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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37절까지 연결되어지고 있는 말씀으로 눈멀고 벙어리 된 사람을 예수께서 고치신 사실을 두고 바리새인들과의 변론의 내용이다. 바리새인들이 말씀을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구약성경에는 너무나 익숙해 있는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선한 행위에 대하여 잘못된 평가를 내리고 정죄 하는 것을 주님께서 타이르고 계시는 것이다.
신앙의 사람들이 말씀을 모르는 것도 문제이겠지만 말씀을 잘못 적용하는 것이 문제이고 오히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받아 들이지 못하는 말씀적용은 참으로 위험하다는 것을 일깨워 주는 동시에 말씀이 삶을 이끌어가지 못하는 머리의 신앙을 경계하고 있다. 믿음을 가지는 사람들의 판단은 언제나 하나님 편이든지 아니면 마귀의 편에 설 수 있다는 경계도 배우게 된다.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이 말씀의 가장 일반적인 교훈은 그것이 어떤 단체이든지 스스로 분쟁하는 집단은 서지 못한다는 경계이다. 언제나 마음을 같이 하는 신앙적 자세는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Ⅰ.신앙에 적극적일 것을 당부하시는 경계이다.(30)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모든 일이 그렇거니와 믿음의 일은 더욱 그렇다. 나 혼자 미온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불참의 원인을 주게 된다. 우선 주변 사람들로부터 빌미를 제공한다. “아무개도 참여 안 한다더라… 뭐 그렇게 요란을 떠냐?[야 요즘 교회 다니는 사람들도 다 한 잔씩은 하더라! 뭐 그렇게 혼자서 고결한 척해?] 아무 집사도 안 간단다 … 네가 뭐 그렇게 유난스러우냐?” 스스로에게도 유혹이 생긴다. “그래 그 사람도 아닌데 나쯤이야 뭐 …!”
“나 한 사람쯤 안 하면 어때…!” 모든 사람의 마음에 이런 생각을 가진다면 한 사람도 참여치 못할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성령께서 주시는 생각이 아니다.
“큰 일은 못해도 나만이라도 참여해서 용기를 줘야지!” 이것이 믿음으로 사는 모습이요, 성령의 음성에 순종하는 사람이다.
하나님께서 큰 것을 요구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 하니라”(눅16:10) 이 말씀은 신비하게도 충성과 ↔ 불의를 비교해서 말씀하고 있다.
지극히 작은 것에서부터 신앙의 가치를 헤아리는 사람은 큰 것에 이르러서도 충성할 수 있다. 그러나 짐짓 작은 것에서부터 충성치 못하면 큰 것 앞에서는 더욱 충성은 어렵다는 귀한 교훈이다. 주님은 어린아이의 작은 보리떡 5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2만 명을 먹이셨고 과부의 두 렙돈을 귀하게 보시는 분이시다.
우리는 늘 신앙도 큰 것에서 한 건으로 끝내려는 한탕주의 생각들이 있고 그래서 평생을 그리스도인답게 사는 것 보다 한 순간의 순교로 영웅이 되려는 경향이 많다. 물론 이 말씀은 순교자들의 가치를 평가절하 한다고 하는 지적을 받을 수도 있지만 그러나 순교할 수 있는 믿음은 분명 작은 것에서부터 죽을 각오로 헌신하는데서 훈련되어졌다고 본다. 지극히 작은 것에서부터 충성하는 훈련이 안된 사람은 극단에 갔을 때도 충성할 수 없을 것이다.
분명히 함께 못하는 데는 여러 가지이유가 있을 것이다. ①확신이 없어서, ②두려워서, ③세상에 대한 미련 때문이다.
Ⅱ.이것을 성령의 불순종으로 말씀하신다.(31)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우리는 대부분 성령을 훼방하고 거스른다는 것을 꼭 신비하게만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본문의 내용에서 보는 것처럼 하나님의 뜻과 의지에 반대하는 것, 좀더 가까이는 기록된 말씀도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것이라는 사실을 생각할 때 말씀을 거역하는 것은 바로 성령을 거역하는 것이다.[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3:16);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벧후1:21)] 스데반은 예수 그리스도를 거역하고 새 언약을 순종치 못하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행7:51)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의 몸을 성전 삼고 계시는 주님의 성령은 때로 우리마음에 하나님과 사람들을 위한 선한 생각을 주실 때가 있다. 그러한 마음을 묵살해 버리는 것도 성령을 거스르는 것이 될 것이다. 우리는 어떤 경우 주님께서 기뻐하실 무엇인가를 하고 싶어 할 때 세상의 일이나 육신적인 일로 인하여 그만 둬 버리는 경우가 있는데 사도바울은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5:16)고 충고하고 있다.
이 세상에 육신으로 사는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갈등할 수 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갈5:17f) 그러나 육체의 욕구를 거스리며 성령에 순종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오늘도 이 땅에서 구원의 역사가 지속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시인하게 하시는 성령의 감화를 거역한다면 영원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잃게되고“…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3)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으면서도 성령의 감동에 불순종한다면 옛날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소망이 없다.
Ⅲ.영원에 관계되는 말씀으로 가르치신다.(32)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여기서도 “말”이 강조되고 있다. 어떤 경우에 우리는 말로 모든 것을 다 해버리는 병폐도 있지만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쉬운 것이 말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마12:34) 그럼으로 말은 마음의 열매요 입술의 열매라고 볼 수 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입술의 귀중한 역사를 소개하고 있는 것을 읽는다.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 하는 입술의 열매니라”(히13:15) 사도 바울은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10:9~10)
불평으로 끝나는 말은 믿음의 삶에 결코 유익이 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는 한은 잠잠할 필요가 있다.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라 불평하여 말라 행악에 치우칠 뿐이라”(시37:8)
“말”로 거역하고 “말”로 순종한다는 것은 가장 쉬운 것의 순, 불순종이라고도 이해할 수 있다.
1.오늘의 시간들은 영원과 연결되어 진다고 하는 사실에 경계를 가져야 한다. 오늘 내가 영적으로 살지 못하면 그만큼 영원을 손해 본다고 깨달을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너무나 쉽게 생각해 버린다. “설마 이 조그마한 일이 영원에 영향을 끼칠까?” 생각하기 쉽지만 오늘 나의 모습이 직접 영원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지금 나의 삶의 모습이 영원의 사람인가 육신의 사람인가를 나타낸다고 한다는 입장에서 깊이 헤아려야만 한다.
때로는 어떤 일을 결정하면서 “이것은 구원에는 영향을 줄 수 없는 적은 일인데 뭐 …” 우리 신앙의 사람들의 독선은 언제나 “구원”과 연결되어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한다. 얼마나 이기적인가? ‘그것은 구원에 관계없으니까 해도 되, 그건 안 해도 구원에는 상관없다.’ 하나님께서 만약에 이와 같이 조건으로만 사람을 구원에 부르셨다면 한 사람도 하나님 앞에 구원받을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무조건적으로 우리를 구원으로 부르셨는데도 우리는 이 엄청난 구원 앞에서도 이기적이 되는 간악함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은혜 받은 자로서의 올바른 자세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이라면 그것이 크건 적건, 구원과 관계가 있건 없건 무조건 적으로 순종하는 자세가 되어야 만 한다.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말씀은 모두가 우리 인간 구원을 위하여 기록된 책이다. 성령께서 주시는 감동은 무엇이든지 순종해야 할 은혜의 이유이다. 당장에 순종하기 어려워도 순종하고 나면 반드시 기쁨과 감사가 뒤따르게 되어 있다.
나의 삶이 성령을 좇아 사는 영적인 사람인가 육신을 좇아 사는 세속적인 사람인가는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쉽게 자신은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만약에 이런 판단조차 불가능하다면 참으로 깊이 회개해야 할 것이다. 이런 류(類)의 사람들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거역했던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었기 때문이다.
2.현실 속에 천국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은 영원에서도 소망이 없다.
우리는 현실 속에서 순종 못하면서 미래에 영원 속에서는 변화되어 순종될 것이라고 기대한다. 일부에서 이 말은 맞지만 완전히 그렇지는 않다. 앞에서 생각했던 대로 육신을 갖고 사는 우리의 삶 속에서 영원 속의 천국과 지옥은 이미 판가름 나 있는 것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5:24)는 주님의 말씀과 함께 바울 사도도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고후2:16) 라고 증거하기 때문이다.
현재의 우리의 신앙의 상태는 자연스럽게 우리 자신의 주변에서 냄새로서 나타나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바로 앞에서 바울은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후2:14) 고 감사하고 있는 내용을 읽을 수 있다. 언제나 육신과 성령의 사이에서 믿음이 이기게 되고 그런 결과로 자신의 속에서 사람들은 생명의 냄새를 맡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오늘 나의 성령께 대한 순종과 불순종은 벌써 영원 속에 살고 있는 나를 증거 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Ⅳ.함께 하는 자와 모으는 자의 복은 무엇인가?
이 말씀은 지금까지 생각해 온 함께 하지 못하는 것을 거꾸로 이해하면 어렵지 않을 것이다.
주님께서 요한 복음 14:12에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고 선언하신 바 있다.
1.하나님의 일을 함께 하는 복된 사람이다.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함께 감당하는 사람이다. 사람이 되어서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사실이 얼마나 놀라운가? 주님께서는 지극히 작은 충성된 자들과 더불어 십자가에서 이루신 구원의 놀라운 역사를 사람으로 더불어 행하신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1:21) 미련할 정도로 주님과 함께 하는 자들 주님과 함께 이 역사를 엮어가고 마지막에는 주님과 함께 악을 심판하는 자리에 함께 앉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마19:28) 바울 사도도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일이랴”(고전6:3) 고 확인해 주고 있다.
2.사죄의 확신을 가릴 수 있다.(31~32)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죄악의 사람, 육신의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도 순종할 수 없다. 반대로 하나님께 사죄의 은혜를 맛본 사람은 결코 어떤 것도 거절치 못할 것은 자명한 이치이다. “주님은 저를 위하여 십자가의 고통과 수치와 죽음을 다 감당하셨는데 이 몸이 부서진들 무엇이 아깝겠습니까?” 라는 모습의 사람은 분명 사죄의 은혜에 사는 사람이 분명할 것이기 대문이다.
3.성령을 순종하고 함께 한다.(31~32)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8)
4.영원한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다.
“예수께서 그 어린아이들을 불러 가까이 하시고 이르시되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눅18:16; 마19:14; 막10:14) 어린이들은 단순한 자를 의미한다. 주님께서 명령하신 것이라면 구원에 관계가 있는가 없는가 저울질하지 않고 생명이 담긴 명령이라는 단순한 자세로 순종하는 자가 천국의 주인이다.
우리는 오늘 이 내용에서 많은 부분의 내용은 간과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한 부분을 정리하면 작은 신앙의 부분에서부터 적극적이지 못한 자세는 하나님의 뜻에 반대하는 것이 되고 주님의 나라를 헤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경계의 내용이다.
마지막 때에 주님께서 내가 함께 하지 않았던 영적인 일에 대하여 “너는 나의 모임을 헤치고 나를 반대했다” 라고 하실 때 ‘주님 저는 다만 함께 하지 않았을 뿐이고 모으지 않았을 뿐입니다.’ 라고 변명한다면 주님께서 바로 이 말씀을 하실 것이다.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마태복음 25장의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40); …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45)는 비유의 말씀은 오늘 우리가 다루는 내용과도 무관하지 않다.
주님의 지극히 적다고 생각되는 말씀을 어기는 것은 성령을 거스리고 하나님의 역사를 거스르는 것이 되고 이것은 영원에까지 관련된 삶의 현실적인 모습으로 생각해야 하고 오늘도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의 역사는 지극히 작은 것에서부터 순종하고 행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진행되어져 영원에 이르게 될 것이다. 지극히 쉬운 말, 덕스럽고 은혜로운 한마디의 순종에서부터 순교에 이르기까지 믿음은 훈련되어지고 천국의 약속은 그러한 사람의 것이 될 것이다.
오늘 내가 깨달은 지극히 적은 것, 그것을 머뭇거림 없이 행하는 매일의 결단 속에 생명의 냄새는 나타나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순종하는 삶이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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