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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금년 한해를 "회복"이라는 기치아래서 신앙생활을 해 왔다. 1.신앙(말씀, 처음); 2.관계(하나님, 이웃); 3.자리(제사장, 섬김, 복)
그러나 되돌아보면 바라고 기대했던 것들이 "그렇다" 할 정도로 회복되어진 것 같지 못하다. 오히려 열 달을 지내고 난 오늘에 와서는 낙후된 느낌이 더 든다. 좋은 목표를 설정하고 기도를 하는데도 왜 이럴까? 라는 의문을 가지게 된다.
오늘 본문의 모습이 나름대로 여기에 대한 답변으로 이해되어 생각하고 분별하여 나눴으면 한다.
주님을 찾아온 이 사람은 적어도 율법의 전문가로 하나님의 말씀에 통달한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이 사람이 예수님께로 일어난 이유는 말씀을 더 깊이 알고자 하는 갈급 함도 아니고 배우고자 하는 겸손함도 아니었다.
이유는 예수를 시험하고 자기를 과신하고자하는 의도에서였음을 본다. 우리가 선한 목표를 세우고 도전한다고 하면서도 짐짓 약속을 시험해 보고 우리 자신들의 신앙을 과신해 보고자 하는 시도들이 오늘도 있을 수 있다고 본다. 그것도 명목은 대단히 아름다운 것들을 내걸고 말이다.
일어나는 것은 반드시 어떤 행동을 위한 자세이기도 하지만 주님 앞에 일어서는 것은 교만일 수도 있다고 봐야 한다.
이러한 어처구니없는 도전에 주님께서는 오히려 되묻고 계시다. 몰라서 주님께 묻고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 예수님의 질문에 너무나 명료하게 율법의 정신을 제시하는 것을 보면 이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그 말씀에 살지 못하는 것도 아님이 더욱 분명해 진다.
주님께서는 두 가지를 물으셨다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본래적으로 쓰여진 성경 자체로서의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을 오늘의 시간과 역사 속에서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 하는 질문이다.
결국 이 사람의 문제는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문제가 아니라 정확 명료하게 이해하고 있는 그 말씀을 삶에 행하지 못한 것이 문제여서 오늘 우리 자신들의 문제를 보는 듯 하다.
Ⅰ.하나님께서는 역사 속에서 사람으로 더불어 일하심을 확신해야 한다.
구약의 시대나 성경 기록의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천사로 더불어 일하셨다. "‥‥하나님은 가시나무떨기 가운데서 보이던 '천사의 손을 의탁하여' 관원과 속량하는 자로 보내셨으니"(행7:35) "너희가 '천사의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53)
그 때는 아직도 구속받은 성도가 없었던 시대였다. 그러나 지금은 각자의 심령 속에 성령을 주시고 그 언제나 임재해 계신 성령의 음성을 순종하면서 말씀을 삶에서 순종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한 것은 다른 사람을 통해서 보다도 바로 기도한 나를 통해서 이루시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마7:7~8) 는 것은 구체적으로 하나님과 동역 하는 신앙인의 삶의 도전이다.
그러므로 기도하고 내가 그 기도에 따라 나아가지 않는 것은 부도수표의 남발이다. 가령 내가 "우리 교회의 빈자리를 채워 주십시오" 라고 기도했다면 내가 사람들을 강권해 다가 앉히는 구체적인 행동이 뒤따라야 하는 것이다. 그럴 때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구체적으로 우리의 교회에 이루어지고 기도는 응답 되게 되는 것이다.
내가 기도하고 말면 천사들이 사람들을 강권 하여 다가 우리 교회의 빈자리에 앉히는 역사는 오늘날에는 일어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오늘 우리 각자는 천사보다 귀하고 확실한 하나님의 일꾼들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 한 사람에 대해서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계신다. 구약에는 기도도 제사장을 통해서 했던 것을 볼 때 참으로 감사한 시대에 우리는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나를 통해서 일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이 복음의 시대에 나(우리 구원받은 각자)와 더불어 일하시기를 원하심을 믿는가?
그래서 믿음은 그냥 믿음이 아니라 "역사 하는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다. 바울사도는 갈라디아 교회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 하는 믿음뿐'이니라"(갈5:6) 다시 야고보는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약2:22) 고 증거 함으로서 이를 분명히 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를 구속하셨다. 즉 십자가에 피를 흘리심으로 나를 죄에서 사신 것처럼 오늘 나에게 구체적인 믿음의 응답을 기대하고 계신다.
기도의 응답도 내가 기대하고 바라는 답변뿐만 아니라 내가 원하지 않는 응답일지라도 응답으로 수용하는 믿음의 자세가 대단히 중요하다.
Ⅱ.이 말씀의 중요한 명령은 "하라!"에 연결되어 있다.
"(하나님을)사랑하고, (이웃을)사랑하라,[기록된 명령] (아는 것을)행하라!"[오늘 나에게 요구되는 명령] 우리말 개역 신약성경에 "하라"는 명령은 대게 308번 나타난다.
구약시대의 '하지 말라' 라는 금지의 명령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래서 이를 이해하는 신앙의 선배들이 말하기를 '복음시대 이후에는 하지 말라는 것을 해서 형벌 받는 것보다는 "하라"는 것을 하지 않아서 하나님께 책망을 받을 것이라.'고 경계를 주고 있다.
"믿으라, 사랑하라, 기도하라, 전도하라, 회개하라, 증거 하라, 전하라, 영접하라, 모이라, 주라, 구제하라, 교제하라, 용서하라, 일하라, 가라, 공경하라, 예비하라, 담대하라, 안심하라, 축복하라, 즐거워하라, 기뻐하라, 문안하라, 기념하라, 사모하라, 확증하라, 순종하라, 복종하라, 배우라, 섬기라, 취하라, 거하라, 가까이 하라, 겸손하라, 순복하라, 충성하라, 경배하라," 모두가 "하라"이다.
오늘 나는 과연 주님께서 하라고 명하시는 것들을 얼마나 행하고 있나? 헤아려 볼 필요가 있다.
지난 금요일 밤에 우리는 사데 교회에게 말씀하신 두려운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너는 일깨워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계3:1~2) 믿음을 안다 거나 내 믿음의 온전한 것이 아닌 행위의 온전한 것을 지적하시는 책망을 새겨들어야 한다.
Ⅲ.우리는 옳은 것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는 아직 부족하다.(28f)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거짓이 범람하는 시대에 옳은 것을 가지고 있는 것도 대단하지만 그것으로 칭찬하지 않으신다. 옳은 것을 인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러나 그것을 행하지 않으면 복이 되지 못한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예비치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치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눅12:47~48f)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약4:17)
요한계시록에서 성도들이 입은 의는 바로 행위라고 말씀하신다.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계19:8)
Ⅳ."그러면 살리라"는 말씀은 아직 죽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28b)
이 율법사는 자신은 의롭다고 의기 양양하게 자랑하려고 주님께 왔지만 예수님은 그를 영적으로 살아 있는 사람으로 칭찬 한 것이 아니라 아직도 죽어 있는 사람으로 취급하시고 진정으로 그가 사는 방법을 제시 하셨는데 그것이 바로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고 가르치신 것이다.
우리는 오늘 나름대로 우리가 가진 진리에 대해서 그 진리에 선 교회에 대하여 확신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그런 대도 변화가 없는 것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이 전도자에 대한 확신의 부족인가? 먼저는 가진 진리에 대한 강한 확신과 자부심이 필요하고 그렇다면 머리에 가지고 있는 그 진리를 손에 발로 가지고 내려서야 한다. 이러한 말씀이 아직도 먼 얘기로 들리는가?" 오늘 우리의 교회의 새로운 시도는 누가 할 것인가?
더 이상 신앙을 나의 의지로 버텨가려는 것은 한계가 있다. 주님을 의지해야 한다. 성령을 의지합시다. 내 자신이 신앙의 주체가 될 때는 결코 기뻐할 수 없다. 주님의 명령을 주체로 순종합시다.
남은 두 달 동안이라도 오늘 이 말씀을 들은 여러분들 각자가 서로 서로 최선의 열심으로 진리를 행하는데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의 선하신 구원의 도구로서의 성도와 우리 교회가 되었으면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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