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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행 9:1~9 2003-11-24
주여 뉘시오니이까…?  
이 사건은 우리 그리스도의 교회에 있어서 십자가와 오순절 성령강림과 교회 탄생으로 더불어 엄청난 사건이요 역사였다. 주님의 약속과 명령에도 불구하고[행1:8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예루살렘을 비롯한 유대와 사마리아를 겨우 맴돌던 복음은 이 사건을 계기로 엄청난 탄력이 붙어서 땅 끝을 향하여 나아갔고 이 사건의 당사자인 사울이 바로 그 일의 진행자가 되었다. 사울은 이 경험을 평생을 잊을 수 없고 자신의 인생을 바꿀 수밖에 없었던 이 엄청난 사건을 자신의 동족들(행22:6-16)과 아그립바 왕 앞(26:12-18)에서 두 번에 걸쳐서 회고하는 기록을 성경이 전한다.

나름대로 당시에 구약 성경에 입각하여 자신의 신앙에 확신과 열심을 가졌고 사람을 죽이는 일도 서슴지 않았던 사울, 자신이 섬기는 대상과 해야 할 일에 대한 확신을 조금도 의심치 않았던 사울 이었기 때문에 그에게 있어서 전혀 새로운 주님의 음성은 엄청난 충격이었고 고통이었다.

오늘도 나름대로 열심히 주님을 위하여 산다고 자위하고 확신하는 우리들 역시 남의 이야기와 성경이 아닌 자신의 온 삶으로 주님을 만나야 하고 그래야 내가 원하는 주님의 일이나 믿음 생활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비로소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 시간 우리 각자는 사울과 같이 하나님의 보내시는 것으로 생각하고 또 다른 다메섹을 향하여 달리고 있다면 하나님의 둘러 비치는 빛을 보고 온전히 엎드려져서 우리의 인간적이고 계산적이며 자신을 위한 열심을 점검할 필요가 있다.

과연 나름대로 주님을 섬긴다고 신앙 생활하는 나와 주님 앞에 “주님은 누구이신가?”가 질문되어져야 하며 주님께서 이 시간 나를 만나시면 행여 라도 “네가 핍박하는 예수” 라고 한탄하실 주님은 아니신지 반드시 확인될 필요가 있다.

Ⅰ.사울은 대단히 열심히 주님을 위해 헌신하고 있었다.(1~2)

“사울이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좇는 사람을 만나면 무론 남녀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사울은 준비된 일꾼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바울은 사실 자신을 가질 만한 모든 것을 갖추었다. 이 사건 이후에 계속 복음을 전하다가 나중에 예루살렘에서 잡혀 결박 된 체로 자기 동족들과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에게 이러한 사실을 증거 한다.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①이 성에서 자라 ②가말리엘의 문하에서 ③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④하나님께 대하여 열심하는 자라, 내가 이 도를 핍박하여 ⑤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22:3~4) 라고 고백하는데 이 사실이 앞에 이미 스데반을 죽이는 내용에서 기록되고 있다.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7:58)

어쩌면 애굽에서 모든 학술을 배워 말과 글에 능했던 모세가 자기민족을 돌아보겠다고 나가서 최초로 행한 것이 애굽 사람을 죽인 사건과 비슷하다.

로마의 옥중에서 기록한 빌립보서를 보면 역시 자신이 그렇게 의기 양양할 수 있었던 이유를 증거하고 있다.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내가 ①팔 일 만에 할례를 받고 ②이스라엘의 족속이요 ③베냐민의 지파요 ④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⑤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⑥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⑦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빌3:4~6)

바울은 나중에 이 경험을 회상하면서 자기 동족으로 자신과 같이 하나님을 거역하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롬10:2~3)고 안타까워하고 있다.

이런 입장에서 바울은 때로는 사람들로부터 곱지 않은 수많은 눈길을 받으면서도 거리낌없이 자신의 소신을 펼쳐 나갔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에게 만족이나 평안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괴로움만을 가져왔을 뿐이었다.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방언으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26:14)

때로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만나지 못하고 주님의 뜻과 성령이 아닌 자신의 능력과 과신으로 행하는 열심은 언제나 주님을 거스르고 자신에게도 만족이 없는 괴로움만을 가져올 뿐이다.

Ⅱ.그러나 안타깝게도 주님은 그것이 자신을 핍박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3~5)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1.이러한 수치는 비로소 주님께서 비추시는 광명에서 드러나게 된다.(3)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이러한 경험은 예전에 바울에게 있어서 한번도 없던 전혀 새로운 것이었다. 그는 그렇게 열심히 주님을 섬긴다고 애써 왔음에도 진정한 하나님을 만날 수 없었고 정오의 빛보다 더 밝은 주님의 빛[26:13 … 때가 정오나 되어 길에서 보니 하늘로서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나와 내 동행들을 둘러 비추는지라] 아래서 비로소 자신의 참모습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요한 사도가 (요일1:5b) 증거 하는 것처럼 “…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했는데 주님의 빛 되신 실체 앞에 섰을 때 비로소 죄진 인간은 자신의 가장 사실적인 모습을 발견하게 되어 있다.

자신만이 동족들 중에서도 의인된 모습이요 선택받은 일꾼으로 자긍심과 확신을 가지고 예수를 부르는 죄인들을 잡아 가두고 죽이려고 달려가는 사울을 향하여 주님은 아나니아 라는 무명의 또 다른 일꾼을 통하여 “이제는 왜 주저하느뇨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 …”(22:16)고 책망 받고 있는 것이다.

2.주님의 빛을 봤을 때에야 허영과 독선과 거짓의 눈은 감기게 된다.(8)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죄를 가진 인간은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진정으로 봐야 할 것은 보지 못하고 보지 말아야 할 것만을 보는 미움과 시기와 질투의 눈을 가졌을 뿐이다. 그리고 이러한 가치는 생명의 주, 대속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만이 비로소 감겨지고 영적인 눈을 뜨게 되는 것이다. 사울처럼 하나님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며 믿음으로 살려고 하는 사람들이 미워지고 시기가 나고 바르게 보이지 않는 사람은 아직도 주님을 바로 만나본 경험이 없는 사람이다. 주님을 만나는 자는 죄와 시기와 질투의 눈은 감기고 의롭고 긍휼이 가득한 예수 그리스도의 눈으로 바뀐다.

바울은 아그립바에게 이 사실을 고백한다.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행26:18)

사울의 눈이 완전히 감겼다가 비늘이 벗어져 다시 떠져서 사물을 봤을 때는 완전히 새로운 것들이었다. 특히 그토록 자신이 증오하던 그리스도인들이 저주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으로 보였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에 대한 많은 이론들이 있겠지만 바울의 눈을 감았다가 떠진 사실은 가치관의 변화라고 봐야 할 것이다. 예수를 바로 만난 사람은 반드시 그 가치관이 바뀌게 되어 있다.

우리는 어떤 경우 자신이 하나님의 일꾼으로 완벽하다고 생각하는 것 때문에 하나님의 명령하시는 것 보다 자신의 지혜와 생각으로 일하고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일하는 경우들이 더러 있다. 바울 사도는 다메섹에서 눈을 감았다가 뜨고 나서 이 사실을 깨닫고 오히려 과거의 잘못되었던 가치를 부끄러워하는 고백을 듣게 된다. “…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빌3:8~9) 여러분들도 주님을 만나고 가치의 변화를 경험했는가?

3.그것은 주님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핍박하는 것이라고 책망 받고 있다.(4~5)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자기 딴에 얼마나 열심히 주님을 섬긴다고 애써 왔는가! 그런데도 뜻밖에 주님으로부터 들은 말씀은 자신의 생각과 정 반대의 평가였다.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인간적인 생각에서 사울은 교회와 성도들을 옥에 가두고 죽이고 핍박했지만 결코 예수 그리스도를 핍박했다고는 꿈에도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고 사울에게 문책하신다. 혹시 오늘 주님께서 나를 개인적으로 만나시면 이렇게 책망 받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주님의 마지막 심판의 비유 속에서 듣는다.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마25:38~40) “…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44~45)

주님은 주님의 교회와 자신을 동일시하신다. 하나님의 백성과 자신을 동일시하신다. 왜인가? 자신의 피로 교회를 사셨기 때문이다.[행20:28,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 우리가 교회를 향하여 잘못한 것 형제와 자매를 향하여 잘못한 것은 주님께 잘못한 것임을 알고 조심할 필요가 있다.

Ⅲ.예수가 누구인가를 묻고 있다.(5~6)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예수 그리스도는 사실 나에게 어떤 존재인가를 묻고 있는 것이다.

1.주님께서 나에게 어떤 존재냐에 따라서 나의 인생에 관여하시는 영향력도 다르다.

우리 대한민국의 그리스도인이면 대부분이 알고 한 개쯤 자기 집의 벽에 걸려 있는 글귀가 있다. “주님은 이 집의 주인이시오, 매 식사시간 때마다 보이지 않는 손님이시오, 모든 대화에 말없이 듣는 이시라!” 처음의 고백대로 나아가야 하는데 주님은 다시 손님이 되어 계신다. 그런가 하면 모든 말을 엿듣는 사람으로 들린다[주님은 우리 안에 계시는데]. 이런 관념들이 어쩌면 우리의 신앙에도 좌우하는 것 같다. 하루 종일 한번도 찾지 않다가 식탁에나 함께 하시는… 그것도 주인이 아닌 손님으로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능력의 주님이시고 만주의 주시오 萬王의 왕이시며 능치 못하심이 없으신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결코 나의 인생에 손님으로 존재하는 주님이시라면 나의 생애에는 아무 역할도 하실 수 없다. 우리는 마음 언저리 가장 비좁은 곳에 주님을 모시면서 우리의 인생에는 엄청난 능력을 베풀어주실 것을 욕심 내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다.

어떤 신앙하는 사람에게 ‘하루에 몇 번이나 기도하십니까?’ “뭐 세 번은 하지요!” ‘아, 유대인들처럼 경건하게도 시간을 정해 놓고 하루 세 번씩이나 기도하는 경건한 사람이구나!’ 그렇게 존경하면서 ‘어떤 시간에 기도하시는데요?’ “그야 식사시간이지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일이다.

‘여러분 모두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주인이신가?’ 아멘! 그러면서도 주인의 시키는 일 기뻐하시는 일보다도 어떤 일을 결정할 때는 언제나 주인은 무시되고 나 자신의 일이 먼저라면 그것이 어찌 주인을 대우하는 것인가? 주님께서 이미 이 안타까운 현상을 지적하신 바 있다.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나의 말하는 것을 행치 아니하느냐”(눅6:46)

‘여러분은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아멘! 입술에 발린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14:21)

주님은 우리를 영원한 형벌에서 사시고 저주와 멸망에서 자신의 피 값으로 나(우리)를 사셨다. 그런데도 생명의 주인 되신 주님을 나의 편리에 따라서만 이용하려는 엄청난 독선을 가지고 살면서 감히 주님을 섬긴다고, 그 분을 주님이라고 입술로만 속이고 있는 것이다. 주인의 자리에 모시지도 않으면서 주인처럼 나에게 어떤 것을 해 주시기를 바란다. 이것은 적어도 인간 관계에 있어서도 문제가 되는 관계다. 수습(인턴)사원 취급도 안 하면서 사장처럼 일해 달라는 것은 엄청난 잘못이다.

2.우리는 주님과 우리 각자의 심령에 조용히 물어야 한다. “주님은 나에게 어떤 존재이며 의미십니까?” 이것은 적어도 자기 자신의 믿음을 향하여 물어야 할 신앙의 과제이다.

우리는 우리 각자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과연 내 인생에게 어떤 존재이며 가치이신가!” 이렇게 질문할 때 혹시 주님은 나를 향하여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라거나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라는 음성을 들어야 하고 그렇다면 사울처럼 회개해야만 한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의심했던 도마처럼 주님께 다시 고백해야 한다.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십니다”(요20:28)

3.이러한 질문과 답변에 실재적이어야만 한다. 사울의 경험은 사실이고 인생을 바꾸는 전환점이 되었다. 오늘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인생에 어떤 존재인가 하는 물음이 심각한 질문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여기에 대한 답변과 따르는 우리 각자의 행동이 우리 인생의 성패를 좌우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름대로 주님을 열심히 섬기며 살아왔는데 참으로 주님은 나의 인생을 움직이시고 명령하시고 이끌어 가시는 주님이라고 불러드리기에 부끄러움이 없는가? 아니면 나는 입술로는 주님을 부르면서 주님을 나의 삶의 언저리에 겨우 끌고 다니며 주님의 몸 된 교회에 오히려 핍박자로 존재하고 있지는 않는지 사실적이고 실재적인 결단을 할 필요가 있다.

Ⅳ.결론.(7~9)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섰더라,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사흘 동안을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하니라” 바울은 드디어 세상의 모든 것을 향하여 눈을 감고 식음을 전폐하고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것은 남이 할 수 없는 자신에게 만의 사건이었다. “오 주여 주님은 나에게 누구이시며 여태껏 주님을 섬겼다고 큰소리 쳤던 나는 누구입니까?” 이것은 주변의 사람들과는 관계없는 전적으로 우리 각자의 문제이다. 이것은 다른 사람이 일러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여기에 바른 회답을 찾았을 때 비로소 하나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자연과의 관계, 자신과의 관계를 바로 설정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도 주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물으신다. “내가 과연 너에게 어떤 존재인지를 …?” 이 질문에 부끄러움이 없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