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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마 1:1~17 2004-05-02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서론(序論)

성경을 순서대로 강론하는 것이 꼭 성서적이거나, 옳다거나 의도적이 아니라 거나 하는 말에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기록된 성경말씀을 오늘의 말씀으로 이해하는 것 자체가 어쩌면 의도성이 있고 어떤 제목을 선택하여 적절한 말씀과 만나게 하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의 계시를 맡은 종들의 할 일임이 분명하다.

하나님의 말씀을 시대와 상황에 적절하게 적용하는 것이 하나님의 종들의 과제가 되겠지만 주님의 말씀을 순서적으로 상고하는 가운데 그 말씀이 우리 교회와 개인의 사건과 만나고 다루게 하시는 조금은 원시적인 방법이 될지 모르지만 생명의 계시는 언제나 어떤 말씀으로도 역사와 만나고 우리 각자의 사건과 만나는 신비를 경험하게 된다.

앞으로 이 생명의 계시의 말씀을 강론해 가면서 신학적인 것 보다는 성경을 바탕 한 신앙의 부분들을 되도록 간결하게 다루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제가 경험하는 바로는 말씀을 순서대로 상고 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마치 모든 상황을 말씀에 맞추시는 것 같은 체험들을 해 봤고, 또 어떤 제목들은 같은 말씀임에도 불구하고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왜 저런 말씀을 전하는 걸까?, 아 이런 상황 때문에 그렇구나!’ 라는 오해를 가질 경우도 있다. 그러나 말씀을 순서대로 증거 하다가 나타나는 하나님의 명령은 그런 부정적인 생각들을 더욱 줄일 수 있는 것은 확실 하다.

우리가 주님의 세계와 구원의 역사를 논하려면 요한 사도의 말처럼 “예수의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요21:25)는 선언에 공감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의 유한한 머리에 무한을 상상한다는 것 자체가 감당할 수 없는 차이일 것이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역사를 인간이 전혀 알지 못하도록 숨기시지 않으신다.

계시(啓示) 라는 말 자체가 ‘가려진 것, 덮어 뒀던 것들을 열어 보인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그렇고, 자연을 통해서도 계시 하실 뿐만 아니라 그것으로는 하나님을 어렴풋이 밖에 알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종 선지자들을 보내셔서 구원을 준비 시키셨다고 증거하고 있는 히브리서 저자의 고백을 듣는다.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1:1~3)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계시의 절정이기시도 하시다. 주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14:9) 죄인 된 인간이 뵐 수 없었던 하나님은 우리와 꼭 같은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시므로 뵐 수 있는 하나님이 되셨다.



1.복음서들. 이 복음서가 한 권이 아닌 사복음서로 쓰여진 것 자체도 우리 두뇌로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혜와 사랑의 역사라고 확신하게 된다. 누가도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 되고 일꾼 된 자들의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눅1:1~3) 라고 말하면서 자신이 받은 그리스도의 교훈을 조심스럽게 전하고 있다.

복음서들을 물론 모두는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하긴 했지만 기록한 사람들 중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직접적인 선택을 받은 사도 두 사람과[마태, 요한] 그리고 간접적인 경험자 두 사람이다.[마가, 누가]

4복음서들은 각각 독특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다른 면들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요한이 본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 앞에 앞뒤에 눈이 가득한 체로 밤낮 쉬지 않고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보좌에 앉으사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돌리는 네 생물이 있는데 이 네 생물들의 모양을 이 마태를 비롯한 네 복음서에 비유 하곤 한다. “그 첫째 생물은 사자 같고 그 둘째 생물은 송아지 같고 그 셋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 같고 그 넷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 같은데” (계4:6~7)



2.마태복음. 이 복음을 기록하는 마태는 당시에 대중들로부터 별로 좋은 평판을 받지 못했던 세리로 본인을 비롯한 공관 복음에서 다 기록하고 있다.[9:9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지나 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 “알패오의 아들 레위” (막2:14)  “레위라 하는 세리”(눅5:27)]

신앙을 시작하는 초보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신약성경을 순서대로 한번 읽어 보려고 시도하다가 주저앉아버리고 마는 끊임없이 낳고, 낳고, 낳고~를 계속하는 이 말씀에도 깊은 구원의 진리가 담겨있음을 이해하게 된다. 모든 인류는 사람을 계속 낳지만 죄의 사람이 되어서 사망의 제물로 바쳐지고 있다. 그러나 이 낳고, 낳고, 낳고~는 사망에서 점점 생명으로 다가가는 낳고 낳고가 되었다.

마태만의 몇 가지 특징들을 살펴보면 이 복음서는 유대인들을 위한 복음서인 만큼 구약의 인용이 많으면서도 대단히 질서 정연하고 논리적으로 구성되었다는 사실이다. 여러 가지의 특징들이 있지만 본문의 말미에 나타나는 “열네 대요(7x2의 반복)” 하는 형식으로 숫자적(12:45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18:21~22일곱번의 용서)으로 기록하면서 호소력을 더 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산상보훈(5~7) 같은 교훈집들(13천국비유, 23종교 지도자들의 책망 등등)로 구성되어 있는 것들과 이 마태 복음만의 자주 사용되는 독특한 용어들(그 때, 천국, 달란트 등등)이 다른 복음서와는 다른 독특성이다.

마태는 다른 복음서들과는 독특하게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이스라엘의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유대인의 왕으로서 오셨음을 증거하면서 그러나 하나님의 자손이 되는 것은 혈육에 속한 것이 아니라 회개한 사람이며 비록 아브라함의 후손일지라도 회개치 않으면 버려질 수 있다는 두려운 경계를 주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3:8~9)] 믿고 회개한 모든 인류들에 의해 약속의 자리는 채워지고 오히려 약속의 자손들은 밀려 날 수 있다고 경고한다.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8:11~12)]

이러한 마태의 주장은 역시 오늘 우리를 늘 긴장시킨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안심으로 영적인 경계를 게을리 하고 무사안일(無事安逸) 하게 세상과 적당히 타협해서 산다면 역시 그 복된 자리는 다른 사람으로 채워 질 수 있다는 경계를 주는 것이다.



Ⅰ.인류 역사상 가장 귀중한 족보이다.

어떤 불신의 사람들의 열을 내면서 항의 하는 것은 “그 이스라엘 족보가 오늘 우리에게 무슨 관계가 있는가?” 라고 흥분한다. 그러나 이 계보는 오늘 나를 살리기 위한 족보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1.믿음의 족보를 본다. 왜 온 인류의 시작인 아담부터가 아니고 “아브라함과 다윗”이 출발지인가?(물론 누가복음은 비록 거꾸로 올라가는 기록으로 아담을 거쳐서 하나님께 이르고 있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생명으로 알고 순종하며 자신들의 삶을 살았던 믿음의 두 조상을 시작으로 출발하는 것도 의미가 있다. 왜 영광스러운 솔로몬이 아니라 다윗일까? 비록 인간적으로는 실수가 많고 범죄 한 두 사람이지만 하나님을 의지하고 회개할 줄 알고 육신적으로 믿을 수 없는 일일지라도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에 받아들이고 수용했던 사람들,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모든 것을 기꺼이 포기할 수 있는 사람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주님은 이 죄악의 역사 속에 오신 것이다.



2.만왕의 왕의 족보를 본다. 이 족보는 바로 이스라엘 왕가의 족보이다. 일류의 많은 나라와 민족들의 왕의 족보들이 있지만 작은 나라 이스라엘, 수없이 포로가 되었던 나라의 족보 그러나 그 족보에 바로 모든 왕들에게 권세를 친히 주시는 왕 중의 왕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라고 선언되고 있다. 지극히 천하고 초라한 이름 예수(인류의 모든 죄를 다 짊어지고 가장 잔인한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하는 이름)에서 높고 높은 영원과 영광의 보좌에 오르신 왕의 족보(위엄과 영광의 그리스도)이다.



3.구원의 역사를 본다. 어쩌면 가장 힘겨운 역사 고난의 역사가 묻어있는 족보이다. 방랑의 집시족에서 이집트에서의 종살이와 출애굽, 끝없이 반복되는 죄의 역사, 이 모든 것은 죄에서 고통 하는 인류가 절망으로부터 빠져 나오도록 섭리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의 역사를 품은 족보이다.



Ⅱ.이 족보가 우리에게 보여 주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

이 족보에서 ①하나님의 진실을 본다. 어떤 것도 숨김이 없는 하나님의 진실을 본다. 어떤 것들을 감추어 둘 수도 있는 것들이지만 하나도 가리지 않고 다 열어 놓으시는 하나님의 공의와 계시를 본다. 주님은 이 인류를 구원 하심에 있어서 완벽한 인간들 만을 쓰지 않으셨다. 인간의 허물과 실수와 수치와 아픔을 다 그대로 보시면서 그 수치스러운 죄의 역사를 구원의 물줄기로 바꾸셨다. 오늘 우리도 감추는 것 보다는 어떤 수치도 주님 앞에 내 놓으면 용서하시는 사랑과 공의가 이 수치스러운 듯한 족보가 우리에게 일러 주시는 하나님의 진실의 속성이다.

②전 이류에 대한 사랑을 본다. 하나님의 택함 받은 자들이라는 자존심 하나로 뭉쳐진 이스라엘의 귀중히 여기는 왕의 족보를 여지없이 망가뜨리고 있다.(여자는 사람 수에도 쳐주지 않는 이스라엘의 족보에 죄 많은 이방 여인들을 등장시키고 있다.) 이스라엘의 자존심을 이 족보는 여지없이 망가뜨리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단순한 이스라엘이라는 한 민족이 아니라 오히려 이 민족을 통하여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창세전의 계획을 실천하심을 보여주고 있다.

③죄에 신음하는 절망의 인간에 대한 긍휼을 본다.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선택의 민족 속에서도 죄의 고통은 예외가 아니다. 아브라함 이후의 수많은 죄의 끈질긴 유혹의 역사로 하나님의 기적과 은혜의 보호에도 불구하고 끝없이 거역하고 방황하는 광야의 반역, 가나안을 줬음에도 계속 죄의 역사로 뒤집히는 수난과 혼란의 사사시대, 르호보암을 시작으로 수없이 범죄 하는 왕들의 결과로 결국 ‘바벨론으로 이거’ 하는 포로의 역사,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택하시고 선택하신 이스라엘 조차도 하나님의 구원의 십자가의 예외 조항이 아님을 이 복음서의 서두의 낳고 낳고는 계속해서 기록해 가고 있다. 그리고 끊임없이 초청하시고 품어 주시는 어머니 같은 사랑을 이 족보는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의 긍휼이 없다면 우리 중에 누가 과연 구원을 얻을 수 있을까? 상하면 고치고 또 고치는 하나님의 긍휼이 오늘 나와 우리를 살게 했다. 그리고 이러한 긍휼의 심장은 오늘 하나님의 사랑 입은 우리 모두의 가슴이어야 한다. 치유와 용서를 통한 소망을 본다.

④혈연적인, 인간적인 약점을 극복한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고”(2) 여기서 시작되는 계보는 계속 장자(長子)가 아닌 차자로 가는 것을 본다. 그것은 역시 하나님의 약속을 귀하게 여길 줄 아는 사람들이 사용되어 지는 것을 본다. 10:40~41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Ⅲ.인류 구원을 위한 구원의 모델이다. 유대인들의 영광스러운 족보에 자리잡고 있는 이방 여인 네 사람.

①“유다는 다말에게서”(3ff) 성경의 가장 수치스러운 일 중의 한 가지를 저지른 사람이 바로 다말과 유다일 것이다.(창38:13~26) 이름은 찬양이지만 그의 자녀들과 그의 행동 그리고 그것을 잘 이용하는 자부는 둘 다 인간적인 면에서 결코 존경 받을 많나 인물이 아니다. 이 이야기는 불륜의 극치이다. 그러나 역시 나중에 회개하는 유다를 본다.

②“살몬은 라합에게서”(5ff) 여리고의 기생 라합은 기생에서 끝나지 않고 국가까지 팔아 먹는 야비한 매국노 였다. 그러므로 이중적이고 음란한 라합이 죄악의 민족과 단절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구원 받았다면 죄악의 수렁에 있다고 구원 받지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③“보아스는 룻에게서”(5m) 여기 기록된 이방인 중에서는 그래도 제일 동정을 받을만한 인물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에게 이방인이라는 것 자체가 환영 받지 못할 이름이다. 모압의 그모스 우상을 섬기다가 시모를 따라 이스라엘에 귀의한 룻 역시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 나야 구원 얻는 약속의 모형이다.

④“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6m) 어쩌면 가장 극악한 협동의 범죄자 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가장 간교하고 잔인한 다윗과 밧세바의 관계는 아무리 합리화 하려고 해도 지탄 받아 마땅한 관계였다. 물론 다윗 역시 자신의 눈물로 침상을 띄우면서 까지 회개를 철저히 했던 사람이다. 이스라엘 중 꺼내기 조차 꺼리는(실지로 역대기 기자는 이 사건을 자신의 서신에서 누락 시켜 버린다.) 이 어두운 이야기가 이스라엘 왕의 족보에 중심에 올려져 있는 것 역시 하나님의 역사이다.

우리는 이 중에 거론 된 인물 중에 십계명에서 금지된 죄에서 빠진 것이 없음을 헤아려 볼 수 있을 것이다.[①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②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③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④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⑤네 부모를 공경하라, ⑥살인하지 말지니라, ⑦간음하지 말지니라, ⑧도적질하지 말지니라, ⑨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 ⑩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

다말이 구원의 족보에 올라 있다면, 기생이요 매국노인 라합이 족보에 오를 수 있었다면, 간음과 살인의 원흉인 다윗과 밧세바가 이스라엘 왕의 족보에 오를 수 있다면 그냥 단순히 용서 정도가 아니라 구원의 족보에 등제 될 수 있었다면 오늘 하나님 앞에 구원 받지 못할 사람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이 족보는 죄에 신음하고 죄의 그늘에 고통스러워 하는 모든 죄인들을 초청하는 사랑의 음성이다.

318:1.예수가 우리를 부르는 소리 그 음성 부드러워, 문 앞에 나와서 사면을 보며 우리를 기다리네, 2.간절히 오라고 부르실 때에 우리는 지체하랴, 주님의 은혜를 왜 아니 받고 못들은 체하려나, 오라 오라 방황치 말고 오라 죄 있는 자들아 이리로 오라 주 예수 앞에 오라.



Ⅳ.결론.

하나님께서는 콧대 높은 이스라엘의 자존심을 여지없이 뭉개 뜨리면서 온 인류의 구원을 초청 하신다. 그들이 개처럼 취급하는 이방여인 그것도 중한 죄와 수치로 얼룩진 역사를 숨김없이 드러내 놓고 오늘 같은 죄의 사람들을 부르시는 것이다.

우리는 짐짓 우리 자신들의 구원만 신경 쓰고 남이야 어떻게 되든 신경을 쓰지 않는 무사 안일과 때로는 구원의 주님께 어렵게 찾아 나온 상한 심령에게까지 상처를 주는 말을 쉽게 내 뱉고 주님의 말씀을 받아 먹지 못하게 까지 악영향을 미치는 경우들도 더러 있다. 하나님은 이에 대해 무서운 경계를 주고 계신다.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양 떼 너희여 내가 양과 양의 사이와 숫양과 숫염소의 사이에 심판하노라, 너희가 좋은 꼴 먹은 것을 작은 일로 여기느냐 어찌하여 남은 꼴을 발로 밟았느냐 너희가 맑은 물 마신 것을 작은 일로 여기느냐 어찌하여 남은 물을 발로 더럽혔느냐, 나의 양은 너희 발로 밟은 것을 먹으며 너희 발로 더럽힌 것을 마시는도다 하셨느니라(겔34:17~19)

마태는 바로 이 지루할 정도의 족보를 통하여 자만한 신앙의 자세를 경계하면서 그러나 그 반대의 입장에서는 인간적인 입장에서 아무리 무서운 죄와 허물로 지탄을 받는 사람일지라도 믿고 회개하고 세례를 받고 거듭나서 하나님의 약속된 복을 누릴 수 있는 사랑의 초청을 이 역사 속의 모든 사람에게 하고 있는 것이다. 죄로 인하여 절망하는 누구든지 하나님은 십자가의 제사를 통하여 부르고 계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