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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서의 여러 부분에서 성경적 지식이 있다고 하는 사람들의 완악함을 보게 되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율법에 능통한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이었다. 신앙 하는 사람들의 어리석음은 그렇게 성경에 능하면서도 안타깝게도 그 말씀에 따라 오신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한 것이고, 간 크게도 하나님의 이름자 조차 쓰는 것을 두려워 했던 그들이 정작 주님이 오셨어도 그분을 시험하려고 시도하는 무모한 도전이다. 물론 바로 알아보지 못해서 그랬던 것이 사실이다. 본문에 율법사는 그냥 “어떤 율법사”라고만 언급되고 있지만 역시 그런 종류의 사람 중에 하나였다. 사실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빠진 지식은 남을 정죄하고 시험하고 비판하는 사람이 되고 만다. 왜 그런가 하면 성경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치기 위해서 있는 것인데 핵심을 빼버린 교훈은 인간을 정죄하는 도구로 쓰일 위험이 많기 때문이다.
오늘도 마찬가지로 주님을 바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사실은 시험적으로 믿는 사람들이 있다. 복을 주면 받고 안주면 못 받고, 천국이 있으면 가고 없으면 못 가고 밑져야 본전이라는 식이다. 이런 자세는 믿음을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경우 허용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 믿는 것이라기보다는 이 율법사처럼 예수를 시험하는 것이다. 이러한 믿음을 주님께서 결코 기뻐하시지 않는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11:6)고 말씀하고 있다.
성경에도 주님을 시험해 보라고 허용된 말씀은 구약에 한번 신약에 한번 단 두 구절이다. “…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말3:10)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엡5:10)
※지식은 인간을 교만하게 한다. (25, 29)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여기 사울과 같이 어리석고 완악한 사람이 또 있다. 그는 율법을 안다고 하는 교만함으로 주님 앞에 은혜를 구하기 보다는 오히려 교만하고 완악해서 감히 예수 그리스도를 시험하고 자신을 옳게 보이려는 악한 죄성을 여지없이 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실의 경험자였던 바울은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 이야기 하다가 “…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고전8:1) 라고 지적하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지식은 주님이 배제된 지식을 이야기한다. 지혜의 왕이라고 했던 솔로몬도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16:18)거나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잠18:12) 고 경계 한바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고대의 철학자들도 결국 智慧나 智識은 인간이 완벽하게 소유할 수 없는 것이라는 데서 철학은 지혜의 소유자가 아니라 단순히 “지혜를 사랑하는 자” 라고 이름을 붙였다고 본다. 지혜의 근본이신 하나님을 떠난 지식은 이렇게 오히려 남이나 자신을 죽이는 독소로 작용하고 있는 것을 본다.
오늘 우리들도 예외는 아니다. 우리 옛말에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는 말이 있듯이 절대 진리를 깨닳게 하는 하나님의 성령의 감화 없이 머리에 담아둔 율법적인 지식으로 별론을 일삼고 듣는 자들을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하게 만드는 안타까운 실수를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1.참된 지식은 온유하고 겸손하다.
우리는 지혜의 근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참된 진리는 독선적이거나 정죄하는 대신, 한없이 온화 하고 포용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요한복음 8장에서 이러한 경계를 본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5)] 율법을 잘 안다고 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그 아는 율법으로 여자와 예수를 다 걸고 넘어진다. 그러나 반대로 그들이 안다고 하는 율법을 인간에게 주신 예수께서는 자신을 올무에 걸려고 하는 그 사람들도 범죄의 현장에서 잡혀 죽어 마땅한 여인도 깨닫고 회개하게 하는 은혜의 역사를 일으키는 것을 본다. 잘 익은 곡식은 고개를 숙이듯이 참된 진리의 소유자는 오히려 바른 진리를 갖지 못한 자들을 불쌍히 여기고 용서하려는 포용성을 갖는다.
2.참된 지식을 가진 자는 행함으로 그 지식을 자신의 삶 속에 확증한다.
올바른 지식의 소유자는 그것을 남이 지키지 않는다고 정죄하거나 분노하는 대신 자신이 그 진리를 따라 살지 못함에 탄식하고 자신의 삶을 그 진리에 따라 맞추려고 날마다 회개하고 자신의 삶 속에서 확인 된 진리를 말뿐이 아닌 행함으로 남에게 증거 하는 사람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을 보고서야 비로소 육신의 형제가 아니라 메시아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됭 예수의 혈육의 형제였던 야고보는 “자유 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약1:25) 증거하고 있다.
바울 사도도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롬2:13)
Ⅰ.인간이 영원히 사는 방법은 성경에만 있다. (25~26)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우리는 앞에서 바른 지식 즉, 진리를 가진 자의 자세를 생각해봤다. 그러나 지식 중에서 가장 귀중한 지식이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수능 점수를 많이 받아 좋은 대학에 들어가게 하는 지식도 아니고, 司法考試에 합격하여 판사가 되는 지식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영원히 멸망할 인간이 살게 된다는 지식, 구원의 지식인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 ‘어떤 율법사’와 예수 그리스도와의 대화에서는 두 사람 다(물론 한 분은 하나님이시지만) 이 율법이 귀한 것임을 인정하면서 묻고 대답하고 있다.
물론 선한 의도가 아닌 주님을 시험하려는 의도이기는 하지만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라는 질문은 지금 율법 외에 무엇을 해야 구원을 얻겠는가 하는 질문이 아니다. 우리 주님이신 그리스도께서도 다른 것을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사람이 모두 알고 있다고 생각하며 묻고 있는 그 율법이 무엇을 가르치고 있느냐는 것을 되묻고 계신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기록하였으며,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표준] 여기 주님의 말씀이 의미하는 내용은 두 가지로 이해가 된다. ①“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②“어떻게 읽느냐” 오늘도 이 질문은 진리를 따라 산다고 하는 우리들에게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과제이다. ①기록된 말씀 자체는 그 말씀이 증거 될 때 바로 그 말씀을 받았던 대상에게 주어진 직접적인 명령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 말씀을 받은 사람들은 이 말씀에 어떻게 반응 했는가 하는 것이 성경에 역시 기록되고 있다. 그러나 이 말씀이 그 당시에 말씀을 받은 사람들에게도 중요 하지만 그 때 받은 그 말씀이 ②오늘 여기 이 시대의 나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 하는 이차적인 이해가 바로 되어야 하고 여기에 따라 우리의 삶의 방향이 나타나게 되어 있다.
그리고 기록된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어떻게 이해되고 확인 되느냐 하는 것은 이론이 아니라 삶으로 말씀을 실천하는 行함에서 확증 되어지는 것은 다음의 항목에서 다루겠지만 본문에서 다루고 있는 이 ‘율법사’나 예수께서 말씀하신 “율법”은 일세기에 아직 신약성경이 기록되지않은 시대에서 모세 오경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물론 구약 성경 전체를 의미하는 별명이었다.
그 “율법”이라는 별명의 성경은 오늘 우리에게는 신구약 전체를 포함하는 성경 전체를 의미하는 것은 당연하다. 불완전한 그림자로서의 진리인 구약 성경은 진리의 실체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비로소 완전한 의미로 이해될 수 있었고 이것은 완벽하게 사람이 영원히 사는 생명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해 주고 있고 불신의 사람들에게는 독선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사람이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길은 더 이상 다른 데는 없다고 증거하고 있다.
주님은 이 율법을 상고했던 당시의 율법사와 과거의 이스라엘을 향하여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로다”(요5:39) 라고 선언하셨고 다시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과 우리들에게 “…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말씀하시고 이 믿음을 그대로 받아들였던 성령의 사람 베드로는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행4:12)고 확인해 주고 있다.
오늘도 우리의 이해나 감정보다 귀중한 진리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다.
Ⅱ.하나님 사랑의 기준을 가르친다. (27)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우리는 구약의 십계명을 상고하기도 하고 암송하기도 하면서 그 계명을 지켜보려고 애쓰기도 한다. 그러나 그 세부적인 항목을 한 제목으로 말할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사랑”이다. 앞의 네 戒命은 하나님께 대한 것이고 나머지 여섯 계명은 사람 즉, 이웃에 관한 계명이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신비한 모습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도구 항목을 네 가지로 말하고 사람에 대해서는 한 가지 기준이 말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1.하나님 사랑.(27f)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한 것인데 사실 우리가 이렇게만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우리의 삶이 엄청나게 달라질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리고 분명히 이것은 모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가져야 할 하나님 사랑의 기준이 분명하다.[아이고 오늘부터 꼼짝없이 걸려네! 어두도 못 내겠는데!]
“네 ①마음을 ②목숨을 ③힘을 ④뜻을 다하며” 여기 양 쪽에 강조된 것은 “네(your)”와 “다하여(all)” 이다.
영어에서는 이것을 더욱 분명히 하고 있다. “YOU SHALL LOVE THE LORD YOUR GOD ①WITH ALL YOUR HEART, AND ②WITH ALL YOUR SOUL, AND ③WITH ALL YOUR STRENGTH, AND ④WITH ALL YOUR MIND” ①[kardiva, ]사고, 감각, 중심부; ②[yuch, ]영혼, 생명, 혼신; ③[ijscuv", ]능력, 권세, 권능; ④[diavnoia, ]깊은 사고, (마음의)기능, 성질, (마음의)작용, 상상, 마음, 이해 등등의 의미들을 가진다.
(1)남의 것이 아닌 나(your)의 모든 것으로 사랑해야 한다.
(2)다해서(all) 사랑해야 한다. 하나님은 나의 모든 것, 나의 인생 전체를 요구하신다. 하나님은 결코 부스러기에 만족치 않으신다. 주님께서는 사랑을 구걸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너의 전체를 나에게 주던지 그렇지 않으면 그만 두어라!”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사실은 시늉만 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하는 척만 하는 것 같다. 그러나 성경은 명령하고 있다. “네 마음을 목숨을 힘을 뜻을 다하며” 사랑하라고, 그러나 여기까지도 아직 이론이니 어찌 하겠는가! 신앙에 관한한 마음에만 가지고 있는 것은 가치가 없다.
우리는 이 말씀을 들으면서 이런 질문을 가질 수 있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사랑하고 나면 세상은 어떻게 살겠느냐”고 그러나 정말 우리가 이렇게만 사랑한다면 우리가 가진 인생의 짐은 다 하나님께로 옮겨 진다는 사실이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는 말씀은 바로 오늘 말씀에 관련된 말씀임을 알아야 한다.
2.사람 사랑의 기준.(27b)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기준은 하나님을 다하고, 다하고, 다하고, 다해서 사랑한 사람들에게는 결코 어려운 것이 아니다. 바울은 바로 십계명의 여섯 계명을 이해하기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롬13:9)고 가르쳐 주고 있다.
마지막에 “사랑하라 하였나이다”는 조금은 어색하게 들린다. 여기 가지도 아직 이론일 뿐이지 자신의 것이 되고 있지 못하다.
Ⅲ.옳은 것을 아는 것 만으로 충분치 않다. (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여기까지의 말씀은 다 아직 이론이었다. 이 어떤 율법사는 분명히 옳은 성경의 지식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께서 “그래 그만하면 됐다” 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셨다는 사실이다. 이 말씀에도 역시 두 가지의 명령과 약속이 주어지고 있다. ‘①이를 행하라!; ②그러면 살리라!’ 하신 말씀이다. 우리가 바른 신앙적 지식을 알고 있는 것이 대단히 중요 하지만 그것을 행하지 않을 때까지는 아직 내 자신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아직 책장에 갇혀있는 글일 뿐이다. 그것이 우리 각자의 삶에 행동으로 나타날 때 비로소 생명의 역사가 나타나고 능력이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비로소 “살리라”는 약속이 이루어 지는 것이다.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 알고자 하느냐(약2:20),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24)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천금 같은 약속이 아무리 많아도 내가 행하지 않으면 그것이 역사 속에 수 많은 사람들을 변화시키고 복을 끼쳤어도 나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다. 머리에만 머무르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요 죽은 믿음은 나를 구원치 못한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약2:14)
아무리 훌륭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도 내 삶에 가져오지 않으면 그것은 나의 생명이 되지 못한다. 복음이 증거 되었어도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10:10)는 약속처럼 조건이 성취 되지 않는다면 수천의 약속과 기적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나에게는 아무 관계없는 또 하나의 철학이 되고 말 뿐이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비록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을 완전히 가진다고 할지라도 말씀의 중심이신 그리스도가 없는 지식은 남을 정죄하고 교만하고 하나님과 인간 관계를 망칠 뿐이다. 하나님께로서 난 지식은 온유하고 겸손하며 남보다는 자신의 삶 속에서 확인하려는 자세이어야 바른 지식이다. 야고보가 이를 잘 일러 주고 있다.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약3:17) 물론 바른 신앙의 이론을 안다고 하는 것이 첫째로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왜냐하면 바로 알지 못하면 행하기 위한 준비가 되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물론 인간이 영원히 살 수 있는 진리는 다른 데서는 찾을 수 없고 오직 성경에만 있다. 다른 데서는 인간이 세상에서 잘 처신 할 수 있는 이론은 가르칠지 모르지만 결코 영원에 이르기까지의 지식을 제공해 주지 못한다. 어쩌면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들으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흉내만 낸 것 같아서 두렵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신 명령과 이것을 잘 알고 이해 하지만 이를 행하라는 명령이 어렵게 느껴지기만 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아무리 옳은 이론과 자신의 판단으로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큰소리 쳐도 행치 않으면 살지 못한다는 두려운 경고를 듣는 것이다.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구슬”이라는 속담과 함께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고전13:2) 라는 바울의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반드시 확인하고 우리 각자의 삶에 실천하므로 주님의 선하신 약속과 생명이 풍성한 제와 여러분 되시기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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