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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종배 전도자
요 6:60~69 2003-11-20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성경의 여러 부분에서 주님의 말씀을 잘 듣는 것이 우리 각자의 인생에 대단히 큰 영향이 있음을 가르치고 있다. 우리가 흔하게 인용하는 말씀이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10:17)는 바울 사도의 증거를 보더라도 이것은 대단히 중요함을 깨닫게 된다. 듣고 주님의 약속에 들어오게 되고 계속 들음으로 우리의 믿음을 키우고 유지해간다는 말씀이다.

그러나 또 성경은 대부분 말씀이 들려지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의 메시지나 전달자보다도 듣는 당사자들에게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바울은 불신 가운데 있는 자신의 민족을 향하여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뇨 그렇지 아니하다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르렀도다 하였느니라”(롬10:18)고 하여 신명기서의 모세의 증거를 인용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가서 그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할꼬 할 것이 아니요, 이것이 바다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그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할꼬 할 것도 아니라, 오직 그 말씀이 네게 심히 가까와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신30:11~14)

주님께서 음식을 만들어 입에다가 넣어 주시듯이 쉽게 말씀하시고 비유를 들어 말씀하시고 다시 설명하셔도 그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있었던 것이다.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주님께서도 이런 말을 들으셨다는 사실이 어떤 경우 오늘도 말씀을 증거 하면서 반응이 없는 경우에 위로를 삼기도 한다.

하나님은 완악한 백성들을 향하여 “내가 알거니와 너는 완악하며 네 목의 힘줄은 무쇠요 네 이마는 놋이라”(사48:4) 고 까지 말씀하셨다.

이런 입장에서 매 시간마다 주님으로부터 말씀을 은혜로 들을 수 있는 것은 대단히 행복한 영적 삶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구약의 여러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이 멸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들을 여러 가지로 들고 있지만 그 중에서 대표적인 예가 역시 백성들이 말씀을 향하여 완고해진 마음들을 원인으로 들고 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사6:9~10)

“인자야 네가 패역한 족속 중에 거하도다 그들은 볼 눈이 있어도 보지 아니하고 들을 귀가 있어도 듣지 아니하나니 그들은 패역한 족속임이니라”(겔12:2; 사43:8; 렘5:21)

오늘 우리도 같은 비극으로 가지 않고 오히려 많은 사람들을 생명의 말씀으로 이끌어 내도록, 말씀이 들리지 않는 이유와 은혜로 들을 수 있는 복, 말씀을 듣는 자세와 허락된 말씀을 누리는 사람들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생명을 풍성히 누리기를 원한다.

Ⅰ.들리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부분은 씨뿌리는 비유의 말씀과도 관련이 있다.(마13:3~9)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고,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고,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결실을 하였느니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길가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눅8:11~12)

1.선입견 때문에 …

“…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요1:46)는 나다엘이나, 예수께서 고향으로 가셔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셨지만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 …”(막6:1~5) 사람들에게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으셔서 은혜를 배풀지 못하셨다는 기록들은 다 생명의 말씀을 잃어버리는 요인들이 되었던 기록들이다.

많은 사람들이 학위가 있어야 좋은 선입견을 갖기 때문에 박사를 사고 파는 웃지 못할 비극들이 그리스도인들 간에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한심스러운 이야기다. 모든 것은 수요와 공급이라는 일반적 원칙에서 볼 때 우리 모두가 다 공범자들이다. 학위를 가진 사람을 선호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나 그것 때문에 그런 수치스러운 일을 생각 없이 감행하는 당사자 모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런 부끄러운 일의 예방도 바로 선입견을 갖지 않는 말씀 앞에서의 겸손이 가능케 한다.

들려 줄 사람을 먼저 판단해 버리면 말씀은 더 이상 나의 말씀, 생명의 말씀으로 들을 수 없다.

2.사이클이 맞지 않아서 …

너무나 쉬운 이해이다. 주고자 하는 자와 받고자 하는 사람의 관점이 다르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이 말씀의 바로 앞에 “그 사람들이 예수의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14~15)는 기록을 보면 저들은 기적의 떡을 배부르도록 먹고 그러한 예수를 임금 삼기만 하면 고생 없이도 살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로 예수를 찾지만 계속 ‘생명의 떡이니 인자의 살이니,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는 말씀들이 그들에게 들려 질 리가 없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은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26~27) 육신의 편리와 만족만을 찾는 유대인들에게 이 귀한 말씀은 효력을 갖지 못했다.

이미 어떤 것을 얻겠다는 전제가 되어 있으면 아무리 귀한 말씀을 해도 자신들의 기대하는 것이 아니면 들려지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싸이클을 맞추는 것보다 하늘 아버지께 싸이클을 맞추고 사는 사람들이다.

3.방해를 받는 경우에 …

저들의 육신의 떡이 이미 머리를 채우고 있기 때문에 생명의 양식이니 영생하는 것은 들려지지 않았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육신이 너무 피곤하면 역시 말씀을 듣는데 방해를 느끼게 된다.[잠이 마귀는 아니다. 물론 마귀는 잠을 이용해서 말씀을 듣지 못하게 할 수는 있다.] 세상근심도, 그렇기 때문에 말씀을 듣는 것을 방해하는 모든 것들을 기도와 준비로 제거할 필요가 있다.

Ⅱ.들을 수 있는 것 자체가 큰복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비유(바알세불, 일곱귀신)를 듣고 있던 여인 하나가 “이 말씀하실 때에 무리 중에서 한 여자가 음성을 높여 가로되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도소이다 하니”(눅11:27) 여기에 대해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눅11:28) 고 반박하셨다.

1.왜냐하면 모든 사람에게 다 들려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마가복음 4:23에서 주님은 계속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막4:9; 눅8:8, 14:35)고 말씀하신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모임에서든지 그 시간에 주시는 말씀이 자신의 것으로 듣도록 해 달라는 기도를 어느 기도보다도 중요하고 간절하게 할 필요가 있다.

사람들이 처음으로 십자가의 대속을 알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때는 십자가만 이야기해도 눈물이 솟고 “주의 보혈”만 찬양해도 가슴이 벅차 오르는 경험들을 하게 되는데 시간과 세월이 흐르면서 신앙이 타성에 졌고 “꼭 저렇게 해야 하는가!”[말씀을 듣고 아멘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하고 구경꾼化 되어 가는 것이 문제다.

하나님의 말씀이 모든 사람에게 은혜로 들려지지 않는 것은 그 때나 이 때나 마찬가지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내가 말씀을 은혜로 들을 수 있도록 추스르는 자세가 필요하다. ‘오 하나님! 제가 주님의 말씀을 은혜로 듣게 하옵소서!’ 말씀을 듣지 못하면 탄식할 수 있어야 한다.

2.말씀이 은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걸려 넘어지는 자들도 있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아시고 가라사대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61)고 물으시는데, 꼭 같은 장소에서 꼭 같은 말을 들었어도 듣고 감격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걸려 넘어지는 자가 있다는 말씀이다. 예수 당시 가장 성경을 많이 알고 신앙 생활을 잘한다고 자부하는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은 항상 주님의 말씀이 걸림의 대상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주님은 마태복음 11:6에서 요한의 제자들의 질문에 답변하신 후에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 라고 경계하신다.

어떤 경우에는 말씀이 나 자신을 강하게 책망할 때가 있다. 사실 여기에 반응하는 자세에 따라서 신앙의 성패가 좌우된다. ①그것을 인간적으로 듣고 “누가 저걸 알려줘서 이 시간에 전도자가 저 말을 하나?” 하는 은혜가 되지 않는 반응이 있다. ②누가 전했던지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고 “그래 하나님은 아시지! 주님, 용서하여 주십시오!” 이것은 그가 어떤 죄를 졌던 사죄의 감격과 함께 은혜 받는 계기가 된다. 말씀에 걸려 넘어지는 비극의 주인공은 한 사람도 없기를 …

3.믿음은 들음에서 나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신앙의 사람이 말씀의 귀중성을 알고 생명의 양식인 말씀을 듣지 않으면 신앙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신앙 생활 가운데 가장 힘드는 것은 말씀이 들리지 않는 것이라고 해도 과원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은 듣고 감격하는데 나만 들려지지 않는 것이 가장 믿음 생활에서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다. 먹지 않는 장사가 없듯이 생명의 양식을 넉넉히 듣고 먹음으로 세상을 넉넉히 이기고 죄와 사탄을 넉넉히 이기는 줄로 믿습니다!

Ⅲ.주님의 말씀을 듣는 자세가 대단히 중요하다.

누가복음 8:18에는 “그러므로 너희가 어떻게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그러므로 너희는 조심하여 들어라-표준) 누구든지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하시니라”는 말씀이 있는데 오늘 말씀과 더불어 이해하면 믿음과 순종하겠다는 자세로 말씀을 들으면 더 넘치는 은혜를 받아 누릴 것이고, 半信半疑하는 또 뭐라고 하나 들어보자 하는 식의 사람은 가지고 있던 신앙조차도 잃게 될 것이라는 경계의 말씀이다. 이왕에 듣는 말씀, 은혜로 들어 믿음을 더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

1.겸손히 들어야 한다.

이것은 말씀을 전하는 사람을 구분하지 말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것이 역사적인 사실은 아닐지라도 신앙에 많은 도전을 주는 ‘쿠오 바 디스’ 라는 영화를 보면 베드로가 박해가 점점 심해 가는 로마를 빠져나가다가 함께 가는 어린아이의 말을 주님의 음성으로 듣는다는 것은 대단히 감동을 준다. 누가 전하든 상관없이 주님의 이름으로 전하는 말씀은 믿음으로 듣는 나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으로 듣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저 사람은 외모를 봐도, 말투를 들어봐도, 은혜를 끼치기는 틀렸어!’ 라는 교만한 판단은 그만큼 나에게 올 은혜를 제한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렇게 먼저 선을 그어 버리면 그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는 다른 사람에게는 몰라도 나에게는 오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사도행전 10장에서 은혜 받는 겸손한 사람의 대표를 본다. “내가 곧 당신에게 사람을 보내었더니 오셨으니 잘하였나이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행10:33) 이것은 적어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의 피로 오늘 내가 있다는 고백을 가질 때 가능하다.

2.모든 말씀을 자신의 말씀으로 들어야 한다.

주님께서 어떤 말씀이든지 듣게 하셨다면 그 말씀은 꼭 내가 들어야 할 말씀이다. 그 말씀은 누구보다도 나 자신이 먼저 들어야 할 말씀이라고 확신할 때 어떤 교훈이든지 풍성한 생명이 되다.

3.듣고 깨달은 것은 반드시 삶에 실천해야 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마7:24~27)

Ⅳ.진리에 감사하고 만족하는 자(者)만이 어떤 음성에도 감사가 된다.(68~69)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기적의 떡을 먹고 말씀에 고개를 끄떡이며 듣던 수많은 사람들이 영적인 생명과 진리를 강조하시자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66)고 기록하고 있는데 주님은 너무나 안타까운 나머지 직접 부르시고 선택하신 제자들을 향하여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67) 물으신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 줄 믿고 알았삽나이다”

①말씀을 잘 듣는 사람이 많지 않다. 우리는 때로 주님 음성을 듣기 위해 세상 쪽의 귀를 막아야 할 때가 있다.[3가지 보물 - ①계속 올라가면 죽을 것이라고 위협, ②바보라고 꾸짖음, ③겁쟁이라고 놀림. 도대체 누가 그러는지 보기 위해 뒤를 돌아본 첫 왕자는 이내 돌이 되고 말았다. 두 번째 왕자가 정상을 향해 거의 절반을 올라가고 있을 때 잠시 쉬었다가라는 유혹의 소리가 들렸다. 그 말에 무심코 뒤돌아보다가 그도 돌로 변했습니다. 세 번째 공주는 귀마개로 막았기 때문에 그를 저지하는 어떤 소리도 듣지 못했다]

②주님께서 우리를 죽고 또 죽어 영원히 멸망할 죄에서 사신 사랑을 이해한다면 어떤 것이라도 감사하게 대하고 말씀도 들을 것이다. 그래서 은혜를 의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③주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이 늘 우리 자신을 위한 것임을 확신한다면 듣기 좋은 말씀은 물론이고 책망의 말씀도 감격할 수 있을 것이다. 주님은 이사야를 통하여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1:19) 라고 약속하신다.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 하나에 감격하고 주님의 부르심의 은혜에 나를 기꺼히 드릴 수 있는 모두가 되어서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는 의심은 오늘 말씀을 듣는 여러분들에게서는 한 사람도 없이 때마다 주시는 은혜로운 말씀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넘치는 은혜를 충만히 누리는 여러분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