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말씀을 클릭하면 성경구절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이종배 전도자
마 3:1~9 2004-05-30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어린 시절의 이야기는 끝나고 공 생애의 준비과정의 이야기들이 시작된다. 메시야의 오심을 준비시키는 이사야의 예언의 성취가 이루어지고 이는 바로 예수보다 6개월 먼저 탄생한 요한의 광야 출현이고 사람들은 오히려 이 요한을 그리스도라고 오해 하기도 한 것을 요한복음에서 읽게 된다.(요1:19~27)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물을 때에 요한의 증거가 이러하니라,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대, 또 묻되 그러면 무엇, 네가 엘리야냐 가로되 나는 아니라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냐 대답하되 아니라, 또 말하되 누구냐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대답하게 하라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 가로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 저희는 바리새인들에게서 보낸 자라, 또 물어 가로되 네가 만일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선지자도 아닐진대 어찌하여 세례를 주느냐, 요한이 대답하되 나는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하더라”

이 세례 요한의 활동에 대한 기사는 4복음서가 다 언급하고 있고 특히 그리스도의 유년기를 생략하고 있는 마가복음에서 조차도 이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오늘 본문은 메시야의 나타남을 준비시키는 세례요한의 활동과 거기에 반응하는 사람들, 그리고 다음 시간에 예수의 세례와 연이어 광야의 네 가지 시험으로 이어지면서 공 생애의 시작으로 나아가시는 주님의 모습들을 기록하고 있다.



Ⅰ.요한의 등장과 사역.

“요한”이라는 이름은 본래 히브리어 “예호하난, 요하난” ‘여호와께서는 자비로우시다, 여호와는 은혜롭게 취급하심, 여호와는 은혜롭게 주시는 자’ 라는 등등의 의미로 구약 성경에는 별로 흔하지 않지만 그리스도의 탄생 이전부터 이스라엘에서 대단히 흔한 이름이고 그리스도의 탄생 후에도 대단히 많은 사들이 사용한 이름[요아네스, !Iwavnnh", Ioannes]일 뿐 아니라 현재도 서양인들 중에는 흔히 쓰이고 있는 이름(John)이다. 성경 속에 다른 ‘요한’이라는 이름들과 구별하기 위해 세례 요한이라고 쓰여지고 있다.

이스라엘의 암흑기라고 불리우는 바벨론 포로귀환 후의 400년의 어두움 후에 등장한 세례요한은 충분히 주목 받을 만한 인물이었고 그의 외치는 첫마디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였다.



1.광야에서 외치는 자였다. (1) “그 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가로되”

어떻게 보면 사람들이 많이 모인 도시에서나 시장에서 외치지 않고 사람들이 잘 가지 않는 광야에서 외친 것이 선지자로서 어울리지 않게 보인다. 복음서에서 보면 불신하는 예수의 형제들은 예수를 향하여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요7:4) 라고 권면을 했고 이것은 세상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방식이다. ‘말은 제주로, 사람은 서울로 …’ 라는 이야기도 다르지 않다.

예수께서도 “요한의 보낸 자가 떠난 후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보라 화려한 옷 입고 사치하게 지내는 자는 왕궁에 있느니라,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선지자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도 나은 자니라,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앞에서 네 길을 예비하리라 한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이가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눅7:24~28; 마11:7~11)고 말씀 하셨다.

세례요한은 이런 일반적인 사람들의 논리와는 전혀 다르게 광야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외쳤고 이것은 과거 이사야 선지자의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사40:3)는 예언의 성취인 동시에 죄로 일그러져 사막과 같이 삭막한 모든 인간 심전(心田)에 외치는 하나님의 회개의 요청이다.

죄에 이끌려 다니는 사람의 마음은 평화나 쉴 곳이 없고 메마르고 낮에는 뜨겁고 밤에는 차가운(갈증이 나고, 뜨겁게 열이 올랐다가 쉽게 식어 버려서 따뜻한 인정을 그리워 하는) 광야처럼 기쁨이 없는 존재들이 되었고 요한과 같은 “회개하라!”는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는 한은 기쁨이 없이 황망(荒忙)한 삶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오늘도 주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마음 밭이 평화롭지 못하고 쉼이 없이 거칠고 만족이 없다면 올바른 신앙인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 믿어서 기본적으로 얻는 것이 평안과 위로와 감사이다.



2.천국이 가까웠다고 외쳤다. (2)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였으니”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은 어두운 역사 속에서 유일한 하나의 기대를 가지고 있었고 그것이 바로 메시야의 오심에 대한 선지자들의 예언이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의 때도 하나님의 나라는 아직 아니었고 바로 손에 잡히듯[The kingdom of heaven is at hand]이 와 있다고 외치고 있다. 아직도 율법의 시대였다.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눅16:16)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도 역시 율법아래 나셨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갈4:4~5) [아브라함이 무할례시에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은 무할례자들에게 의롭다 함을 얻게 …]

예수께서도 “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셔서 사단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막1:13~15)

이 약속은 바로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사죄의 피를 흘리시고 죽으셨다가 3일만에 부활하시고 40일 후에 승천하시고 오순절날 성령을 보내셔서 이 땅에 이루어졌고 우리는 이 하나님의 나라(천국, 天國) 속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약속으로는 세례 요한 보다 큰 자들이 되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이가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눅7:28; 마11:11)는 주님의 말씀이 바로 그것이다. 율법 속에 지극히 큰 자라도 하나님의 나라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가치가 적은 자라는 엄청난 약속이다.



3.외치는 자의 자세를 본다.(4) “이 요한은 약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더라” 오늘 날 우리는 육신적인 편리함과 부요를 누리면서 오히려 더 기쁨은 잃어지고 육신적인 욕구는 더 강해지는 것을 본다. 삶의 기본적인 것도 누리지 못하고 죽는 사람들이 아직도 이 지구촌에 수두룩한데 우리는 편리에 편리를 욕심 내고 있으니 영적인 부분에 등한해지고 신앙적 용기를 많이 잃는 것을 본다.

우리가 정말 세상적으로 살아 남기 위해서 투쟁하는 것에 비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얼마나 힘쓰고 있는가를 살펴보면 참으로 한심하고 부끄럽기까지 하다. 입으로는 분명히 “하나님의 나라가 인생에 있어서 가장 귀중하다!” 라고 말하면서도 사실에 있어서는 그렇지 못함을 본다. 구원은 분명히 하나님의 선물로 거저 받지만 영적인 부분에서도 분명히 투쟁적인 부분이 있다. 주님께서 직접 말씀하시기를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마11:12) 바울 사도도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2:12)고 교훈하고 있다.

어쩌면 영적인 싸움이 더 긴박하고 절실한데도, 마귀 사탄은 오늘의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세상에 너무 분주하게 만듦으로써 영적인 부분에 신경을 쓰지 못하게 하는 무장해제를 시키는 감도 있다.

우리는 영원한 영광을 기대하면서도 인간의 공로가 아닌 은혜로 받는다는 사실을 감사하기는커녕 거기에 너무나 무사 안일한 우리 자신을 보곤 한다.

정말 이런 모습으로 예수께서 이땅에 다시 오신다면 부끄러움을 면치 못할 것 같다. 세례 요한은 단순하고 꾸밈없는 삶이 큰 소리를 칠만 했고 오늘날도 권력이나 재물과 결탁된 사람은 사회적으로나 신앙적으로 바른 하나님의 메시지를 외치지 못하는 것을 볼 때 광야의 세례 요한을 생각지 않을 수 없다. 대상에 관계없이 강하게 외치는 자세를 볼 때 부끄럽기 그지없다.



Ⅱ.이러한 세례 요한에게 나아오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5~6)

“이 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

결국 말씀이 있는 곳이면 그곳이 광야가 되었든 산 중턱[산상보훈]이 되었던지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보내심을 보는 것이다. 성경이 결코 과장된 표현이 아니었다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라는 기록으로 봐서 세례 요한의 듣기 거북한 증거는 대단히 호소력이 있었던 것 같다. 말씀 앞에 겸손히 나아와 믿음으로 반응하는 자세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중요한 모습임을 배운다. 외치는 말씀이 거북스럽고 듣기에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그 말씀을 들으러 온 나라 방방곡곡이 찾아 나오는 모습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바람직한 모습이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자신의 허물을 자복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움직이는 사람들을 복 주신다. 자기들의 자랑거리를 이야기 하는 것이야 얼마나 좋겠는가 만은 자신들의 부끄러운 죄를 전혀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게 자백하고 그의 지시를 따라 세례를 받는 모습은 우리가 읽는 것처럼 편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모습은 오순절날 예루살렘에 모여 왔다가 베드로의 말씀을 듣고 반응하는 최초의 교회에 더해진 사람들과 꼭 같다.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행2:37~39) 41“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는 완성된 교회 속에서의 모습이 바로 세례 요한에게 나아 왔던 사람들과 동일한 모습이고 이 사람들이 더 복이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상황은 이렇게 긍정적인 것 많은 아니다.



Ⅲ.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7~9)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 베푸는 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움직였던 세례 요한은 거기 찾아 나오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문제의 중심을 꽤 뚫어 보고 옳지 못한 자세를 책망하고 있다.



1.신앙의 지도자들이 가장 무서운 책망을 듣고 있다.(7)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 베푸는 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아브라함의 자손)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 요한은 광야에 나타나면서부터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2)고 백성들에게 요청했고 “…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 (5~6) 라는 모습을 봤다. 그러나 문제는 신앙에 보다 전통을 가졌다고 하는 사람들이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이스라엘의 신앙의 양대산맥(兩大山脈)이라고 할 정도로 유명하고 오래된 종파이다. ‘분리된, 구별된 사람들’이라는 바리새인들은 주로 산해드린 공회를 장악하고 정치적인 기득권을 누려왔고 대개 구약의 경전을 다 믿고 부활도 믿는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을 향해 나중에 예수께서도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마23:33)는 무서운 책망을 듣는 것을 보면 분명 요한의 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2)는 책망을 듣고도 회개치 못한 것이 분명하다.

반면에 신앙의 중심인 성전의 제사장의 자리를 주로 차지하고 모세 율법인 오경을 주 경전으로 받아들이면서 부활도 믿지 않고 백성들의 제물로 가져오는 제물(祭物)을 부정하다고 판단해서 싸게 팔게 하고 그것을 되돌려 와서 비싸게 다시 되파는 식으로 성전에서 많은 돈벌이를 하는 옛날 사독 제사장의 가문의 혈통을 자랑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나중에 예수께서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막11:17; 마21:13; 눅19:46) 고 분노 하셨던 대상이었다. 이렇게 신앙에 진실 하지 못한 사람일수록 사실은 말세(末世)의 이야기를 두려워 하기 마련이다.

신앙에 깨어 있어 자신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세상의 말세가 온다고 해도 두려울 것이 없는 사람으로 자신 있게 살 것이다. 종교 지도자들로서 자신들도 메시야의 예언은 들어 왔고 지금까지의 선지자들과는 유별난 세례 요한 앞에 두려움을 가지고 나오긴 했지만 이들은 진정으로 회개치 못해서 예수님께 더 큰 책망을 듣는 것이다.

사실 세례 요한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는 책망이나 주님의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마23:33)는 책망은 성경을 읽고 믿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가장 무서운 저주이다. 그러나 양심에 화인 맞은 이들은 이런 책망을 듣고도 회개치 못했다는 것이 오늘 우리가 경계로 삼아야 할 무서운 교훈이다.



2.회개는 반드시 회개한 모습이 있어야 한다.(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이런 가증한 신앙의 지도자들의 거치래 식의 신앙의 자세를 안 세례 요한은, 회개는 단순한 후회나 탄식이 아니라 삶의 큰 변화[metavnoia, metanoia - 반전시킴, U-turn, 180도의 돌이킴, 죄로부터의 영과 혼의 하나님을 향한 완전한 변화]이기 때문에 거기에 따르는 마땅한 결과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세상을 향해 가던 삶을 돌이켜 하나님을 향해 가는 변화 받은 사람이라면 그 모습뿐만 아니라 생각하는 것까지도 분명히 다를 것이다. 야고보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 믿음이 생활에 들어 나야 한다는 사실을 지적해 주고 있다.(약2:14~26)

오늘 우리 각자는 죄의 세상을 등지고 천국을 향해 가고 있다면 우리 삶 속에 그러한 결과들이 열매로 나타나야 당연한 것이다.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느니라,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7:17~20)고 선언 하셨다. 여기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경계는 다음 이 시간에 다시 다루게 될 것이다. 우리 각자는 오늘 어떤 열매를 맺고 있는가? 우리가 신앙적으로 안일할 때마다 지속적인 경계로 “회개하라!”는 요청은 들려져야만 한다.



3.조상들과 과거의 의를 의지하지 말라!(9)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문제는 이들이 이런 안타까운 모습을 버리지 못했던 이유는 또 다른 믿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자신들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이유에서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요한은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는 경계를 주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나중에 자신들이 사생아가 아니라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주장하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의 행사를 할 것이어늘 …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요8:39~40) 우리의 입술로 하는 주장이 중요하지만 그것을 뒷바침 하는 행동이 있어야 그것이 사실이라는 말씀이다. 우리는 짐짓 우리 신앙의 조상들을 자랑하면서 그 조상을 모신 후손다운 모습이 없다면 그 믿음의 조상을 오히려 욕되게 할 뿐이다.

우리 조상이, 집안이, 교회의 선배들이 믿음생활을 잘 했다고 그들의 후손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의 죄를, 불순종을 눈감아 주시리라는 기대는 애당초 해서는 안된다. 주님께서 오늘 나에게 요구하는 삶의 자세는 바로 그 자랑으로 삶는 믿음의 조상들과 같은 신앙의 자세이다. 비록 세상에서는 제산을 많이 가진 부모나 공을 많이 세운 후손이 덕을 보는 것이 사실이지만 위대한 믿음의 조상을 두었다고 하는 것의 신앙적 자세는 내가 오늘 그 믿음의 조상 다운 신앙을 할 수 있다는 푯대가 있어서 좋은 것 뿐이지 그들의 공로나 혜택을 내가 누리는 것이 아니다.

구약에서도 에스겔 선지자를 통하여 같은 경계를 주고 있다. “… 의인의 의도 자기에게로 돌아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18:20)

그러므로 우리는 각자 자신의 신앙의 조상들을 내세우거나 자랑하기 보다, 우리가 자랑하고 의지해야 할 유일한 이름은; 영원한 저주에서 구속해 주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이다. 교만 하려 할 때도 낙심(落心) 될 때도 내세울 이름은 바울의 고백처럼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15:10)

이것을 자랑하고 의지하는 자만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심판주로 다시 오실 주님을 환영하고 찬양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