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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종배 전도자
고전 11:23~36 2003-08-27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우리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린 십자가 위에서 시작되었다. 흉악한 범죄자인 나 자신이 바로 그 십자가에서 새 인간이 되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 그럼으로 십자가를 제해버린 그리스도의 교회는 우리에게 있어서 상상도 할 수 없는 엄청난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의 역사요 사랑의 역사이다. 이 이유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영광을 우리 것으로 기대하긴 하지만 십자가를 더 큰 은혜로 다루고 있는 것이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그의 사도들에게 주신 약속의 확인이다.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26:26~28; 막14:22~24; 눅22:19~20)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눅22:19b)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눅22:20b) 이라는 당부는 우리가 매주 이 새 언약의 확인으로 십자가의 못 박히심과 피 흘림을 기념함으로서 새 언약의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고 있는 것이다.

그 것은 구약의 제사의 완성이면서 모든 그림자들의 실체를 주님 앞에 확인하는 것이다. 엄밀히 말한다면 우리는 매주 드려진 제사를 확인하고 기념하는 것으로 구약의 제사와 절기는 계승하고 있는 것이다.



Ⅰ.주님께서 직접적으로 명령하신 것이다.(23)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분명히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만찬 자리에 없었다고 단언할 수 있다. 그렇게 확신하는 이유는 바울이 교회가 탄생하고 복음이 이미 사마리아를 넘어 다메섹에 증거 되기까지도 사울이라는 이름의 불신자로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으로(빌3:5)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를 핍박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랬던 바울이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라고 증거 한다. 이러한 고백은 바울의 성격상 다른 사도들로부터 전해들은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받았다고 확신해도 좋을 것이다. 주님으로부터 이 명령을 다메섹에서인지 아라비아(갈1:17)에서인지 직접 받았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리고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에 열두 사도에게 지시하신 바로 그 명령이었음을 환기시킨다.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주시던 그 새 언약의 떡이었음을 확인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對敵者 바울을 복음의 일꾼으로 참여시키시면서 이 점을 강조하셨던 것이다.

1.주님께서 직접 명령하신 것들은 어떤 교훈들보다도 중요하다.

우리는 신앙의 성격상 직접적인 명령과 간접적인 명령이 있는 것을 성경 여러 군데서 읽고 본다. 특히 그의 땅에서의 공생애를 마감하시면서 주신 교훈들은 대단히 중요하다.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16:15)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19~20) 하신 명령과 비중이 같은 명령이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신 것이다. 이것은 어떤 경우에도 사람의 입장에서 가볍게 여길 수 없는 것들이다. 그것은 열두 사도들과 바울 까지도 주님께서 직접주신 명령으로 오늘 우리에게 전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신앙하는 세계에서 직접 명령하신 것들은 약화되고 간접적인 것들이 강조되고 있는 것들이 오히려 문제이다. 사람이 복음 속에 살아야 한다는 부분보다도 세상에서의 영광이나 복이 강조되고 있는 것들도 분명히 기현상으로 세속적인 영향이 크다.

2.행하여 기념하라!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24b)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25b)

언제나 우리 그리스도의 교회의 문제는 행동으로 나타나야 할 것들을 생각에만 머무르게 하고 만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오늘 다루는 본문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기념함에 있어서도 관념적인 것을 경계하고 있다. “이것을 행하여…” “이것을 행하여…” 물론 사회 속에서나 교회 속에서 어떤 신앙의 행위를 시행하려고 하는 데는 수많은 제약이 따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이것을 행하여…” 라고 당부하신다. 여기 “행하여(헬 poieo)" 라는 낱말은 ‘행하다, 일으키다, 완수하다, 지키다, 실행하다, 준수하다, 실천하다, 일하다, 활동하다’ 등등의 여러 가지 듯을 가지는 말이다. 하나님의 명령 그것은 어떤 것이 되었던지 반드시 시행되어야 하는 과제이다. 1세기 때에도 그리스도인들의 예배는 이 만찬을 기념하는 까닭에 식인종이라는 오해를 받았고 그러한 오해 속에서도 이 주님의 명령은 거리낌없이 계속 되었다는 사실을 역사는 우리에게 일러주고 있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는 주님의 명령은 충성된 그의 사람들이 목숨을 걸면서까지 행하였던 것들이었음에도 오늘 우리는 ‘번거롭다’는 이유로 ‘자주 행하면 경건성이 감소된다’는 이유로 그대로 행치 않는 것은 분명히 불순종이다.

어찌 보면 ‘기념하는 것’과 ‘행하는 것’은 전혀 다른 감정을 갖게 하는 것 같으면서도 반드시 연결되어야 할 신앙의 사람들의 과제라고 할 것이다. 신앙인들의 생각하는 모든 것들은 반드시 행동에 옮겨야 할 것들임을 확신할 필요가 있다.



Ⅱ.주의 죽으심을 전해야 한다.(26)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1.죽으심을 기념하고 증거 할 때 겸손하게 되고 감격하게 된다.

“나를 기념하라”[헬 anamnesis 생각하게 하는 것, 기억←(헬 anamimnesko )연상하다, 기억을 되살리다, 생각나게 하다, 회상하다, 상기시키다) “…나의 행사 곧 내가 각처 각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고전4:17)]하셨을 때 ‘기념’이라는 말은 십자가의 현장에서 나를 위하여 희생하시는 기억을 되살리고 회복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지속적으로 회복해야할 믿음의 확신이다. 믿음의 사람들에게 십자가의 주님이 희미해져서는 안 된다. 그 십자가의 은혜로 오늘 ‘나’라는 그리스도인이 새 생명으로 존재하게 되었다는 감격이 늘 나로 하여금 하나님께 순종으로 가게 해야만 한다. [믿는가?] 그래서 기념은 중요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첫사랑’이요 ‘처음사랑’이다.

오늘 지속적으로 나 자신 속에서 확인되어지고 검증되어 지는 것을 우리는 확신을 가지고 증거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여기 "전하다"[헬 katangello]라는 말의 의미는 ‘공포하다, 반포하다, 선언하다, 전도하다, 보여주다, 말하다, 가르치다; to proclaim’(행4:2) 등등의 뜻을 가진다. 죽음의 십자가를 전하기 때문에 귓속말로 몰래 몰래 전하는 것이 아니라 선언하고 보여주고 가르치는 것이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고전1:23)

영광이 아니라 고난의 증인, 십자가의 증인으로 증거 해야 한다. 입에 발린 말이 아닌 이 땅에서는 희생의 모습을 가져야 한다. 베드로 사도는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로라”(벧전5:1) 우리는 죽지 못하고 그리스도의 고난 후의 부활만을 욕심 내고 생명록 책에 기록되었다고 자위한다. 사람들은 언제나 영광의 소식을 듣기를 원한다. 그러나 분명한 한가지 사실은 우리가 죄의 몸이 그리스도와 함게 십자가에 죽음으로만 생명록에 기록된다는 것이다. 오늘 우리는 고난의 흔적을 잃어버리고 영광만을 희구하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안다. 바울 사도는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갈6:17)고 그리스도 예수의 고난의 상처를 자신 만만하게 자랑하고 있다. 그리고 이 고난의 흔적은 과거의 것만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순례자의 길을 가는 사람들이 가지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대할 때 겸손하게 되고 감격하게 된다.’ 그런 이유에서 기념하고 전하는 삶은 중요한 것이다.

2.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25b~26)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①먹고 마실 때마다~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를 좀더 확대해서 우리는 좀 일상적인 삶 가운데서 예수의 나를 위하여 죽으심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매 끼니 때마다 육신의 건강을 위한 식물을 먹고 음료를 마실 때마다 우리 자신의 영적인 부분도 채워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 때문에 오늘도 거듭난 인생으로 이 밥을 먹고 이 음료를 마시게 하셨으니 감사드립니다.” 실지로 처음 교회는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행2:46) 라는 기록으로 날마다 식사와 함께 기념되어짐을 확인할 수 있다.

②주님의 날마다~ 이것은 교회의 매 주님의 날마다 드리는 예배에서 시행되어져야할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적인 의미로 예배의 중심을 차지하는 것을 말한다. 누가는 일세기 교회의 주일 날 모임의 목적을 분명히 언급하고 있다. “안식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하여[헬 klasai 는 klao 의 제일 부정과거 능동 부정사로 목적을 나타냄]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저희에게 강론할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행20:7)

우리는 예루살렘 초대 교회는 모일 때마다 떡을 떼었지만 교회가 점점 확산되면서 매주의 날 예배는 유대교의 안식일에서 주의 날로 즉, 안식 후 첫날로 자리를 잡아갔고 사도행전 20:7의 말씀과 같이 주의 만찬을 나누는 것이 목적이 되었고 말씀을 강론하여 구속의 은혜를 확인하고 떡을 떼는 것이 중심이 되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잃어버렸던 이것을 회복하려고 하는 노력은 대단히 중요한 신앙의 과제라 생각되어져서 감사를 가지게 된다.

이것은 분명히 간과할 수 없는 예배의 중심이다. 구약의 제사의 완성으로도 그렇고 주님께서 명령하신 것으로도 분명히 그렇다. 말씀은 이 기념을 더욱 확실히 하기 위해서 증거 되었다. 이것은 히브리서 기자의 당부(히10:25)와 같이 우리 예배의 모임에도 분명한 가치와 목적을 줌으로서 모이기를 폐하는 습관을 버리게 될 것이다. 이것은 모임이 없고서는 참여할 수 없는 예배의 중심으로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바뀔 수 없는 신앙의 과제이다.

③생명 다하기까지~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명령은 복음증거와 함께 우리의 생명이 다하기까지 이 역사가 다하기까지 기념되어지고 전해야할 과제이다. 하나님께서 구약의 이스라엘에게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신6:6~7)라는 당부가 이 새 언약으로 지속되어져야만 할 자손 대대에 기념하고 전해야 할 신앙의 중심이다.



Ⅲ.결론.

주님께서 바울 사도를 통하여 주신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는 부탁의 말씀은 주님께서 직접 주신 명령으로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선택의 여지가 있는 말씀이 아니다.

이 명령은 복음 증거와 함께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교회 속에 어떤 교훈들보다도 중요한 반드시 행해지고 계승해 가야할 신앙의 중요한 과제이다. 이것은 생각과 관념으로만 가지는 것이 아니라 가장 사실적으로 그리스도의 희생을 확신할 수 있는 떡과 잔이라는 보이는 매개체를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하고 전하는 믿음의 역사로서 말뿐이 아닌 행함으로 전해야 한다는 주님의 간곡한 명령을 다시 듣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의 복음이라고 할 때 어느 것보다도 이 죽으심의 기념이야말로 지속적으로 감격하게 하고 찬양하게 하는 이유가 된다. 이것은 주님께서 이 땅에 심판 주로 다시 오실 대까지 계속 되어져야할 예배의 중심이다.

요한은 증거하기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요6:53~54)고 함으로서 이 볼 수 있는 사실적인 희생의 예전을 통하여 십자가의 감격하는 믿음을 주님 오실 때까지 지키고 전하는 자에게 부활이 있을 것임을 확인해 주고 있다.

종교 개혁 이후에 ‘말씀이 중심인 예배’라는 현상은 의례적이고 성례적인 카톨릭의 미사에 대한 반작용이라고 할 지라도 예배는 여전히 제사라고 할 때 완성된 십자가의 한번으로 완전한 제사를 드리고 있는 기념적인 예전을 약화해서는 안 된다.

오늘 이 거룩하고 은혜로운 성례에 참여하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성령과 함께 기쁨과 감사가 충만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넘치시기를 주님의 복되신 이름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