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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눅 14:16~24 2000-11-12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  
이 비유는 물론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혜에 배은망덕하여 거부하고 오히려 그들로부터 짐승 취급을 당하던 이방인인 우리들이 초청되는 일면은 우리소서는 대단히 감사해야할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은혜를 깨닫게 하는 비유이지만, 이미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으면서도 하나님의 초대를 사양하고 세상일에 매달리는 온전치 못한 신앙에 대한 질책이기도 하다.



더 심각한 것은 하나님의 잔치에는 사양을 하면서도 세상일에는 "불가불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는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는 제목의 말씀이 죄를 회개하면서 사죄의 간청으로 들리지만 사실은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것을 용납하라는 무서운 인생의 실책을 받아드려 달라는 내용이라는 데 더 심각성이 있다.



어쩌면 이러한 요청은 오늘 우리의 아니 나의 신앙의 모습일 수 있다는데 경계를 가져야 한다.



Ⅰ.천국 잔치만큼 만족한 잔치는 이 땅에서는 없다.(16~17)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배설하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 잔치할 시간[복음의 완성]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가로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매"



하나님나라의 잔치는 마르지 않는 기쁨과 감사와 노래와 감격이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14:17)



그러나 초청 받은 사람들은 먼저 여기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그런 까닭에 그 귀중한 초청을 거절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강한 확신이 전제되어야 헛된 것에 눈을 돌리지 않는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마13:44~46)



세상의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다. 이런 확신이 있고서야 다른 것을 포기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확신은 맨 눈으로서는 볼 수 없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3:3) 다시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3:5)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심으로 사 주신 하나님 나라에 대한 확신이 있는가?



Ⅱ.초청된 사람들의 사양의 모습과 주인의 진노.(18~20, 24)



(18f)"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여기의 심각성은 귀한 천국 잔치에 이미 청함을 받은 자들이라는데 있다. 그러므로 이 약속은 본래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둘째로는 아브라함의 자손들인 믿음의 백성들에게 경계로 주신 말씀이다.



1.밭을 산 사람.(18b)



"나는 밭을 샀으매 불가불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 하고"



밭은 본 비유의 시대적 상황에서 삶의 터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기본적으로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이 재산을 불려 가는 사람이라면 "밭을 샀으매 불가불 나가 보아야 하겠다"고는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품팔이로 살다가 마침내 자신의 땅을 소유하게 된 사람만이 그 밭을 또 가보고 또 가보고 하지 않겠는가?



이런 입장에서 밭을 샀다는 것은 삶의 터전을 새로 마련하였다는 것으로 이해되어 질 때 인간적으로는 이해가 된다. 초청 받았던 잔치보다도 자신의 소유가 된 그 밭을 고르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밭에 서서 이제 이 밭은 나의 것이라고 자랑도 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이러한 입장일지라도 그것이 주님의 초청을 거절하는 것이 된다면 비극이라는 말씀이다.



밭을 산 것은 일평생의 생계에는 대단히 중요하긴 하지만 영원에 관한 것은 등한한 어리석음을 보게 된다.



우리는 같은 누가복음12:16~21까지의 어리석은 부자에 대한 교훈을 잘 안다.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12:19~20)



세상에 살면서 삶이 안정이 되어야 신앙도 잘 할 수 있다고 우리는 일반적으로 알고 있지만 하나님의 명령을 받는데 그것이 앞설 수는 없다는 비유이다.



2.소를 산 사람.(19)



"또 하나는 가로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 하고"



이 사람은 재산을 상당히 가진 것이 분명하다. '겨리'로 표현 된 것으로 봐서 목축을 위한 것이 아니고 땅을 갈기 위한 것이 분명하고 그것도 '다섯 겨리' 즉 열 마리의 소를 한꺼번에 샀다고 하는 것으로 볼 때 더욱 분명하다.



아마도 농사철이 다가오고 있었고 농사일을 원만히 하기 위해서 소를 산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시험하러 가니" 하는 이 사람의 얘기를 볼 때 더욱 확실하다. 유대의 농사일의 도구는 두 마리씩 한 쟁기를 끄는 소는 잘 길들여지지 않으면 제시기에 농사를 잘 하지 못할 염려도 있고 해서 사들였고 그것을 농번기 전에 확인해 놔야 한다고 하는 것은 인간적인 입장에서 지극히 합리적이고 칭찬 받을 모습이다.



결국 이런 정도로 생활이 안정되어 생활의 기반이 잡혀 있는 사람들은 시기적으로 긴박하게 돌아가는 일이 많고 그럴 경우 "이 일이 중요하고 긴박해서 그 일에는 수 없으니 용서하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합리적인 변명도 주님은 인정치 않으신다. 주님의 초청에 대한 응답이 먼저라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시간이 없어서; 이 일은 사업의 성패가 달린 일이라"고 해도 주님의 명령보다는 앞설 수 없다는 말씀이다. 왜 그런가 우리가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인이시기 때문이다.



나의 모든 것의 주인이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것은 그래서 어려운 것이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 라는 고백은 모들 삶에 있어서 주님께서 먼저라는 고백이다.



믿는가?



3.장가든 사람.(20)



"또 하나는 가로되 나는 장가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이스라엘 사람들은 율법적으로도 결혼을 한 신랑은 적어도 일년 동안은 모든 의무에서 해방되어 신혼의 단 꿈을 즐기게 되어 있다. "사람이 새로이 아내를 취하였거든 그를 군대로 내어 보내지 말 것이요 무슨 직무든지 그에게 맡기지 말 것이며 그는 일 년 동안 집에 한가히 거하여 그 취한 아내를 즐겁게 할지니라"(신24:5)



그런 입장에서 잔치의 거절은 당연한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보장된 즐거움이 하나님의 명령에 우선 할 수 없다는 말씀이다. 바울 사도는 "우리가 먹고 마시는 권이 없겠느냐,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이 없겠느냐, 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이 없겠느냐(고전9:4~6)



고전9:11~12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 육신의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을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을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라"



(15)"그러나 내가 이것을 하나도 쓰지 아니하였고 또 이 말을 쓰는 것은 내게 이같이 하여 달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차라리 죽을지언정 누구든지 내 자랑하는 것을 헛된 데로 돌리지 못하게 하리라"



여기서 앞의 두 사람은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고 하지만 마지막 사람은 이 말 조차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내가 내 즐거움 찾아 누리는데 네가 뭐냐는 식에서 그렇다.



주님께서는 경계하시기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마24:38~39; 눅17:27)



주님은 결코 우리의 즐거움을 빼앗으시는 분이 아니시다.



그러나 경계하신다. 세상의 오락이나 쾌락이 주님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 왜인가? 순간의 쾌락을 위하여 영원한 희락을 잃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기 때문이다.



믿는가?



이들 모두를 향하여 주님께서는 선언하신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24)



4.다시 내려진 초청의 명령과 초대되는 하객의 범위.(21~23)



[1]바삐 움직이는 종들의 보고.(충성된 종들)



(21f)"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22)"종이 가로되 주인이여 명하신 대로하였으되 오히려 자리가 있나이다"



천국은 온 역사 속의 인류를 다 채워도 여분이 있고 그 자리를 우리가 채워야 한다.



[2]주인의 명령.



(21b)"이에 집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 오라 하니라"



영혼의 기갈을 가진 가난한 나, 영적으로 불구인 죄인 된 나, 하늘나라를 보지 못했던 소경 된 나, 영적으로는 완전히 절름발이였던 나를 청해 주심에 대한 감격으로 구원을 찬양하는가?



(23)"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부족한 우리가 천국의 정함을 받았다는 감격이 있는가?



하나님에 나라에 초청하지 못할 인간은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없다.



Ⅲ.오늘 나는 어떠한가?



오늘 우리 중에는 하나님의 명령에는 사양을 하면서도 세상일에는 "반드시 나가 보아야 하겠다" 라고 하는 성도는 없는가? 하나님의 명령에 불복종하면서 "나를 용서하라!"고 말하지는 않는가?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의 어떤 것보다 귀중함을 믿는가?



우리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삶의 문제 그것보다도 영원을 사는 문제가 더 중요하고, 하나님의 일보다 더 성패가 달린 긴요한 문제도 없고, 당연히 누릴 수 있는 휴식과 오락도 주님의 명령을 순종하는 것보다도 행복할 수는 없다는 확신을 가지고 주님께서 나의 명령권을 가진 왕이요. 나의 모든 것을 주관하실 수 있는 주인임을 마음과 행위로서 고백할 때 주님은 이 세상의 삶도 책임지시고 영원한 영광도 주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