:8) 가련한 인생끼리 다투고 싸우는 모습이 하나님 보실 때는 오죽이나 측은하시겠는가?

인간스스로는 절대로 운명을 바꿀 수 없는 비극적인 인생, 그러한 절망을 불쌍히 여기신 주님께서 우리의 비극인 죄를 해결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우리와 같은 몸을 입고 오신 것이다. 이에 대한 평가를 성령의 사람인 바울은 이렇게 고백한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7~8)

우리의 노래처럼 “두둥실 두리둥실 배 떠나가네 물 맑은 봄 바다에 배 떠나가네… ” 라는 식의 삶이라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어느 인생도 괴롭게 그 인생을 저어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바람이 거스리므로 제자들의 괴로이 노 젓는 것을 보시고 밤 사경 즈음에 바다 위로 걸어서 저희에게 오사”(48) 평탄할 만 하면 다시 풍랑은 그 인생을 거스리고 그래서 괴로이 인생을 감당할 수밖에 없는 “괴로이 노 젓는” 것이 고해라고 하는 이 세상에 우리의 인생을 노 저어 가는 모든 인류라고 보기 때문에 이것은 단순한 제자들을 향한 연민이 아니라 죄에 신음하는 전 인류를 향한 주님의 긍휼이다. 주님은 죄로 죽어 마땅한 인류를 살리시기 위하여 친히 죽으러 오셨고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오셨다.

Ⅱ.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유령 취급한다.(49)

“제자들이 그의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유령인가 하여 소리지르니”

“유령(幽靈)”이라고 번역된 이 낱말은 [favntasma (phantasma), an appearance, an apparition, ghost; 허깨비, 귀신, 환영] 등등의 의미로 번역될 수 있는 말이다. 이것은 기본이 극도로 상승되어 있는 가운데 나타나는 환상을 의미하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기분이 공양되어 있을 때만 우리의 눈에 보이시기를 원하는 유령이기를 결코 원치 않으신다. 한가지 안타까운 사실은 주님께서 죽으셨다가 삼일만에 부활하셔서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위로하시고 소망을 주시기 위해 나타나셨을 때 “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니, 저희가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발을 보이시나, 저희가 너무 기쁘므로 오히려 믿지 못하고 기이히 여길 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매,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눅24:36~43) 는 기록이다.

1.불신의 세계에서는 당연히 그럴 수 있다. 하나님이 부정되는 사회 속에서는 어느 하나도 확실한 것은 없고 모든 것이 모호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무신론자들에게 있어서는 그들이 성인시 하는 모든 대상들을 포함해서 예수나 하나님도 유령과 같은 존재로 취급될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그것을 탓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2.신앙의 사람들 속에서 주님은 유령 취급을 당하신다. 우리는 지금 불신의 사람들을 얘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신비한 환상 중에서만 주님을 뵙는다고 하는 것이 사실은 문제이다. 정상적인 일상에서 늘 뵙는 주님이 아니라 예배 시간이나 부흥회, 기도회 때만 들뜬 기분 속에서만 주님을 본다고 하는 것이 문제이다.

우리가 하늘과 땅, 이 우주에 인격적으로 항상 존재하시는 주님을 의식하지 못한다면 또 하나의 미신이나 별반 차이가 없다. 만약에 우리 각 개인이 가족들로부터 세상을 떠난 존재로 취급을 당한다면 그 기분이 어떠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곧잘 그렇게 주님을 대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나는 절대로 그렇지 않다”고 항변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다.

①그리스도인이란 사람들이 일상의 삶 속에서 없는 것처럼 처우한다. 우리 믿는다는 사람들 중에 육신적(肉身的)인 눈으로 주님께서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주님을 허깨비로 취급하는 일이 너무나 많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육신으로 계심을 보고 있다면 그렇게 할 수 있을까 하는 일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이 인생에 있어서 가장 가치 있고 귀중한 믿음의 사람들의 가치라고 하면서도 세상에서 조금이라도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이 있으면 ‘주님 잠깐만!’ 하고 그 일을 먼저 한다. 과연 주님께서 불꽃같은 눈으로 보고 계신다면 그럴 수 있을까? 생각하게 된다. 사람을 의식해도 할 수 없는 일들을 우리는 주님과 임마누엘로 살기를 원한다고 고백하면서도 곧잘 해버린다. ‘그럴 때 주님은 과연 어떠한 기분이실까?’ 라고 한번이라도 생각한다면 우리는 함부로 그렇게 못할 것이다. 우리의 삶에서 주님께서 있으나 마나 한 존재로 취급되신다면 그러한 사람의 인생에도 주님은 있으나 마나 한 가치로 밖에 역사 하실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이점을 깊이 생각해야만 한다. 분명히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주님은 상천하지(上天下地)에 충만해 계신 분이시고 우리 각자의 머리카락의 수까지도 알고 계시는 분이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을 경외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②고난과 역경 속에서 그 문제를 해결하시기를 원하시는 주님을 허깨비로 다룬다.

오늘 본문의 제자들은 “괴로이 노 젓는 것을 보시고 밤 사경 즈음에 바다 위로 걸어서 저희에게 오신”(48) 주님을 유령이라고 소스라치게 놀랐다는 사실이다. 물론 평상시에 주님께서 안 계신 것처럼 행동하던 사람들에게 주님은 그들이 당한 어려움에서도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떤 경우에 사람들은 자살을 생각할 정도로 인생의 파탄을 경험하는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기도 한다. 사실 그럴 때는 사람들이 도움이 되지 못한다. 이 제자들이 절망하며 노를 저으며 살길을 찾는 것처럼 그런 위기 가운데 있을 때 그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사람이 아니다. 주님만이 그런 절망적인 문제들에 유일한 희망일 뿐이다. 그럼에도 평상시에 주님을 가까이 하지 못했던 사람들은 주님께로 문제를 가지고 가지 못하는 이유는 주님께서 여전히 보이지 않는 존재로 너무나 멀리 계시는 주님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주님은 우리의 모든 인생을 과제를 전부 다루시기를 원하시며 믿음으로 확실히 맡기기만 하면 기꺼이 해결해 주실 분이라는 사실이다. 믿는가?

Ⅲ.그럼에도 주님께서는 연약한 믿음의 제자들을 위로하신다.(50)

“저희가 다 예수를 보고 놀람이라 이에 예수께서 곧 더불어 말씀하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하시고”

바로 그날 저녁때에 빈들에서 이적의 떡으로 수천을 먹이신 주님을 따르면서도 물위로 걸어오시는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한심한 제자들, 제 자신만 같아도 “그래 꼴 좋다, 한번 당해 봐라!” 그러고 지나가셨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여기서도 주님의 사랑은 한이 없다.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그래서 우리 주님은 좋으신 분이시다. 이 분이 바로 나와 여러분들의 주님이시다. 믿는가?

주님께서는 언제나 연약한 믿음의 사람들을 꾸짖는 대신에 격려하고 위로하셨다. 주님보다는 풍랑이 더 심각하게 보이는 연약한 사람들, 혼란해 하는 사람들에게도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격려하시는 주님이시다.

그러나 안다고 하면서도 거스리는 자들을 향하여서는 주님은 무서운 책망을 하셨다. 알 때도 되었는데, 아니 아노라고 큰 소리 치는데 삶은 믿음을 따라가지 않는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은 아주 무서운 말투로 책망하셨다.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마23:33)

물론 세상의 풍파와 싸우다 보면 우리의 믿음이 무디어지고 주님에 대한 확신이 옅어지기도 하지만 우리 인생자체가 연약하기 때문에 주님이 더욱 필요하다는 사실을 주님께서 더 잘 아신다. “배에 올라 저희에게 가시니 바람이 그치는지라 제자들이 마음에 심히 놀라니, 이는 저희가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51~52)

같은 병행 말씀인 마14:28~32에는 요한이나 마가가 침묵하고 이는 내용이 있는데 그것은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위로 오라 하소서 한대,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는 말씀에서 베드로의 또 다른 경험에서 우리 일반적인 사람들이 경험할 수 있는 사실들을 추가로 소개하고 있다.

이 사건을 통해서 베드로는 또 다른 경험을 하게 되고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위로 오라 하소서 한대,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주님의 언약을 확인했음에도 베드로는 잠시 눈을 돌리는 사이에 다시 물 속에 빠져가고 또다시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라는 외마디를 외치고 있는 모습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주님은 여전히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Ⅳ.결론.

“저물매 배는 바다 가운데 있고 예수는 홀로 뭍에 계시다가, 바람이 거스리므로 제자들의 괴로이 노 젓는 것을 보시고 밤 사경 즈음에 바다 위로 걸어서 저희에게 오시는” 주님을 향하여 “제자들이 그의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유령인가 하여 소리지르는” 안타까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하시고” 위로해주시는 주님 앞에 부끄러워 몸둘 바를 모르는 제자들…

오늘 나(우리)는 어떤가?

오늘 내용은 아직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나 그분에 대해 너무나 무지했고 성령을 받기 이전의 제자들의 모습이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과정과 신구약 성경과 성령을 통하여 주님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우리들은 어떤가 하는 것이다.

주님은 죄로 인하여 저주받을 수밖에 없는 나, 스스로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인생을 찾아 오셔서 십자가로 저주를 대신 져 주시고 하늘의 거룩한 영광의 약속을 바라며 살게 하시고 이 세상에서 혼자서 감당할 수 없는 수많은 일들을 함께 감당해 주시기 위해 임마누엘이 되시는데도 우리는 급하고 필요할 때는 불러 세우고, 편하고 잘 될 때는 마치 없는 것처럼 유령 취급을 하고 있는 나 자신은 아닌지…? 아니 오히려 힘겹고 어렵다고 부르짖을 때 찾아와서 그 문제들을 해결해 주시려 하지만 우리의 이성과 생각, 그리고 세상의 가치에 익숙해져서 오히려 유령이라고 소리 지르는 나는 아닌지…?

우리는 주님을 향한 믿음을 가지고 천국을 바라보면서 산다고 하면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기보다는 세상의 고생스런 삶에 빠져들어 가고 있지 않은가? 우리 아버지 하나님은 이 우주를 운행하시고 나의 인생을 책임질 분이시라는 사실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때로는 옆에 늘 함께 계시는 주님을 없는 것처럼 무시하고 사는 나 자신은 아닌지…?

[325]

1.주 예수 대문 밖에 기다려 섰으나, 단단히 잠가두니 못 들어오시네, 나주를 믿노라고 그 이름 부르나, 문 밖에 세워두니 참 나의 수치라.

2.묻 두드리는 손은 못 박힌 손이요, 또 가시 면류관은 그 이마 둘렸네, 이처럼 기다리심 참 사랑이로다, 문 굳게 닫아두니 한없는 내 죄라.

3.주 예수 간곡하게 권하는 말씀이, 네 죄로 죽은 나를 너 박대할소냐, 나 죄를 회개하고 곧 문을 엽니다, 드셔서 좌정하사 떠나지 마소서.[아멘]

더 이상 주님을 외롭게 두지 말자. 주님은 결코 내 인생 언저리에 외면 당해야 될 분이 아니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