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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종배 전도자
요 11:21~27 2003-07-09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⑤“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요한 복음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다섯 번째의 자기 선언[①6:35 내가 곧 생명의 떡, ②8:12 나는 세상의 빛이니, ③10:7 나는 양의 문이라, ④10:11 나는 선한 목자라]이면서 세상의 모든 인간이 만든 종교와의 완전한 차이점이 바로 부활에 관한 신앙적 교훈이다. [부활, (헬, anastasis), 들어올림, 위로 올림, 죽음에서 일어나다 = (헬, ana) 위로, 위를 향하여 + (헬, histemi) 세우다, 서다, 고정시키다, 굳게 하다, 확정하다-모든 일반적인 사람이 흙(땅)으로 내려가는 것이 일반적인 자연 현상이라면 이것은 단어 자체가 하늘에 속한 낱말이다.- 위를 향하여 세우다, 위로 고정시키다.] 이러한 부활의 사상은 땅에서 발생한 어느 종교에서도 없는 그리스도인들 만의 구별된 신앙관(信仰觀)이다.

심지어는 유대인들 사회에서도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하나님의 약속이다. 바울이 자신의 동족들을 향하여 안타까움으로 호소하는 것을 봐도 그렇다. “당신들은 하나님이 죽은 사람 다시 살리심을 어찌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나이까”(행26:8) 그러므로 일반적인 사람들에게 이해되지 않는, 믿음으로만 깨달아지는 가르침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래 예수가 위대한 사람이고 선생인 것은 믿는다. 그러나 남자 없이 잉태되었다는 것과 죽어서 부활했다는 것만은 납득할 수 없는 논리다’ 라고 부정해 버린다. 하지만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이처럼 엄청난 약속은 없다. 그럼으로 부활이 믿어지는 것 자체가 엄청난 복이다.

물론 영원한 형벌에 들어가기 위한 부활도 있긴 하지만(계20:13~14) 반드시 낡아지고 썩어져서 못쓰게 될 이 육체가 썩지 않고 낡지 않고 쇠하지 않을 영광을 입을 사실을 생각하면 그 소망은 어떤 일이 있어도 잃지 말아야 할 복되고 또 복된 주님의 약속이다. 믿는가?

바울사도는 고린도 전서 15:52~54에서 흥분된 목소리로 선언하기를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고 고백하고 있다.

그리고 오늘 역시 함께 말씀하시는 “나는 생명이다” 라는 부분 역시 ‘부활’과 불가분리의 단어인데 신약 성경에는 ‘생명’이란 말로 번역되는 낱말이 대개 3개가 사용되고 있다.

①(헬, psyche)v, 호흡, 목숨, 혼- 육체의 생기); ②(헬, bios), 삶, 생애, 생활비, 생활방편- 눈에 보이는 육신이 살아가는 것을 묘사)하고 ③(헬, zoe)v, 죽음에 반대되는 하나님 안에만 있는 높고 가장 존귀한 ‘생명’을 의미)하는 부활과는 때어 놓을 수 없는 하나님만이 가지시는 영원성과 불변성이시다. 바울사도는 이를 표현하기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골3:3)고 선언하였고 디모데를 향하여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능력을 돌릴지어다 아멘”(딤전6:16) 이라고 확신에 찬 고백을 드리고 있다.

Ⅰ.범죄로 인한 비극은 모든 역사 속의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고 가고 있다.(33, 35)

“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비통)히 여기시고 민망(불쌍)히 여기사,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본래 하나님의 창조에는 죽음이라는 것이 없었다. 아담을 비롯한 어떤 것도 소멸하는 존재로 만들지 않으셨다. 창세기 2:7에 “주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의 코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표준새] 그러나 아담의 범죄 후에 모든 사람은 예외 없이 사망의 종노릇하게 되었고[롬5:12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자연까지도 저주를 받아 소멸되고 썩어지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창3:18) 범죄하고 에덴에서 쫓겨난 모든 인류는 나고 죽고 썩어 멸망할 운명만이 가장 확실하다. 죽음과 질병은 예수께서 평소 사랑하시던 마리아와 나사로의 가정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5)

그러므로 이 나사로의 가정에 비극의 죽음이 있었던 것은 저들 자매의 말처럼 주님께서 계시지 않아서가 아니라 너무나 일반적인 죽음의 저주를 실감하는 계기이다. 마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키실 때 애굽의 모든 가정에 죽음이 없는 가정이 없었던 것처럼 이 일류에 죽음을 피해갈 인생은 아무도 없다. 그것은 범죄 한 인류에게 하나님께서 정하신 법칙이기 때문이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

어느 곳에나 죽음과 절망은 풀숲의 살모사처럼 또아리를 틀고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5:8)

이러한 사람과 자연의 비극을 해결하시기 위하여 주님은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되셨고 친히 십자가에 제물이 되셨다. 이를 치료하기 위한 은혜의 역사가 바로 십자가이다.

Ⅱ.예수 그리스도는 부활이요 생명이시다.(25~2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이러한 선언은 아담이후의 역사 속에 누구도 할 수 없는 선언이다. 죽음의 공포와 절망과 두려움을 친히 맛보시고 정복하신 주님만이 하실 수 있는 선언이다.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깐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히2:9) 때문에 죽음뿐만 아니라 우리의 절망을 근본적으로 해결하실 수 있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다.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은 이 역사의 마지막에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기대한다.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15:52~55)

주님께서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라고 선언하시고 그 부활에 동참할 약속들을 확인 시켜주고 계신다. 이러한 주님의 은혜의 선언을 몇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1)“나를 믿는 자는” 하나님 우리의 아버지께서는 이 엄청난 은혜의 약속을 사람들에게 유효하게 하시기 위해서 대단한 것을 요구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이다. 다만 이러한 사랑의 역사를 믿고 받아드리는 것으로 정하셨기 때문에 모든 이류에게 공평한 은혜가 되었다. “영광스러운 부활의 몸으로 나와 함께 영원히 살고 싶으냐, 그럼 100억씩만 바쳐라” 하셨다면 없는 사람들은 다 제외될 수밖에 없고 세상에서의 억울함이 영원에도 그렇다고 탄식할 것이다. 또는 양반가문에 난 자, 공부를 대학까지 반드시 한 자 등등을 조건으로 내거신다면 이 혜택을 입을 사람들이 많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모든 사람이 다 가능한 “믿음” 만을 요구하셨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마리아에게 물으셨던 것처럼 각자에게 확인하시고 계신다. “이것을 네가 믿느냐”

(2)“죽어도 살겠고” 데살로니가 교회나 오늘 많은 사람들의 관심은 이미 죽은 자들에 관한 미래의 궁금증이다. “이미 죽어 있는 자들이 주님 오실 때에 어떻게 될까?” 그러나 주님의 분명한 약속은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라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 육신에 살면서도 죽을 것에 공포를 가진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의 약속이다. 주님의 죽으심은 히브리서 기자의 고백처럼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히2:15) 라고 하였다. 믿음의 사람들에게 죽음은 더 이상 공포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죽어도 살겠고” 라는 분명한 주님의 약속이 있다.

(3)“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 이것은 사람들이 살아서 해야할 가장 귀중한 것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시는 중요한 교훈이라고 믿어진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사람들을 향하여 평가하기를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11:16)

베드로 사도는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궤휼을 말하지 말고,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여 이를 좇으라”(벧전3:10~11) 이것은 바로 믿음의 삶을 당부하고 있는 것이다. 죽음의 공포를 확실히 이기려면 믿음으로 살면 된다.

죽음에 대한 공포를 가진 사람은 아직도 확실한 믿음에 살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설령 죽는다해도 죽음 너머에서 여전히 나를 다시 살리실 주님께서 계시기 때문에 결코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그럼으로 죽는 것이 두려우면 열심히 믿음의 삶을 살기 바란다.

(4)영광된 부활은 주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만 일어날 약속이다.(23)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이 유명한 사건은 예수께서 가장 친밀하게 지내신 것으로 여겨지는 베다니의 나사로와 마르다 마리아의 가정에서 이루어진 역사라는데도 의미가 있다고 이해가 된다.

주님께 붙어 있는 자들에게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고전15:23)

Ⅲ.우리들의 믿음의 한계를 마리아의 형제들에게서도 본다.(21~22, 24)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마르다가 가로되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1)우리도 여전히 시공간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믿음을 가졌다.

(32)“마리아가 … 가로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어쩌면 형제가 아니랄까봐 이렇게 같을 수가 있는가? 그러나 우리 모두는 다 이렇게 불신에 한결 같다는 것이 비극이다.

(2)이 모든 약속은 오직 믿음으로만 채워진다.(27)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이 놀라운 은혜의 약속 앞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아무 것도 없다. 다만 부활이요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믿고 세례를 받는 것뿐이다.

(3)나사로를 썩어 냄새나도록 버려 두신(지체하신) 이유를 헤아리자.

그렇다며 왜 주님은 마르다와 마리아의 요청을 들으시는 것을 연기 하셨는가?

주님께서 나사로로 하여금 썩어서 냄새나도록 지체하신 이유는 바로 주님께서 죽음의 절망을 근본적으로 해결하실 분이심을 보여 주시기 위해서일 것이다.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6)

Ⅳ.결론.

우리는 약하므로 부활을 더욱 사모하게된다. 이 땅에서 질병과 싸우고 좌절을 경험하면서 더욱 영광스러운 부활의 미래를 사모하고 기대하게 된다. 바울은 부활의 장이라고 하는 고린도 전서 15장에서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42~44)

우리는 이 한 시간에 주님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라는 놀라운 교훈을 다 이야기 할 수는 없다. 또 이러한 은혜의 역사는 한 절기에만 얘기할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 놀라운 약속이 이루어진 날 죽음과 무덤이 수치를 드러낸 날,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라는 말씀이 확인된 날, 이 승리의 날에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시편 기자의 고백처럼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는 여호와의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 이 날은 여호와의 정하신 것이라 이 날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리로다”(시118:22~24)

뿐만 아니라 음산하고 몸서리쳐지는 죽음을 정복하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죽으심을 기념하는 주님의 만찬이 이 승리의 날의 예배의 중심이며 이것은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기념되어지는 명령이다.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전11:26) 그러므로 우리의 주일 예배는 주님의 구원의 은총을 하나님께 감격하며 찬양하는 것이요 바로 희생의 십자가를 다시 우리의 삶에 세우는 거룩한 예식이다.

부활은 죽음과 썩음만이 가장 확실한 인류의 운명에 놀라운 약속이다. 범죄 한 모든 인류에게 죽음만이 확실한 대가임에도 부활은 놀라운 운명의 변화이다.

하나님 아버지의 창조의 역사 속에 죽음은 포함되지 않았던 것이고 결국 범죄 함으로 이 저주는 모든 인류에게 왔고 이 비극의 해결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우리 대신 사망의 공포 속으로 들어가셔서 결국 죽음을 정복하셨다. 그리고 그의 약속에 사는 자들, 믿음으로 사는 자들에게 동일한 부활의 약속을 주고 계신다. 돈도, 권세도, 가문도 이 은혜를 받는 자격이 아닌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한 은혜가 되게 하기 위해서이다. 우리는 이제 주님의 놀라운 은혜로 이 엄청난 복을 누리는 자들로서 이 땅에서도 생명 있는 모습(믿음)으로 살고 아직도 죽음과 멸망으로 가는 저주받은 절망의 사람들을 주님 오실 때까지 이왕에 허락된 우리가 살게된 동일한 복음으로 끌어내는 일을 감당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