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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롬 14:7~9 2000-11-19
오늘 내가 사는 이유  
왜 사는가? 여기에 적절한 답변에 따라서 삶의 질이 다르고 사람들에게 끼치는 영향도 다르고 인생의 활력도 다를 것이다.



꼭 같은 일을 하고, 꼭 같은 음식을 먹고, 꼭 같은 문화 수준을 누려도 왜 사느냐의 이유에 따라서 사람의 행복감은 차이가 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사는 이유를 물으면 나름대로 다 다른 이유로 답변해 올 것이다.그러나 그 삶의 가치의 평가에 따라서 감격이 있고 절망이 있고 눈물이 있고 웃음이 있게 될 것이다. 주어진 생명이니까. 내던져졌으니까. 운명적인 답변이다. 마지못해서. 체념적인 형이다. 또 왜 사는가에 명백한 해답을 갖지 못하면 막연한 다른 사람의 삶을 부러워하고 동경하게 될 것이다.



세 사람의 석공이 같은 일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고백이 각각 다르다.



   ①"더러운 환경에 태어나 배우지 못해서 이렇게 힘겨운 일을 하고 산다"

  ②"마누라, 자식 세끼 먹여 살리려니 내가 배운 것이 이 짓밖에 없어서 어쩔 수없이 이일을 한다"

  ③"아! 나는 지금 위대한 역사적인 도성 석축 공사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길이 역사적으로 남을 이일에 참여하고 있다는 데 자부심을 느낍니다. 뿐만 아니라 이 예술적인 역사에 참여하는 것과 함께 우리 가족이 남부럽지 않게 살고 있습니다."

세속적으로도 생각의 차이는 삶의 질을 다르게 만든다.



오늘 나는 왜 사는가? 여기에 자신 있는 해답을 가지고 있는가? 그렇지 못하다면 오늘 이 말씀을 생각하면서 분명한 목표와 이유를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란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우리가 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분명한 목표를 선언하고 있다.



그렇다고 바울이 환경 적으로나 인생여정이 평온하고 부유한 사람은 분명히 아니었다. 바울 사도를 비롯한 신앙의 위인들만큼이나 생의 구비 구비에 굴곡이 많은 사람들이 또 있을까 생각하면 오늘 우리의 삶은 그야말로 호강에 겨워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Ⅰ.이왕에 모든 인생은 자기의 의도대로 되는 것은 없다.(7)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이 첫 번째의 고백 속에서 바울은 일단 부정적인 부분을 먼저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 모든 사람들은 인간이라는 관계 속에, 사건 과 더불어 묶여 있다.



우리는 더러 과거를 회고하면서 "그 때에 그 사람과, 그 일과 ‥‥ 헤어졌어야, 그만 뒀어야 했는데" 그러나 그것이 그렇게 쉬웠다면 지금 이런 후회를 하고 있지도 않을 것이다.



이왕에 모든 사람들은 이렇게 관계되어 산다. 자식에게, 부모에게, 가족에게, 이웃에게, 국가에게, 빚쟁이에게 등등. 그래서 불신자들의 원망하는 소리를 들을라치면 "아이고 그 원수 놈의 ‥‥ " 그래서 사람들은 운명을 탓해 본다. "이놈의 팔자가 더러워서‥‥ "



사실적으로 모든 사람은 서로 얽히고 섥혀서 관계지어진 속에서 살도록 되어 있다. 아담은 하와와 아브라함은 사라와...



그래서 "그때쯤에는 나를 위해서 살아보자" 해도 현실이 허락지 않는다. 또 다른 일이 터지고 벌어지고 그러면서 세월은 흘러간다.



그렇다면 이왕에 무엇과 더불어 살 것인가 하는 결정을 잘할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이왕에 자기를 위하여 살 수 없는 것이 인생이라면 한번 가는 인생을 무엇과 더불어 살 것인가는 신중하게 결정을 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죽음도 자신을 위해서는 선택할 수 없다고 바울은 고백한다.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이런 모든 것이 죄성을 가진 인간의 의지로 되지 않는 것이고 되어서도 안된다.



Ⅱ.그래서 긍정적인 삶의 목표를 바로 설정해야 한다.(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이왕에 자신을 위하여 살 수 없는 것이 인생이라면 위하는 대상을 바꿀 필요는 있다. "살아도, 죽어도 - 주를 위하여" "사나 죽으나 - 주의 것"



그러면 이 이야기는 우리 각자가 그 절망적인 상황을 육신으로 도망쳐 나오라는 말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꼭 그렇게 해야 주님과 함께 사는 것은 아니다. 바울의 고백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여기서 보는 것은 바울 사도는 아직도 그 육체에 그대로 있다. 그러나 삶의 이유는 과거와 완전히 바뀌어 있다.



"주님을 위하여" 라는 말은 지금의 자리에서 도망치라는 말이 아니다. 믿음의 삶은 고난의 환경에서 도망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신앙의 신비는 여기에 있다. 우리의 환경과 처지가 그대로 이지만 주님과 함께 살면 운명이 바뀐다. 바울 사도는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고후3:17)고 선언한다.



이를 위하여 주님께서 피를 흘리심으로 우리를 저주에서 사 주셨다. 그리고 '주님을 위하여, 주님과 함께' 라는 분명한 삶의 이유와 목표가 있을 때 환경은 우리에게 굴복하게 되어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히11:24~26)



우리가 주님을 위하여 살겠다는 고백과 함께 우리의 환경이 바꾸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그 저주받은 것 같은 운명에 종노릇하는 것은 아니다. 치유 될 수 없는 평생의 질병을 가진 남편을 보살피며 산다고 해도 이제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간호하는 것이 된다.



Ⅲ.가치 있는 삶의 이유를 고백한다.(9)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



"이를 위하여"는 물론 일차적으로는 '우리가 사나 죽으나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게 하려'고 일 것이지만 두 번째의 이유는 한 걸음 더 진보해서 "이를 위하여"는 우리의 삶의 행복을 위하여 라는 죄의 해결에 대한 확신을 주시고자 함이다.



우리가 저주와 절망과 슬픔에 사는 것을 우리 주님께서 결코 원치 않으신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가 우리의 삶의 이유와 목표가 "주님을 위여"로 바뀌면 해결된다는 약속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몸은 이미 우리의 것이 아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6:19~20) 때문에 이제 나(우리)는 살아도 주님의 것 살아도 주님의 것이다.



로마의 감옥 속에 앉아있는 바울의 고백을 들어볼 필요가 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빌1:20~21)



벌써 삶 속에 주님이 주인이 되어 계시면 生死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다.



주님께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역사는 우리의 구속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우리의 살고 죽는 모든 상황에서도 주인이 되시기 위해서이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



Ⅳ.오늘 나는 주님을 위하여 산다고 자신 있게 고백할 수 있는가?



오늘 우리 모든 신앙하는 사람들은 한결 같이 입술로는 같은 고백을 하는 것 같다. "나는 주님 때문에 산다,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존재한다" 그러나 자기 자신은 이를 누구보다도 바르게 알고 있을 것이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6:7~8)



주님은 우리를 모든 불평과 비극의 운명에서 건지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그리스도인이라 이름하는 사람들은 주님을 영접한다고 하는 신앙의 시작 때 가졌던 감격과 고백을 지속적으로 누리지 못하고 과거의 주님을 알기 전의 상태와 별로 다르지 않은 상태로 되돌아 가 있다. 그런 사람들을 향하여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5:1)



오늘 나는 어떤가? 우리의 환경과 처지에 관계없이 주님은 여전히 나의 삶의 목표이고 이유인가? 여기에 자신 있게 "그렇다"라고 답변할 수 있다면 여러분들의 모든 좋지 않은 환경조차도 굴복하게 될 것이다.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