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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속적으로 자신들을 주님과 사람들 앞에 줌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실천해야 한다는 과제로 이 4월을 살고 있다. “…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행20:35b) 그러나 우리의 죄악 된 근본이 바뀌지 않는 한 이 당부는 역시 구호에 그치고 말 것이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인하여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속한 것들은 눈에 보이지 않고(요3:3) 깨닫지도 못하기 때문에 그런 영적인 것들이 귀한 것도 당연히 모를 것이다. 바울 사도는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2:14) 고 경계하고 있다.
사람이 거듭 난 가장 사실적인 모습이 어떤 것일까 생각해 보면 바로 겸손이라고 이해해도 크게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겸손은 일 순간의 행위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모든 상황에서 자연스러운 것이어야 참된 것이고 어떤 경우에는 겸손을 가장한 교만의 극치가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로 속지 않으신다. “여호와께서 높이 계셔도 낮은 자를 하감하시며 멀리서도 교만한 자를 아시나이다”(시138:6)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지속적으로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겸손한 자들이 복되다는 사실이다.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습2:3)
오늘 본문에서 모든 그리스도인은 같은 겸손을 가지고 섬겨야 할 것을 당부하면서 섬김이 결코 다툼이나 허영으로 될 때는 영적인 일을 할 수 없음을 가르치면서 그 겸손한 섬김의 모델이 바로 그리스도이심을 연이어 5~11에 증거 해 주고 있다. 바울은 자신의 이러한 자세를 간증하기를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고전9:19)고 고백하고 있다.
Ⅰ.겸손은 어떤 것인가?
“…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3b)
구약 성경에서 주로 사용되는 ‘겸손’이란 표현은 [히, wn:[;, anav, 굴복 당하다, 괴로움을 당하다, 잠잠케 되다] 라는 기본적 의미를 가지면서 나 자신이 하나님께 기꺼이 스스로 굴복 당하여 그것 때문에 오는 괴로움 조차도 기쁘게 감당하고 잠잠히 거기로부터 구원해 주실 주님의 처분을 기다리는 자세를 의미하고 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를 모세에 견주어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을 듣는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히11:24~26)는 자세를 겸손에 비길 수 있다.
스데반이 표현한데로 “모세가 애굽 사람의 학술을 다 배워 그 말과 행사가 능하더라”(행7:22) 했지만 그의 교만은 이스라엘을 구원하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고 결국 그가 애굽의 학술을 배운 같은 40년의 시간을 미디안 광야에서 양들과의 목동의 삶은 모세로 하여금 겸손하게 하여 이제는 애굽으로 보내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응답에도 지나치게 겸손하여 “…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출3:11) 라거나 말과 행사가 능했지만 “… 주여 나는 본래 말에 능치 못한 자라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하신 후에도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출4:10) 또는 “…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출4:13) 라는 고백은 히브리서 기자의 표현을 빌린다면 비로소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라는 것을 보면 구원의 하나님을 바로 알았기 때문임을 깨닫게 된다.
신약 성경에서 표현되는 ‘겸손’의 의미는 [헬, tapeinov", tapeinos, low, humble; 짓눌린, (상징적으로) 굴욕감을 느끼는, (환경이나 순서에) 천한, 초라한, (신분의)낮은 등급] 등등의 뜻을 가지지만 이것이 어쩔 수 없이 수동적으로 그렇게 된 상황에서의 표현이 아니라 스스로 그것을 자초하는 능동적이 표현으로 나타난다. “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말라”(롬12:16)
사람이 과연 진정으로 겸손할 수 있을까? 뒤에서 다시 언급하겠지만 나 자신이 철저하게 죽고 겸손의 극치이신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셔야 한다. 이러한 논리를 바울의 고백 속에서 듣게 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나 자신이 죽지 않은 겸손은 위선이고 거짓일 수 밖에 없다. 자존심 강하고 교만했던 바울이 비로소 겸손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십자가의 그리스도와 함께 자신을 함께 못박아 장사 지내므로 가능하게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 우리 각자에게서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이 나오지 않고 우리 자신의 인간적이고 육신적인 옛 사람의 성품이 나타나고 있다면 그것은 자신이 죽은 것이 아니며 겸손할 수도 없다.
Ⅱ.어떻게 겸손할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자와 함께 하신다. “지존 무상하며 영원히 거하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자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케 하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 하려 함이라”(사57:15)는 약속과 함께 “여호와께서 겸손한 자는 붙드시고 악인은 땅에 엎드러뜨리시는 도다”(시147:6)라고 고백하고 있다.
우리 모두는 사회 속의 일반적인 사람들처럼 교회 속에서도 여전히 자존심을 지키고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려고 한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이를 지적하고 있다. “…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믿음의 사람들이라면 모두가 다 이 사실에 동감하지만 과연 어떻게 가능한가?
주께서 육신으로 이땅에 계실 때 친히 말씀하시기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11:29)고 가르치셨고 바울 사도는 빌립보 교우들을 향하여 사실적이고 중요한 방법을 제시해 주고 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1.자신을 철저하게 비워야 한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5~7) 사실 그리스도인의 신앙적 성공비결은 ‘자신을 얼마나 비우느냐, 자신에게 그리스도를 얼마나 채우느냐’와 비례한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우리의 모범이신 그리스도께서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요6:38) 라고 말씀하시고, 마지막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를 앞에 두고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 방울같이 되도록 간절히 기도를 하시면서도 “…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26:39; 막14:36; 눅22:42) 라는 소원을 아뢰셨고 이런 주님이셨기 때문에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말미에서도 “…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마6:13) 라고 기도하도록 가르치신 것이다.
2.자신이 철저하게 죽어야 한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8)
고아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브리스톨의 George Müller에게 성공의 비결을 물었을 때 “내가 철저하게 죽었던 날이 있었습니다.” 라고 말을 꺼내면서 머리가 거의 바닥에 닿을 정도로 고개를 숙이고 나서 계속 하기를 “그날은 조지 뮐러가 완전히 죽은 날이었습니다. 남들로부터의 평판, 선택, 좋아하는 것들과 싫어하는 것들, 원망 등이 전부 죽게 되었고 그것들에 대해 조금도 개의치 않게 되었습니다. 또한 이 세상과 그 칭찬이나 비난에도 완전히 죽었습니다. 또 형제나 친구들의 칭찬이나 비난에도 완전히 죽었습니다. 그날 이후 저는 하나님께서 제게 어떤 칭찬을 하실까라는 데만 마음을 쓰는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뮐러의 성공도 그가 완전히 죽고 변화된 날에서부터 비롯되었던 것이다.[교회사에서 골라낸 1,882가지 신앙이야기, p 86]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2:20f)는 고백이 모든 신앙의 사람들 입에서 사실적으로 고백 되어 질 때 비로소 제대로 겸손할 수가 있을 것이다. 이 고백이 오늘 말씀을 듣는 여러분 모두의 고백이 되시기를 주님의 복되신 이름으로 빈다.
Ⅲ.겸손이 주는 유익은 무엇인가?
하나님은 절대로 겸손하셨던 주님께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9~11)는 결과를 기록하고 있다.
최고의 영화와 존귀의 자리에 있었던 솔로몬은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잠18:12, 잠15:33)고 권고한다. 세상에서 자기 권리를 철저하게 챙기는 사람을 세상은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 가운데 오늘도 세상에서 겸손이 유익이 되는가? 세상에서는 겸손하면 바보 취급을 당하는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사실적인 겸손이 아닌 겸손한 척 할 뿐이지 그것이 진실이라면 존경을 받을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 없이는 겸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겸손은 절대로 쇼(show)일 수 없다. 많은 정치가들은 정치 쇼를 하면서 언제나 종교를 흉내낸다. 이판사판(理判事判)식의 머리 깍기(삭발, 削髮)나 삼보일배(三步一拜)는 불교를 흉내내는 것이고, 단식투쟁은 그리스도교의 금식기도를 흉내내어서 사람들의 동정을 얻어내려는 것들이다. 그러나 사실 이 모든 일들은 하나님을 의식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의시하는 것이라는 데서 신앙적으로 볼 때는 옳지 못한 것들이다. 우리 신앙의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겸손을 보이려 한다면 그것은 사실 하나님 앞에 가증한 행위가 될 것이다. 베드로 사도는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라고 표현하고 있다. 우리가 뱀처럼 머리를 쳐들 때 하나님은 우리를 대적하신다고 성경은 지적한다.
1.하나님께서 구원을 주시는 대상도 겸손한 자들이다.
욥의 친구였던 엘리바스는 “네가 낮춤을 받거든 높아지리라고 말하라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구원하시느니라”(욥22:29)고 말했고 시편기자는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기뻐하시며 겸손한 자를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심이로다”(시149:4)고 고백한다.
자기 의를 내세우는 교만한 자는 결코 구원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은 너무나 당연한 이치이다. 나는 그대로 두면 당연히 지옥으로 갈 죄인이기 때문에 십자가에 나를 위해 피를 흘리신 주님을 의지할 수 밖에 없다는 신앙의 고백을 드리고 전적으로 주님의 보혈의 은총을 의지하는 자들은 주님의 긍휼로 인해 우리 인류에게 베풀어 주신 구원을 넉넉히 누릴 수가 있을 것이다.
2.겸손한 자의 기도를 들으신다.
시편 기자는 고백하기를 “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으니 저희 마음을 예비하시며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시10:17)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마음의 자세를 더욱 낮출 필요가 있다. 인생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을 의뢰하고 의지하는 자들의 간구를 하나님은 외면치 않으실 것이다. 주님께서는 성전에 올라가 기도하면서도 자신의 의를 주장하면서 남을 참소하는 바리새인의 기도보다 “…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18:13) 라고 탄식하는 세리의 기도가 응답을 받았다고 가르치셨다. 오늘도 겸손을 삶으로 실천하며 간구하는 사람들의 기도는 반드시 응답될 것이다. 믿는가?
3.겸손한 자가 만족한 인생을 산다.
다윗은 시편에서 고백하기를 “겸손한 자는 먹고 배부를 것이며 여호와를 찾는 자는 그를 찬송할 것이라 너희 마음은 영원히 살지어다”(22:26) 하였고 주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도 “겸손한 자가 여호와를 인하여 기쁨이 더하겠고 사람 중 빈핍한 자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를 인하여 즐거워하리니”(사29:19)라고 교훈 한다. “나 같은 미천한 처지에 이만한 것도 은혜입니다.” 라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더 큰 만족을 주실 것이다.
반대로 ‘신이 있다면 이럴 수 있습니까? 나만한 자격을 사람들이 몰라주고 가족도 몰라주고 이렇게 살게 합니까?’ 라고 투정하는 사람은 그 자세에서부터 만족이 있을 수 없을 것이다.
4.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우리는 얼마나 은혜 받기를 간절히 갈망하는가? 또 주님은 우리 모두가 은혜 받기를 간절히 원하신다. 이 말씀은 바꿔 말하면 하나님은 은혜 주시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주어도 주어도 받을 그릇이 없으면 받지 못하는 것이 은혜다. 은혜를 받는 그릇이 뭐냐 하면 바로 겸손이다. 솔로몬은 “진실로 그는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나니”(잠3:34) 했고, 야고보는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육신의 형으로 밖에 못 보다가 구원의 사역을 이루신 후에 깨닫고 믿으면서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약4:6)고 고백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늘 자신이 맨 먼저라고 설치고 덤벙대던 베드로도 말년에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벧전5:5)고 고백하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시며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신다. 다만 우리 모두가 겸손의 그릇을 준비해야 받을 수 있다.
겸손은 주님을 믿는 우리에게 이 밖에도 많은 유익을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겸손치 못한 것이 안타깝다.
Ⅳ.오늘 나는 어떤가?
진정한 섬김은 겸손에서 가능하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인간을 섬기기 위하여 이 죄악의 땅에 종의 형체로 내려 오셨고 그 섬김의 절정이 바로 희생의 십자가이며 그 속죄의 피 흘리심 때문에 오늘 내가 구원 받았다. 오늘 주님을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 이라면 당연히 이러한 주님의 모습을 뒤따르는 신앙이어야만 한다.
사랑은 섬기게 하고 겸손도 섬기려 한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히13:12~13)자고 권면 한다.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2~4)
이러한 섬김은 주님의 사랑의 희생 때문에 스스로 사랑의 종 노릇 하기 위해서 우리 자신을 철저하게 비우고 죽이며 겸손의 절정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우리 인생에 가득 채울 때 가능하게 될 것이며 이러한 겸손으로 섬기는 자를 끝까지 구원하시고 기도를 들으시며 만족한 인생이 되게 하시고 은혜를 넘치도록 부어 주실 것이다. 이 귀한 약속이 실제적이기 위해서 오늘부터 더욱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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