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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의 배경을 보면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생산치 못하였고 그에게 한 여종이 있으니 애굽 사람이요 이름은 하갈이라,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의 생산을 허락지 아니하셨으니 원컨대 나의 여종과 동침하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창16:1~2) 그리고 17:1에서 이삭을 낳기 바로 앞 해에 “아브람의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충고하셨고 그의 이름을 개명해 주신다. 그리고 다시 15~16에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그 이름을 사라라 하라,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네게 아들을 낳아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열국의 어미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열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하셨지만 17~18에 “아브라함이 엎드리어 웃으며 심중에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생산하리요 하고, 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고하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라고 기도했고 19에 “하나님이 가라사대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정녕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고 확실한약속을 주셨다. 그리고 이 역사는 창세기 21장까지 짧지 않은 역사를 이어가면서 안타까운 일들을 일으킨다.
이 말씀은 참으로 절묘한 비유이다. 사도바울은 아브라함의 두 아내였던 사라와 하갈을 통하여 복음과 율법에 비유하면서 이 두 여인에게서 난 이삭과 이스마엘의 운명적 위치와 입장을 위에 있는 천상의 예루살렘과 시내 산이나 땅에 있는 예루살렘으로 연결짓고 있다. 바울 사도는 복음에 살면서도 여전히 율법에 자유하지 못하는 유대적 그리스도인들에게 오늘 이 비유를 통해서 진정한 자유와 복음의 삶이 어떤 것임을 가르쳐 주고 있다. 그렇다고 하면 오늘 이방인으로서 복음에 들어온 우리에게는 별 의미가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을 가질 수 있지만 갈라디아 교회 또한 본래적인 유대인들이 아닌 이방인들로서 복음에 들어온 사람들이고 오늘 이 비유는 갈라디아의 그리스도인들 뿐만 아니라 오늘도 여전히 율법과 같은 인간의 계율이나 세상의 유혹이나 평가로부터 자유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동일한 경계의 교훈이다.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를 왕으로 섬기는 엄청난 특권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섬김의 대상을 가지고 거기서 자유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모습들을 여전히 버리지 못하고 있다. 오늘 말씀을 통한 경계와 함께 진정한 자유의 사람으로 회복되어야 할 것이다.
오늘 본문 28v에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는 경계의 선언은 다른 표현으로는 “너희가 은혜의 복음에 사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오늘의 말로 바꿔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24v에 “이것은 비유니” 말하고 있는 것처럼 이 말씀은 오늘의 우리의 신앙을 점검하는 좋은 비유의 말씀이기도 하다.
Ⅰ.육체와 약속의 두 가지 다른 형태의 믿음이 있음을 가르친다.(22~25)
“기록된 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노릇하고”
사실은 그럴싸한 인간 합리주의에서 관계된 것이 하갈이고 이로 말미암아 탄생된 것이 이스마엘이었다. 우리도 사라처럼 착각할 때가 있다. ‘하나님의 약속은 아마도 이런 방법으로 이루어질지도 몰라요’ 그리고 믿음에 굳게 서려고 하는 아브라함을 유혹했고 아브라함은 안타깝게도 이것을 받아들이고 만다. 그 순간부터 함께 평화와 사랑을 누리며 그래도 행복했던 아브라함의 가정에 문제가 생겨나기 시작한다. 우리는 많이 속을 때가 있다. 하나님의 입장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체로 우리 머리에서 나온 것을 하나님의 약속과 대체하려는 위험에 설 때가 많다. 그러나 이 함정을 주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1.육체를 따르는 믿음이 있다는 말씀이다.
육신을 따라 난 자가 먼저였다. 우리 모두도 육신이 언제나 먼저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한다. 그렇지만 이것이 언제나 우리에게 비극을 만들고 약속을 누리지 못하게 만든다.
요한 사도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결코 인간적인 방법에 의해서 가능한 것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1:12~13)
바울도 이런 안타까운 위험을 경고하고 있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7:22~25)
연이어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롬8:5~8) 고 선언한다. 우리가 육신을 따르는 이상 절대로 영적인 자유를 누릴 수 없음을 확인하게 된다.
(1)애굽에서 들어온 여자가 하갈이다. 즉 세상에서 들어온 죄의 냄새만이 사망의 냄새만이 가득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하갈이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건 본 부인이건 법이건 상관없이 옛날 조선시대의 무수리처럼 오로지 아들 낳아서 왕의 자리에 올리는 것 한가지 생각뿐이었다. 그리고 이 하갈의 생각은 하나님의 역사가 없었다면 그대로 맞아떨어진 것이나 일반이다.
우리는 오늘도 여전히 약속보다 육체의 습관과 욕구에 더 잘 순종하고 있지 않나 살피고 회복할 필요가 있다.
(2)계속 죄의 종노릇하게 한다.
세상의 것들과 더불어 살면 생기는 것은 마음의 고통과 갈등 뿐으로 자유가 아니라 끊임없이 종노릇 할 분이다. 여태껏 자식이 없어도 행복했던 아브라함의 가정에 어쩌다가 하갈이 첩으로 들어오고 이스마엘을 가지면서부터는 부부관계에 문제가 생기고 바가지를 긁게 되어 하나님의 약속을 가진 아브라함도 그야 말로 살맛이 아니었다.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잉태하매 그가 자기의 잉태함을 깨닫고 그 여주인을 멸시한지라,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나의 받는 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 내가 나의 여종을 당신의 품에 두었거늘 그가 자기의 잉태함을 깨닫고 나를 멸시하니 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창16:4~5)
평화는 사라지고 다툼과 분열만이 생기게 되었다.
2.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 믿음이 있다.(28~29)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이것은 인간의 혈연적이고 계산적인 믿음이 아니라 철저하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약속에 근거한 믿음이다. 하나님께서 범죄하여 포로된 이스라엘에게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주신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렘31:31~33)는 언약,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 잃어버린 약속에 바탕을 둔 믿음이다.
이 새 언약은 바로 십자가에 피로 새우는 새 언약,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림의 제사로 세워지는 새 언약을 의미한다. 주님께서 직접 말씀하셨고 “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눅22:20; 마26:28; 막14:24) 하셨고 사도바울도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고전11:25) 라고 이를 확인해 주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예배를 드리면서 이 언약을 확인하는 것이다.
본래는 아브라함도 이 하갈 사건이 있기 전까지는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움직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복 주셨음을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15:6) 오늘 날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도 바로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을 의미한다. 이 약속에 근거한 믿음만이 당당하고 확신을 가지는 믿음이다.
Ⅱ.약속의 자녀만이 유업을 상속한다고 가르친다.(28~29)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1.약속의 자녀만이 상속자라는 사실이다.
다시 본문의 배경이 되는 창세기 21:8~10에 가서 보면 “아이가 자라매 젖을 떼고 이삭의 젖을 떼는 날에 아브라함이 대연을 배설하였더라, 사라가 본즉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소생이 이삭을 희롱하는지라, 그가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어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고 하나님께서는 이를 승인하신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이나 네 여종을 위하여 근심치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칭할 것임이니라”(12)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고전6:9~10; 갈5:21)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고전15:50)
분명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살리 못하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는 경계를 주고 계신다.
2.그러나 핍박을 겸하여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주님께서 육신으로 계실 때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막10:29~30)
본문 29절에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본래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가지고 진리를 전하는 하나님의 일군들을 육신의 혈통에서 난 이스라엘이 괴롭혔고 오늘도 어리석을 정도로 하나님의 약속만을 가지고 타협 없이 신앙하는 사람들은,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며 사는 이름뿐인 그리스도인들과 세상으로부터 불이익을 당할 수 있고 어려움을 당할 수 있다. “야 꼭 그렇게 믿어야 하는 거야?” 그러나 분명히 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약속에 살 때만이 확신이 있고 영적으로 자유 하는 삶을 산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눈으로 볼 때는 세상과 더불어 적당히 타협하며 교회를 오가는 사람이 자유스러운 것 같지만 사실은 극단적인 상황에서는 생명을 버리게 되기 때문에 진정한 자유가 아니다. 여기에서도 롯의 처는 모델이 될 것이다.
Ⅲ.육체에서 나는 것들을 쫓아내야 한다.(30~31)
(30)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계집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계집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31)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계집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니라
1.우리는 이미 세상과 결별한 사람들이다.
아브라함이 그의 친척 아비 집을 떠나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약속의 땅 가나안에 외롭게 사는 것처럼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영광, 세상의 방법, 세상의 보호 모두 십자가에 이미 못박은 사람들이다. 우리는 세상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고 하나님의 영광의 약속과 세상의 향락을 함께 누릴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세상에서 들어 온 것을 내어쫓아야 한다. 내 개인의 삶에서 우리의 가정에서 교회에서 하갈 같은 욕심 많고 간교한 여인을 내어쫓아야 한다. 이스마엘같이 본래 하늘의 영광을 갉아먹는 죄의 결과들을 모조리 내어 좇아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약속이 근실히 선다.
그러나 정들었던 세상의 것들을 내어쫓는 것이 말처럼 쉽지만은 않다. “그(사라)가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매, 아브라함이 그 아들을 위하여 그 일이 깊이 근심이 되었더니”(창21:10~11)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것은 아브라함이 가슴이 애이도록 아팠지만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는 까닭에 내어쫓았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이나 네 여종을 위하여 근심치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칭할 것임이니라”(창21:12) 이래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다. 신앙인이란 잘못이나 실수가 전혀 없는 사람이 아니라 잘못이 있을 때는 그것을 회개하고 고치는 사람이다. 다윗도 그런 사람이었고 베드로도 그런 사람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존귀한 인물들이었다.
2.이것은 성경의 약속, 하나님의 명령이다.
(30)“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하였고 연이어 “계집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계집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성경에서 ‘계집종’은 소속이 영구치 못하고 오로지 평생을 자신의 소속된 주인을 섬기는 운명을 가진 존재다. 즉, 임시적인 재산 정도로 취급되는 운명의 존재였다. 오늘 여권 운동가들에게 이것이 걸리는 얘기지만 사실 이것은 비유이다.
하나님의 명령은 단호하다. “계집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우리 믿음의 삶에서 본래의 자리하나님의 약속을 희미하게 하고 바꾸려고 하고 의심하게 하는 모든 세상적 요소들은 모조리, 미련 없이 우리 각자의 신앙에서 내어쫓아야 할 하나님의 약속의 적들이다.
3.우리는 약속의 자녀들이기 때문이다.(31)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계집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니라”
베드로 사도는 나그네와 행인 같은 우리를 향하여 권면하기를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궤휼을 말하지 말고,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여 이를 좇으라,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저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낯은 악행하는 자들을 향하시느니라 하였느니라”(벧전3:10~12)
믿음의 선진들을 열거하며 우리에게 믿음의 귀중성을 일깨우던 히브리서 기자는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11:35) 라고 증거하고 다시 40절에서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격려하고 있다.
바울 사도는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후4:18)고 격려하고 있다. 우리 순례의 길을 가는 성도들은 없어지고 사라질 세상의 것들에 연연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쇠하지 않는 기업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벧전1:3~4)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보호를 입을 뿐만 아니라 미래와 영원에 놀라운 약속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다 약속의 자녀들, 성령의 법에 사는 사람들만이 누릴 약속이다.
Ⅳ.결론.
오늘 우리가 다루는 본문은 많은 내용들을 담고 있고 그것을 다 다룰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도 믿음은 다 같은 믿음이 아니다. 육체의 욕구를 따르는 믿음과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하여 주신 약속에 근거한 믿음이 있고 약속에 거하는 자만이 천국의 상속자가 될 것이라는 경계를 주고 있다. 또 약속에 거하는 자만이 비록 핍박을 겸하여 받을지라도 흔들림이 없는 소신과 자유를 누릴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애굽에서 들어온 하갈과 그 결과로 우리의 삶에 들어와 있는 세상적인 것들을 마음의 아픔을 각오하면서까지 과감하게 쫓아내야만 가능하다고 가르친다. 적어도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이며 우리 모두는 이미 세상에 대하여 죽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래야 한다. 바울은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골3:3)
오늘 나의 믿음에 하갈은 없는가? 이스마엘은 없는가? 계속 세상과 하나님의 약속간에서 갈등하게 하는 그런 요소들은 내쫓고야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 자신들과 우리의 가정과 교회 속에 근실히 서고 자유 하는 믿음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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