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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 제자들과 이 땅에서의 마지막 만찬을 나누시고 십자가의 희생제사를 위하여 미리 제자들의 마음을 무장시키시는 부분이다. 3년 동안 동고동락 하면서 가르치시긴 했지만 이 땅에 남겨둬야 하는 제자들에게 당부하시는 이 귀한 당부는 여전히 천국의 약속을 받고 있으면서도 변화무쌍한 이 세상에 몸을 두고 사는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동일한 교훈이 된다. 오늘 본문 마지막 33절을 통하여 주님을 섬기는 것으로 인하여 환난을 견뎌야 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위로가 되었으면 한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용기 있는 모습은 다 어디로 가 버렸을까? 역사 속에서 그 수많은 박해와 어려움 속에서도 흔들림이 없었던 능력들은 다 어디로 가고 이 평안의 시대에도 우리는 세상에 끌려 다니는 비굴함만 보이고 있으니 주님 앞에 부끄럽고 세상의 불신자들에게도 수치스러운 일이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이겠지만 그리스도인의 삶은 전쟁의 지속이고 다른 종류의 사람들과 다른 것은 죄와 악을 대상해서 싸우는 것이다.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세상은 고난이 들어 왔고 특히 의롭게 살려고 할수록 힘겨운 싸움을 싸울 수밖에 없게 되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께서 십자가를 향해 나아가시면서 격려하시는 말씀을 깊이 새겨들어야 할 것이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Ⅰ.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가르치신다.(33m)
대부분의 종교인들이 종교생활을 하는 것은 세상에서 환난을 면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우리의 주님께서는 그렇게 가르치시지 않으신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주님은 그를 따르는 우리들에게 세상에 살 동안은 환난을 당할 것이라고 각오시킨다. 주님은 “세상에서 내가 너희와 함께 하는 한 어떤 어려움도 없을 것이다!” 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환난이란, 헬, thlipsis]'압박, 고난, 괴로움, 고민, 핍박, 고통'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thlibo 괴롭히다, 에워싸다‘에서 왔다.)’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고후4:8~9))
1.이는 주님이 먼저 당하신 환난이다.
주님은 요한 사도를 통해 말씀하시기를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15:18~19))고 위로하시고 격려하신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환난 당하는 것 자체를 절망하지 않는다. 왜, “주님도 이 땅에서 평생을 환난과 함께 사셨는데 … ”[365:1내 주의 지신 십자가 우리는 안질까, 뉘게나 있는 십자가 내게도 있도다] 주님은 우리에게 환난이 있을 것을 기정 사실화 하신다. “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그러나 여기에서도 분명한 한계를 설정해 주셨다. “세상에서” 주님을 믿고 따르는 자들의 환난은 짧은 이 세상에서 뿐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자들은 영원에서 환난과 살게 될 것이다. “너희로 환난 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환난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저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나실 때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살후1:6~8))
2.주님께서 알아주시는 환난이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주님은 이 것을 알기 위하여 우리와 꼭 같은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가 당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이미 다 감당하시고 마지막으로는 환난 당하는 인생 미래가 없는 인생들을 구원하시려고 33세의 꽃 같은 인생을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면서 접으셨다.
주님을 따르면서 세상에서 환대를 받을 것이라는 생각은 애초부터 버려야 한다. 조금 뒤에서 주님은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저희를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을 인함이니이다”((요17:14)) 하나님의 말씀은 죄를 책망하고 심판하는 도구이고 그것을 가지고 사는 그리스도인들을 좋아할 이 없는 죄악의 세상이라는 것이다. 어쨌거나 주님은 “너희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는 것을 내가 알고 있다!” 라고 격려하신다. 우리의 눈물을 아시는 분이 계시고 고통을 헤아리시는 분이 계시다는 사실 자체가 사실 큰 위로이다. 나중에 사도 요한은 격려하기를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이상히 여기지 말라”((요일3:13)) 고 당부하고 있다. 우리의 당하는 환난이 의를 위하고 주님을 위하고 주님을 섬기는 이유 때문이라면 그러한 환난을 주님은 헤아려 주실 것이기 때문에 큰 힘이 된다.
Ⅱ.담대 하라고 당부하신다.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담대하라, 헬, thapseo]‘용기를 갖어라, 대담하라, 안심하라’ 는 의미의 격려이면서 확신과 위로를 담고 있는 말씀이다.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행14:22))
주님은 “내가 마귀를 이미 반죽음을 만들어 놨다. 담대하기만 하면 반드시 이길 것이다.” 하시는 데도 우리가 그 말씀을 신뢰하지 못해서 세상에서 힘없이 날기를 포기한 독수리처럼 초라한 삶을 산다.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기죽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우리가 유약한 모습을 보일 때마다. 안타까워하신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가? 사실 싸움에 있어서 이기고 지는 문제는 외형적인 모습에 있지 않다. 마치 조선인민미주공화국(이북)과 우리 대한민국과 같은 형세와 같다. 재래식 무기가 아무리 많고 크다고 해도 컴퓨터 장비가 장착 된 작은 신형 병기에 비교될 수 없는 전세와 같이 아무리 힘이 있어 보이고 웅장하고 거대한 세상일지라도 허울 좋은 골리앗과 같다.
비록 작고 힘없고 초라해 보이는 다윗일지라도 하나님과 함께 가기 때문에 무너질 수밖에 없었던 골리앗처럼, 주님은 “안심해라, 내가 너와 함께 한다!” 라고 약속을 주시는데도 우리는 다윗 같이 담대하지 못한 까닭에 세상으로부터 하나님의 군대인 교회가 조롱과 멸시를 당하게 되는 것이다.
시편 기자는 “강하고 담대하라 여호와를 바라는 너희들아”((시31:24))라고 격려한다.
주님은 가나안을 앞둔 이스라엘을 향해서도 같은 명령을 주셨다.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그들 앞에서 떨지 말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와 함께 행하실 것임이라 반드시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시리라 …”((신31:6))
우리가 늘 용기를 잃는 것은 유약하여 실수하고 범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자신을 보는 연약한 자세에서 크고 강하시고 놀라운 주님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믿습니까?
Ⅲ.이김의 장소를 한정하신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33f) 주님과 함께 하는 사람은 반드시 이길 것이라고 확신하신다.
우리는 주님을 경외의 대상으로 섬기고 사는 사람들이다. 함에도 불구하고 거꾸로 세상을 경외의 대상 즉 두려워하며 산다면 마지막에 멸망할 세상과 더불어 수치를 당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대상은 세상이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독생자를 십자가에 우리를 위하여 죽게 하시고 이 세상에서 십자가의 보혈을 의지하며 산 그리스도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다시 그리스도를 보내실 하나님 한 분뿐이다.
범죄 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주님은 이제 세상 속에 있는 그의 백성들에게 이 세상을 구원하도록 맡기셨다. 그런 입장에서 세상은 바로 우리의 것이다.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고전3:22)) 라고 바울은 이를 확인해 주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으로 정복해서 마귀를 물리치고 한사람, 한사람을 구원해 내야 하는 일이 바로 우리에게 맡겨져 있다. 세상은 오늘 그리스도인들에게 좀더 구체적으로 우리(나)에게 주어졌다. 그럼에도 그것에 빠지고 두려워한다면 우리는 주님의 기대를 저버리는 것이 된다.
우리는 이미 세상에서 구별해서 뽑힘을 받은 사람들이다. 누구로부터인가? 하나님으로부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세상을 두려워하고 그것에 끌려 다닌다면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영원히 구원하신 주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요 이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희생의 십자가를 욕되게 하는 것이다. 믿습니까?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경계하기를 “만일 저희가 우리 주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저희에게 나으니라, 참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저희에게 응하였도다”((벧후2:20~22))
이를 위하여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33f)고 말씀하신다. 주님을 깊이 신뢰하는 그리스도인은 세상이 지난번 매미 태풍처럼 혼란할지라도 그 내면은 깊은 바다처럼 평온할 수 있다.
성경에서는 언제나 망대니 산성이니 반석이니 하는 표현을 특히 다윗이 많이 쓰고 있다. 주님 안에 거하는 경험을 늘 했던 다윗은 안전하고 복된 주님의 안에 거한다는 것의 행복을 누려봤기 때문에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시18:2))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우리가 담대하면 반드시 승리하는 보호처는 바로 주님 안에만 있다. 여기를 벗어나는 이상 주님은 우리를 보호하실 수도 승리를 주실 수도 없는 것이다.
고속 전철의 가공할 속도 중에서도 안전은 두 개의 규정된 rail 위에서만 가능한 것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승리와 안전의 보장은 주님 안에서라는 사실을 확신할 필요가 있다. 믿습니까?
Ⅳ.이길 수 있는 이유를 분명히 가르치신다.(27, 32b~33)
우리는 수없이 그리스도인의 승리의 확신을 들음에도 불구하고 세상과 죄악을 이긴다고 하는 사실을 너무나 막연히 생각하고 그러한 약속들이 나와는 너무나 거리가 먼 것으로 의식하기 쉽다. 그러나 이것은 주님을 깊이 신뢰하는 사람들에게 너무나 당연한 약속이다. 오늘 본문에서도 우리가 이길 수밖에 없는 몇 가지를 주님은 일어 주시고 계신다.
[1]승리의 비결은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나를 하나님께로서 온 줄 믿은 고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니라”(27) 이 말씀의 요지는 우리가 ①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②믿고 그럼으로 ③하나님께 사랑을 받는 것을 말한다. 이것만이 분명한 승리의 약속이다.
[2]승리의 비결은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32b) 우리가 아무리 위험한 절망에 던져진다고 해고 그곳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것이라는 확신이다.
[3]승리의 비결은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33) 주님께서 이기셨기 때문에 그 분을 순종하고 따르며 함께 사는 그리스도인은 당연히 이길 것이라는 분명한 약속이다.
성경 속에서도 언제나 세상을 두려워하고 동경하는 사람들과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세상을 극복한 사람들의 이야기들로 충만해 있다. 홍해 바다에 이르렀을 때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자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런 일들을 다 소개한다면 시간이 부족할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들의 결말이 하나같이 소개되고 있다. 그러한 구원의 역사 속에서의 사건들이 글 속에서 끝난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아무 유익이 될 수도 없고 하나님의 약속도 神話이상이 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사실이고 오늘 우리로 통해서 이 역사 속에서 지속되는 것이다.
우리는 불신자들과 함께 세상에 살면서 세상을 이기든지 아니면 세상에 먹혀서 끌려 다니든지 두 가지 중의 하나이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 세상을 이기면 세상은 그러한 사람들을 감당치 못할 것이라고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영웅들을 소개하고 나서 말하고 있다.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히11:38)) 그러므로 우리가 세상을 감당치 못하는 허약한 이름뿐인 그리스도인이든지, 아니면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하나님의 일꾼으로 세상을 주님의 복음으로 정복해 가는 능력의 백성들이든지 양당간에 한 모습일 것이다.
바울 사도는 늘 자신에게 승리를 주시는 주님을 얻고 발견되는 것이 자신의 인생에 成敗가 달림 문제였기 때문에 “…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빌3:8b~9f)) 라고 고백하고 있다.
세상의 어떤 풍랑과 물결에서도 주님을 실재적으로 믿고 신뢰하며 언제나 주님의 말씀을 선택하는 것이 거친 인생항해를 끝까지 승리로 이끄는 비결이다.[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回轉儀, gyroscope]
언제나 세상이 문제이다. 언제나 거대한 위용의 골리앗처럼 세상은 우리 앞에 버티고 서 있다. 그러나 세상을 이기지 못하면 세상에 끌려 다니고 마침내 세상과 함께 멸망할 것이다. 주님과 함께 세상을 이기는 삶이 되어 고달픈 이생이지만 승리와 평안을 늘 성취하는 용기 있는 하나님의 일군으로 살든지 아니면 초라하게 세상에 끌려 다니면서 부끄러운 삶을 살다가 세상과 함께 영원한 멸망에 이를 것 인지의 선택은 오늘 우리 각자의 선택할 몫이다.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열조가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이든지 혹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수24:15))는 여호수아의 권면은 오늘 우리에게도 변함이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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