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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종배 전도자
마 20:25~28 2003-07-02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사람은 누구나 권력 지향적 존재라는 사실을 누군가 말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것은 남을 지배하려는 죄악 된 인간의 본성에서 나오는 것임을 성경은 지적한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을 가까이 불러 놓고 "너희도 알다시피 이방인들의 통치자로 자처하는 사람들은 백성을 강제로 지배하고 또 높은 사람들은 백성을 권력으로 내리누른다.”(막10:42공동) 에덴에서 이러한 사람의 본성을 자극하여 하나님과 권력에 있어서 같아지려는 마음을 품게 하여 아담으로 하여금 범죄케 했던 사단의 역사를 봐도 증명이 되고 “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창11:4)고 한 바벨탑 사건도 인간의 높아지려는 욕망을 잘 표현하고 있다.

그러므로 선악과(하나님과 인간의 한계선-“여기 까지는 하나님의 영역이다. 너희들이 넘봐서는 안 된다”는 하나님의 자의적 선언이 바로 창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는 하나님의 계명이었다)의 한계를 인정하고 겸손으로 섬기는 행복은; 영광의 보좌를 버리시고 스스로 겸손으로 종의 형상을 가져 사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희생을 실감하는 구속받은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복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이란 세상의 죄악 된 권세와 힘에 절망하여 겸손과 희생의 그리스도께 도망한 사람들이 바로 주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이라고 이해된다.

오늘 이 말씀이 나올 수밖에 없었던 본문의 배경을 먼저 이해하고 본론으로 들어가야 할 것 같다. 이 말씀은 두 복음서에서만 기록이 되고 있는데 오늘 본문 이전의 20~25과 마가복음10:35~41의 내용을 보면 주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이유를 읽을 수 있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 주님께서 영광의 나라에 앉으시면 자신들을 좌우에 앉게 해 달라는 요청이었었고 이를 안 다른 제자들이 분히 여긴 내용이다. 한가지 차이가 있다면 마태복음에서는 이 두 사람의 어머니가 먼저 요청을 했고(일세기의 치마 바람) 마가복음에서는 제자들 자신들이 그렇게 한 것으로 기록되고 있는 점이다.

여기에 대한 주님의 첫 번째의 말씀은 (22)“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야고보와 요한의 생애] 라고 대담하게 답변했고 주님께서는 다시 (23)“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시자 (24)열 제자는 이 것을 듣고 두 형제에게 분노를 표시한다.

이 두 제자가 베드로와 함께 주님과 특별히 취급된 것으로 복음서에서는 나타난다. 변화산에 올라 가셨을 때(마17:1; 막9:2)나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실 때(막5:37) 그리고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막14:33)도 늘 세 사람만을 대리고 다니신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베드로가 이러한 요청에 빠져 있는 것이 좀 이상하긴 하다. 예수께서 왜 그렇게 이 제자들을 더 가까이 취급하셨는지는 직접적인 언급이 없기 때문에 말하기 어렵지만 변화되지 못한 사람들은 오히려 가까이 하는 것이 더 문제를 일으키는 원인이 되는 것을 또 한번 깨닫게 된다.

여기까지 오시면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중요한 두 가지는 하나님의 나라가 곧 올 것과 함께 자신이 예루살렘에 가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셨다가 부활하셔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이들은 십자가에 죽으셔야 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깊은 생각을 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나라의 영광에만 마음이 집중되어 있었던 것 같다. 오늘 날 신앙하는 우리들도 사실은 이런 입장에서 일반이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십자가를 지고 고난을 당해야 된다는 것에는 별로 마음을 두지 못하고 영광의 천국에만 더 관심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두 제자들처럼 정신없는 이야기를 하게 되고 같은 신앙인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이 사실이다.



Ⅰ.이것은 불신의 세상에서나 흔한 일이라고 말씀하신다.(25)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가라사대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사실 여기 야고보와 요한은 다른 제자들보다 주님과 가깝다고 하는 것 때문에 남다른 기대를 하고 있다. 세상은 어떤 사람과 가깝다고 하는 사실도 역시 처신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사실이다.

우리가 서론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하나님을 떠난 인류는 언제나 그렇다. 솔로몬 이후에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았던 여로보암 왕으로 세워진 북조 이스라엘이 그랬다. 그래도 다윗의 언약에 기초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던 남쪽 유다와는 다르게 계속 피를 흘리고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왕가의 집안이 바뀌어 가는 비극을 계속적으로 반복하는 부정한 피의 역사를 보게 된다. 이것은 비단 성경의 역사뿐만 아니라 우리 역사의 얼룩진 전쟁의 기록들이 바로 그런 것들이다. 짧은 1세기의 역사 속에서도 그랬고 최근의 격동 50년이 그러했다.

그리고 이러한 사악한 먹고 먹히는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역사 배후에는 하나님으로부터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범죄 한 천사들 …” 즉, 사탄의 사주를 받는 악한 무리들이다.(벧후2:4; 유1:6)

여기서 ①“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katakurieuvw, 헬 katakyrieuo] ‘주인 행세하다, 즉 제어하다, 복종시키다, 통치권(주권)을 행사하다, 극복하다’ 라는 의미를 가진 사람의 입장에서 ‘순종’이나 ‘복종’과는 전혀 반대되는 하나님이 행하시는 권력을 사람이 행사하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 낱말이 같이 쓰여지고 있는 한 군데를 예로 보면 사도행전 19:16에 "악귀들린 사람이 그 두 사람에게 뛰어올라 억제하여 '이기니' 저희가 상하여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하는지라"는 말씀이다. 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이 예수 이름으로 악귀를 내 쫓아 보려다가 오히려 제어 당하는 모습을 전해주고 있다. 이것이 일반적인 세상의 모습니다. 거듭나지 못한 어두움의 세력에 의해 좌우되는 권력은 언제나 사람들을 밟고, 뚫고 자신을 세우고 올라서는 형태이다. 거기에는 반드시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는 죄악이 행해지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와는 반대적인 모습이다. ②“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 오늘의 제목과 더불어 의미를 생각하면 [대인, 헬, megas] ‘뛰어난, 유명한, 힘센, 강한’ [권세를 부리다, 헬, kateksousiazo] '특권을 가지다(휘두르다), 권세를 부리다' 세상에서는 언제나 강하고 뛰어난 사람[똑똑한, 잘 생긴, 힘있는]이 특권을 가지고 많은 사람들을 거느리는 것이 사실이다.[남모랑]

주님께서도 이를 인정하고 계신다. 적어도 우리의 죄를 십자가에서 지시고 죽어 장사지내시고 삼일만에 부활하시고 하나님 우편에 승천하신 주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실 때까지는 어쩔 수 없이 이 세상의 모습은 대부분 이럴 것이다. 그래서 강한 사람이 나타나면 권력행사를 하고 또 그보다 강한 사람이 나타나면 또 뺏기는 악순환이 지속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일로 설움을 당할 지라도 억울해 할 필요가 없다. 결국 두 제자의 자세에 분히 여기는 다른 열 제자도 꼭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다. 그저 그런 것이려니 하고 더욱 주님을 의지하는 것 밖에 없다. 그러나 이어지는 다음절의 말씀은 이것과는 정 반대되는 사실을 증거하고 계신다.



Ⅱ.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불신의 세계와 다름을 말씀하신다.(26~27)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주님께서는 “이방인의 집권자들”을 제 삼인칭으로 말씀하시고 이제는 주님을 따른다고 하는 제자들과 우리들을 향하여는 이인칭으로 말씀하신다. 사실 이 땅에서 잘 났다고 하는 한가지 사실 때문에 사람을 부리는 사람들은 주님과는 관련이 없는 ‘그들’ 또는 ‘저들’로 불려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주님의 거룩한 피에 참여하는 백성들, 나중에 천국의 영광을 기대하며 영광을 매 순간 주님께 돌려 드리는 사람을 ‘너희’ 라고 가깝게 부르시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대우일 것이다.

1.교회는 이래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신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오늘 날 죄악 된 세상의 권력 의지가 교회에서 나타난다면 그것은 더욱 경계해야만 하는 주님의 뜻을 역행하는 죄악이 될 것이다. 죄악 된 세상은 그럴 것이라고 주님께서도 말씀하시지만 세상에서 따로 불러냄을 받은 교회, 세상에서 구별된 성도는 달라야만 한다. 물론 주님의 피에 죄 씻음을 받고 은혜에 의해서 새로운 인생이 있음을 고백하고 날마다 바울처럼 죽는 삶을 사는 복된 믿음의 사람들에게야 그런 일이 없겠지만 교회가 세속화되고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는”(딤전6:5)는 교회에서는 오히려 세상에서 권력의지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교회 속에서 세상에서의 설움을 한풀이하는 식의 자세로 간다면 주님으로부터 동일한 책망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유혹에 노출 될 때마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라는 주님의 경계를 기억해야만 할 것이다.

듣기에 거북하고 힘겹겠지만 참으로 딱하고 안타까운 오늘 우리의 교회 속에서 이러한 부분들을 점검해야 할 모습들이 분명히 있는 것 같다. 하나님께서 주신 하늘의 가족이 된 이름(성도, 그리스도인)보다는 교회의 직함을 이름처럼 불러 주기를 바라는 것도 옳은 것은 아니고 적게는 세상에서의 권력 의지의 양상이다. [‘성도’ 헬, hagios, ꡐ두려운 것ꡑ에서 유래 '(육체적으로 도덕적으로)신성한, 순결한, 결백한, 봉헌된(사람, 사물), 정결한‘ 등등의 의미를 가지는 하나님께서 주신 명칭이다.; ’그리스도인‘ 헬, Christiaanos, ’그리스도의 추종자, 그리스도의 것이 된 사람‘]

물론 하나님을 섬기는 지위에 대하 자긍심을 가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늘에 속한 자신의 영광된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에 더욱 자긍심을 갖는다면 ‘성도’나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려지는 것을 가장 영광스럽게 생각하게 될 것이다. ’성도‘ 라는 이름은 세상에서 결코 얻을 수 없는 이름이고 들을 수 없는 이름이다. 하나님께서 죄에서 죽을 우리를 피로 씻으셔서 거듭나게 하시고 새로운 피조물로 이름지어준 새로운 이름이 바로 성도이다.

우리는 곧잘 “존귀 영광 모든 권세 주님 홀로 받으소서, 멸시 천대 십자가는 제가 지고 가오리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다”[355:3]는 찬송을 부르고 특히 임직식에서는 빠뜨리지 않고 부르는 찬송이다. 그럼에도 나의 수고와 애씀을 사람들이 먼저 알아주기를 바라는 세속적인 습성이 자주 고개를 내미는 유혹을 받는다.

가장 일반적인 ‘집사’를 비롯해서 대부분의 직분은 다 섬김의 직임이지 명칭이 아니다. [사장님!-집사님!(아직 집사도 못됐어?)] 그럼에도 오늘날 그것이 또 하나의 영광된 계급의 명칭으로 불려지는 우리 나라만의 모순이다. 그런데도 ‘~성도님’ 이라고 하면 서운해한다. 교회에서 자격에 합당한 직분을 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마땅히 섬겨야 할 귀중한 직임이 마치 세상의 계급과 명예인 것처럼 여겨져서도 안될 것이다. 이것은 또 하나의 연약한 사람들을 낙심시키는 원인이 되기도 하다. 자기를 소개할 때도 (X ‘홍길동 집사입니다.’ O‘집사의 직분으로 ~교회를<주님>를 섬기는 ~성도입니다.’) 직분은 명칭으로 불려지게 하라고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일하라고 주어지는 직분이다.

일찍이 이런 것들은 예수께서 세상에 계실 때 잘못된 종교인들에게도 있었다. 요한복음 5:41에서 주님은 “나는 사람에게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말씀하신 다음 44절에서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고 말씀하신다. 이런 입장에서도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라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해야만 한다.

2.세상과는 반대되는 통치의 원리가 행해지는 곳이다.

①“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하나님의 나라는 약한 자가 보호받고 섬기는 자가 섬김을 받는 자보다 아름답게 여겨지는 범죄 이전의 에덴보다도 순수하고 강제력이 필요 없는 섬김의 천국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내가 많이 섬긴다(몸이든 물질이든)고 해서 과시해서도 안되고 또 그럴 수도 없는 곳이다. 세상에서는 분명히 섬김을 받는 자가 섬기는 자보다 크게 여겨지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오히려 그 반대이다. 여러분 가운데 진정으로 크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섬기는 자리로 내려서서 이 땅에서 칭찬 받을 것을 기대하지 말고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서 주시도록 미래를 기약하고 기도도 섬김도 구제도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려는 자세가 되고 그런 하늘의 모습을 가진 성도가 많아지고 교회가 그런 사람들로 채워질 때 사랑과 십자가로 세상을 정복할 수 있는 능력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②“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하나님의 나라인 교회에서는 꾸밈없이 겸손한 자가 귀한 자요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자이다. 이 땅에서의 모든 영광을 주님께 돌리고 미래의 쇠하지 않는 영광을 기대하며 오늘을 기꺼이 희생하는 아름다운 삶을 사는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이요, 하늘의 백성인 성도다. 으뜸이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니다. “ … 방백들과 두목들이 이 죄에 더욱 으뜸이 되었다 하는지라”(스9:2) 그러나 겸손의 으뜸, 섬김의 으뜸, 감사에 으뜸, 믿음의 으뜸은 하나님께서 귀하게 보시는 으뜸들이다.

주님께서 경계하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사람 위에 군림하려고 하는 세상적인 높은 위치를 좋아하는 것을 경계하고 계신 것이다. 으뜸의 높은 위치가 욕심날 때마다 우리는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라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Ⅲ.주님의 모범을 바라 봐야 한다.(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우리는 이러한 실재적인 모습을 요한복음 13장에서 보게된다. “저희 발을 씻기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니,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12~17) 제자들은 서로 ”내가 크다“고 다투고 있는데 이런 실재적인 모습으로 저들의 입을 막으셨다.

1.겸손은 복음을 빛나게 하고 십자가를 가치 있게 한다.

2.겸손은 남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것이다.

이 원리는 영광의 나라가 이루어 질 때까지도 불변하는 원칙이다.

교만의 유혹이 있을 때마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라는 주님의 사랑 어린 교훈을 기억하자. 영광 받는 것은 늦어도 좋다. 그러나 희생과 고난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쁨으로 받을 자세가 되어 있다면 많을수록 복된 사람임을 잊지 말자.

‘그리스도인, 성도’ 라는 구별된 하나님이 주신 하늘의 가족이라는 이름보다도 귀한 것은 없다. 영원한 영광을 사모하는 자마다 이 땅에서는 주님과 하나님의 백성들의 종노릇하고 영원 속에서 불변하는 영광을 자신의 것으로 누릴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