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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로 인하여 진정한 소망을 잃어버린 인류는 에덴 이후에 참된 삶의 목표를 잃어버리고 갈등 하는 존재가 되었다. 해가 바뀔 때마다 새로운 각오를 가져보지만 역시 죄성에 길들여진 인간은 그러한 결심들이 사흘을 넘기지 못하는 인내의 한계를 경험할 뿐이다. 新正이니 舊正이니 이중으로 설을 쇠는 것도 사실은 이러한 결심할 기회가 두 번이라는 데서 여유를 갖는 것 같다. 그러나 매일 매일을 주님의 약속과 경건으로 사는 사람들에게는 구태여 어떤 날이 중요하지 않는 것을 본다.
하여튼 우리는 또 다른 각오와 결심으로 한해를 시작하는데 그리스도인들에게 무엇보다도 필요한 삶의 자세와 각오는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을 바탕으로 한 하나님의 사랑이 바탕을 이룰 때 실패 없이 계획과 다짐을 열매 맺을 수 있다는 데서 오늘 우리의 각오는 일반 사람들과 달라야만 할 것이다. 오늘 본문으로 선택한 말씀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과 구원을 확신 시키시는 은혜의 약속이고 여기에 창세전부터 계획하신 하나님의 약속과 그것을 각자가 자신의 것으로 누릴 수 있는 믿음, 소망, 사랑의 의미를 담고 있다. 특히 마지막절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은혜의 역사)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은혜의 효력) ◎선한 일에 열심 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은혜의 결과)”(14)는 약속은 우리로 하여금 넉넉한 보장으로 승리에 이끄실 것임을 약속하는 말씀이다. 참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의지하는 삶이 될 때 주님의 선한 의지에서 벗어남이 없는 삶을 감당케 될 것이다.
Ⅰ.하나님의 사랑이 기초이다.(11)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모든 우리의 계획과 목표와 삶의 방법은 이 절대적인 사랑을 기초로 시작해야만 한다.
1.모든 사람은 예외 없이 죄인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미 우리 인류에게 넘치도록 주어져 있다. 다만 그 은혜를 받아들이는 사람들과 거부하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복된 사랑에서 출발한 創造의 역사가 마무리 되자 말자 아담은 범죄하고 복된 동산 에덴을 잃어 버리고 땅은 저주를 받게 되는데 창세기 3장은 이 비극의 시작을 알리면서 거기에도 원시복음 또는 태초복음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의 역사가 함께 기록되고 있는 것을 두 군데서나 읽게 되는데(15, 21) 조금 뒤에서 생각하도록 한다.
건전치 못한 신앙을 가진 사람은 아담의 범죄를 여러 가지로 왜곡시키고 하나님의 형벌에 대해서도 잘못된 가설들을 만들고 있지만 사실 에덴에서의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참으로 큰 은혜 그 자체였을 본다. 사람들은 자주 질문을 한다. “하나님은 어째서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을 것을 빤히 아시면서 선악과를 만들어 놓아서 범죄 하게 하는가?”라고 말이다. 사실 하나님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애당초 만들지 않을 수도 있으셨고, 선악과가 있는 곳에 오늘 하야리야 부대 담장처럼 섬짓한 철조망을 쳐서 그곳에 접근조차 못하게 하실 수도 있으셨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다가가면 가슴으로 고통을 느끼게 하는 전자 칩을 내장한 거의 Robot처럼 인간을 만드실 수도 있으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에덴의 어느 곳도 하나님과 아담의 영역만으로 따로 구별하지 않으시고 무엇이나, 어디서나 자유로운 생활에 제약을 두지 않으셨다. 다만 금하신 것 하나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善惡을 알게 하는 열매였다. 그러므로 아담과 하와에게 어떤 행동에도 제한을 두지 않으신 하나님은 다만 이 선악과, 그것도 손을 내밀어 따먹을 수도 있는 장소에 두신 그 열매를 創造 主 하나님과 피조물인 인간의 한계로 구분하신 것이다. “나는 너희에게 이 동산에서 아무것도 아무데도 제한하지 않는다. 다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나와 너의 사이의 경계로 정한다.” 그리고 실제로 뱀이 하와를 유혹하기 전까지만 해도 선악과는 아담內外에게는 전혀 관심 받는 대상이 아니었다. 그때는 행복한 희락만이 가득한 동산이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사단의 사주를 받은 하와와 아담은 이 마지막 한계를 넘고 말았고 선악의 개념의 정의도 필요 없었던 이 복된 동산은 더 이상 하나님과 함께 언제 어디서든 유쾌함으로 교제하던 희락의 장소가 되지 못한다.
2.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하나님의 사랑이 먼저 이고 유효하다.
범죄 한 아담이 할 수 있었던 자신들의 수치를 가리려는 시도는 인간의 한계를 가장 분명히 말해주고 있다.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7) 인간 스스로의 생각은 영원한 처방이 되지 못한다. 잠시 수치를 가렸다가 말라 바스러질 무화과 나뭇잎으로 치마를 만드는 것이 자신들이 수치를 가리는 방법이었던 것처럼 오늘도 여전히 사람들은 잠시 숨길 수 있는 여러 가지 속임의 방법을 고안해 내는 것이 간교한 인간의 죄를 감추려는 수완일 뿐이다.
범죄 할 수 밖에 없는 연약한 사람을 위하여 이미 창세전에 계획된 대속의 십자가의 언약은 주어지고 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15)라는 언약을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함께 비유하여 이르기를 “…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3:16b) 하였고 율법에 대해 말하다가 “…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19b) 하여 이 태초복음이라고 하는 창세기의 약속을 환기시키는 것으로 이해 된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의 다음 장인 4장에서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4~5)고 고백하고 있다.
다시 창세기의 범죄 이후로 되돌아가보면 하나님은 바스러져 버릴 무화과 나무 잎으로 수치를 가리려는 아담 내외를 위하여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21)고 기록하고 있는데 역시 대속의 은혜를 이해하게 하는 말씀이다. 당시에도 아담과 하와의 죄의 수치를 가리게 하려고 하나님은 짐승을 피 흘려 죽여 그 가죽을 베껴서 사람의 옷을 만들어 주셨다. 이 원리 또한 오늘도 죄의 사람이 순종의 세례를 받아 죄를 씻는 비유에서 같은 의미로 이해하게 된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갈3:27) 그리고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식물이 되리라”(창1:29)하신 하나님의 약속으로 동물을 죽이는 것을 상상할 수 없었던 아담에게 동물을 희생시킨 하나님의 사랑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다.(동물은 식용보다 모피 즉, 옷으로 먼저 쓰였음을 본다.)
이 비극을 불러 들인 장본인인 아담과 하와가 먼저 하나님께 용서를 빌어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부끄러움으로 인하여 이네 자신의 수치를 숨기기에 급급했고 이 깨어져버린 관계를 회복하려는 시도조차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4:10) 증거 하였고 19절에도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고 증거하고 있다.
범죄 한 인간 스스로는 어떤 방법으로도 자신의 수치를 가릴 수 없다. 하나님의 사랑만이 대속의 희생을 통한 회복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갈3:13f) 라는 말씀이 이를 분명히 하고있다.
Ⅱ.희생의 십자가만이 우리의 힘이다.(12)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믿음으로 예수를 옷 입고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우리가 의지하고 살아갈 절대적인 능력이다.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아직 죄성이 남아있는 우리 인간을 바르게 이끌어갈 방법이나 교훈이 되지 못한다. 위대한 지식의 소유자요 율법의 교사였던 바울 조차도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2:2) 고 고백하고 있다.
1.믿음과 성결을 유지해 가는 힘이 된다.
우리 하나님의 백성이 된 모두가 그리스도의 희생 때문에 생명을 누리고 있다고 하는 것은 누구나 항상 고백하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때는 영생을 가진 것 같기도 하고 잃어 버린 것 같은 천국과 지옥을 넘나드는 변화 무쌍한 흔들림을 경험하곤 한다. 그런 이유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우리 신앙 하는 사람들이 어떤 경우 우리 자신들의 감정에 의해서 그러한 굴곡을 겪게 되는 것을 본다.
주님의 이름으로 봉사하거나 전도하거나 교회에 나와서 은혜를 받고 좋은 말씀을 들을 때는 구원 받은 것 같고 세상에서 어려움을 당하고 때로는 부끄러움을 겪기까지 할 때는 정말 나 자신이 구원 받았는가 의심이 되기도 하는 경험들이 그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각자의 경험과 감정에 의해 흔들릴 때가 많다. 사실 그렇기 때문에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는 훈련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하고 영적으로 곤두박질 하지 않도록 하는 신앙의 경계를 지속적으로 계속해야만 한다.(사실 이래서 봉사나 전도나 예배는 지속적으로 참여할 필요가 있다. 적어도 그러는 동안은 확신을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가 구원 받았다고 해도 우리의 지식이나 경험이나 감정 모두가 다 불완전하기 이를 데 없다. 우리의 대부분은 마치 옛날 돼지를 키우는 시골집의 구정물 통과 다름이 없다. 온 갓 음식찌꺼기가 가라 앉아 있을 때는 물을 떠 먹어도 될 정도로 구정물 통이라는 사실을 구별하지 못할 만큼 깨끗하다. 그러나 돼지에게 그 구정물을 퍼주기 위해서 한번만 휘저을라치면 그 속에 가라 앉아 있던 온 갓 것들(특히 명절 같은 경우는 더 종류가 많다.)이 일시에 떠오르게 된다.
우리 사람이 그런 것 같다. 평상시 좋을 때에는 천사처럼 보이다가도 누군가 우리의 마음을 한번 휘저어 놓기만 하면 속에 감추어져 있던 온 갓 더러운 본성들이 다 되살아 나는 것 같은 더러움을 경험하곤 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그러한 우리 자신의 본성을 바탕으로 믿음생활 하는 한은 언제나 천국과 지옥을 왕래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것은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롬9:32)는 바울의 자기 同族에 대한 안타까운 탄식의 선언을 통해서 듣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불변하시는 하나님의 義, 그리스도의 十字架를 의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가 애당초 구원 받은 것이 우리 자신의 義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마련하신 구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온 갓 추한 것들이 튀어 나오려 할 때마다 세상에 있는 어떤 것이나 상대를 바라 볼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그러한 나를 위하여 피를 흘리시는 주님을 바라 볼 필요가 있다. “오 주님 이 미천한 것의 이 추한 죄악 때문에 주님께서 피를 흘리셨군요!” 라는 고백과 함께 십자가를 의지하여 당면한 분노와 악한 생각을 처리 할 필요가 있다.
靈의 사람, 肉의 사람의 차이는 사실 이러한 상황을 대처하는 모습에서 결정된다. 사람들은 거의 다르지 않다. 그러나 남이 나를 휘저어 놓을 때 그렇게 한 사람을 보고 울분을 토할 것인가 눈을 십자가를 향하여 돌릴 것인가의 간격이다. 여러분은 어디를 향하는가?
바울 사도의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라는 표현은 온 갓 죄로 엉크러진 자신을 십자가 때문에 끊임없이 단속하시는 주님의 역사를 우리 각자의 삶에 수용하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마지막의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가 중요하다. 천국에서는 우리의 더러운 죄성을 휘저을 사람도 없고 또 그러한 죄성 자체가 소멸되어 버린 상태이기 때문에 경계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가나안을 향해 가는 이스라엘의 광야 같은 이 세상 속에서의 삶을 단속할 것을 당부하고 있는 것이다.
2.낙심치 않을 이유가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십자가는 인생에 가치를 제공한다. 믿음의 사람들은 모두 보혈을 지불해 주신 가치 있는 생명이 되었다. 오늘 나의 나 됨이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벧전1:19)는 베드로 사도의 고백처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을 바라보면서 우리의 삶을 새롭게 회복하고 또 고치는 새로움을 지속적으로 가질 수 있다.
오늘 우리가 겪는 절망이 내일의 영광을 가져오는 가치 있는 역사가 되는 것은 십자가의 피 흘리심 때문에 가능함을 깨닫는 것이다. 은혜를 외면하는 인생들에게는 절망에 대한 약속이 없기 때문에 절망은 인생의 막다른 경우로 가게 되는 이유가 되는 것을 본다. 그러나 대속의 피를 힘입는 사람들에게 있어 낙심이나 인생의 마지막은 있을 수 없는 소망을 누린다. 그러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고난은 더욱 주님을 의지하게 하는 기회일지언정 저주는 아니다.
우리가 힘겨울 때마다 마귀 사탄은 더욱 우리를 참소하게 된다. “너는 안돼!”라고 그러나 그럴 때에도 오늘 이러한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피 흘리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사실을 확인하면서 마귀에게 큰 소리 칠 수 있다. “그래도 예수 그리스도는 나의 허물과 죄를 대신 감당하시기 위해서 피 흘려 주셨다!” 이러한 나의 고백을 듣는 마귀는 한 길로 왔다가 일곱 길로 도망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마귀 사탄을 이기는 힘은 우리 자신에게 있지 않고 십자가에 고난 당하신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늘 십자가를 바라 보면서 확신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 대한 확신이 바로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 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14)우리가 참소를 당할 때마다 나 자신을 내어 놓으면 절망할 수 밖에 없다. 오직 주님의 대속의 은혜를 증거 할 필요가 있다.
바울은 우리의 영적인 싸움의 무장을 가르치면서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義의 흉배를 붙이고”(엡6:14) 라고 증거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희생의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하면서 마귀의 불화살을 능히 물리치게 되는 것이다.
3.풍성한 생명을 얻게 한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14) 대부분의 사람들은 선을 향하여 살고 일하려 하면서도 죄악 된 세상의 분위기는 오히려 그 반대적인 영향이 더 강하다. 그래서 좋은 일 보다는 나쁜 일 궂은 일에 붙잡혀 고생하고 힘겨워 하는 것이 사실이다. 우리의 마음이 나쁜 일에 붙잡혀 사는 한 하나님의 허락하시는 생명의 은혜와 능력을 맛보지 못하고 풍성한 생명 보다는 많은 절망과 좌절을 맛볼 뿐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약속 하시기를 “…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b)고 약속 하셨다.
십자가의 희생은 이 모든 저주와 절망을 거두어 가시기 위하여 피 흘리셨고 주님의 죽음에서의 부활은 더 이상 우리로 하여금 어두움과 죽음의 종 노릇 하지 않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깊은 사랑이 담겨져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를 통한 사죄의 환희와 죄를 정복하는 승리의 감격을 누리면서 남은 생애를 살아야 한다. 베드로 사도는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이전 알지 못할 때에 좇던 너희 사욕을 본 삼지 말고,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벧전1:14~15)고 당부하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들을 위하여 필요한 삶의 자세이다.
Ⅲ.인생에 불변하는 목표를 제공한다.(13)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우리 각자의 인생에 놀라운 은혜요 인생을 성공으로 이끌 수 있는 분명하고 충분한 근거가 된다. 실패하고 낙심할 때마다 우리는 우리 대신 죽음의 저주를 십자가에서 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 봐야 한다.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3:14) 바울을 비롯해서 십자가를 의지하는 우리 모두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십자가만이 용기요 위안이며 감격의 이유이다.
모든 인류에게는 진정한 소망이 없다. 죽음이라는 분명한 결과 외에는 죄 아래서 온 갓 고통과 번민과 갈등을 겪으면서 인생은 저물어가고 남는 것은 후회와 절망 뿐이다. “그 때는 이렇게 했어야 했는데!” 이러한 불쌍한 인생을 복스러운 소망을 가진 새 생명으로 바꾸어 주시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우리의 당할 저주를 대신 감당하시고 죄와 절망과 죽음에서 우리를 사 주셨다. 그리고 이러한 그리스도인 된 우리 모두의 최종적인 기대와 약속은 죄와 상관없이 믿는 자들을 영원한 영광으로 이끌어가시기 위해서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再臨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히9:28b) 고 히브리 기자는 확신한다.
그러므로 모든 인류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거치는 이상 그 인생은 절망으로 끝나지 않는다.
베드로 사도의 만년의 고백을 우리 자신의 것으로 확신할 필요가 있다.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벧전1:3~4)
범죄 하여 절망에 사로 잡혀 있던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사랑만이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한다. 오늘도 여전히 하나님의 사랑의 힘만이 우리를 구원으로 온전히 인도할 수 있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14)는 고백이 저와 여러분 모두의 것으로 누리시기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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