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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가 선택한 본문은 하나님께 물질을 드림으로서 받는 복을 말할 때마다 강조되는 부분이다. 마치 하나님께서 부가가치세(1/10)를 요구하시는 인상마저 든다. 그러나 당시의 배경을 이해한다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백성들이 신앙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으므로 십일조를 받아서 생활하던 제사장과 레위 가문조차 모두가 밥벌이를 하기 위해 다른 일을 찾아 나가고 재건된 성전은 피폐해질 대로 낡아서 과연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섬겼던 민족이었던 가가 의심되어지는 암흑의 시대에 하나님은 말라기 선지자를 통하여 잃어버린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무조건적으로 사랑하시는데 사람들은 신앙의 행위조차 계산적이고 이기적이다. 자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죽이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음에도 우리의 마음은 차지 않는 것 같다. 어떻게 우리가 그분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고 있는가를 생각지 못하고 아직도 하나님 앞에 손가락을 세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니라”(요일3:1) 오늘 나는 어떤가?
사람들은 대단히 이기적이다. 그런 단적인 예가 동물들에 대한 과보호를 봐도 나타난다. 동물은 잘해주는 주인에게 절대적이고 맹목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계산하고 헤아리는 사람을 사랑하고 베푸는 것은 확실한 대가가 보장되지 않기 때문에 사람보다는 개를 선택한 것이다. 개들이 비싼 고기와 사료를 먹고 미용과 목욕을 받으며 주인의 침대에 함께 사람처럼 누워 자는 대신에 이 지구촌 구석 구석에는 정말 개처럼 먹지 못하고 끙끙거리며 더러운 곳에 개처럼 살게 되는 것이다. 개에게 베푸는 것들을 사람에게 베푼다면 이 사회는 분명 개를 돌보면서 느끼는 만족 이상으로 회복될 수 있을 것이다. [개로 하여금 개의 자리에 있게 하라!]
신앙의 사람들조차 비신자들로부터 너무 이기적이라는 평가를 많이 듣는다. 하나님께야 오죽 하겠는가!
하나님은 말할 수 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부르시고 돌보심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믿음의 행위조차 계산적이고 이기적이다. 구원을 주신 주님의 은혜를 망각하고 여전히 구원받기 위해서 신앙생활하고 복 받기 위해서 연보를 드리고 있는 계산적인 나 자신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주님은 이 원리를 이미 말씀하셨다.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빌리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로우시니라”(눅6:35)
섬김이 조건으로만 될 때 감격은 없고 삭막할 수밖에 없다. 이런 우려를 아셨던 주님은 일찍이 당부하시기를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눅6:38) 이것은 비단 사람 상대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해서도 더욱 그렇다고 믿어진다.
우리는 구약의 암흑의 시대에 완악한 백성들에게 주신 이 말씀을 오늘의 시대에도 꼭 같이 적용하려고 하는 이기주의적 신앙의 자세를 버리고 좀더 하나님의 사랑의 가치에 맞는 믿음을 드려야 할 것이다.
Ⅰ.먼저는 마음이 하나님께 있어야 한다.(7)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 열조의 날로부터 너희가 나의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런즉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하였더니 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 하도다”
우리 마음이 머무는 곳에 우리 몸이 있고, 언제나 관심을 가진 곳에 우리의 정신이 집중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마음으로는 내키지 않는 것을 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이렇게 억지로 하는 것들은 성의도 없고 기쁨도 없다. 사람에나 동물들도 이것을 대개는 알아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는 더욱 그러하실 것이다. 주님께서는 마음이 없이 드리는 제사나 예배는 결코 기뻐하지 않으신다. 적어도 하나님의 백성들은 나를 죄와 절망과 형벌에서 구원하신 은혜에 감격하고 그 사랑과 은혜를 인하여 하나님께 경배하고 예배하는 백성들이다. 이것은 구약이나 신약이나 다르지 않다.
1.마음이 담기지 않은 의무적인 물질은 결코 기뻐하시지 않으신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사1:11~13)
우리 시대에 왜곡된 사람들의 심성은 주님을 개에게 하는 것만큼도 못하는 다만 안 하면 저주라는 공포에서만 섬기고, 복권처럼 일확천금의 물질을 받아 육신이 잘되고자 기적을 바라는 매개체로 연보를 드리려는 것에 대한 경계로 이 말씀은 주어지고 있다.
2.보이는 물질보다 중요한 것은 그 중심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계실 때에는 오히려 십일조를 철저히 드리는 데도 책망을 하시는 것을 듣는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더 중요한 정의와 자비와 믿음은 저버렸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소경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는도다”(마23:23~24) 왜 이런 책망을 듣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유대인들은 자신에게 주어지는 의무에는 철저하면서 진정으로 하나님께 사랑하는 마음은 결여된 체로 다만 국가에 부가하는 세금처럼 철저하게 십일조만을 계산해서 바쳤던 것이다. 오늘 우리 시대의 사람들도 십일조를 십 원 단위까지 철저하게 계산해서 바치면서 그것이 최고로 잘 하는 것인 양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은 의무일 뿐이지 사랑으로 인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진정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아니다.
먼저 우리 마음 중심에 십자가에 대한 감격과 사랑 받는 감사를 회복할 필요가 있다. 삶은 잔혹하리 만큼 냉정하여 평화하지 못하면서 주님께서 복 주시리라는 착각은 오히려 주님의 진노를 부를 수밖에 없다. 주님께서는 인간관계와 하나님 관계를 다 중요하다고 가르치신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5:23~24)
세상에서 사람들과 화평, 주님께는 죽을 수밖에 없는 생명이 십자가에 의한 거듭남의 감격이 우리온 마음을 지배하고 넘치게 될 때 비로소 주님께 드리는 것이 감격이 될 것이다.
Ⅱ.자진해서 드리지 못한다면 도적질이다.(8~9)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을 드리지 못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나 죄스러움도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의 마음에서 하나님은 제해져 있었기 때문이었고 출애굽의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도 바벨론의 포로생활에서의 회복과 성전 재건도 저들의 심령에는 더 이상 감격으로 남아 있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 드려야 할 십일조나 헌물을 내지 않은 것이 더 이상 죄라고 여겨지지 않았던 것이다.
이래서 지속적으로 은혜 받는 것이 필요하고 믿음과 영혼이 소생하는 것과 경성 하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의 마음과 영혼이 무디어지면 하나님 앞에 죄를 지으면서도 그것을 죄로 느끼지 못하는 비극까지 가게 됨을 배우게 된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눅21:34)
오늘 우리들도 말라기 선지자의 때와 같이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 “십일조와 헌물이라” 하셨지만 이것은 비단 물질뿐만이 아니다.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을 드리지 않는 것은 도적질이다. 시간도 그렇고 지난 시간에 약속한 드리지 못한 것들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드려야 하는 시간은 최소한의 단위로도 계명으로도 1/7이다. 물질이건 시간이건 시간이 지나면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쉽게 생각하지만 이렇게 구약처럼 낱낱이 계산한다면 우리는 엄청난 도둑질을 하고 있는 것이 된다. 드리지 않고 시간만 지나면 무마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이런 계산으로 우리의 과거를 돌아본다면 우리는 참으로 하나님께 진 빚이 많지 않은가? 그래서 또 우리는 하나님께 실재적으로 빚진 자들이요 사랑의 빚진 자들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참으시고 용서하시고 우리를 받으신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한가? 우리의 도적질 한 대로 행한 대로 계산하고 받아 챙기신다면 과연 남아날 사람이 있겠는가?
이래서 우리 하나님은 인내의 하나님이시고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지 못하고 지나간 모든 것은 물질이건 시간이건 도적질이라는 이 정신은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Ⅲ.복음 속에서는 더 이상 상대적인 대가로 평가되지 않는다.(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있고 아주 넉넉하게 있다. 다만 주님께서 우리들의 부요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셔서 육체를 입고 이 세상에 오셨고 자신의 생명까지 우리를 위해 아낌없이 주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수고한 것들을 드리는 것들의 열매와 시간을 드리는 것은 전혀 우리를 위한 것이다. 이러한 은혜를 인하여 새 언약 속에서는 우리 생명조차가 주님의 것이라면 십의 일은 최소 단위이다. 우리는 이제 금전의 가치를 헤아려 드리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인한 감사를 헤아릴 뿐이다. 그래야 당연히 드리는 것이 기쁨이 되고 감사가 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제사를 완성하시므로 구약의 모든 상대적인 조건과 같은 율법들은 완성되고 채워졌다. 때문에 더 이상 율법적인 계명은 우리에게 호소력이 없다. ‘무엇을 해라! 그러면 이렇게 될 것이다. 나 하나님 여호와가 이렇게 하겠다!’는 식의 신명기적인 계명은 완성되고 주님의 십자가의 구속으로 인한 은혜에 의한 사랑만이 우리의 삶의 이유가 되었다. 바울은 고백하기를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후5:14)고 삶의 이유 섬김의 이유를 고백한다.
주님은 나의 생명이 되시며 모든 것에 모든 것이 되시는 삶의 이유라면 그분께 어떤 것도 아깝지 않고 드림이 오히려 감격이 될 것이다.
오늘 우리(나)는 어떤가?
나 자신이 주님의 은혜를 앎으로 세상의 가장 귀한 가치도 상대적인 것이 되어버리고 오직 죄와 상관없이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그것에 인생의 초점을 맞추는 것이 제대로 된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표이다.
Ⅳ.우리는 의무에 매인 연약한 믿음에서 자라야만 한다.
우리는 아직도 구약의 율법적인 의무에 매여서 시간을 드리고 물질을 드린다면 아직도 진정한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지 못한 사람이다. 세상에서도 사랑하는 자에게는 무엇이든지 주고 싶고 시간을 나누고 싶은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앉아서 자주 시계를 들여다보는 사람은 없다.
우리 가진 모든 것은 주님의 것이요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쓰십시오! 하는 신앙의 자세야말로 복음에 합당한 삶이요 피 흘리신 십자가에 감격하는 삶이다. 주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당부하시는 말씀이 구약의 아름다운 명령들, “…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고 말씀하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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