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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여섯 번째 “나는 ~이다” 라는 자기 선언이시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요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6:35)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8: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10:7)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10:11)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11:25)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앞에서 나타난 말씀들의 확인인 듯 한 부분들도 있다. (6)“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는 말씀은 “길”은 “양의 문”이라는 데서 의미가 통하고 “진리” 라고 할 때 “세상의 빛”이라는 말씀에서 통하고 “생명”은 이미 “부활이요 생명” 라는 선언과 일반이다.
특히 주님의 이 가르침은 최후의 만찬이 끝난 후의 가르침으로 도마의 물음에 답변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3년이나 교육을 시키셨는데도 ‘가신다’는 말씀에 두려워 ‘우리를 두고 어디를 가시겠느냐?’는 투의 다소 염려 섞인 질문으로 인해서 우리에게 귀중한 교훈을 얻게 하신 것 역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의 결과이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라는 증거는 인류의 모든 사람들을 향한 영원의 초청이며 모든 철학에 갈증 하는 진리의 탐구자들에게 하나밖에 없는 분명한 해답이다. 역사 속에 성인이라는 사람들이나 철학자들은 이 것을 찾는 방법을 알고자 인생을 투자했지만 분명한 길을 얻지 못하고 막연한 논리들만을 가르쳤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라는 분명한 선언을 하셨고 그 말씀은 지금도 변함없는 만고의 진리이다. 이 말씀이 영어로는 “I am the way, and the truth, and the life” 라고 정관사를 씀으로서 둘이 아닌 유일함을 나타내려고 번역한 것을 본다. 특히 최근의 번역본들은 접속사인 ‘and’ 조차도 맨 마지막에 쓰는 것이 관례이지만 두 번째에서도 쓰고 있다. 그만큼 예수 그리스도의 이 말씀은 약화시킬 수 없는 영원의 가치다.
Ⅰ.주님은 길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죄인이 반드시 가야만 할 길이요, 하나님 아버지께 가는 유일한 길이시다. 오순절 이후에 이 땅에 교회가 세워지고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생명의 위협을 받으면서도 강하게 주장했던 베드로를 비롯한 다른 사도들의 생명을 건 고백에서 이 의미를 읽게 된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행4:12) 이것은 마태가 그의 복음서 서두에서 성령에 감동된 고백으로 들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대한 의미해설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1:21)
누가는 성령의 행전에서 “저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거하되 저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행10:43) 바울은 전도자 디모데게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2:5) 하였다.
죄인이 하나님을 향해서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바로 온 인류의 죄를 십자가에 대신 지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모든 사람이 범죄 하여 짐승으로 타락한 비극의 역사 속에 주님만이 인간이 가야할 유일한 길이시다.
여기의 “길”[헬 hodos; 길, 도로, 방향, 수단, 여행, 큰길; way].은 여러 가지 깊은 의미를 가지는 낱말이다.
1.사람으로서의 삶의 방법.
예수 그리스도를 길이라고 할 때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사람의 삶의 방법을 주님의 모습에서 본다고 하는 것이다. 헬라어 ‘hodos’는 실재적으로 수단을 의미하는 뜻을 가지면서 ‘접근 방법들, 과정’ 등등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이 세상에서 사람이 살아가는 방법은 천차만별(千差萬別)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삶은 여러 가지가 아니라 오직 한 길밖에 없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신 방법 밖에 다른 삶의 방법은 인정치 않으신다. 우리는 생각하기를 주님은 사람이면서 신이시기 때문에 인생이 우리처럼 힘겹지는 않으실 것이라고 짐작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으시다. 히브리서 기자는 증거하기를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4:15)고 일러주고 있다. 특히 십자가를 지시기전의 겟세마네 동산의 마지막 처절한 기도는 주님의 인간 되심을 가장 사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마26:39; 참고: 막14:36; 눅22:42)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것은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신 것이다.
주님께서 우리와 꼭 같은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사람이 살아야 할 도리를 분명히 보이셨기 때문에 아무도 핑계할 수 없게 되었다. 예수께서 보여주신 삶의 방법 인간의 길, 그것은 범죄치 않아야 한다는 것과 죽음 앞에서도 하나님 아버지께 절대적으로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범죄 한 인류는 그렇게 살 수 없기 때문에 주님께서 친히 피를 흘리시고 십자가의 제물이 되신 것이다.
2.영원에 이르는 통로.
인류는 범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영원에 대한 갈증을 가지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셨기 대문이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전3:11) 그러나 죄의 무게는 사람을 절대로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갈 수 없게 되어 있다.
성경이야말로 영원으로 들어가는 지도책이라고 하면 성경이 영원을 향하여 가르치고 있는 모든 이정표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로다”(요5:39) 구약의 그 수많은 제사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을 상징하는 것들이고 선지자들도 하나같이 오직 그리스도를 예언했는가 하면 그 수많은 시편의 노래들도 메시야를 보내실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찬양이며 오실 그리스도에 대한 회복과 기쁨과 감사로 채워져 있다.
주님께서 친히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요10:9) 선언하셨다. 이 문으로 들어가는 자들이 영원히 거룩한 길을 다닐 것이다.
233:1.황무지가 장미꽃같이 피는 것을 볼 때에, 구속함의 노래 부르며 거룩한 길 다니리,
2.하나님의 아름다움과 그의 영광 볼 때에, 모든 괴롬 잊어버리고 거룩한 길 다니리,
3.마른땅에 샘물 터지고 사막에 물 흐를 때, 기쁨으로 찬송 부르며 거룩한 길 다니리,
4.거기 악한 짐승 없으니 두려울 것 없겠네, 기쁨으로 노래 부르며 거룩한 길 다니리,
5.거기 죄인 전혀 없으니 거룩한 자 뿐이라, 주가 주신 면류관 쓰고 거룩한 길 다니리,
(후렴)거기 거룩한 그 길에 검은 구름 없으니, 낮과 같이 맑고 밝은 거룩한 길 다니리,
예수 그리스도만이 영원으로 갈 수 있는 하나밖에 없는 길이다. 다른 길은 없다. “천국에 들어가는 길은 예수님 뿐이지요, 황금 집으로 들어가는 길도 예수님 뿐이지요, 다른 길은 다른 길은 다른 길은 없어요, 천국에 들어가는 길은 예수님 뿐이지요”
3.인생여정의 모범. 모든 대부분의 인생들은 오래 사는 것을 사모한다. 그러나 인생은 길고 짧고의 문제가 아니다. 내 인생에 주어진 과제를 잘 감당하고 가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세상적(世上的) 안목으로 볼 때 예수님의 생애는 참으로 불쌍하기 이를 데 없다. ‘33세의 청춘에 결혼도 못해보고 한 국가의 반란자로 낙인찍혀서 형장의 이슬로 간 사람’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 죽음의 순간에 “다 이루었다!” 라고 소리치셨다.
분명히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도 복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이 인류에 왔다가는 아무 가치도 끼치지 못하고 혼자 자신의 삶의 안일과 무사만을 위해서 살다 간다면 역사 속에 인물로서는 의미가 없는 인생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분명히 이 땅에 해야 될 역할이 있어서 보내셨는데 전혀 그 목적에 기여하지 못했다면 몇 천년을 산다고 해도 가치 있는 인생이 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사명을 아는 그리스도인들은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신앙의 역할을 했던 것이다.
적어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생 길을 배워야 할 것이다. ‘주님이 나를 이 땅에 보내시고 거듭나게 하셨는데 과연 내가 하고 가야 할 일이 무엇인가!’ 하나님과 의논하면서 인생을 개척해 가는 순례자다운 삶을 살아야 만 함을 모범으로 보이고 계시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시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니다.” 라는 고백을 드리고 있는 것이다.
Ⅱ.주님은 진리이시다.
[헬 aletheia, (a 부정 접두 +letho=lanthano 숨기다)]본래적 의미는 ‘숨기지 않는’에서 유래하여 진실, 성실, 사실, 정직, 믿음성 등등의 의미를 가진다. 진리는 들어내는 속성을 가진다.
요한은 그의 복음서를 시작하면서부터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고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거 했고 시편기자는 고백하기를 “내가 나의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진리의 하나님 여호와여 나를 구속하셨나이다”(시31:5) 찬양하고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이러므로 땅에서 자기를 위하여 복을 구하는 자는 진리의 하나님을 향하여 복을 구할 것이요 땅에서 맹세하는 자는 진리의 하나님으로 맹세하리니 이는 이전 환난이 잊어졌고 내 눈앞에 숨겨졌음이니라”(사65:16)
정직한 사람도 어느 순간에는 진실할 수 있다. 그러나 죄인 된 인간을 지속적으로 진실 할 수 없기 때문에 진리일 수 없는 것이다. 바울 사도는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롬3:4f) 라고 고백하고 있다.
진리만이 불변하는 절대적 가치이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주님의 진리의 성품을 닮아야 한다. 신앙한다고 하면서도 진실 되지 못한 것은 진리의 주님의 성품을 닮지 못한 것이다. 불변하시는 성실과 진실 그것 때문에 가룟 유다의 간교한 배신 앞에서도 진실하신 주님을 뵐 수 있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진리의 일꾼된 입장으로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궤휼 가운데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천거하노라”(고후4:2) 고 권면 하고 있다.
진리의 주님은 비록 주의 백성들이 때로는 실족하고 넘어지더라도 영원히 그를 의지하는 모든 자에게 불변하시는 보증이 되신다. 믿는가?
Ⅲ.주님은 생명이시다.
[헬 zoev, zao‘살다’]에서 유래하여 ‘생명, 영생, 내생’ 등등의 의미를 가지는 낱말이다. 생명은 원한다고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가진 분이 주셔야 누릴 수 있다. 주님께서는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10:28)고 분명한 약속을 주고 계신다. 사람의 근본을 다루는 것이 종교이고 그렇기 대문에 적어도 종교는 생명의 종교가 되어야 한다. 확실한 약속이 없는 종교는 한평생을 허비하는 것이요 영원을 포기하는 것이다.
지난번에도 불교의 경전에 이야기를 했는데 생명에 관한 한은 비교를 해 볼 수 있다. 불교의 비유경(譬唯經)[불교의 모든 경(經)․율(律)에 말한 인연과 비유를 모은 경전으로는 ‘법구비유경(法句)’과 잡비유경(雜) 두 가지가 있다.]에 나오는 얘기가운데는 요9:1~3에 나오는 말씀과 아주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석가가 많은 제자들을 거느리고 가다가 눈멀고 벙어리 되고 앉은뱅이 된 사람을 만나서 제자들이 “이 사람은 누구의 죄로 이렇게 되었는가?” 묻자 석가는 이 사람의 전생에 산마루 터에서 주로 강도 짓을 하는 강도였다고 말하면서 이 사람의 ‘눈멀고 벙어리 되고 앉은뱅이 된’’ 이유를 해설한다. 그러자 제자들이 “그럼 이 사람이 불쌍하니 우리가 먹을 것을 좀 줄까요?” 했지만 이 사람의 업보를 빨리 닦아 내기 위해서는 도와주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못하게 한다. 그러나 인간의 업보를 스스로 감당하고 해소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천지 사이에 한 사람도 없다. 사실 그래서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셨다.
생명과 비 생명의 차이는 여기에 있다. 절망으로 시작되었어도 소망과 생명으로 나아가는 모습과 절망에서 영원히 절망으로 나아가는 비극의 인생을 만드는 종교의 차이를 보는 것이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 …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1~6) 이 생명이 미치지 못하는 곳은 우주 중에 어떤 곳도 없다.(시139:7~12)
Ⅳ.결론.
주님의 우리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 가를 가장 명백히 보여 주시는 모든 인생의 길을 제시하신다. 주님만이 영원에 이르는 유일무이한 통로이시다. 가장 바람직한 모든 인생의 모델로서의 길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거짓이 없으신 불변하시는 절대적인 원칙이신 길이시다. 주님만이 살아서도 생명이 있는 삶의 가치와 육신을 떠나서도 영광으로 이끄시는 영원한 생명이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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