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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눅 14:16~24 2004-04-11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  
성경에서 하나님의 영광의 나라는 곧 잘 혼인잔치로 비유된다. 구약의 이사야서도 회복될 이스라엘을 비유하면서 “…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이 결혼한 바가 될 것임이라, 마치 청년이 처녀와 결혼함 같이 네 아들들이 너를 취하겠고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 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사62:4b~5) 하였고 이 비유와 비슷한 마태복음 22:1~14의 시작에서는 보다 직접적으로 비유되고 있다.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2) [내용면에서도 약간의 차이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이 비유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초청이라고 하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 특히 이 비유의 말씀이 연이어지는 26~ 제자의 자격조건을 말씀하시는 것으로 볼 때 단순한 초청의 거절이 아닌 것을 깨닫게 되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초대와 사역으로 이해할 때 더욱 깊이 음미해야 할 경계의 말씀이다.

사람들은 왕의 잔치 같은 이 잔치에 초대를 받고 처음에는 가겠다고 해 놓고 막상 시간이 되자 여러 가지 이유로 거절하는데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 생각하고 귀한 교훈을 나눴으면 한다. 이 말씀은 단순한 비유이지만 우리를 깨우는(警醒시키는) 비유요, 이스라엘 속에 일상적인 비유이지만 우리의 중심을 꿰뚫는 비유이다.



Ⅰ.잘 차려진 잔치가 있다. (16~17)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배설하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 잔치할 시간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가로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매”

이 비유는 “큰 잔치를 배설하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 “잔치할 시간에” “청하였던 자들에게 …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라는 순서로 내용이 전개되어 간다.

천국을 혼인잔치로 비유하는 말씀들은 성경에 더러 나타나는 내용들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신랑으로 그리고 구속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과 교회를 신부로 비유되는 것은 일관된 성경의 흐름이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뇨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마9:15) 결정적으로 요한은 지상의 교회의 온 갓 시험과 시련이 마무리되고 하나님의 구원의 완성을 말하면서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계19:7, 9) 고 성경의 말미에서 결정적인 증거를 주고 있다.

결국 이 비유로 언급되는 “큰 잔치”는 하나님께서 준비하시고 마련하신 천국이 틀림없다. 이 잔치는 창세전부터 계획되고 몇 천년에 걸쳐서 준비하시고 마침내 때가 차매 배설하신 잔치이다. 하나님은 이 큰 잔치를 준비하시고 초청된 사람들을 기대하신다.

인간 세상에 많은 종교들이 영원한 세계를 꿈꾸고 기대하지만 참 극락(極樂)[시43:4f 그런즉 내가 하나님의 단에 나아가 나의 극락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은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것 외에는 다 거짓이다. 천국은 하나님이 준비 하셨다. 거기에는 사람의 노력이나 공로는 아무 가치가 없다. “…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한 것처럼 진정으로 사람에게 필요한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준비하셨다. 사람은 잔치를 준비해도 분주함 뿐이고 끝나고 나면 준비했던 사람들은 피곤하고 초대됐던 사람들은 허전할 분이다.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화목제물로 드리고 준비한 생명의 잔치만이 우리 영육이 다 만족할 수 있는 진정한 잔치일 뿐이다. 하나님은 다 준비된 이 천국 잔치에 우리를 부르신 것이다.



Ⅱ.초청 받은 사람들의 거절을 본다.(18~20)

하나님의 초청에 거절하는 사람들을 본다. 모두가 다 거절했다.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18ff) 많은 聖經學者들은 이들을 가리켜 구약의 이스라엘이라고 이해한다. 처음 하나님의 영광의 나라에 초청된 그들이 정작 천국의 주인공이신 신랑 예수께서 오셔서 완성된 잔치의 두 번째로 초대했지만 거절 했다고 하는 데서 그렇게 이해를 한다. 그러나 이 거절하는 사람들은 오늘 우리 시대의 모든 사람들임을 이해하게 되는데 거절하는 세 사람들을 분석해 보면 그렇고, 이것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잔치 참여는 뒤에 나타나는 弟子의 道 즉 사역의 초청으로 볼 때는 믿음의 사람들이라고 이해 하기도 한다.

이스라엘이나 아랍권에서는 처음 초청을 하고 이미 허락을 받은 뒤에 잔치 시간이 되어서 종들을 보내서 두 번째 초청을 할 때는 어떤 경우도 거절할 수 없다고 하는데 이 두 번째의 초청을 거절하는 것은 선전포고로 간주하고 적대시 하기까지 한다고 전한다.

①“하나는 가로되 나는 밭을 샀으매 불가불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 하고”(18) 이스라엘 속에서 자녀들에게 유업을 물려주려고 밭을 사는 연령은 대개가 젊은 사람들이 아닌 나이든 연령 즉 노령의 사람들이다.[나이 핑계] ②“또 하나는 가로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 하고”(19) 두 번째 사람은 한창 사업에 바쁜 중년의 사람으로 이해될 수 있고[사업 핑계] 그래도 노년이나 중년의 사람들은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는 조금은 정중한 거절과 함께 변명을 한다. 그러나 ③“또 하나는 가로되 나는 장가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20) 이 사람은 사리 분별이 어려운 청년이다. 당시에 이스라엘 속에 있었던 율법 조항을 빌어서 변명도 없이 자기 갈 길을 가고 만다.[공부 핑계, 아내 핑계] “사람이 새로이 아내를 취하였거든 그를 군대로 내어 보내지 말 것이요 무슨 직무든지 그에게 맡기지 말 것이며 그는 일 년 동안 집에 한가히 거하여 그 취한 아내를 즐겁게 할지니라”(신24:5)

이 잔치의 초청에 대한 약속은 이미 오래 전에 약속된 것이므로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 앞에서 “불가불 나가 보아야 하겠다”는 변명은 호소력이 없다.

오늘 우리 시대의 사람들도 그렇지 않은가? 먹고 사는 문제 해결 되면, 집이라도 마련하고 나면, 결혼하고 나면, 자녀들 좀 키워 놓고, 우리에게 하나님께 드릴 적당한 시간은 이런 입장에서는 전혀 없다. 우리는 변명하는데 시간을 다 써버린다. 변명하며 주님의 부르심에 회피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일에 적당한 때란 우리 인생에 절대로 없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이 바로 부르심에 응답할 그 시간이다. 실지로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리 바빠도 하나님의 일이 먼저이다.

오늘날도 변명을 하려면 연령에 관계없이 직업에 관계없이 하는 것이 사실이다. 어떤 이유를 대고라도 하나님의 일에 빠지려고 하는 사람은 미꾸라지처럼 빠져 나간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것은 현명한 일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부르심이나 명령에 변명해서는 안 된다. 어떤 일도 하나님의 부르심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그것을 지금은 모르지만 나중에 후회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생활에 손해를 감수하면서 까지는 봉사하지 않고, 봉사하면서 어려움을 당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래서 변명을 잘도 만들어 낸다. 그러나 변명하며 하나님의 초청을 거부하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포기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오늘 날 얼마나 많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 약속해 놓고 두 번째는 거절해 버리는 예가 많은가![세례 받을 때, 직분을 받을 때]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이 자신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면 거절해 버린다. 그러나 십자가는 변명이 있어서는 못 지는 성격의 것이다.



Ⅲ.주인의 진노를 본다. (21f, 24)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주인이 노하여, …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이들은 분명이 처음에는 약속해 놓고서 정작 시간이 되었을 때는 “안 되요!” 라고 거절해 버린 것이다. 그것은 분명 자신을 초청한 주인에 대한 배은망덕이다. 하나님은 자격 없는 우리를 천국잔치에 초대하신 사랑의 하나님이시면서 또한 불순종에는 진노의 하나님이시기도 하다. 하나님을 진노케 해서 득이 될 인생은 없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르기를 “그러면 우리가 주를 노여워하시게 하겠느냐 우리가 주보다 강한 자냐”(고전10:22) 라고 경계하고 있다.

1.하나님은 절대로 자신의 계획을 상황 때문에 변경하지 않으신다.

잔치가 준비되었으나 초청된 본래의 손님들이 못 온다고 잔치를 연기하시거나 취소해 버리시지 않으신다.[여기에 대해서는 모든 인간적인 요소는 배제되고 있다.] “잔치할 시간에…”(17ff) 모든 시간과 역사는 주님의 정한대로 움직여 가고 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 …” (갈4:4)신 하나님께서는 정하신 이 역사의 마지막 때를 변경치 않으실 것임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역사나 시간은 인간이 나태하다고 절대로 기다려 주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어리석게도 자신의 시간에 하나님의 시간을 맞추려는 잘못된(무모한) 생각들을 하고 있다. 오히려 하나님의 시간에 자신을 맞추려는 사람이 진정한 지혜의 사람이다.

2.절대로 최고에 연연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다.

처음 초대한 귀족들이 잔치에 오지 않았다고 그 일로 연연하거나 고민하실 하나님이 아니시다.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은 지래 생각하기를 “나 아니면 하나님은 안 하실 거야!” 라고 착각한다. 그러나 죄송하지만 저나 여러분들이 없다고 하나님의 계획이 불가능하신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능력보다 자신을 과대평가하고 공적을 추켜 세우려 한다. 사실 이것 때문에 이스라엘은 메시아를 잃었음을 꼭 기억할 필요가 있다.

아무리 위대한 영적인 힘을 가졌다고 해도 사용되지 않는 능력은 소용이 없다.

3.잔치의 손님이 바뀌는 것을 본다.(21b)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①가난한 자들과 ②병신들과 ③소경들과 ④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잔치는 준비 됐는데 청한 사람들은 오지 않았고 주인은 초청된 사람들 대신에 이 잔치에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사람들을 초청한다. 다시 청한 사람들은 어찌 보기에는 이 큰 잔치에 어울리지 않을 사람들 같지만 사실은 이들이야 말로 복음이 필요한 사람들이요 순종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바울은 복음에 응답한 사람들을 말하기를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이 부르심을 받을 때에 그 처지가 어떠하였는지 생각하여 보십시오. 육신의 기준으로 보아 지혜 있는 사람이 많지 않고, 권력 있는 사람이 많지 않고, 가문이 훌륭한 사람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어리석은 것을 택하셨으며,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비천한 것과 멸시 받는 것을 택하셨으니, 곧 잘났다고 하는 것들을 없애시려고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택하셨습니다. 그것은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는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고전1:26~29-표준 새번역) 라고 하여 하나님께서 사람들처럼 최고에만 연연하는 분이 아니심을 지적하고 있다. 하나님은 지금도 복음에 굶주리고 있는 사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을 거절된 잔치에 초청하고 계신 것이다. 그러므로 자만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하지 않으면 우리 대신 다른 사람을 사용하신다. 두렵지 않은가?



Ⅳ.하나님은 현실에 만족치 않으신다.(21b~23)

“그 종에게 이르되 ①빨리 ②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③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 (22)종이 가로되 주인이여 명하신 대로 하였으되 오히려 자리가 있나이다 (23)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④길과 산울 가로 나가서 ⑤사람을 강권하여 ⑥데려다가 ⑦내 집을 채우라”

하나님께서는 현재의 구원 받은 사람에 만족치 않으신다. 거리 거리 다니며 사람들을 강권하는 종들의 모습은 바로 우리의 모습이 되어야 한다. 베드로 사도를 통하여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3:9)고 말씀하시는 주님은 우리 서면 교회를 향하여 같은 당부를 주고 계신다.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온 갓 사람들을 데려오라 …, 길과 산울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억지로라도 데려다가] 서면 교회를 채우라”

하나님의 영광의 잔치는 “…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34:10) 오늘 읽은 바로 앞의 말씀에 “함께 먹는 사람 중에 하나가 이 말을 듣고 이르되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 하니”(눅14:15) 라는 고백을 듣는다. 우리 인간의 범죄로 잃어버린 낙원을 찾아 주시려고 주님께서 얼마나 모진 고난을 당하셨는가? 그것이 바로 The Passion of the Christ 이다.

때문에 하나님의 부르심에 더 이상 변명하지 말자! 우리가 과연 주님을 거부할 수 있는가?

우리는 수난 당하시는 주님을 보면서 그리스도를 향하여 침 뱉고 채찍질 하는 로마의 병정들을 향하여 진노하는데, 엄밀히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도록 선동하는 야비한 종교 지도자나 힘이 빠지리 만큼 씩씩거리며 피가 자신에게 튀기는 것을 즐기며 채찍질 하는 로마의 군인도 실상은 나 자신이다. 그것을 객관적으로 볼 수 없는 우리들은 자신의 행위에 스스로 진노하면서도 그것이 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불러 시키는 일에 변명하고 거절하는 나를 위하여 주님께서 피를 흘리시고 수치를 당하신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나 자신을 일깨워야만 한다.

하나님께서는 최고의 사람들에 연연하지 않으시고 현재의 상황에 만족하지 않으신다. 지금도 우리를 하나님의 잔치에 부르시는데 먹고 사는 문제만 해결 되면, 집이라도 마련하고 나면, 결혼하고 나면, 자녀들 좀 키워 놓고, 갈 터이니 나를 봐 주시오. 그러나 하나님의 예정된 시간이 핑계 대고 있는 나를 기다려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 라고 변명하지 말아야 한다.

오늘도 나에게 기회가 주어지고 있는 것이 주님의 은혜며 사랑이며 긍휼임을 알아서 지금도 다른 사람들을 강권하여 하나님의 집을 채우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만 한다.

언젠가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 라고 변명으로만 일관하는 나 자신이 주님을 노엽게 했다고 깨달았을 때는 때가 늦을 수 있다.

변명은 언제나 누구나 늘어 놓을 수 있다. 그러나 변명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우지 못한다. 순종과 응답만이 우리를 영광과 은혜의 잔치 주인공으로 세울 것이다.

히브리서의 기자의 고백처럼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히3:13)는 경계로 어려울지라도 주님 앞에 오늘을 드릴 때 영광의 잔치는 다른 사람이 아닌 나의 잔치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