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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종배 전도자
히 11:17~19 2003-12-25
하나님이 능히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오늘 말씀과 함께 이 사건의 실재적인 기록인 창세기 22:1~18의 말씀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지난주의 아브라함에게서 보는 믿음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었다. 이것은 적어도 이삭을 받기까지의 아브라함의 믿음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오늘 이 말씀과 더불어 생각하는 하나님을 향한 아브라함의 자세는 또 다른 국면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가르친다.

어렵게, 어렵게 25년의 고달픈 인생여정에서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하나님의 약속이 어떻게 아브라함에게 이루어지고 받아들이는가? 하는 것이 이삭을 받기까지의 아브라함과 사라의 믿음의 여정이었다면, 이제는 그렇게 힘겹게 받은 이삭이 어느 정도 자라고 장성해서 어느 날 갑자기 하나님은 다시 그 이삭을 동물제사를 드리듯이 하나님께 바치라는 명령을 내리셨다. 분명히 아브라함은 120여세가 거의 되었을 것이고 이삭은 제물을 태울 장작을 짊어질 만큼 장성하여 아브라함 내외는 한동안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자식을 보는 기쁨으로 자신들의 늙어감도 잊고 있는 평안한 때에 자신의 귀를 의심하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브라함에게 또 다시 하나의 위기와 어려움으로 주어지게 된다.

이제 어렵게 얻은 이삭이 무병하게 무럭무럭 자라고 양떼들을 돌볼 만큼이었기 때문에 어쩌며 두 노인은 이제는 자식을 통한 주님의 약속이 이루어짐만 남았다는 안도감으로 말년을 보내고 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또한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던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도 의연하게 믿음으로 철저하게 순종하는 아브라함을 보면서 오늘 우리의 신앙자세를 돌아보게 한다.

Ⅰ.믿음의 조상들도 한결같이 시험을 받았다.(17~18)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믿음의 사람 야고보는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peiravzw, peirazo, 시험하다, 훈련하다, 증명하다]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1:13~14) 라고 증거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다른 부분에서 믿음의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훈련되어져야 하고 믿음이 장성해야 한다는 사실을 지적하기도 한다. 야고보도 바로 앞 절에서는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v12)고 말한바 있다.

시험받는 것이 절대로 좋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시험을 피해 갈 수 없는 것도 인생이다. 우리의 자녀들은 과거에 우리가 그래왔듯이 학교에서 수 없는 시험을 거쳐서 지성인으로 자라 사회인으로 자라고, 어떤 일을 감당하려고 할 때마다 그 과정을 감당할 수 있는가 하는 시험은 자격증을 받기 위해서 잘 치러야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듯이, 믿음의 사람들의 영적인 시험도 우리 인생에 있어서 예외일 수가 없음을 보는 것이다. 자연의 식물들은 어떤 절망적 상황에서도 움을 틔우고 자라고 열매를 맺지만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절대로 자연적으로 자라는 예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쓰실 사람은 훈련을 시키시는 것이다.

모든 성장하는 단계를 점검하는 것이 시험이라는 과제로 완성되어 간다면 하물며 영적인 신앙에 있어서도 이것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거대한 믿음의 조상들도 아브라함을 비롯해서 요셉과 모세 다윗, 한결같이 시험을 거치는 것을 성경에서 읽게 된다.

1.이해가 불가능한 시험이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시험은 때로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이해가 불가능한 것일 수도 있다. 이제까지 하나님이 동물 제사를 요구하셨어도 사람을 제물로 바치라는 경험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주님의 요구는 믿음으로 대하지 않는 한 절대로 이해가 불가능한 요구일 수도 있다.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많은 후손을 이삭으로 말미암아 주시겠다고 약속 하셨는데[18,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이제 와서 그 이삭을 번제로 죽여 바치라니?’ 아브라함은 혼란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명령이든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우리의 판단과 이성에 맞던, 그렇지 않던 순종해야 자신의 것이 됨을 아브라함은 확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비단 아브라함뿐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같다. 그러나 우리가 감사한 것은 우리는 이와 같은 시험을 겪지 않고도 이기는 비결을 이미 터득할 수 있다는 사실에 충분한 감사를 가질 수 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것으로 시험을 하시기도 한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17)

2.영적인 시험은 대개의 경우 가장 귀중한 것을 요구하는 것으로 치러진다.

그렇기 때문에 넘어지는 경우가 많다. 주님은 우리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오늘 나에게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그런 것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없어지면 죽을 것 같은 그런 귀중한 것을 요구하신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 번제로 드리라”(창22:2)

엘리야가 시돈에 속한 사르밧의 과부와 외아들의 마지막 것을 요구하였다.

“저가 가로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두엇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엘리야가 저에게 이르되 두려워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하나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왕상17:12~13) 어찌 보면 몰인정하게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이런 이해하기 어려운 명령에도 순종하기만 하면 하나님은 그것보다 더 귀한 것을 되돌려 주시는 주님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가장 귀한 것을 포기하면 시험은 반드시 이긴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물을 태우는 나무 위에서 다시 일으킬 때 그 기쁨이 오죽했을까?

믿음 생활에서는 하나님을 확실히 신뢰하기만 하면 시험은 오히려 복으로 바뀐다. 아브라함은 역시 믿음의 조상으로서 시험을 이기는 비결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감당할 시험만을 허락하신다는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신뢰하게 한다. 때문에 주님은 감당할 수 있는가를 먼저 점검하신다.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창22:1) 이것은 어쩌면 “예 말씀하시는 것이 어떤 것이든지 준행 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라는 고백이다.

Ⅱ.창조주 하나님을 확신하는 믿음을 가졌다.(19)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우리가 지난주에 나눴던 말씀 중에 “… 그의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롬4:17)는 바울의 평가를 들었다.

1.아브라함은 이미 이삭을 받을 수 없는 중에 받았기 때문에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확신할 수 있었다. 같은 장에서 히브리서 기자의 평가는 “이러므로 죽은 자와 방불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이 생육하였느니라”(히11:12)고 이삭을 받은 사실을 증거하고 있다.

아브라함이 논리적으로 하나님께서 창조주라는 사실을 이해하던 그렇지 못했던 간에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죽은 자를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시는 사실을 확신했기 때문에 이삭을 기꺼이 드릴 수 있었다. 오늘 우리가 역시 하나님을 창조주로 확신하고 믿는 것은 우리의 생각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대단히 중요하다.

젝 카트렐은 “예수진리”에서 “창조의 사실은 성경의 가르침 중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이다. 이 사실이 무시되고 부정될 때 온갖 종류의 과오와 거짓 교리가 생길 수 있고 반대로 창조의 사실을 이해한다는 것은 철학과 윤리, 신학의 많은 문제들을 해결하는 열쇠가 된다.”젝 카트렐, 예수진리, (태광출판사, 1986) 21~



(1)하나님이 창조주란 사실을 확신할 때 이 물질세계가 본래 좋은 것임을 말해 준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창조하시고 그것이 참으로 "보기에 좋았다" 라고 선언 하셨다(창1:31). 우주에 존재하는 어떤 타락으로 인한 결과(즉 질병이나 인간의 죽음)도 자연적이거나 타고난 것이 아니라 그것은 죄의 결과로 온 것이다.(롬8:19~23, 많은 종교철학에서 물질을 본래 악한 것으로 생각해 왔고, 물질이 다른 모든 잘못과 오해하는 원인이 된다고 생각해 왔다).

(2)창조는 이 우주와 우주의 역사에 목적과 목표를 제시해 준다.

우주 전체에 대해 참되다는 것은 그것의 부분에 대해서도 역시 참되다. 존재하는 이 모든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하는 가장 심오한 문제에 대한 해답을 준다. 창조를 제외한 어떤 철학도 이 문제에 결코 해답을 줄 수가 없다. 인격이신 하나님의 의도적인 창조 행위만이 목적과 목표를 가능케 한다. 달리는 우주는 의미가 없고 불합리하며 단지 존재해 있을 뿐이다.

(3)창조는 윤리에 대한 기초를 제공한다.

오직 한 분 창조주 하나님만이 절대적인 법칙과 옳고 그름의 표준을 세울 권위를 가지고 계신다. 그렇지 않고 모든 표준이 相對的이면 죄에 대한 개념은 의미가 없다. 역시, 한 분 초월자이신 창조주 하나님만이 이들 법칙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라고 주장하실 수 있다.

(4)창조는 우리가 영원한 피조물, 즉 우리는 현재나 장래나 어떠한 의미에서도 신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의 작은 한 조각, 神들의 조각이 아니다. 구원은 결코 많은 거짓 종교들이 가르치는 것과 같이 신이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2.자신이 가진 모든 것의 관리자라는 믿음에서 이삭을 드릴 수 있었다.

(1)창조주 하나님만이 인간의 삶에 목적과 의미를 부여해 준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생명을 창조하지 않으셨다면 그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죄진 인간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십자가가 없었다면, 주님의 다시 사심의 부활이 없었다면, 주님께서 의를 판결하시기 위해서 다시 오시지 않는다면, 인간이 되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하는 문제에 아무런 해답도 주지 못한다. 비록 무식한 아브라함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약속에서 벗어나 있다면 인간의 진정한 삶의 목적과 의미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창조는 우리가 항상 하나님을 섬기는 위치에 있어야 할 것을 요구한다. 그것이 예배를 위한 기초이다. 우리는 항상 경외심을 가지고 하나님을 대해야 한다. 장막을 옮기면서도 계속해서 주님께 단을 쌓았던 아브라함과 이삭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섬김이 없다면 자신들의 아무리 아름다운 인생의 계획도 의미가 없음을 늘 의식했던 것이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못한다면 수 천대에 수많은 민족을 이룰지라도 그것은 짐승의 번식, 그 이상이 아님을 알았던 것이다.

(2)하나님이 창조주라는 믿음은 청지기 직분에 대한 기초이다.

하나님은 창조의 권리로서 모든 것을 소유하신다. 우리는 단지 우리가 소유한 것을 맡은 청지기 일 뿐이다. 이것은 생태학에도 같은 의미를 가진다(자연은 하나님과 후손에게 빌려쓰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현대세계가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지만 하나님의 창조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창조의 개념을 버린 이상, 윤리나 도덕, 종교에 심한 혼란이 있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생명이건, 자식이건, 재산이건, 우리각자는 그것을 임시로 관리하는 청지기임을 의식해야만 한다. 아브라함은 백 살에 얻은 구한 자식일 찌라도 그런 믿음으로 기꺼이 드릴 수 있었다.

(3)믿음으로 가장 귀한 것을 드렸다.(17b~18)

“…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있어서 가장 귀한 것이 과연 무엇이겠는가? 당연히 이삭일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아브라함이 다 자란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바치는 것은 사실 아브라함 자신을 드린 것이라고 이해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것을 요구하셨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의 역사가 이루어지는데는 언제나 먼저 믿음의 사람들의 희생과 헌신이 드려졌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와 기적을 기대한다면 먼저 자신의 가장 귀한 것, 아까운 것, 생명이 달린 것을 주님의 손에 드릴 수 있어야 한다. 그러한 자세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이 진정으로 어디에 있는가를 확인하시는 것이다. 예수께서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6:21)하셨는데 우리의 가장 귀한 것이 가는 그곳에 우리의 마음이 가 있음을 이미 아신 것이다.

五餠二魚의 기적으로 장정 남자만도 5천명이 먹을 수 있었던 기적은 자신의 주린 배를 참으면서 예수께 자신의 초라한 도시락을 바친 어린아이의 희생이 빚어낸 은혜였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사르밧의 과부와 그의 아들이 3년 6개월의 가뭄을 의식하지 못하고 지낼 수 있었던 것, 역시 그들의 마지막 식사의 재료인 가루 한 움큼과 기름 한 병으로 먼저 하나님(엘리야)께 드렸기 때문이다. 자신의 희생 없이 기적을 기대하는 것은 헛된 욕심일 뿐이다.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히11:18)거나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18)신 하나님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다시 요구하시는 말씀 “…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 번제로 드리라”(창22:2)는 명령을 기꺼이 준행하는 아브라함에게서 믿음의 놀라운 순종을 보게 된다.

여기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신비가 담겨 있기도 하다. 어쩌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매다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심정이 장작더미 위에 아들을 묶어두고 칼을 뽑아 잡으려는 아브라함의 비통한 심정과 같았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운명의 순간까지 태양은 빛을 잃었다. 우리 같이 죽어 멸망해 마땅한 죄인들을 위하여 하나님은 마음에 고통을 감수하셔야만 했던 것이다.

Ⅲ.이삭은 부활로 받은 생명의 아들이다.(19)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여기 가슴을 도려내는 父子의 대화가 들린다. “… 이삭이 가로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 할 어린양은 어디 있나이까”(창22:8b) “아브라함이 가로되 아들아 번제 할 어린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창22:8f) 이 답변은 사실 진실의 답변이며 고백이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만 충성한 나머지 자식에 대한 애정은 접은 듯한, 참으로 매정하게 들린다. 이삭은 하나님께서 준비해 주신 은혜의 아들이요 나중에 수풀에 뿔이 걸린 양도 하나님께서 준비해 주신 것이다.

분명한 한 가지는 하나님께 먼저 충성할 때 모든 것은 지켜지고 조화를 이룬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이 인간적인 애정보다 뒤쳐질 때 그 가정은 지켜질 보장이 없고 애정은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결국 아브라함은 이삭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더 완벽한 인 침의 아들로 받기를 원했던 것이고 하나님께 바쳐진 아들로 살기를 원했기 때문에 그 때나 나중에나 이삭의 반항을 볼 수 없는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스스로 나그네라는 사실을 늘 의식하며 살았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어떤 조건에 살건, 어느 연령에 살건 이 땅을 스쳐지나 가는 나그네 인생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했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사실을 증거하기 전에 이르기를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 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저희가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13~16)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어떤 것이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사실이 분명하기만 하면 명령을 순종하는데 극성스러울 정도로 철저한 사람이었다. 아브라함은 이 인간적으로 보기에 즐거울 수 없는 명령을 수행하기 위하여 아침 일찍이 일어나 三日 길을 걸어야 했다.(창22:3~4) 우리는 ‘뭐 단 한번에 명령이니까’ 라고 반문할 수 있지만 ‘과연 하나님께서 이일을 오늘 나에게 시키신다면 이행하겠는가?’ 자문해 볼 필요가 있다.

오늘 우리의 믿음도 아브라함처럼 시험받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다. 하나님은 어떤 경우 우리 인간의 생각으로 도저히 이해가 불가능한 것을 명령하실 수 있고 우리의 생명과 직결된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요구하실 수 있다. 그러나 그것까지 순종할 때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요구가 어떤 것이 되었던지 창조주로서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는 확신을 가질 때 우주 만물의 존재 의미와 우리의 삶의 가치와 목표를 이해하게 되고 흔들림 없는 절대적인 삶의 기준을 가질 수 있고 나의 소유하는 무엇이든지 청지기라는 사실을 인정하게되고 불합리하게 들리는 나에게 있어 가장 귀중한 것을 요구하시는 주님의 명령도 기쁘게 순종할 수가 있게 된다.

우리가 절대적인 믿으므로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을 대할 때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10:13)을 말씀이 우리 모두에게 확인되어 질 것을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