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이 시대를 정보화 시대라고 쉽게 이야기 한다. 정보를 잘 수집하고 활용하는 자가 승자가 되는 그런 시대이다. 정보를 주고 받는 방법에 있어서도 예전처럼 어떤 장소나 집을 찾아가서 만나서 주고 받는 공간적인 개념을 넘어서 이제는 한번도 만난 경험이 없는 사람들끼리도 스스럼 없이 정보를 공유하고 담장 위의 철조망 같은 경계를 거치지 않고도 그 안의 사람들과 만나는 과거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그런 만남이 이루어지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세대간에 가장 의사소통이 어려운 시대가 바로 오늘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서로의 생각이 다른 것도 오늘의 시대라고 봐진다.
우리는 이 같은 정보를 주고 받는 일을 위해서는 의사 소통이 가능해야 하고 그것을 흔히 쓰는 요즘의 표현으로 Communication 이라고 하고 우리가 흔히 쓰는 말로 교통(交通) 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함께 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의사 소통이 가능해야 하고 그렇지 못하면 지속적인 교제가 불가능하게 된다.
오늘의 시대는 시간과 공간의 방해를 받지 않는 만남이 이루어지고 이런 입장에서 온 인류가 지구촌(地球村)이라는 말들을 쉽게 사용한다. 그럼에도 민족간의 간격은 더 벌어지고 서로를 향한 공격은 쉬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우리 모든 인류는 이러한 쉬운 교통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 아래에는 보이지 않는 가려진 많은 어두움들을 본다. 가족간의 불화, 나라간의 무역전쟁, 정치 집단끼리의 반목, 도시간의 이익 싸움, 도신 안의 지역간의 NIMBY나 PIMBY 같은 것들은 흔한 뉴스거리가 되고 있는 데 사실 이런 것들은 모두 의사 소통이 안 되서 일어나는 이야기들이다.
우리 모두는 이 지구촌의 거대한 물결에서 밀려나지 않기 위한 고통의 싸움을 하면서 우리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문제는 인간적인 교제의 문제보다도 더 중요한 교통의 문제가 있다. 이것은 한 개인의 문제 뿐 아니라 온 인류의 문제이다.
그것은 바로 영적인 문제이다. 우리의 상황을 풀어낼 수 있는 문제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문제를 중요하게 다룰 수 밖에 없고 영원을 연결하는 귀중한 문제로 인식 해야만 한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다윗이 곤고한 중에 하나님께 부르짖는 간절한 기도의 내용이다. 여기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안타까운 탄식은 “응답하소서”라는 부르짖음이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의 인생에 성공과 실패는 한마디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의사 소통이 잘 되느냐 안 되느냐’ 가 문제이다. 또 우리는 사람들 간의 관계에는 대단히 신경을 쓰면서도 하나님간의 관계의 심각성을 때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 더 큰 문제이다.
올 한 해도 우리 신앙 생활의 성공여부는 “하나님과 얼마나 잘 통하느냐”에 따라 결과의 큰 차이가 있게 될 것이다.
오늘 이 말씀을 듣는 여러분들은 주님과의 의사 소통이 잘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Ⅰ.하나님과의 교통이 잘 되느냐 하는 것이다.(14~15)
“나를 수렁에서 건지사 빠지지 말게 하시고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서와 깊은 물에서 건지소서, 큰 물이 나를 엄몰하거나 깊음이 나를 삼키지 못하게 하시며 웅덩이로 내 위에 그 입을 닫지 못하게 하소서” 여기서 ‘깊은 수렁’이나 ‘깊은 물’ 또는 ‘웅덩이로 내 위에 그 입을 닫지 못하게 하소서’ 라는 내용들은 다 자신과 하나님 사이에 방해 물들이 끼어 드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다. 사실 성경 속의 모든 인물들의 성공과 실패의 관건은 하나님과의 교제의 모습에서 들어 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하나님과의 교통(交通)이 잘 이루어지느냐 하는 것이다.
이것은 다윗 한 사람을 봐도 그렇고 다른 성경 속의 인물들을 봐도 마찬가지이다.
다윗은 같은 시편 13편에서도 자신의 안타까운 상황을 탄식하고 있다. “(1)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영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언제까지 숨기시겠나이까 (2)내가 나의 영혼에 경영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쳐서 자긍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 여기서 다윗은 하나님과 연결이 끊겨 있는 것이 가장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었음을 본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네 악이 너를 징계하겠고 네 패역이 너를 책할 것이라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 줄 알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렘2:19) 고 경계하고 있는 것을 듣는다.
최초로 이스라엘의 왕으로 선택 되었던 사울이 하나님의 응답 없음에 대한 한탄을 하는 것을 보면 “사울이 여호와께 묻자오되 여호와께서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그에게 대답지 아니하시므로”(삼상28:6) 라고 사무엘 서의 저자는 기록했고, 결국 답답한 나머지 신 접한 여인을 찾기까지 한 사울은 고백하기를 “…하나님은 나를 떠나서 다시는 선지자로도, 꿈으로도 내게 대답지 아니하시기로…”(15) 라고 자신의 심정을 털어놓고 있다.
오늘 우리의 문제도 마찬 가지이다. 상황과 처지가 어렵고 답답하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고 계신다는 확신만 있다면 어떤 고난과 어려움도 심각한 절망은 되지 않는다. 그러나 만사가 다 형통하는 것 같고 잘 되 나가는 것 같아도 마치 물고기 뱃속에 들어 앉은 요나처럼 답답하면 영혼의 고통은 진수 화려한 궁전도 감옥같이 여겨지고 진수성찬도 쓰디쓰기만 하게 마련이다.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잘 유지하는 것이 중요 하다.
아직 앳띤 티를 벗기 전인 다윗이 육 척 장수 골리앗을 향하여 물맷돌을 쥐고 달릴 때도 두려움이 없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와 함께 하시고 어떤 부르짖음에도 응답하신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그러나 우리아를 죽이고 밧세바를 취한 후에 나단이 자신에게 나타나기 까지는 그야말로 답답하여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하나님과 잘 통하고 어떤 사람이 하나님과 못 통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상태에 따라서 “아버지!” 라고 부르기만 해도 “그래 내가 여기 있다!”라시는 주님의 응답을 받는 것만 같으면 우리는 충분히 행복할 수 있고 어떤 고난과 역경도 넉넉히 이길 수 있을 것이다.
여러분 모두가 이렇게 하늘이 열려 있는 신령한 교제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빈다.
Ⅱ.하나님께서 이미 완벽한 교제의 통로를 마련 하셨다.(16~17)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선하시오니 내게 응답하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게로 돌이키소서, 주의 얼굴을 주의 종에게서 숨기지 마소서 내가 환난 중에 있사오니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
결국 범죄 한 인간 모두는 예외 없이 이미 하나님과의 관계 사이에 가로막혀 있는 죄라는 장애물로 인하여 교통(交通)이 불가능하게 되었고 그런 가련한 인생은 창조주요 능력의 하나님 없이 각자가 인생이라는 과제 앞에 각개전투를 할 수 밖에 없고 고달프고 힘겨운 인생의 싸움을 경험할 수 밖에 없는 비극의 운명을 어찌 할 수 없는 존재들이다. 그리고 이 무서운 죄의 장벽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모든 좋은 것들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될 수 밖에 없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이를 증거하고 있다. “너희 허물이 이러한 일들을 물리쳤고 너희 죄가 너희에게 오는 좋은 것을 막았느니라”(렘5:25) 죄는 언제나 영광의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는 가장 심각한 우리 인간의 장애물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 죄라는 장애물은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처리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마침내 하나님께서 이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하여 창세전부터 세우신 계획을 이 사람 사는 역사 속에 이루시기 위하여 독생자를 보내신 것이다. 바울은 이 사실을 선언 하기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엡2:14~16)
여기서 하나님과 죄진 인간이 서로 원수가 되어 있는 상태를 말씀하고, 그것은 하나님이 원수로 지내고 싶어서가 아니라 인간이 죄로 인해서 하나님을 떠나 스스로 원수가 되어 있는 상태를 묘사하고 있다. 사실 인간 세계에서도 서로 교제가 불가능한 관계는 원수 관계 뿐이다. 그 원수가 국가간의 것일 수도 있고, 함께 사는 동내 안에서 일 수도 있고, 더 심각한 것은 가족 간에도 원수가 되어 있으면 항상 함께 살아도 서로의 생각을 나눌 수 없는 관계일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 날 이런 모습이 점점 많아 가는데 그것은 늘 마귀, 사탄의 역사로 인한 것이고 절대적인 능력의 하나님의 역사 없이는 도저히 회복이 불가능한 상태라는 비극적인 사실이다. 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이 안타까운 관계를 회복하시고자 죄없으신, 아니 죄를 알지도 못하신 독생자를 화목제물로 피 흘리게 하셔서 이 절망의 관계를 해결 하셨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5:21) 죄를 해결하고 의를 입어 의로우신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가능케 하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에 피 흐리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그러므로 이 화해의 십자가 아래로 원수 된 인류를 부르시고 이 은혜의 역사, 화평의 역사를 믿고 죄를 회개하고 세례를 받기만 하면 회복된 사랑의 자녀로 대우하신다.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히12:7) 이제는 진노의 대상으로 형벌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으로 교제의 대상으로 우리들을 받아 들이게 되신 것이다. 할렐루야!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이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의 역사를 거부하고 끝까지 원수로 남는 것은 참으로 불행하고 가련한 인생들이다. 그리고 먼저 하나님의 사랑 받는 대상이 된 우리들이 하나님의 화평의 대사(大使) 역할들을 해야 할 사명이 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후5:18~19) 우리는 오늘 이 귀한 직책의 대사(Ambassador)들이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아직도 죄로 인하여 고통하며 하나님의 마련하신 화평을 모르는 자들에게 오늘 우리가 교통(交通)의 통로역할을 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마련하신 화해의 사신들로 세우셨다는 감격으로 이 하나님의 사랑을 전해야만 한다. 이것을 전하지 않으면 화가 있다고 바울 사도는 우리들에게 경고한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고전9:16)
이것을 행치 않는 자가 한 달란트를 땅에 묻어두고 썩히는 악한 종이라고 책망 받고 있는 것이다.(마25:24~30) 자기 자신만 생각하기 때문에 한 달란트를 지키는 것이다.
또 우리는 하나님과 이미 교제의 관계에 있다고 할지라도 때로는 우리들이 범죄 하므로 하나님과의 교제가 어려워 질 때가 있다. 마치 전화선이 낡고 오래되면 잡음이 생기는 것처럼 잡음이 생기고 하나님의 음성이 희미하게 될 때도 있다. 그럴 때는 역시 하나님께 받은 회개라는 귀한 은혜를 사용하여 늘 새로운 상태를 회복할 필요가 있다.
요한 사도는 이에 대해 약속하기를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1:9~10) 라고 증거 해 주고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더 이상 하나님과 영원히 교통이 중지 되는 위험은 완전히 해결 받은 존재들이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고후4:8~9) 라고 확신할 이유가 있다. 우리의 사방이 다 막혀도 하나님과의 통신은 절대로 끊길 염려가 없다. 할렐루야!
Ⅲ.우리들에게 주어진 교통의 도구들은 무엇인가?
우리는 이 제목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귀한 교통의 도구들과 그것들을 잘 못 사용하므로 올 수 있는 폐해들을 생각했으면 한다.
오늘날 통신 수단은 대단히 다양하고 편리하다. 이런 여러 가지 Communication 의 도구들을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과의 교통의 도구들을 역시 생각할 수 있다.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쉽고 편리한 교통의 도구는 하나님께서 주신 말(語)이다.[물론 외국어는 서로 이해가 불가능함을 본다.] 그러나 서로의 관점이 같지 못하면 이 언어도 그 기능을 하지 못한다. 창세기 11장에서 혼잡케 된 말은 서로의 생각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읽게 된다.(7절)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주시는 말씀과 우리가 교통 하는데 있어서 죄나 세상의 것들이 혼합된다면 우리는 바른 교제를 누리지 못할 것이다.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은 신령한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즉, 천국의 언어를 사용하는 백성들이다. 그래서 우리는 언어사용에도 주의해야 한다. 바울은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딤후1:13) “책망할 것이 없는 바른 말을 하게 하라 이는 대적하는 자로 하여금 부끄러워 우리를 악하다 할 것이 없게 하려 함이라”(딛2:8)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3:17) 고 여러 번 경계한 바 있다.
우리가 너무 세상의 흐름에 빠져있다 보면 하늘의 신령한 언어에 무디어지는 비극에 빠질 수 있음을 기억하고 경계할 필요가 있다.
이 우리의 언어를 통해서 하나님께 직접 교통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기도이다. 그러나 하늘을 열게 하는 기도가 있고 듣지 않으시는 기도가 있다고 성경은 경계한다. 이사야는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사1:15)고 경계하고 있다.
역시 누가 복음18:10~14에는 두 사람의 기도를 말씀하신 예수의 비유를 읽게 되는데 한 사람의 기도는 하나님께 외면되고 한 사람의 기도는 응답되는 것을 본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주신 교통의 도구인 기도를 잘 사용하는 하늘의 백성들이 되어야 하겠다.
우리는 말이 아닌 또 다른 교통의 도구로 행동을 들 수 있다.[지하철에서 수화를 하는 사람들-어두움 속에서는 사용이 불가능하다.] 우리는 언어의 홍수 속에 살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래서 어쩌면 말은 호소력이 약해지고 생명을 표현하는데 한계를 느끼게 된다.(사랑, 진실 등등)
말이 가장 구체적으로 확인되는 것은 그 말이 행동이 되는 것이고 이것은 사실 세계적인 언어라고 한다.[Body Language]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도 이 행동 언어는 통하는 참으로 귀중한 언어 수단이다. 마찬가지로 오늘의 시대에 우리가 하나님과 불화한 사람들에게 말로 전하는 천국의 언어보다는 이제 행동으로 하나님을 보여줘야 할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사랑을 행위로 보여주신 행동으로 표현하는 언어의 모범적인 사용자이시다. 야고보는 우리에게 당부하기를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약2:18)고 함으로서 믿음을 보이는 행동으로 표현 할 것을 가르치고 있다.
우리의 영적인 교통의 가장 구체적인 언어 역시 행동으로 확증 되어져야 함을 당부 받고 있는 것이다. 나 자신의 신앙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말씀과 다른 사람이 누리는 하나님과의 교통을 우리의 삶 속에 확인 하는 것이 우리 자신들의 믿음을 가장 구체적으로 키우는 믿음이기도 하다.
오늘 이 말씀을 듣는 여러분 모두는 “주의 얼굴을 주의 종에게서 숨기지 마소서 내가 환난 중에 있사오니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 내 영혼에게 가까이 하사 구속하시며 내 원수를 인하여 나를 속량하소서”(17~18) 라는 안타까운 탄식이 없는 주님과 항상 교통하고 그의 사람들과 불신의 사람들에게까지도 하나님을 만나게 해 주는 귀한 천국의 대사 역할을 잘 감당하여 마음에는 천국의 기쁨이, 우리 주변에는 화평이 충만한 신령한 교제가 충만하기를 복되신 이름 예수 그리스도의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