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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달의 우리 신앙의 과제는 지극히 작은 것부터 실천하자는 자세로 한 달을 살아왔고 이 부분(연보) 역시 작은 부분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큰 신앙의 실천 부분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가장 구체적인 행위 중의 하나가 바로 물질을 드리는 자세이다. 사람으로서 하나님께 구체적으로 드릴 수 있다고 하는 자체가 대단히 감격이 되는 일이 바로 나의 보화를 드리는 물질의 봉헌이다. “연보” 라는 말은 언제나 “은혜”와 “찬양” 이라는 말과 번갈아 쓰이고 나타나는 것을 자주 보게 된다. 그럼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응답이요, 하나님을 찬양하는 행위적 표현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자신의 귀한 것을 드리지 못한다면 그것은 입술의 고백으로 그치는 것이다.
사실 연보는 신앙의 모든 것들의 구체적 표현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왜냐하면 믿음이 아니고는 드릴 수 없고 그런 것은 하나님께서도 기뻐 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오직 너희는 믿음과 말과 지식과 모든 간절함과 우리를 사랑하는 이 모든 일에 풍성한 것같이 이 은혜에도 풍성하게 할지니라” (7)
오늘 본문에서 바울 사도의 유럽(마게도니아) 이방 교회들의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연보를 칭찬하면서 연보의 자세와 우리가 물질로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 이유들을 가르치고 있다. 우리의 신앙 생활에서 잘 하면 은혜로운 부분이 여보이고 잘못하면 시험에 들기 가장 쉬운 것도 바로 물질로 섬기는 연보 생활이다.
Ⅰ.우리는 넘치는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기꺼이 드리는 것이다.
사실은 우리의 가진 것이 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다. 우리 모두는 빈 주먹 쥐고 이 세상에 나와서 먹고 입고 쓰고 있고, 새생명까지도 하나님의 선물로 받은 것이다. “…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고전4:7) 이러한 가장 사실적인 부분을 구약성경에서 보는데 다윗의 고백에서 읽는다. 자신은 성전을 지어드리고 싶지만 거절 당했어도 성전을 지을 재료들을 백성들과 더불어 헌물과 연보를 받으면서 감격한 다윗은 “나와 나의 백성이 무엇이관대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대상29:14)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은혜를 넘치도록 주시고 부으신다.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9:8)
사실 모든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고 섬김으로 드린다면 드리면서 또 다른 것을 기대하거나 요구하는 것은 지나친 욕심일 수 있고 드리는 자세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드릴 때 이미 바치는 사람의 마음을 읽으시고 복 주신다.
이런 입장에서 미국 교회들은 대단히 모범적이었음을 본다. 바친 연보를 인하여 다시 복을 달라는 자세보다는 연보를 드릴 수 있음을 감사하고 드리면서 연보를 바치기 전에 감사를 드리고 축복을 별도로 하지 않는 모습이 참으로 하나님께 바치는 모습이었다. 수표를 내도 재정 담당 외에는 전혀 알 수 없는 체제가 되어 있어서 그 많은 연보를 거두면서도 자신들의 은혜에 또 다시 감사하는 예배의 자세는 참으로 아름다운 물질의 헌신이라고 할 것이다.
사실 주님께서는 부요하신 분이시지만 우리에게 영광의 보좌도 몸도 피도 생명도 모두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를 살리셨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9) 모든 인류를 위하여 아낌없이 주셨다. 십자가상에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으시고 가셨다. 이러한 주님의 희생과 더불어 나의 희생도 함께 드리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
사실 바칠 수 있는 것 자체가 얼마나 큰 복인가!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은 이런 은혜를 누리지 못한다.
Ⅱ.물질의 헌신은 많이 가진 사람만이 많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2~3)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물질이 많이 있다고 반드시 많이 드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앞에서 말한 대로 연보는 은혜와 찬양과 연결되어 있기 대문이다. “그들은 큰 환난의 시련을 겪으면서도 기쁨이 넘치고, 극심한 가난에 쪼들리면서도 넉넉한 마음으로 남에게 베풀었습니다.”[표준] 이것이 믿음의 신비이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는 사람들은 힘에 지나도록 하나님 앞에서는 부요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부자들이 헌금함에 헌금 넣는 것을 보시고, 또 어떤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 넣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눅21:1~4)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것도 아니시고 부유한 것도 아신다.
우리는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주님께서 말씀하신 어리석은 부자가 될 수 있다.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눅12:21) 하나님께서 그 생명을 도로 찾으시거나 물질을 일 순간에 가져가실 수 있다. 그러고 나서 “이럴 줄 알았으면 하나님께라도 드렸더라면…” 하는 후회는 너무 늦은 것이다. 우리는 물질을 드릴 때도 예수를 의지할 필요가 있다. “생명 있을 동안에 예수 의지합니다. 천국 올라가도록 의지할 것 뿐일세, 세월 지나갈수록 의지할 것 뿐일세, 아무 일을 만나도 예수 의지합니다.”[342:4] 주님께 드림에서도 주님을 의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광야에서 하나님의 성막을 지으려 할 때도 모세가 백성들에게 “너희의 소유 중에서 너희는 여호와께 드릴 것을 취하되 무릇 마음에 원하는 자는 그것을 가져다가 여호와께 드릴지니”(출35:5) 라고 했더니 “무릇 마음이 감동된 자와 무릇 자원하는 자가 와서 성막을 짓기 위하여, 그 속에서 쓸 모든 것을 위하여, 거룩한 옷을 위하여 예물을 가져 여호와께 드렸으니, 곧 마음에 원하는 남녀가 와서 가슴 핀(부로우치)과 귀고리와 가락지와 목거리와 여러 가지 금품을 가져왔으되 사람마다 여호와께 금 예물을 드렸으며”(출35:21~22)
어려움과 위기 가운데서 채우시고 역사하시는 경험을 한 자들마다 기꺼이 드리려고 할 것이다. 주님께서는 앞으로 주시면 드리겠다는 자세 보다는 가진 것이 얼마든 그것을 드리는 것을 기뻐하신다.
Ⅲ.풍성한 연보는 먼저 자신을 하나님께 바친 사람들이 가능하다.(4~5)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우리의 바라던 것뿐 아니라 저희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 뜻을 좇아 우리에게 주었도다”
사실 어떤 대상에게 반해버리면 모든 것을 다 가지고 뛰어든다.(안타깝기는 하지만 이단들을 보면 그런 예들을 많이 본다. - 비록 나중에 후회를 할지언정) 우리 예수 그리스도가 그럴만한 대상이 못 되는가?
그 은혜를 인하여 인해 성도를 섬기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몸과 물질로 봉사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나 자신이 하나님의 것임이 분명하다면 그 분에게 드리는 일에 저울질 하지 않을 것이다. 사랑하는 대상을 위해서는 아낌없이 쓰는 것은 세상에서도 너무나 자연스럽고 일반 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 사도는 이 연보의 역사의 말미에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를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후9:15)
그럼으로 기꺼이 드리지 못하고 아깝다면 죄송하지만 아직도 자신을 기꺼이 주님께 드리지 못한 것이 아닌가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바울 사도는 권면하고 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12:1) 그래야 모든 것을 기꺼이 드릴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당부하는 것이다. 자신을 먼저 주님께 드리지 못하면 아직 하나님의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혜에서 떨어졌을 때 의무조항 조차도 지키지 못했고 그러한 속에 제사장들이 드리는 것들은 사람에게 줘도 받지 않을 것들을 하나님께 드린다고 바쳤다. 안타깝긴 하지만 여기에 대한 주님의 탄식을 들어 볼 필요가 있다. “너희는 제단 위에 더러운 빵을 바치면서도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가 제단을 더럽히다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야훼의 젯상쯤이야 아무러면 어떠냐고 하는구나. 눈이 먼 짐승을 제단에 바치면서도 잘못이 없다는 말이냐? 절뚝거리거나 병든 짐승을 바치면서도 잘못이 없다는 말이냐? 그런 것을 너희 고관에게 바쳐 보아라. 나 만군의 야훼가 말한다. 그러고도 융성한 대접을 받을 것 같으냐? 그 따위를 바치면서 긍휼을 빈다고 너희를 곱게 보아 주겠느냐? 만군의 야훼가 말한다.”(말1:7~9-공동)
결국 그래서 강조하시는 최소한의 의무조항을 말라기서 3:10이다. 그러나 오늘은 그것을 복받는 비결로 이 말씀은 사용되고 있다. 우리가 우리의 아이들에게도 성의 없이 주는 것들은 주고도 욕을 먹고 얻어 먹는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주면 오히려 주고 나서도 욕을 듣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연보를 하나님께 드릴 때에 그럴 때가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바쳐졌다면 사실 우리의 가진 것은 다 하나님의 것이어야만 한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 시대의 연보는 십의 일이 아니다.
Ⅳ.드리는 것이 억지가 되게 해서는 안 된다.(고후9:5~6)
(6)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7)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조심할 것은 신앙이 없는 자들이 억지가 되지 않도록 해야만 한다. 이것이 신앙을 시작하는 자들에게 장애가 되어서는 안 된다.
1.준비된 연보이어야 한다.(9:5)
“이러므로 내가 이 형제들로 먼저 너희에게 가서 너희의 전에 약속한 연보를 미리 준비케 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필요한 줄 생각하였노니 이렇게 준비하여야 참 연보답고 억지가 아니니라”
2.진실한 믿음의 증거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7~8)
“오직 너희는 믿음과 말과 지식과 모든 간절함과 우리를 사랑하는 이 모든 일에 풍성한 것같이 이 은혜에도 풍성하게 할지니라, 내가 명령으로 하는 말이 아니요 오직 다른 이들의 간절함을 가지고 너희의 사랑의 진실함을 증명코자 함이로라”
“이 직무로 증거를 삼아 너희의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실히 믿고 복종하는 것과 저희와 모든 사람을 섬기는 너희의 후한 연보를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9:13)
3.개인의 이름보다 주님의 이름 교회의 이름이 나타나야 한다.
교회의 이름으로 해야 한다.(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고) (1)“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3:17)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벧전4:11)
사실 성경에 연보자들의 몇몇 이름이 나오긴 하지만 그것은 중요성을 강조할 때이지 일반적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께 드리고자 해서 연보 하는데 그 무명의 연보 뒤에 자신을 숨기고 안주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나 자신을 하나님께 드렸다는 가장 구체적인 표현이 무엇 보다도 물질일 것이다. 믿음을 가장 쉽게 표현하는 자세가 물질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자세에서도 나타난다는 사실을 볼 수 있다. 마게도냐 교회들처럼 하나님의 은혜가 넘쳐서 자신들에게 복음을 준 예루살렘 교회를 물질로서 기꺼이 돕는 모습을 바울은 여러 가지로 평가하고 있다.
물질을 기꺼이 드리지 못한다면 말씀을 다 지킨다고 해도 그것은 온전한 믿음이 아니다. 율법을 철저히 지켰다고 하는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가 가지고 있는 많은 제산으로 인하여 온전치 못하다고 책망하고 계시다. “여짜오되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이르시되 네가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 사람이 큰 부자인 고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눅18:21~23)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부자 청년의 거부를 이미 아셨을 것이다. 그러나 그 주위의 제자들을 비롯한 둘러선 무리들과 오늘 우리에게 교훈을 주시고자 이 말씀을 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이 없는 부자에게 재물의 봉헌을 요구하는 것은 믿음도 잃게 할 수 있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을 위해서 드리는 연보를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의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빌4:18)고 증거 한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받은 자로서의 믿음의 표현을 시편 기자처럼 고백해야 할 것이다.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으리로다”(시116:12~14)
우리 각자의 물질을 드림은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 삶인가의 구체적 표현이라고 했다. 오늘 우리의 작은 믿음의 실천은 하나님께 부요함으로서 표현할 수 있는 물질의 드림으로, 하나님 우리 아버지의 풍성한 복을 이 연보를 드림에서도 경험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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