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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광야에 좀 유별난 모습으로 나타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고 군중을 향하여 소치 치던 세례 요한은 이제 점점 메시야이신 예수께로 사람들을 이끌어 가면서 자신은 쇠해야 하고 그리스도는 흥하여야 한다고 사람들에게 들어내 놓고 말하는 것을 본다. 우리가 세례 요한에게서 배워야 하고 오늘 이 시대 속에서 특히 중요한 자세가 이런 모습이 아닌가 깨닫게 된다.
조금만 인기가 있으면 “나 아니면 안된다!, 나 뿐이지!”라는 식의 독선보다는 자기의 역할의 한계를 분명히 하고 뒤로 물러 날 때 그만 둘 줄 아는 세례 요한이야 말로 이런 모습에서 위대한 스승이다. 우리 모두는 사실 그리스도를 가르키는 방향 지시를 위한 화살표 역할이고 나는 비록 망하더라도 주님께서 흥하시면 성공한 것이라는 올바른 인생의 좌표를 세례자 요한에게서 배운다고 하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 네가 누구냐 물을 때에 요한의 …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요1:19~20)
“…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자 곧 선생님이 증거하시던 자가 세례를 주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나의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거할 자는 너희니라,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요3:26~30)
Ⅰ.구원과 심판의 권한을 가지신 예수에 대한 증거이다.(19~12)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회개에 합당한 열매”에 이어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10)고 선언하는 세례 요한의 말에는 죄악의 굴레를 벗어난 하늘의 성도는 반드시 생명의 열매를 결실할 것이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새로운 피조물로서 생명을 소유했다는 증거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사도 요한을 통하여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요15:2)는 가르침과 같은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바울은 이후에 불신함으로 잘린 이스라엘을 두고 말하기를 “옳도다 저희는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우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롬11:20)고 같은 경계를 주고 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면서 공의의 하나님으로 심판적 요소는 늘 있다. 예수께서 기적을 가장 많이 행하셨음에도 회개하지 못하는 고라신과 벳새다를 향하여 탄식하시기를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눅10:13) 은혜를 많이 누리면서도 그 은혜를 열매로 결실하지 못하면 심판은 쉬지않을 것을 비유하시는 교훈이다.
1.세례 요한의 사역의 한계.(11f)
주님의 일꾼들은 누구에게나 회개를 요청할 수 있지만 거기에 반응하는 각자의 순종과 불순종에 대한 결과는 전혀 다른 결과를 가져 올 것임을 증거하고 있다. 단순한 회개를 선포하는 세례 요한과 다른 예수 그리스도의 역할은 전혀 다른 것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11) 당시의 이스라엘 사회에서 종이 주인의 신을 챙겨서 신기고 벗기는 관습에서 자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을 관리할 자격도 없다고 말하는 것은 역시 인간과 하나님과의 간격을 고백하는 것이다.
주님의 종으로서의 바른 자세 그것은 자신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야 하는 영적 사역의 자세를 광야에서 낙타 털옷과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회개를 외쳤던 세례 요한에게서 배운다.
2.구원과 심판의 열쇠를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을 선포한다.(11b~12)
“…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명령하신 회개와 순종의 최종적인 표인 세례의 반응에 따라 결과를 정하시는 주님의 권한을 선포하는 것이다. 주님은 부활 후 승천하시기 전에도 “…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막16:15~16)고 제자들에게 당부 하셨다.
“…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헬, baptizo,← bapto, (기본적인 의미)물에 잠그다, 완전히 덮다, 충만하다]를 주실 것이요” 라는 말씀을 많은 사람들이 단순히 성령의 세례만으로 이해 하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이 세례 요한이 주님의 주권에 대해 선언한 것은 구원과 심판, 즉 믿음과 불신에 대한 결과에 대응하시는 심판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막16: 16)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물론 십자가의 구속의 역사를 바탕으로 한다.
주님께서는 만 인류의 죄를 감당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고 각각 사람들을 향해 “내가 너희들의 형벌을 다 감당하였다. 이제 너를 위해 죽은 나의 십자가의 희생이 유효하게 하기 위해서 예전의 죄악의 삶을 회개하고 나의 죽음에 일치가 되기 위해서 세례를 받아 나의 대속의 피가 너희에게 유효하게 하여라! 너희들은 아무 것도 할 것이 없다. 이것은 어떤 다른 것도 필요치 않은 선물이다 너희 모두가 살기 위해서 이 선물을 받아 들여라!”고 당부 하셨다. 이것은 분명한 주님의 약속이고 진실한 언약이다.
따라서 이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에게는 구원의 표로 성령을 선물로 주시고 이 은혜를 거절하는 자들에게는 당연히 불이 충만한 심판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고 고통과 절망이 함께하는 지옥에 던져지게 되는 것이다. 이 사실이 12절에서 확인되어지고 있다.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타작 마당’ 즉, 심판의 최종적인 결과가 지금의 선택에 의해서라는 사실을 선포하고 있다. 어찌 보면 사람들의 가치에서 볼 때는 어리석은 것처럼 들리기 때문에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일반적인 생각은 도를 얼마나 닦아야 신(神)의 경지(境地)에 이를 수 있는데, 단순히 믿고 순종하는 것이 너무나 가볍게 보이는 것이다. “십자가의 도(道)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 세상에는 많은 도(道)가 있지만 이것은 다 불확실한 길이다. 십자가의 도(道)만이 구원의 유일한 길이다.
십자가의 도(道)만이 창조주의 약속이기 때문에 순종과 불순종의 결과도 당연히 약속대로 이루어 질 것임을 의심할 수 없다.
Ⅱ.예수 그리스도의 세례와 하나님의 백성들의 세례.(13~17)
“이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서 요단 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신대, 요한이 말려 가로되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신대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요단 강 세례 요한의 세례 장소에 공생애를 시작하시는 예수께서 오셔서 세례를 요청하시는 예수께 “요한이 말려 가로되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14) 라는 반응은 당연한 것이었다.
세례는 회개의 구체적인 행위이기 때문에 어려서 엘리사벳의 배속에 잉태되어 있으면서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했던 세례 요한이(눅1:41)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오 자신을 시켜서 회개의 세례를 명령하시는 주님이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회개가 필요 없으신 지고지선(至高至善)의 하나님께서 단순한 인간인 자신에게 세례를 요청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사실을 잘 알았기 대문에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라는 반응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1.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15)
그러나 주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15f) 하셨고 이러한 주님의 당부에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15b)는 모습은 아름답기까지 하다.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for in this way it is fitting for us to fulfill all righteousness)”는 말씀은 목표만을 지향하는 현대의 우리가 귀 기울여 들어야 할 진리의 음성이다.
독생자의 위상보다도 하나님의 위엄(威嚴)스러운 약속을 채워가는 것이 중요하다. 죄인을 용서해 주시기 위해서는 독생자가 십자가에 온 인류의 저주를 대신 감당한 것도 하나님 아버지의 공의를 만족 시키기 위해서 였다면 그 공 생애를 시작하는 첫걸음부터 의로우신 하나님의 아버지의 뜻을 채워 가시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지금은 내가 하자는 대로 하여라. 우리가 이렇게 해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든 일이 이루어진다”(공동) “지금은 그렇게 하도록 하여라. 이렇게 하여, 우리가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옳다.”(표준)
2.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16~17)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1)예수 그리스도의 세례에 나타난 하나님 아버지와 성령의 임재는 장차 이렇게 세례로 거듭 날 모든 사람들의 모델이 되었다. 에덴 동산 이후에 범죄 한 인류는 하나님 아버지와의 교제가 단절되고 신령한 영적인 존재에서 영성을 잃어 버림으로 거의 동물로 전락하여 육의 사람이 되고 말았다. 사실 그래서 주님의 약속을 거부하고 육적인 삶을 고집하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짐승과 다름이 없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시49:20) 바울 사도는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롬8:5~8)고 이를 분명히 선언하고 있다.
이러한 죄의 사람, 세상을 향하여 가던 사람이 복음을 듣고 믿고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고 세례를 받으므로 죄 사함을 받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그러한 거듭난 사람에게 비로소 거룩한 성령께서 오셔서 그 사람을 성전삼고 그 사람과 임마누엘로 거하시게 되는 모습을 이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 오실 때 성령께서 임하시는 모습을 모델로서 나타내신 것이다.
우리는 죄인이 어떻게 성령을 받아 영적인 사람이 되는가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에 늘 명확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어떻게 성령을 받는 가에 대한 인간적인 얘기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성령이 이땅에 하나님의 사람들과 함께 하시기 위해서 내려오신 오순절 날 제자들의 가르침에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반응하는 백성들을 향하여 “…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행2:38) 라는 베드로 사도의 답변만이 가장 명확한 약속이 될 것이다.
하나님의 성령은 인간의 마음을 감화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드리도록 감동하실 수 있지만[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3)] 아직 성령은 죄를 씻지 못한 육의 사람과는 함께 하실 수 없는 것이다. 성령의 감화와 임재는 구별 되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성령을 거역하는 사람은 더 이상 방법이 없으므로 사하심을 영원히 받을 수 없다고 주님께서 선언 하신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마12:31~32; 막3:28~29; 눅12:10)
그러나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전도와 마음으로부터 감화 하시는 성령의 감화를 받아들이고 회개하고 세례를 받음으로 거듭난 생명들을 하나님의 것으로 인치시는 성령께서 선물로 오시는 것이다.[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고후1:22)] 그리고 그렇게 오신 성령은 우리와 영원토록 함께 하신다. 이것이 주님의 약속인 이상 의심할 필요가 없다. 언제나 우리의 감정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다.
그리고 우리는 늘 성령을 좇아 행하고[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5:16)] 술 취하는 대신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한다.[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엡5:18)]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사람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롬8:8)
여기서 우리의 또 작은 경계를 가질 필요가 있는 부분을 간과(看過)할 수 없다. 본문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라는 말씀을 형상화 해서 우리는 대부분 교회 강단 위 의자들의 뒤면에 비둘기들을 세기고 있다. 또 오순절 날 불의 혀 같은 모습으로 성령이 내려 오신 것으로 인하여 성령을 ‘불’이라고 표현하게 되는 것들도 조심해야 할 신앙의 자세이다. 위에서 우리가 상고한 대로는 ‘불’의 충만은 오히려 소돔과 고모라를 의미하는 심판에 더 가깝다. 마태나 누가는 인간의 눈으로 보기에 가장 비슷한 모습을 비유했을 뿐이지 성령은 비둘기도 아니고 불도 아니다. 우리는 십계명에서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계명을 자주 읽으면서도 하나님의 성령을 묘사함에 있어서 이런 실수를 자주 범하고 있는 것이다.
(2)거듭난 사람만이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심을 받는다.(17)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 오시기 전에도 아버지와 영화를 함께 누렸던 기뻐하시는 자였지만[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17:5)] 죄의 인간은 진노의 대상일 뿐이다.[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2:3)]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이 바로 자신의 죄로 인한 것임을 받아들이고 순종하여 세례로 거듭난 사람들을 향하여 하나님은 바로 그리스도와 같이 귀하게 보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오늘도 거듭난 그의 백성들을 향하여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기뻐하시고 귀하게 보신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귀하게 보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 아버지를 향하여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엡3:12)고 바울은 확신하고 있다.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복의 대상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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