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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서로의 호칭에 따라서 관계의 깊이가 다르고 반대로는 서로의 관계로 인하여 서로를 부르게되어 있다. 연애 시절에 “자기”라거나 이름을 부르다가 막상 결혼을 하면 부모님들과 함께 있을 때는 서로의 호칭이 어려울 때도 있다고 한다. 이렇게 남으로 인해 서로를 부르는 영향을 받게 되는 역시 사람은 관계의 어려움을 갖는 것도 인간관계의 피할 수 없는 한 단면이다.
이 마태복음 본문과 마가복음 8:27~30, 누가복음 9:18~21의 병행되는 말씀들은 세 복음서의 분수령(分水嶺) 같은 귀한 말씀으로 공관복음 모두 중심이 되는 귀중한 말씀이면서 우리 신앙하는 각자에게도 늘 의식해야 하는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확인 시켜주는 귀한 교훈이다.
모든 신앙하는 사람들은 이 말씀과 같은 고백 위에 믿음을 세우고 믿음생활을 한다. 그러나 과연 입술의 고백을 따라 삶이 따라주고 있는가 하는 깨달음도 늘 있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나의 말하는 것을 행치 아니하느냐”(눅6:46) 고 입술로만 선생 된 종교지도자들을 책망하시는 것을 듣는다.
이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경계는 ①나는 다른 사람이 평가하고 부르는 이름으로 주님을 섬기면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고 있지 않은가 하는 안타까움과 ②주님을 나의 메시야 즉, 왕이요 대제사장이요 대선지자 라고 부르면서 그 말씀은 순종치 않는 이율배반적인 삶은 아닌가? ③또 하나의 경계는 베드로처럼 하나님 나라의 영광만을 꿈꾸면서 이 땅에서의 주님의 일을 가로막는 나 자신이 아닌가? 하는 세 가지 검증이 다 필요하다.
Ⅰ.예수 그리스도는 바른 고백을 들으시기를 원하신다.(13~14)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가로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우리는 그 때 당시로부터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의 그리스도에 대한 평가를 듣게 되지만 그들의 평가에 결코 좌우될 필요는 없다. 헤롯왕으로부터 흘러나왔을 것 같은 세례요한, 과격하리 만큼 격렬한 선지자 엘리야, 죄인과 세리의 친구, 귀신들린 사람, 2천년 전의 예수, 이스라엘의 인권운동가 선생, 기존의 종교에 반대하던 예수, 로마의 가장 비참한 사형 방법으로 죽은 예수, 수많은 이름들만큼이나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도 달랐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실 많은 구약 인물들의 성격을 함께 가지고 계셨다. ①왜냐 하면 그는 엘리야나 요한처럼 죄에 대하여 분노하시는 대선지자의 모습[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마23:33)]을 가지셨다. ②그런가 하면 멸망하는 백성들과 예루살렘을 안타까워 우는 눈물의 선지자인 예레미야 처럼 대제사장적인 모습을 예수에게서 뵐 수 있다.[마23:37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눅19:41~44)] ③사람들뿐만 아니라 사망을 향하여 명령하시고(요11:43) 마귀들과 자연들까지도 다스리시는 왕의 위엄을 가지셨다.[막1:25~26예수께서 꾸짖어 가라사대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으로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오는지라]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막4:39)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평가는 천차만별(千差萬別)이다. 우리는 예수에 대한 세상의 평가에 흔들릴 필요는 없고 때로 우리가 우리의 삶 속에 함께 하시는 주님을 증거 함으로 그들의 평가를 바로 잡아줄 필요가 있다. 어떤 사람들에게처럼 지금은 역사 속에 지나간 영웅이나 성자처럼 현실의 삶에는 아무 영향력도 없이 다만 정신적인 지주인 간디나 에머슨 같은 존재는 아닌가? 오늘 나의 삶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영광을 받으시기도 하고 지나간 한 시대를 지배했던 과거의 인물로도 비쳐질 수 있다는 데서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예수의 평가에 기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한다. 이런 입장에서 오늘 나의 바른 고백적인 삶이 중요하고 그 영향은 세상과 이웃에게 파생된다. 사람들은 현실의 나를 보면서 역사 속의 그리스도를 생각하는데 나는 과연 어떻게 영향을 줄 수 있는가? 오늘 나와 예수 그리스도는 과연 어떤 관계인가?
주님은 이런 입장에서 오늘도 우리 각자에게 묻고 계신다.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Ⅱ.예수 그리스도는 나의 고백을 듣기를 원하신다.(15)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주님은 베드로의 고백을 앵무새처럼 흉내내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오늘 나에게서 듣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질문은 우리의 모든 시간과 운명 속에서 주님께서 끝임 없이 나에게 던지시는 질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그 아내를 통해서 이와 반대로 물으셨다. “…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욥2:9) 그러나 불변하는 믿음의 고백을 가진 욥은 변함없이 고백하기를 “…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치 아니하니라”(욥2:10) 그래서 욥은 욥이었다.
오늘 욥처럼 절망과 좌절을 경험하면서 죽음의 문턱에 서 있는 것 같은 위기의 태풍 속에 있는 사람이 있는가 역시 주님은 같은 질문으로 다가 오신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묻고 계신다. 여기에서도 “주님만이 나의 모든 죄를 하나님 앞에 가져 가셔서 해결하시고 하나님을 가장 사실적으로 나에게 보여주시고 나의 생사화복을 친히 다스리시는 주님이심을 확신합니다!” 라는 고백을 드릴 수 있다면 주님은 오늘 고백 속에서 감당하고 있는 어려움들을 기꺼이 감당해 주실 것이다. 믿는가?
①주님은 막연한 고백을 싫어하시고 ②강요에 의한 고백도 싫어하신다. 아내들은 남편에게 가끔 “나는 당신에게 누구냐?” 라는 질문들을 하곤 한다. 그것은 사랑을 확인하고픈 자세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영원하신 신랑이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자주 이런 질문을 하고 계신다.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일세기에 로마는 권력으로 그리스도인들에게 로마의 황제인 씨저가 주님이라고 고백할 것은 강요했었다. 그러나 주님은 억지 고백을 원하시지 않으신다. 시편 8:1~2에서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을 하늘 위에 두셨나이다, 주의 대적을 인하여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와 보수자로 잠잠케 하려 하심이니이다” 라는 고백을 시인은 드리고 있다.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것은 하나님은 절대로 우격다짐으로 고백을 들으시는 분이 아니시라는 의미이다.
우리말에 “억지춘향” 이라는 말이 있다. 어떤 것을 자의로 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힘으로 밀어붙이는 식으로 하는 것을 일컬음이다. 주님은 우리 각자의 고백을 요구하시지만 절대로 억지로 강요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사랑의 주님은 그 사랑의 능력 앞에 엎드려 고백하기를 바라신다.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라는 오늘 주님의 질문에 베드로처럼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라는 고백을 드릴 수 있는 나와 여러분 되시기를 …
Ⅲ.예수 그리스도는 고백하는 대로 살기를 원하신다.(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우리가 아는 대로 그리스도는 기름 부음을 받은 자요 구약 성경에 세 가지 직임의 사람들을 본다.
①나의 대제사장으로의 고백이다. 나의 죄를 해결하실 분은 주님 밖에 없다는 고백이다.
184:1.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의 피밖에 없네, 다시 성케 하기도 예수의 피밖에 없네,
2.나를 정케 하기는 예수의 피밖에 없네, 사죄하는 증거도 예수의 피밖에 없네,
3.나의 죄속 하기는 예수의 피밖에 없네, 나는 공로 없도다 예수의 피밖에 없네,
(후렴)예수의 흘린 피 날 희게 하오니, 귀하고 귀하다 예수의 피밖에 없네.
우리는 때로 다른 어떤 방법으로 우리의 죄와 관련되어 있는 우리의 사망과 절망을 해결해 보려는 시도를 하곤 한다. 스스로의 노력으로 신령해 지려고 발버둥 쳐보기도 하고 그 노력에 따라가지 못하는 자신을 한탄하기도 한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모든 인류가 누구나 예외 없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한다. 예수라는 이름 자체가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마1:21) 는 나시기 전부터 주어진 이름이다.
때로 목회자들은 교회 일을 하다보면 ‘거룩하고 신령하게 보이도록 하자!’ 라는 시도로 거룩해 보이는 구별된 옷을 입어보기도 하지만 무슨 옷을 입는다고 죄성이 도말 되고 거룩해 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나와 인류의 죄를 해결할 수 있는 복된 이름은 예수 밖에 없다. 이런 이유에서 주님은 나에게 그리스도이시다.
히브리서 기자는 레위 가문의 대대로 바뀌는 제사장의 한계를 지적하신 후에 그것이 영원하신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의 모형이었음을 증거 한다.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든지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그 후에 자기 원수들로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히10:11~14) 주님만이 완전하고 영원한 나와 인류의 대제사장이고 우리를 왕 같은 제사장으로 부르셨다.
②나의 대선지자로의 고백이다.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범죄 한 이스라엘의 선지자로 세웠던 것처럼 하나님을 가장 나에게 잘 보여 주는 미래의 영광을 오늘에 가져오는 인물이 바로 선지자이다. 그러므로 역시 하나님을 가장 바르게 알 수 있는 방법은 예수밖에 없다. 예수 그리스도는 당시의 세상의 많은 평가처럼 하나님을 부분적으로 보여줬던 선지자들의 여러 가지 모습을 다양하게 지니고 계셨고 히브리서 기자는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1:1~3)고 고백하고 있다.
우리는 요한 복음에서 이러한 주님의 선언을 여러 군대서 접하게 된다. 서두에서부터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1:1)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자신이라는 말씀을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신 아버지와 하나님 아버지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를 중요한 부분들을 수없이 선언한다. 10:38, 17:21, 23 등등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요14:10~11)
뿐만 아니라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요14:8) 라는 빌립의 요청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9)는 말씀을 하심으로서 자신이 하나님 되심을 친히 증거 하셨다. 육신을 입으시고 육신을 가진 인간에게 내려오신 하나님,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다.(빌2:5~11)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선지자보다도 하나님을 분명히 그리고 가까이 보여주시는 대선지자이시다.
③나의 왕으로서의 고백이다.
이 부분이 가장 중요하고 오늘 우리의 삶에 가장 밀접한 관련을 가진 부분이다. 구약의 모든 왕들은 한결같이 기름부음을 받고 대관식을 올림으로 자신의 한 시대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왕 중의 왕이시오 모든 권세의 근원이시다. 주님은 오늘 나의 삶의 현장에 살아서 함께 하시고 보시고 역사 하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으로 고백해야 하는 분이시다.
함에도 우리의 운명의 결정권을 가지신 왕이시라고 고백하면서 주님을 허수아비 취급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이것이 가장 심각한 문제인 것 같다. 주님을 눈먼 소경취급하고 귀머거리 취급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한가지 사실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대우하는 만큼 주님은 나의 인생을 주장하실 수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평상시에는 주님을 왕으로 고백하다가도 세상의 이권이나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갑자기 “일”이 왕으로 변신하고 사람이 왕으로 변신하는 부끄러운 모습들을 가진다. 예배에서는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다가도 어려운 일이 닥치면 그것을 해결할 돈을 찾고 사람을 찾는 불신을 드러내고 마는 경우가 허다하다.
“기쁜 때나 슬픈 때나 바쁜 때나 틈날 때, 예수 친히 하신 말씀 날 더 귀히 여겨라”(366:3) 주님은 요구하신다. 분명히 주님은 그러실 자격이 있으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오늘도 내일도 영원히 나의 왕 되심을 믿는가?
Ⅳ.모든 인간이 반드시 드려야 할 고백이다.(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1.이 고백은 참으로 복된 고백이다.(17f)
이 고백은 결혼한 부부가 최초로 “여보” 라고 고백하는 것 보다 훨씬 귀한 고백이요, 말을 시작하는 어린 젖먹이가 엄마, 아빠를 고백하는 것보다도 비교될 수 없을 만큼 귀한 고백이다.
2.이 고백은 죄진 인간 스스로는 드릴 수 없는 고백이다.(17b)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3)
3.불변하는 고백이 되어야 한다. 베드로는 이 고백 뒤에 주님의 일에 “그리 마옵소서!” 라고 사탄의 노릇을 했고 나중에는 여자아이 앞에서 세 번씩이나 주님을 함께 있는 분으로조차 부인하고 말았다. 이 고백은 주님의 영광의 권능으로 이 땅에 오실 때까지 지속되는 한결 같은 고백이 되어야 한다.
Ⅴ.오늘 나의 운명이 이 고백과 삶 속에 있다.
주님은 오늘 우리로부터 우리 각자로부터 바른 고백을 듣기를 원하신다. 억지가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고백을 들으시기를 원하신다. 뿐만 아니라 주님의 우리가 입술로 고백하는 것처럼 살기를 원하신다. “주님만이 나의 모든 죄를 하나님 앞에 가져 가셔서 해결하시고 하나님을 가장 사실적으로 나에게 보여주시고 나의 생사화복을 친히 다스리시는 주인이심을 확신합니다!” 이러한 고백대로 살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교회 속에서나 평안 속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베드로처럼 고백하기도 한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그러나 우리가 질병이나 어려움을 느낄 때 그렇게 고백하던 입술은 어느새 탄식과 슬픔으로 바뀌고 주님을 무능력한 불상처럼 취급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 것을 본다. ‘주여 내가 죽겠나이다. 나를 구원해 주소서!’ 오히려 그러한 가운데서도 흔들리지 않는 사람을 이상하게 보는 불신의 모습을 버려야 한다.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가 평상시에도 바른 고백이 필요하지만 위기와 절망 속에서 영혼을 가다듬고 바른 고백을 드리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왜냐 하면 나의 진면목은 언제나 그러한 때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우리 각자가 사망과 한 걸음의 간격에 있을 때에도 예수 그리스도는 그 문제 속에 벌써 와 계신 분으로 믿고 확신하는 것이 필요하다.
주님은 이런 입장에서 오늘도 우리 각자에게 묻고 계신다.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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