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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에게 어떠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주문한다. 적어도 나 자신이 그렇게 못살았어도 자녀들에게만은 기대하는 것들이 많고 그것은 몇몇 가지 이유에서 그럴 것이다. ①그렇게 못살았더니 후회되더라! ②우리의 성취 못한 것을 이루어 다오! ③나 자신이 그렇게 살았으므로 너희들도 그렇게 사는 것이 좋을 것이다.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당부하시는 의도는 세상의 부모들의 그것과는 사뭇 다른 의미이다. 그분은 못다 이룬 소원을 우리에게 이루고자 하거나 지난 삶을 후회해서 우리에게 이렇게 당부하시는 것이 아니다. 주님께서는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땅에 기는 바 기어다니는 것으로 인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 지어다”(레11:44~45) 하셨고 베드로 사도도 같은 당부의 말씀을 주고 있다.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 지어다 하셨느니라”(벧전1:16)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면서 이런 안타까운 당부를 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앞으로 심판과 영광이 반드시 있을 것인데 주님은 우리가 반드시 영광에 들어가기 위하여 이것을 주문하고 계신 것이다. 주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닌 전혀 우리 사람들을 위해서 간곡히 당부하고 계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요단을 건너기전에 이와 비슷한 명령을 그의 백성들에게 주신 바 있다.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며 또 그에게 부종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시니 여호와께서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하리라”(신30:19~20)
하나님께서는 우리 사람들의 미래를 불 보듯이 환하게 보시면서 진노로 갈 수밖에 없는 불쌍한 인생들에게 미리 경고하시고 계신 사랑의 요청이다. 독생자의 십자가의 희생을 통한 은혜의 영광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 은혜의 역사가 이미 2000년이 지나고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는 사람이라면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라고 다분히 경고적인 선언을 하고 계신 것이다. 우리는 타락하려는 유혹에 노출 될 때마다 “나는 과연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라고 자신에게 물을 필요가 있다.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의 목표는 언제나 두 가지에 귀착되고 있다. 그 목표가 ‘영원이냐, 순간이냐?’ 아니면 ‘하나님께냐, 사람에게냐?’ 또 다른 비유는 ‘보이지 않는 것이냐, 보이는 것이냐?’ 그러나 사람은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바울은 오히려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후4:18)고 영원에 합당한 삶을 당부하고 있다.
하늘에 맞는 사람이든지 이 땅에 맞는 사람이든지… 이 양쪽에 다 충실할 수 있는 사람은 성경에는 물론 없고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없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인생들은 이 둘 다를 거머쥐려고 욕심을 부린다. 이것은 분명히 성취 불가능의 욕망이고 과욕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하나를 버려야 한다고 쉼 없이 경고하고 계시다. 오늘 나는 과연 어떤가?
오늘 그리스도인들은 영원을 선택한 사람들이다. “맞는가?” 그런데도 어떤 때는 하나님의 약속이 더 귀해 보이고 천국의 영광이 보이는 듯 하고, 믿음 생활이 힘겹고 시험 당할 즈음에는 ‘내가 왜 이 고난의 길을 선택해서 갈등하는가?’고 낙심을 해 보기도 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선택한 목표에 분명할 필요가 있고 더 이상 갈등하거나 후회해서는 안 된다. 오늘의 주님의 당부를 염두 해 둔다면 우리의 선택은 분명해야만 한다.
185:1 “내 너를 위하여 몸 버려 피 흘려, 네 죄를 속하여 살길을 주었다.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무엇 주느냐,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무엇 주느냐?”
오늘 갈등하는 나를 향하여 주님은 물으신다. “내가 너를 죄의 수치를 벗기고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려고 십자가에서 피를 흘렸다. 그런데도 너의 분명하지 못한 태도는 무엇이냐 … 네가 나의 은혜와 영광과 약속을 알고 사랑 받는 자라면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묻고 계신다.
Ⅰ.믿음의 사람들에게 시간의 길이는 중요하지 않다.(8~9)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1.천년을 하루 같이 사시는 하나님처럼 하루를 천년처럼 쓰려고 할 것이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8)
하늘의 분명한 목표를 향해 가는 사람은 하나님처럼 시간의 길이에 연연하지 않는다. 그것이 자신의 육신의 생명의 길이든지 이 역사의 시간의 길이든지 괘념치 않는다.
2.하나님의 인내와 관용을 배워야 한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9f)
주님의 기다리심을 배운다면 요즘처럼 급하게 돌아가는 세대에도 조급하지 않는 삶을 살 것이다. 참으로 기다림을 견디지 못하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로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을 삼으라,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약5:10~11)
3.오직 한 사람이라도 회개를 위해서 애쓸 것이다.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9b)
거룩하지 못한 어줍잖은 우리 신앙 인들은 마지막에 대한 관심과 기대에도 사실 이기적이다. 모든 세상이 다 불태워지고 망할지라도 나만은 살아 남고 영광에 들어가기를 바란다. 그러나 주님의 심장은 어느 한 사람도 멸망하지 않고 회개하기를 기다리시고 이것을 위해서 역사를 늦추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9b)는 선언은 입에 발린 이야기가 아니라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인류를 사랑하신 그 긍휼과 자비의 심정을 우리에게 알게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예레미야를 통해서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애3:33)고 일러 주셨고 사도 바울은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2:4)고 같은 말씀을 하고 있다.
이러한 주님의 안타까운 마음은 믿음의 사람들이라면 반드시 가져야 할 마음이다. 하나님은 멸망 받을 인생들이 안타까워서 마음 달아 계시는데 우리는 이 역사의 마지막에 있을 자신들의 득실만을 따지고 있으니 얼마나 사악한가! 하나님의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9b)는 안타까움의 해소는 천사들이 아닌 오늘 하나님을 알고 구원받은 나를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생각하고 그 주님의 심정으로 역사의 종말과 심판을 부지런히 알려야만 한다. 나는 구원받았으니 절대 안전하다는 안일한 마음을 버리고 하나님의 심정으로 돌아가서 한 사람이라도 구원의 길에 세우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
Ⅱ.미래의 모든 것이 드러날 때를 염두 해 두고 살아야 한다.(10~11)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1.이 말씀은 이 세상의 끝이 있음을 반드시 염두 해 두고 살라는 말씀이다.
오늘 많은 사람들이 세상의 마지막이 오고 있음을 안다면 삶을 고칠 것이다. 우리 신앙의 사람들조차도 주님은 영원히 오시지 않을 것처럼 사는 사람들이 많으니 안타깝다.
조금 문제가 있지만 어떤 극단적인 사람들처럼 이 땅의 재산을 다 바쳐서라도 그 영광을 준비해야만 한다. 그러나 바치는데도 염두 해 두고 드릴 수 있다면 적어도 이단에 빠지지는 않을 것이다. 차이가 뭘까? 이단자들의 바치게 하는 이유는 언제나 세상처럼 그 물질로 뭘 살 수 있는 것처럼 선전하고 바치게 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아무리 많은 우리의 재산을 다 바친다고 해도 그걸로 영광의 나라를 산다거나 영광을 얻게 된다는 가르침은 분명히 거짓말이다. 이 세상의 어떤 보화로도 영원을 살수는 없음을 염두 해 둬야 한다. 천국의 가치는 오직 주님의 피 흘리심의 대가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만 받을 수 있다.
물론 성경에는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눅16:9)는 말씀이 그런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여기서 친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고 이해해도 그르지 않을 것이고 ‘주님을 위해서 세상의 재물을 쓰는 것이 가치가 있다’는 은유적인 의미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감격해서 드릴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귀중한 믿음의 행위이다.
2.인생의 마지막에 반드시 행한 것들이 공개될 것을 알고 행하라는 경고다.
하나님을 현실적으로 의식하고 사는 사람들은 함부로 행동할 수 없을 것이고 평생을 그렇게 산다면 마지막 때에도 우리가 수시로 실수하는 많은 것들, 다른 사람들에게 아픔을 주는 많은 행동들은 사실 옆에 하나님이 계시다면 그럴 수 없는 행위들이 많다. 주님의 은혜를 입은 그리스도인이라면 언제나 마지막을 염두 해 두고 사는 사람들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모든 천사들 앞과 온 역사 속의 모든 사람들에게 공개하기 부끄러운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주님의 육신의 형제였던 야고보는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약2:12)
주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숨은 것이 장차 드러나지 아니할 것이 없고 감추인 것이 장차 알려지고 나타나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눅8:17)고 경계 하셨고 바울 사도도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5:10)고 경계한다.
오늘 과연 마지막에 우리의 모든 언행심사가 들어 나고 주님이 옆에 계심을 확신한다면 다른 사람에게 그렇게 상처를 주는 말이나 행동은 결코 하지 않을 것이다.
Ⅲ.영원을 준비하는 삶의 자세…(11b~13)
“…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세상은 반드시 끝이 있을 것이고 존재하는 모든 것은 소멸될 것인데 오늘 나(우리)는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한가? 우리네 신앙의 사람들은 비록 모든 사람들과 같은 것을 먹고 입고 같은 지구촌에 살고있지만 현실의 보이는 삶이 목표도 아니고 이유도 아니다. 믿는가? 물론 이 말씀은 이 땅은 떠날 것이므로 되는대로 살아야 된다는 말이 아니다.
1.구별된 삶을 산다. “… ①거룩한 행실과 ②경건함으로” 이것이 우리 삶을 지탱하는 두 다리와 같은 것이다.
①“거룩한 행실”[헬, hagios 구별된 + 헬, anastrophe ~로 바쁘다, 살아남다, 살다, 거주하다, 처신하다, 왕래하다, 산다, 던지다, 지나다, 돌아오다, 사용되다.] 구별된 행동, 구별된 삶을 사는 모습을 가지고 살 것이다.
②“경건함”[헬, eusebeia]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중심이 되는 삶을 일컫는다.
2.하나님의 날을 고대하는 삶이다.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나이든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미 저물어 가는 인생이니까, 하나님의 날을 기대하고 바라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고대(苦待)는 늙은 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거룩한 피에 죄 씻음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삶의 가치가 바뀐 사람들이다. 우리는 이 땅에서 우리 각자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면서도 최종적으로 바라는 것은 이 세상이 아니다. 믿음으로 산다고 하면서도 완성될 영광의 새 예루살렘을 고대하지 않는 사람은 올바른 신앙의 사람이라 할 수 없다.
이 땅의 불의와 죄악을 볼 때마다 하나님의 의의 통치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요, 정직하고 의롭게 살면서도 거기에 상응하는 대우를 받지 못하면서도 기대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의 최종적인 승리다.
3.하나님의 약속과 의의 성취를 바라는 삶이다.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우리는 죄악으로 인하여 완전한 의의는 기대할 수 없는 세상에 살고 있다. 아무리 법을 계속 바꿔도 이 세상의 역사나 질서는 완전해 질 수 없다. 사람이 바뀌어도 법을 바꿔도 여전히 그 모양 그대로이기 때문에 그것을 응징한답시고 전쟁을 일으키고 많은 사람들이 살상(殺傷)되는 안타까운 모습들을 본다. 결국 이 땅에 의의 성취는 사람이 다스리는 이상은 어쩔 수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완전한 의의 실현을 약속 받고 기대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다른 한편에서는 영원히 의의 통치를 누려보지 못하고 가는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고 초청할 필요가 있다. 주님께서 그 추하고 더러운 불법과 죄악을 몸소 구속의 십자가에서 감당하시고 죽으실 뿐 아니라 삼일만에 부활 하셔서 영광의 우편에 오르셨다가 이 구조적인 죄악을 형벌 하시기 위하여 심판 주로 다시 오셔서 완전한 의의 통치를 이루실 그날, 이 약속을 잊지 말아야 한다. “죄 많은 이 세상은 내 집 아니네, 내 모든 보화는 저 하늘에 있네, 저 천국 문을 열고 나를 부르네, 나는 이 세상에 정 둘 수 없도다.
이 놀라운 약속에 부끄러움이 없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복되신 주님의 이름으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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