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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믿는 사람들은 사실 너무나 막연하게 ‘주님께 영광’ 이라는 표현을 남발하는 경우가 더러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가만히 있으면서 주님께 영광은 불가능하다. 하나님의 바라시는 것을 하는 것이 주님께 영광이 될 수 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는 바울 사도의 가르침도 사실 그런 것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 그것은 주님의 원하심을 위해서 일하여 그토록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든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죄인들을 구하는 일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심판을 미루시면서 까지 오래 참으시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음을 베드로 사도는 가르쳐 주고 있다. [벧후3:9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이것은 사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계실 때 직접 말씀하신 것이다.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요6:40)
영적인 생명을 잉태하고 해산하고 출산하는 것 그것은 생명 있는 성도와 교회가 당연히 행해야 할 그리스도의 신부로서의 의무이고; 마치 자식을 혼인시켜 들어온 자부로 하여금 자녀를 보는 부모의 기쁨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이 전부는 아니고 아내 된 미덕과 순결과 아름다음을 잃지 않고 지켜 가는 것 또한 아내로서의 당연한 품위이다. 결국 잃어진 영혼을 구원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의지와 그러면서도 자신의 신앙을 훼손시키지 않고 그리스도인의 순결을 지켜 가는 두 가지 과제를 천국의 백성들을 지속적으로 이루어 가야 할 것이며 오늘 본문의 내용이 이 두 가지를 분명히 가르쳐 주고있다.
주님께서 나를 먼저 자신의 피로 씻어서 죄에서 구원하신 이유는 또 다른 생명의 재생산을 위하여 그렇게 하셨음을 깨닫고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주님은 이미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도 기뻐하시지만 인간 구원에 대해서는 절대로 만족하실 수 없는 사랑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한 사람도 사탄의 수하에서 사망의 종노릇하는 것을 결코 기뻐하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바울 사도를 통해서도 이를 분명히 선언하고 계시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2:4)
이러한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진 바울 사도는 당연히 이 일을 위해서 마음 달아 있었고 그의 일생에 이일을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이라도 감수할 수 있다는 고백을 수없이 반복하고 있다. 이일만 원만히 이루어질 수 있다면 자신의 체면이나 입장은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는 고백을 하고 있는 것이다. 로마의 감옥 속에서 그를 질투하던 사람들의 시기에 찬 열심을 들으면서도 “그러면 무엇이뇨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빌1:18) 사실은 우리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면 다 이래야 할텐데 사실에 있어서는 그렇지 못하다. 복음 증거보다는 나 자신의 자존심과 입지가 더 귀중함을 우리는 우리 자신들 속에서 너무나 자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보다 사실적인 표현은 그분의 기대하시고 바라시는 인간구원을 위해서 우리 인생을 투자하고 일하는 그 일을 위해서 사는 바울 사도의 삶을 우리가 배우고 깨달아서 어떤 종류의 사람이든지 그리스도의 피에 씻어 새로운 피조물로 구원하기를 원하는 같은 사랑의 의지를 우리의 교회와 인생에 실현하는 나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복되신 이름으로 …
Ⅰ.바울은 사람들 속에서 살았고 일했다.(19~23)
우리는 그렇지 않느냐고 반문할 사람이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사도 바울처럼 구원을 위해서라면 사람의 종류를 가리지 않는 충성된 마음은 늘 세상의 일반적인 사람들, 그것도 죄인시 하는 단절된 삶을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르치는 바가 많다. 바울 사도는 일을 해도 오로지 사람을 얻기 위해 일했음을 보게 된다. 바울 사도는 오로지 사람을 얻기 위해 산 사람이다.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19)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20)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21)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22) 바울은 어떤 사람이든지 오로지 ‘얻고자 함’이라고 거듭 거듭 강조하고 있다. 주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죄인의 형상으로 사람이 되시고 당시에 하나님의 은혜 속에 있지 못하는 버려진 듯한 사람들 속에서 구원을 가르치시고 하나님의 사랑을 삶으로 실천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러한 주님의 삶을 본받게 하시려고 우리를 또한 건지셨다.
1.잘못된 종교인들을 복음으로 불러들여야 한다.(20)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바울은 자신의 동족의 구원에 대한 여한을 고백하기를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롬9:3) 우리는 적어도 나는 구원을 잃을 수 없다고 말하지만 바울은 자신이 구원을 잃어서 자신의 동족이 구원받을 수 있다면 기꺼이 그렇게 하겠다는 고백이다. 우리는 사실 가족의 구원을 위하여 이렇게 불타있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종교는 종교로되 사람을 멸망시키는 종교에 인생을 바치고 재산을 바치고 청춘을 바치는 많은 잘못된 사람들을 주님처럼 불쌍히 여길 줄 아는 우리 모두가 되자.
2.이방인들을 하나님의 은혜로 불러 들여야 한다.(21)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율법 없는 자는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이 바른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를 모르고 영생이 뭔지, 구원이 뭔지 모르고 무덤너머를 생각지 못하고 막연히 주어진 인생을 팔자타령하며 사는 모든 사람들도 하나님의 애정의 대상이다. 바울은 역시 이방인에게 보내진 사실에 대해서도 대단히 깊은 감격을 가지고 있음을 듣는다.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롬11:13)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를 강건케 하심은 나로 말미암아 전도의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이방인으로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지웠느니라”(딤후4:17)
땅에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으로 알고 내일이 없이 사는 모든 육신의 사람들 그들은 무지하기 때문에 그런 것으로 우리가 얻어야 할 사람들이다.
3.연약한 인생들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거듭나게 해야 한다.(22)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세상에서 사실 가장 불쌍한 사람들은 자신의 의지가 연약하고, 경제력이 연약하고, 배경이 없는 연약한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은 이 땅에서의 삶에조차 확신을 갖지 못하는 가장 그리스도가 필요한 사람들이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약2:5) 어쩌며 세상의 누구도 돌아보지 않는 이들에게 복음은 가장 필요한 사람들이다.
4.나 자신이 종노릇하기까지 낮아질 때 더 많은 사람을 얻을 수 있다.(19)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 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당시의 바울 사도는 정치적인 지리적 배경이나 지식적으로 어떤 경우에서도 어떤 사람들에게도 얽매일 이유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종의 모습으로 겸손하고 섬긴 것은 오로지 하나의 이유였다고 고백한다.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오늘 우리의 사회는 세상에서의 영광을 위하여 처신한다. 자녀교육을 위하여 남편 출세를 위하여 아내의 처지를 위하여 때로는 비굴하리 만큼 아부하고 저자세가 된다. 그러다 때로 잘 안될 때는 혼자서 독백하기를 “내 참, 더럽고 아니꼬워서! 내가 저만 못해서 그러나 …만 아니면 내가 이 짓 안 한다. 두고보자 내가 …게 되면 그때는 반드시 이 설음을 갚아 주겠다!” 그러나 바울처럼 육신의 이권이 아니라 상대의 구원을 위해서 복음을 위해서 종노릇 할 수 있다면 절대로 원망할 필요가 없고 주님의 위로가 풍성할 것이다.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5:11~12) 하셨고 자신의 안전을 위하여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베드로 사도는 나중에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벧전4:14) 고 격려하고 있다.
주님께서도 죄인 된 인생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종의 형상으로 사람이 되시고 십자가를 지셨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6~8) 이것은 분명한 모범이다.
남을 위해서 상대를 위하여 종노릇하는 것을 우리는 박애정신이라고 한다. 사람이 사람을 섬길 수 있다는 것은 행복이며 사람과 주님을 겸하여 섬기는 것은 더욱 복된 일이다. 그러나 주님을 위해서 종이 되는 것은 참으로 복된 일이요 그러한 희생은 반드시 생명을 잉태하는 영혼의 결실을 할 수 있을 것임을 바울 사도는 일깨워 주고 있다.
사실 적으로 오늘 우리는 종이 되기까지 겸손하지 못하고 충성되지 못해서 주님께서 명하신 일들을 잘 감당하지 못하고 있는 부분들이 많다. 여기서도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눅9:23)신 주님의 가르침은 진리이다. 주님을 위하여 복음을 위하여 모두가 자존심을 죽이고 종노릇 할 때 더 많은 사람을 얻을 수 있는 것은 평범한 진리이다.
5.바울은 오직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하노라고 고백한다.(23)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십자가와 자신을 구원하시고 일꾼 삼아주신 사실에 대하여 바울은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딤전1:12) 일생을 그 고마움을 갚는 일에 투자하기로 각오하며 일했고 항상 최선을 다했어도 부족함을 느낄 뿐이었다.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15:10)
바울 사도의 삶의 귀중한 주제와 목적은 “모든 것을 복음을 위하여 행함”과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었다. 오늘 나는 모든 행함이 무엇을 목적하는가? 두 세 사람만이라도 어떤 것을 행하든지 무엇을 하든지 “복음을 위하여” 살 수 있다면 우리 교회와 사회는 많이 변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 날 많은 그리스도인이라 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만족과 가족의 번영과 안정만을 희구하는 독선으로 세상이 이 만큼 어두워지고 있다. 우리 모두가 각성해야 할 때이다.
우리 자신들은 나보다 나은 사회 사람들의 모임과 형편에 들어보려고 얼마나 애를 쓰는가? 그것이 경제 수준이든, 지식 수준이든 지위든지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정도의 사람들의 수준에 참여하려고 발버둥을 친다. 이런 일을 자랑하는 사람이 성경에도 더러 있지만 대표적인 인물이 하만이었다. “또 가로되 왕후 에스더가 그 베푼 잔치에 왕과 함께 오기를 허락 받은 자는 나밖에 없었고 내일도 왕과 함께 청함을 받았느니라”(에5:12)
여러분들 모두가 복음에 참여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되시길 바라고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하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복되신 이름으로 …
Ⅱ.나 자신을 바로 세워야 한다.(24~27)
두 번째로 바울 사도가 경계하는 것은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27) 는 것이었다. 우리가 남을 위하여,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해야 하겠지만 그것은 하나님과의 긴밀한 관계를 지속적으로 가짐으로서 가능하게 되고 어쩌면 이 부분이 더 중요한 부분임을 가르치고 있다. 세상을 위하여 살 힘, 복음을 위하여 살 능력은 인간 스스로에게서나 세상에서 터득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서만 온다. 주님의 육신으로 살아 계실 때의 모습도 바로 그것이었다.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다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마14:23; 막6:46)
우리가 영적인 부분을 지속적으로 행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결코 쉽지 않기 때문에 여기에서도 운동에 비유되고 있다.
1.모두에게 달음질하라고 권면한다.(24)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이것은 실지로 당시에 있었던 이스무스 경기를 비유하는 말이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달린다. 즉, 바쁘게 움직인다. 그러나 그 목표는 다 다르다. 나는 과연 무엇을 위해서 달리고 있는가! 그 목표를 성취했을 때 진정한 감격과 기쁨을 맛볼 수 있을 것인가?
향방이 없는 달음질은 몸만 피곤할 뿐이다.[남편 감 고르기] 허공을 치는 주먹질은 의미가 없다. 우리가 대상을 분명히 보지 못하면 권투 선수가 허공을 향해 주먹질하는 것과 일반이다. [left hook, upper cut, 다시 right hook 그러나 빗나갑니다. 예 안타깝군요] 사실 세상의 어떤 일들은 분명한 목표가 되지 못한다. 소위 말하는 ‘신념(信念)’을 가지고 열심히 하면 뭐가 되겠지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그런 것들에만 정력을 다 쏟는 사람들을 향하여 바울은 이러한 비유를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목표는 내가 무엇을 하든 분명해야만 한다. 참된 그리스도인들의 투쟁은 헛된 것을 위하여 하지 않는다. 우리의 열심히 행하는 모든 것들은 최종적으로는 복음을 위한 것이 되어야 한다. 이런 입장에서 오늘도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이라는 운동장에서 영적인 달음질을 지속해야만 한다. 분명한 목표와 대상을 향하여 달리고 주먹질하는 운동을 해야 한다.
2.썩지 않을 목적을 위하여 달음질해야한다.(25~26)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하여” 바울은 헛된 수고에 대하여 경계하고 있다.
썩어지고 없어질 것에만 온 힘을 다 소진해 버리고 정작 하나님이 바라시고 기뻐하는 일을 하려고 할 때는 맥없이 뒷걸음질 쳐야 하는 모습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향한 모습이 아니며 이것은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자신의 피를 지불하시고 사신 주님의 십자가를 헛되게 하는 것이다.
아이들이 모여서 정신없이 놀다가도 부모가 부르면 속히 되돌아가는 그런 모습이 옛날에는 있었는데 요즘은 참으로 안타깝다. “이번만 더하고, 이것까지만 하고 …” 하는 오늘의 아이들처럼 주님의 요청에도 계속해서 헛된 것들에만 신경을 쓰고 있다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우리의 본업이 아니고 주님께서 부르시면 언제나 복귀할 수 있는 부업으로 사는 그리스도인이 필요한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 주님은 기적으로 배부른 사람들을 경계하여 이르기를 “썩은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요6:27)
3.바른 달음질을 위하여 자신을 쳐서 복종시킨다고 고백한다.(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우리가 바른 목표를 향하여 달음질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이미 말했다. 그러나 때로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잘못된 길로 벗어나게 되고, 특히 세상의 일에서 뒹굴다 보면 어느새 그렇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본업에 빨리 복구할 수 있을까? 그것을 평소에 자신을 말씀에 복종시키는 훈련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평소 훈련을 많이 하는 군인들은 휴식이나 휴가를 가지다가도 업무에 복구명령을 받으면 즉시로 귀대한다. 영적인 원리에서도 이것은 같은 원리이다. 자신을 말씀에 쳐서 복종시킬 수 있는 평소의 신앙과 경건이 훈련되어 있지 않으면 주님이 오신다해도 곧이 듣지 않고 멸망할 세상 속에 그대로 머무르려고 할 것이다. 바울은 육신의 삶과 영의 삶을 비유하는 로마서 8장에서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13) 라는 경계를 준바 있다.
우리가 달리다가 목표에서 멀어지거나 달리는 자세가 잘못되었으면 고치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은 평상이 경성된 자들만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롯의 사위들과 처는 소돔 성의 아름다움을 그 성이 망한다고 해도 믿지 못해서 돌이키질 못해서 망했다. 그래서 주님은 “롯의 처를 생각하라”(눅17:32) 는 경계를 주고 계시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모드의 경계이다. 믿는가?
Ⅲ.결론.
여러분들의 삶의 목표는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죄와 절망에서 구원해 주신 은혜에 합당하게 살고 있는가? 나를 구원해 주신 주님의 사랑을 입었으므로 할 수만 있으면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는 바울과 같은 자세로 살고 있는가? 무엇을 하든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하는가? 그런 일을 항상 염두 해 두기 위하여 주님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시키고 언제든지 명령을 기다리는 자세로 자신을 신앙적으로 훈련하고 있는가?
이것은 결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라고 세상의 일이 무익하다는 말이 아니다. 다만 어떤 자리 무슨 일을 하더라도 그 일을 하는 목표를 분명히 해야 하고 주님의 명령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되어지는 일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세상의 일에 붙잡혀 있으면서 그것이 하나님의 일인 것처럼 착각하고 썩어질 일에만 몰입하는 것이 경계해야 할 부분이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약1: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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