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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앞에서 이 요한 복음을 통하여 주님의 “나는 생명의 떡, 세상의 빛, 양의 문이다” 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선언에 과한 부분들을 나눈 바 있다. 물론 자신을 간접적으로 생수로 선언하신 부분도 있었다.
본문의 말씀은 사실 삭막한 도회지에서 말로 설명하는 것이 쉽지 않다. 시골에서 소를 몰거나 염소라도 끄는 시골 풍경 속에서 이 말씀은 그래도 실감이 날 것 같다. 그러나 우리 영혼의 원리에서 인생을 비유하고 삶을 비유해 보는데 깊은 깨달음을 주는 귀한 교훈이다.
Ⅰ.모든 인생은 길 잃은 양이요 목자 없는 양이다.
여기에 한 마디 덧붙인다면 집나온 탕아이다.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벧전2:25)
많은 인본주의 자들(Humanist) 대부분 인생을 낙관적으로 평가하려 들고 긍정하려고 한다. 그러나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보편적인 사람에 대해서 사실 긍정적인 평가를 하고 있지 않다. 죄에 매인 인생, 멸망할 인생, 비극적인 인생, 그것이 거듭 나지 못한 인생에 대한 성경의 견해이다.
사실 모든 일반적인 사람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유리 하는 어리석은 양이다. 이를 한 마디로 표현하는 말씀이 바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3:23) 라는 말씀이다. 목자의 인도를 받지 못하면 눈은 멀리 보지 못하고 영광의 목표를 바라 볼 수 없는 가냘픈 인생이 아담 이후의 범죄 한 인류이다. 에덴 이후에 아담이후의 사람들은 감당할 수 없는 적수를 만났고 그 원수는 바로 범죄 하게 하는 마귀 사탄이요 연약한 양 같은 인생을 착취하고 괴롭히며 탈취하는 하나님의 대적자(對敵者))이다.
그러나 주님은 이러한 절대적 절망과 함께 복음으로 변화될 인생에 대해서는 소망 적인 약속을 주고 계시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6:23)
자신의 인생에 자신 있는 사람이나 자랑스러운 인생은 아주 없다. “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났나니 불티가 위로 날음 같으니라”(욥5:7) “여인에게서 난 사람은 사는 날이 적고 괴로움이 가득하며”(욥14:1) 거기에 오직 하나의 희망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죄를 씻음 받는 것뿐이다.
1.모든 인류는 목자가 필요하다고 하는 데서 양과 같다. 양은 좋게 표현해서 순하다고 하지만 좀 듣기 거북한 표현에서는 어리석은 것이다. 순하고 착한 사람일수록 바른 인도자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악에게 이용당하기 십상이다. 또 홀로 떨어져 있는 순한 짐승은 언제나 포식자의 목표가 된다.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마9:36)
2.스스로는 절대로 악을 이길 수 없다는 데서 양이라고 할 수 있다. 목자 없는 양 떼는 아무리 수가 많아도 오합지졸(烏合之卒)일 뿐이다. 모든 사람은 죄라는 무거운 짐을 지고 싸워야 하기 때문에 자신의 힘으로는 절대로 악의 세력을 물리치지 못하고 참소를 당할 수밖에 없고 “…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이루었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계12:10)
3.인도자가 없으면 앞길을 헤쳐 나갈 수 없다는 데서 양과 같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6) 어리석어서 앞길을 알지 못하고 그래서 미래를 알고자 발버둥치며 점치고 꿈을 해몽해 보고 하지만 사람은 참 목자 없이는 어리석은 짓만을 거듭할 뿐이다. 구약성경 스가랴서에서는 말하기를 “드라빔 우상은 헛소리나 하고, 점쟁이는 거짓 환상을 본다. 그들은 꾸며낸 꿈 이야기를 하며, 헛된 말로 위로하니, 백성은 양 떼같이 방황하며 목자가 없으므로 고통을 당한다.”(10:2표준 새번역)
우리가 계속 상고하고 있는 시편119편 말미에서는 “잃은 양같이 내가 유리하오니 주의 종을 찾으소서 내가 주의 계명을 잊지 아니함이니이다”(176)
그렇기 때문에 모든 인생들은 예수 그리스도께 반드시 돌아가야 할 양들이다. 거기에만 소망이 있다. 그래서 주님은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친히 피를 흘리시고 십자가를 지셨다.
Ⅱ.우리 주님은 선한 목자이시다.(11, 14~15)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11)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14~15)
주님은 선한 목자이심이 분명하다.
1.선한 목자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목자이다.(11, 15b)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선한, (헬, kalos)] beautiful; 본래적 의미로는 ‘아름다운, 즉 가치 있는, 또는 덕스러운, 보다 나은, 공정한, 좋은(좋게), 정직한, 충족한’ 등등의 뜻의 말이며 [버린다, (헬, tithemi)]는 말을 우리와 더불어 이해하면 ‘굴종하다, 맡기다, 죽다, 무릎꿇다, 내려앉다’ 라는 등등의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이사야가 이러한 주님의 모습을 우리에게 잘 전달해 주고 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사53:4)
(1)선한 목자는 언제나 자신의 것을 버리고 포기한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6~8)
(2)자기가 기르는 양을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담보한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2.선한 목자는 양을 잘 알고 양도 목자를 안다.(14~15)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1)양의 모든 것을 잘 안다. 연약함도, 목마름도, 굶주림도,
다윗은 하나님에 대하여 고백하기를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그것은 바람이 지나면 없어지나니 그 곳이 다시 알지 못하거니와,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그의 의는 자손의 자손에게 미치리니”(시103:13~17)
(2)역시 양의 입장에서도 자신의 목자를 잘 알고 따른다. 양의 또 다른 특징은 자신의 목자를 반드시 알아본다는 사실이다. 목자는 양의 각각의 이름을 알고 나 자신이 주님을 발로 알지 못한다면 역시 목자와 양의 관계가 될 수 없다.
오늘 우리가 읽은 바로 앞에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자기 양을 다 내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요10:3~5) 고 기록되고 있다.
Ⅲ.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모든 목자를 자칭하는 자들은 삯군들이다.
(12)삯꾼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13)달아나는 것은 저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아보지 아니함이나
어떤 경우에는 가르친 스승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제자들이 스승을 그렇게 만들어 버리는 예가 허다하다. 가장 가까운 예가 부처(고타마 싯타르타)의 예이다. 불경에 보면 ‘부처님께서 제자들을 돌아보시며 나는 예배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나를 예배하거나 섬기려 하지 말라고 힘주어 말씀하셨다.’는 기록을 일을 수 있다.
불교에서 불변의 진리라고 하는 [사제(四諦, 四聖諦) - 고제(苦諦), 집제(集諦), 멸제(滅諦), 도제(道諦)] → (1)정견(正見) 바로봄을 뜻한다. 곧 올바른 견해이다. (2)정사유(正思惟) 올바른 생각이다. (3)정어(正語) 올바른 말, 곧 온갖 망어(妄語) 사어(사語)등을 하지 않는 말이 정어이다. (4)정업(正業) 올바른 행위, 살생이나 도둑질 따위의 악한 행위를 하지 않고 선한 행위를 하는 것이다. (5)정명(正命) '올바른 생활 수단'을 말하는 것으로 바른 견해에 입각한 전체적인 생활에 있어 바른 몸가짐과 마음가짐을 실천하는 것이다. (6)정정진(正精進) 올바른 노력, 한 마음으로 노력해 나가는 것을 뜻한다. (7)정념(正念) 올바른 정신과 생각, 사념을 버리고 항상 향상을 위하여 정신을 집중시키는 것을 말하며 바른 생각을 말한다. (8)정정(正定) '바르게 집중(集中)'한다는 말로서, 마음을 한 곳에 모으는 것인데 '삼매(三昧)' 라는 음역어를 통해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수행법이다.
이모든 “~게 하여야지” 라는 것은 자연적인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
오히려 불교도 율법처럼 인간은 도저히 죽음을 피할 수 없고 해탈의 약속이 분명치 못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하나의 인간의 한계를 일러주는 교훈이다.
한 곳의 성경과 비교되는 곳을 보면 누가복음 7:11~17 외아들을 살리는 주님의 역사를 본다. 화엄경에 구지라 성가에 숲을 제자들과 함께 거닐다가 아들이 죽어 애통하는 여인을 만난다. 죽음이란 항상 있다. “마을에 내려가서 사람이 한번도 죽은 일이 없는 집안을 찾아서 쌀을 한 줌씩 얻어다가 죽을 끓여 먹이면 산다” “생자필멸(生者必滅)이미 너무 슬퍼하지 말라” 역사 속에 고뇌하며 불도를 닦던 많은 사람들의 불확실한 고뇌를 역사에서 듣게 되는데 전등록 - 중국의 마저도의가 그늘에서 참선을 하고 있는데 스승인 황벽스님은 옆에 와서 바위에다가 벽돌을 갈고 앉아 있다. 벽돌을 갈아서 거울을 만들려고 한다. 부처란? 동산승려-뜰 앞에 잣나무가 부처다. 운문스님- 마삼근(삼배 세 근) 벽장승- 마른 똥 작대기
부처의 가르침을 올바로 깨닫는다면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 앞에 올 수밖에 없는 일반 계시에 속한(도덕 철학이기 때문에) 또 하나의 미완성의 율법이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가끔 절간에 가서 시주하고 절함으로 불교인이라고 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중국의 공자 역시 많은 가르침을 줬지만 우리 나라에 미친 결과는 제사 예식과 인종 차별, 그리고 운명론적인 인생의 체념과 같은 것 외에는 별로 미친 것이 없다. 유교에서는 높은 도덕률을 자랑하지만 죄진 사악한 인간이 도덕을 자의적으로 지킬 수 없다는 것이 이 역사가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결과다.
이들은 다 생명을 갖지 못한 사람들이고 그들이 고뇌하는 인생을 위해서 해 줄 수 없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왜냐 하면 자신도 연약에 싸여 있었기 때문[히5:2저가 무식하고 미혹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싸여 있음이니라]에 어떤 경우에는 역사가 흐르면서 본인의 의도와 관계없이 절도요 강도 역할을 하게 되고 말았다.
Ⅳ.우리의 선한 목자는 아직도 잃어진 양으로 인하여 만족치 못하시다.(16)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이미 주님의 보호 속에 있는 은혜 속에 있는 구원된 주님의 양들을 다시 울 밖에 있는 양들에게 보내시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의지를 선언하시는 음성이다. 아직도 목자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고 갈등하는 주님께 인도해야 할 양들이 있다고 주님은 안타까운 탄식의 요청을 이미 그의 보호 속에 있는 우리들에게 말씀하신다.
1.주님께 인도되어야 할 울 밖의 양이 있다는 말씀이다.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2.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 무리가 되어 거할 것이다.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Ⅴ.결론.
모든 인생은 스스로 길을 찾지 못하는 목자 없는 양들이다. 우리 주님만이 잃어진 양같은 죄진 인생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려 주신 선한 목자이시다. 세상의 어떤 위대하다는 스승도 예수 그리스도 같지 못하다. 우리는 아직도 울 밖의 양을 보시고 안타까워 눈물 흘리시는 우리의 목자의 음성을 들려주어 저들이 한 목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 있도록 최선을 다하여야 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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