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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씀은 첫째적인 경계는 무엇보다도 말세에 대한 경계의 교훈이다. 마지막을 사는 성도들의 전체적인 삶의 자세이면서 하나님께는 섬김의 자세를 그리고 성도 상호간의 교제의 모습을 당부 하는 교훈이다. 사실적으로 시대의 마지막 즉, 종말적 상황일수록 사람들은 계산적이게 되고, 자신에게 이익이 없으면 섬기는 자체가 힘드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므로 베드로 사도의 이러한 당부는 오늘 우리에게 더욱 긴요한 요청으로 들린다. 오늘 날 많은 사람들이 신앙도 편하게 하려는 경향들을 많이 보이는데 안타까운 모습들이다. 남들이 자신에게 너무 깊이 관여하는 것 자체를 싫어하고 적당히 있는 듯 없는 듯 그렇게 교회를 다니기를 원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입장에 맞는 교회를 선택하게 되고 형제 자매로서의 긴밀한 관계는 점점 퇴색되어 가는 안타까운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섬김 자체도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좇아가는 희생적인 것 보다는 실리적이고 성취적인 결과를 더 중시하는 세속적인 모습들 조차 많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성경에서 가장 경계 되는 종말적 현상을 꼬집는 부분이 바로 관계성의 문제로 지적하고 있는데 형제에게 하지 않은 것이 바로 주님께 하지 않은 것이라거나(마25:40, 45) 사랑을 잃어 버린 것으로 책망하고 있는 것(마24:12)이 오늘 본문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8) 이러한 현상의 원인들은 진리를 잃어버린 결과들이다. “불법이 성하므로” 그래서 진리를 사랑함이라는 표현을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요일3:14)는 경계의 교훈을 듣게 된다.
이런 모든 현상들은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를 잃어 버리고 자기 실현적인 신앙이 원인이 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자신의 민족인 유대인들이 실족한 원인을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롬9:32)
때문에 옛날이나 지금이나 미래에도 우리의 모든 섬김의 원인은 은혜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
은혜를 관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의 7~9절의 당부는 오히려 10~11절을 바탕으로 해야 가능하게 된다.
인생의 가치와 생명의 가치를 어디에서 찾는가? 현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즐기는 것이라고 말한다. 물론 그리스도인들도 그렇다. 그러나 그 즐기는 종류가 분명히 다르다.
오늘 우리의 신앙적 자세는 ‘받기 위해서, 아니면 받았기 때문에…’ 라는 두 질문의 답변에서 구별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 생명을 선물 받고 모든 것을 받았음에도 아직도 계속 덤으로 덤으로 받기만 바라고 섬기니 부끄러울 뿐이다. 우리 각자가 오늘 이 말씀을 들으면서 각자의 섬김을 점검하면서 믿음의 자세를 바르게 회복할 수 있기를 바란다.
Ⅰ.마지막 때에 섬김의 가장 요긴한 자세들을 먼저 제시 한다.(7~9)
베드로 사도는 그리스도의 본을 따를 것을 1~6절에 대표적으로 1~3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에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죄를 그쳤음이니,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 라고 권면한 다음에 그 주님의 다시 오심을 향한 교회와 성도들의 가장 중요한 신앙의 자세를 당부하고 있는데 바로 7~9절의 크게 세 가지의 역 세상적인 적극적인 믿음의 행동을 가르치고 있다.
1.가장 근본적인 섬김의 자세는 기도에서 출발해야 한다.(7)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말세적인 현성들 중에 가장 심각한 영향력은 성도들로 하여금 기도하지 못하도록 다른 것들에 붙잡아 두려고 하는 마귀적인 방해 공작이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쉼 없이 말씀하는 것은 기도하라는 것, 기도로 깨어 있으라는 당부이다. 예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를 앞에 두고 기도하실 때에도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마26:41; 막14:38; 눅22:40, 46 어찌하여 자느냐)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5:17) 오늘 본문 7절에 “세상의 종말이 가까왔으니 정신을 차려 마음을 가다듬고 기도하십시오.”[공동] 왜 기도해야 하느냐 하면 세상의 마지막이 가까웠기 때문에 중언 부언하는 무사안일의 잠꼬대 같은 기도가 아니라 정신을 가다듬고 기도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자신을 절제하면서 기도해야 한다.
어떤 일을 하든지 하나님을 찾는 일이 먼저이다. 그래야 일을 바르게 감당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로 해야 한다. 성령의 능력으로 감당하기 위해서 열심으로 부르짖어야 한다. 우리가 지닌 지혜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다고 하더라도 세상과 더불어 살다 보면 무디어 지고 뒤섞여져서 늘 희미해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신 순수함을 그대로 유지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주님을 찾아 의논해야 한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5:8) 베드로 사도는 바로 뒤의 5장에서 경계하고 있다. 기도 없이 우리 힘으로 뭘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마귀가 주는 생각임을 깨달아야 한다.
어떤 것도 주님과 의논 없이 행하려고 하는 것은 거절 해야만 한다. 우리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주시는 능력으로 감당할 때 어두움 속에서도 빛을 찾고 혼란 속에서도 질서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기도는 의논이고, 기도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고, 기도는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다. 우리는 이 어두움의 때에도 기도하는 것을 못하게 하는 생활들, 기도 없이 무엇을 하라고 부추기는 유혹을 반드시 이겨 내야만 한다. 섬김의 출발지가 기도임을 잊지 말자.
2.하나님과 그의 백성들을 섬기는 바탕은 사랑이어야 한다.(8)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우리가 천국에 가서도 지속적으로 갖게 되는 신앙의 요소가 바로 사랑이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섬겨야 한다. 나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사랑 받았기 때문에 이 세상의 사람들의 반응에 관계없이 불변하시는 사랑을 확신한다면 사랑하는데 문제가 생기지 않을 것이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전13:13) ①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 때문에 내가 천국 백성으로 있다. 나는 사랑 때문에 살게 된 존재이다. ②아무리 많이 해도 도를 넘지 않는 것이 사랑이다. 성경에서는 때로는 지나침을 경계하는 부분들도 분명 있다. 모든 사람은 의인으로 살기를 원하고 그리스도인들도 의인으로 살아 남기를 원하는데 주님은 지혜의 왕이라고 하는 솔로몬을 통하여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케 하겠느냐”(전7:16)는 경계를 주고 있다. 그러나 사랑은 아무리 많이 해도 지나치지 않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사랑할 만큼 했노라고 이야기 하는 것을 못 들어 본다. 그러므로 주님의 십자가에 죽기까지 사랑하신 모습을 바라 볼 때마다 늘 모자라는 것이 알량한 인간의 사랑임을 느끼게 된다. ③사랑을 가져야 허물들이 보이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의 허물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은 사실 나 자신의 사랑이 바닥나 간다는 증거임을 빨리 깨달아야 한다. 일은 하고 싶은데 누구 보기 싫어서 못하고, 누구 미워서 못하고, 누구 좋아 할 까봐 하기 싫은 것 다 나 자신의 문제이다. 어떤 것 보다 힘써야 할 부분이 사랑임을 다시 확신하게 된다. “무엇보다도 먼저 서로 뜨겁게 사랑하십시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어 줍니다.”[표준새]
3.불평으로 섬기는 것은 아무 가치가 없다.(9)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일세기 때에 복음 하나만을 위하여 삶의 터전을 버리고 여행하는 하나님의 일꾼들이 의외로 많았다고 전한다. 뒤에서 보겠지만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11f) 라는 말씀은 바로 그러한 일을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의지로 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분들이 머무는 교회는 그들을 또한 그리스도의 사랑과 예우로 대우해야 할 것을 바울은 여러 곳에서 당부하고 있고, 특히 직분자들의 자격에서 조차 이를 다루고 있는 목회 서신들을 읽게 된다. 어떤 경우 그것을 감당해야 하는 사람들은 “왜 하필이면 우리 집인가? 왜 우리 교회여야 하는가?” 라는 불평들이 있었을 것이고 이러한 사람들의 심성을 읽고 있는 베드로는 어떤 일일지라도 불평과 더불어 하는 일들은 은혜 되지 않기 때문에 이런 가르침을 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인생 속에서 누리고 있는 것들, 특히 믿음의 사람들은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다 내어 줘도 불평은 금물이다. 가진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겨 두신 것이라고 하는 청지기 의식으로 살 때, 불평은 주인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자신의 것도 아닌 것으로 주면서 입을 삐쭉 대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교훈이다. 청지기나 관리자는 주인의 시킨 것을 묵묵히 하면 된다. 참 관리자는 불평하지 않는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일이라도 불평으로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하지 않음만도 못한 것이다. “불평하지 말고 서로 따뜻하게 대접하십시오.”[표준새]
Ⅱ.자기가 받은 것과 가진 것으로 봉사해야 한다.(10~11f)
믿음의 사람들인 우리 모두가 가진 것은 다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바울 사도는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같이 자랑하느뇨”(고전4:7) 라고 충고하고 있다. 이것은 영적인 능력 뿐만 아니라 시간, 물질, 권력 모두를 말할 수 있다. 우리의 믿음이 바로 이 은사를 바탕 한 것이어야만 하고, 우리의 하나님 섬김은 당연히 은혜를 따라야 한다. 이러한 신앙적 논리에 베드로 사도는 같은 교훈을 주고 있는 것이다.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10) 이 은사나 은혜는 헬라어에서 다 같은 어근을 가지는 낱말들이다. 은혜란? 용서, 친절, 호의나 은총을 의미하는 [헬, charizomai] 라는 말에서 왔다. 바울 사도는 우리의 실제적인 섬김을 당부하면서 가르치기를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롬12:6) 라고 말씀한다. ‘믿음의 분수대로’ 라는 말은 무엇보다도 은혜를 받은 우리의 자세에 대한 경계다. 영적인 능력을 의미하면서도 우리가 그것을 받아 관리하는 분수를 넘지 말아야 한다는 경계이기도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주신 믿음의 신비를 가지고 있고, 역시 맡아 가지고 있는 청지기 의식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고전4:1) 역시 마지막 부분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 누구에게나 특별한 능력을 주셨으니 그것을 서로 돕는 일에 사용하십시오. 하나님의 넘치는 복을 다른 사람과 나누십시오. 이렇게 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그 선물을 잘 관리하도록 하십시오.”[현대]
하나님께서 오늘 무엇을 나에게 맡겨 두셨던지 그것은 섬김을 위해서 맡겨 두셨음을 잊지 않는 것이 첫째이다. 모두가 다 꼭 같은 것을 가지지 않은 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고르게 하기 위해서 라는 사실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경계해 주고 있다.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요구할 것이 없으니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존귀를 더하사,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하여 돌아보게 하셨으니,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나니,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전12:24~27)
또 다른 비극은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는 은사를 주시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데 있다. 신령한 것도 귀중하지만 우리가 영적으로 사용한다면 우리 가진 어떤 것도 세속적이거나 추한 것이 아니며, 반대로 아무리 신령한 것이라도 섬김이 아닌 자신을 내세우고 개인적인 욕심을 위해서 쓴 다면 그보다 추한 것은 없다는 사실이다. “믿습니까?”
오늘 내가 가진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복음으로서 하나님과 교회와 그의 백성들과 세상의 잃어진 영혼을 사랑하여 구원하라고 주신 것이라는 사실을 가지고 성심 것 자신에게 맡기신 것을 바르게 사용하고 관리하는 것이다. 그래서 당연히 연결 되어지는 말씀은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11)는 권면을 주고 있는 것이다.
여기 “말하려면” 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메시지의 전령으로서의 자세이고 “봉사하려면”은 역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섬기는 것을 가르치는 의미이다. 말씀을 전하는 것 자체가 진리의 교훈이라면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 없이는 생명의 말씀을 전할 수 없고 전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모두가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으로 전하고 듣는 것이 중요하고 물질을 통해서 봉사하드라도 그것은 나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것을 맡기셔서 봉사한다는 자세로 섬겨야 한다는 경계이다.
비록 대상이 일반 사람이었음에도 이런 사실을 망각한 헤롯을 벌레가 먹어 죽는 것을 성경에서 읽게 된다. “헤롯이 날을 택하여 왕복을 입고 단상에 앉아 백성에게 연설하니, 백성들이 크게 부르되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하거늘,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므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벌레에게 먹혀 죽으니라”(행12:21~23)
Ⅲ.우리의 최종적인 섬김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어야 한다.(11b)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
우리 믿음의 사람들의 평상시에는 물론이고 최종적인 목표는 언제나 여기에 맞추어 져야만 한다. 만물의 마지막이 다가오고 있는 가운데 드리는 기도도 나 자신의 영달이나 부귀를 위한 기복적인 것 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 아버지의 구원의 역사를 우리 각자의 삶에 이루기 위한 것이 되어야 하겠고 주님과 사람을 섬기고 사랑하는 목표도 어떤 경우에도 섬김에 불평이 없어야 하는 목적도 주님께 영광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난 주에도 주님의 겸손과 희생을 나누었지만 예수께서도 “그리스도께서도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롬15:3) 라고 바울은 증거하고 있다.
자신이 받은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청지기의 자세로 구원을 위하여 겸손이 사용하는 자세도 하나님께 영광이 될 것이다. 성속(聖俗)의 경계는 자신의 신앙의 자세에 있음을 잊지 말자.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롬14:14)
우리가 구원과 은혜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받고 누린다면 영광을 돌리는 통로도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려져야만 한다.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3:17)
우리의 삶의 절대적 이유가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원칙이 있다면 어느 때, 어느 장소에 있든지 부끄럽지 않은 인생을 살 수가 있고 감사와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게 될 것이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14:8)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빌1:20)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고후5:9)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0:31)
오늘 나는 왜 섬기는가?
우리 모두 죄인으로 하나님을 진노케 하는 삶을 살 수 밖에 없었지만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십자가를 통해 구원 받고 다시 오실 승리의 주님을 기다리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 수 있는 복된 제사장들이 되었습니다. 예배도 섬김도 은혜 받은 것 때문이라는 고백으로 옛 정욕이 아니라 감격으로 드려서 주님을 영화롭게 하는 거룩한 제사장의 역할을 잘 감당하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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