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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마 4:18~25 2004-06-27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증거 하시던 주님은 이 귀한 구원의 메시지를 보다 효과적으로 天下各地 모든 人類에게 증거하기 위하여 그 복음을 위한 일꾼들을 택하시고 그들과 더불어 어두움에 잡혀 고통과 질병과 모든 약한 것으로 신음하는 인류를 치료하시는 은혜의 역사를 시작하신다. 우리는 마가복음(1:16~20)에서 이 제자들의 부르심의 같은 기록들을 볼 수 있고 누가(5:1~11-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베드로는 이 사건을 경험하면서 비로소 인간의 한계와 주님을 순종하는 것이 성공의 비결임을 확신하고 주님을 따르게 되었다. 요한복음(1:35~42-세례요한의 제자로 안드레가 먼저 주님을 만나고 베드로를 데려오고 ‘시몬-(히)들음’이라는 이름을 ‘게바’로 개명해 주심)에서는 사뭇 다른 모습을 읽는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하여 주님의 부름 받은 일꾼으로서의 자세와 이 죄악의 역사에 복음이 미치는 놀라운 주님의 은혜의 역사를 생각하면서 생명의 역사를 확신하고 우리의 미래를 복음에 확실히 세우는 구원의 은혜를 나누었으면 한다. 그리고 다음 시간부터는 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구체적으로 살피게 될 것이다.



Ⅰ.하나님나라를 위한 일꾼의 부르심과 거기에 응하는 자세를 본다.(18~22)

마가는 주님께서 제자들을 택하신 이유를 기록하기를 “또 산에 오르사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하심이러라”(막3:13~15)고 밝히고 있다. 이 말씀은 제자를 선택하시는 기준이 전적으로 주님의 의지로서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라고 하셨고 부르심의 목적 역시 주님께서 이땅에 오신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1.주님은 일하는 사람을 부르셨다.(18)“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 (21)“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이 그 부친 세베대와 한가지로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성경은 언제나 부지런함을 격려하면서 게으름을 경계한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롬12:11) 구약의 잠언서도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로 가서 그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 개미는 두령도 없고 간역자도 없고 주권자도 없으되, 먹을 것을 여름 동안에 예비하며 추수 때에 양식을 모으느니라, 게으른 자여 네가 어느 때까지 눕겠느냐 네가 어느 때에 잠이 깨어 일어나겠느냐,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눕자 하면, 네 빈궁이 강도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같이 이르리라”(잠6:6~11, 26:13~16)는 경계를 주고 있고 모세도 야곱도 다윗도 엘리사도 모두 열심히 일하는 가운데 주님의 쓰임에 부르심을 입었다.

주님께서 불러 쓰신 제자들도 직업이나 지식이나 생활 수준은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모두가 일하는 가운데 부르심을 입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하나님께서는 게으른 사람을 결코 기뻐하지 않으신다. 어떤 경우도 게으름은 신앙 속에서 정당화 될 수 없다. 모두 부지런 한 자들을 불러서 쓰셨다. 공중 나는 새를 먹이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부지런함을 기뻐하시고 쓰시는 것이다.

오늘날 세상일을 적극적으로 열심히 하지도 않으면서 어려움을 당하고 “나는 세상 일을 아무리 하려고 해도 안되서 하나님의 일(목회)을 하기로 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그런 사람이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 사실과 다른 것을 본다.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 참으로 원하시는 사람은 강단에서 말씀을 증거하고 외치는 사람도 중요하지만 세상의 삶의 현장 속에서 교회와 그리스도인을 비웃는 불신의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을 향하여 무릎을 꿀면서 부지런하고 경건하여 요셉처럼, 다니엘처럼 모범 되는 그리스도인을 주님은 더욱 필요로 하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있다.



2.주님의 부르심은 명령적이다.(19)“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21)“…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이 그 부친 세베대와 한가지로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주님은 제자들을 선택하시거나 명령을 주시면서 “어때 비릿내 나는 이 일보다는 나를 따라 이스라엘 여기 저기 다니면서 같이 말씀을 전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깊이 생각해 보고 내일 다시 올 테니 결정하도록 하렴!” 그런 식으로 의사 타진을 하신 것이 아니라 부모와 더불어 일하는 제자들에게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일방적으로 명령하셨다. 누가복음 14장에서 주님께서는 “26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27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33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이것은 적어도 전적으로 주님 만을 위해서 사는 사람(주님의 일을 전담하는)은 물론이거니와 모든 주님의 제자들에게 해당되는 말씀이다. 평상시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 것 같을지라도 주님의 백성들에게는 이런 시험이 있는 경우가 반드시 있다.

“나를 따라오너라” 거나 “따르라”는 의미를 깊이 헤아려야만 한다. 이 말은 언제나 따르는 대상인 예수 그리스도를 본 받아야 한다는 의미다. 주님을 섬기는 사람이면 누구나 같은 원리이다. ①어떤 경우에도 예외가 없이 주님이 하시는 것처럼 행하는 것이 제자요 따르는 것이다. ②어떤 경우에도 따르는 주님을 앞서서는 안 된다는 의미이다. 구약의 나오미를 따르는 룻의 모습에서 이를 배울 수 있다. “그들이 소리를 높여 다시 울더니 오르바는 그 시모에게 입맞추되 룻은 그를 붙좇았더라”(룻1:14) 이후에도 룻은 무엇이든지 시어머니 나오미를 앞서지 않고 묻고 순종하는 모습을 읽을 수 있다.

오늘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피 흘리신 주님은 우리에게 “그래 너가 이것 해 줄 수 있겠니?” 라고 물으시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해라!”고 명령하신다. 아직 죄의 성품을 갖은 우리는 주님을 따르는 것이 필요하고 이것은 어느 순간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 이땅에 다시 오시거나 내가 이 세상을 떠 날 때까지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당연한 약속이 우리가 세례를 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을 때 계약되어졌다.



3.순종은 즉각적이어야 한다.

“저희가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좇으니라”(20) “저희가 곧 배와 부친을 버려 두고 예수를 좇으니라”(22) (막1:20)“곧 부르시니 그 아비 세베대를 삯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 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

인간적으로는 너무하다 싶을 정도이고 저래도 되는가 싶을 정도이다. 아직도 세상에 미련을 두고, 세상의 습성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은 이런 입장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을 것이다.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아브라함 조차도 그러질 못했다. 사도행전 7:2b~4에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가라사대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창12:1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 아비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시방 거하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 우리에게도 가족이 장애가 될 수도 있고 사업이 장애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누가복음9:61~62에서 “또 다른 사람이 가로되 주여 내가 주를 좇겠나이다 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허락하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는 말씀을 하심으로 우리가 주님을 따르는데 장애를 느낄 정도로 우유부단 한 것을 경계 하신다.

주님은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으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우주의 창조자이시고 주인이실 뿐 아니라 자신의 피로 우리를 죄에서 사 주신 생명의 주인이시기 때문이다. 할렐루야!

우리가 오늘도 주님이 불러 시키는 일에 망설인다면 주님은 진정한 주님이 아니시다. 오늘 신앙 하는 많은 사람이 자신이 주인인 것처럼 행동하고 살며 심지어는 주님을 종처럼 취급하는 모습을 보는데 참으로 간 큰 행동이다.

어떤 경우에 이런 주님의 명령을 전하는데도 “그것은 성경에나 있는 이야기고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고 변명을 한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아직도 구원은 성경 속에나 있는 것이지 자신의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우리의 삶이 성경과 다르다면 그 구원은 보장 받을 수 없고 주님의 재림은 그러한 사람에게는 기쁨이 아니라 비극이 될 것이다.



Ⅱ.천국복음을 통한 구원의 역사를 확인하게 된다.(23~25)

1.복음은 온 세상 누구에게나 필요한 것이다.(23)“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 (24)“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 (25)“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 강 건너편에서 허다한 무리가 좇으니라” 여기에 나타난 언급은 당시 이스라엘 근방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다. 그러나 주님은 구속의 역사를 완성하시고 제자들을 향하여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마28:19) 명하셨고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막16:15~16)고 명령 하셨다.

적어도 주님의 십자가의 효력이 미치지 못할 인류는 아무도 없다. 역사의 중심에 오셔서 온 인류를 위하여 피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혜는 십자가 사건 이후뿐만 아니라 십자가 이전 아담 이후의 하나님을 순종한 모든 사람들의 죄까지도 도말 하는 능력이 있다. 히브리서 기자는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이를 인하여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히9:14~15)고 증거 함으로서 이를 분명히 하고 있다.

십자가의 은혜에서 제외되어야 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만 불신으로 전하는 말씀과 성령의 감화를 거절하는 사람만이 제외될 뿐이다.

[273:1]“저 북방 얼음 산과 또 대양 산호섬, 저 남방 모든 나라 수많은 백성을, 큰 죄악 범한 민족 다 구원 얻으려, 참 빛을 받은 우리 곧 오라 부른다”



2.복음은 전파하는 것이다.(23)“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전파, khruvssw, (khvrux), kepysso]라는 말은 ‘공포하다, 발행하다’(고후4:5)는 어떤 경우에는 일방적인 말씀이기도 하다. 이러한 내용은 오히려 구약에서 더 강하게 나타난다.

에스겔2:5에 “그들은 패역한 족속이라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들 가운데 선지자 있은 줄은 알지니라” 하였고 7 “그들은 심히 패역한 자라 듣든지 아니 듣든지 너는 내 말로 고할지어다” 11 “사로잡힌 네 민족에게로 가서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 하시더라”는 말씀을 읽을 수 있다.

그러므로 복음을 가졌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위엄과 권위를 가지는 것이다. 그것은 가진 자의 권위가 아니라 보내는 분의 권위와 위엄 즉, 하나님의 명령을 전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므로 정말 위엄스런 모습을 가지려면 복음을 전하면 된다. 이것을 듣고 순종하는 것과 거절 하는 것에 따라 운명이 달라지기 때문에 정말 대단한 권위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원히 살 수 있는 복음을 주면서 기죽거나 부끄러워 할 필요가 없다. 순종하면 살고 거절하면 멸망이다. 이보다 더 큰 권세가 우리에게 있겠는가? 오늘도 우리는 우주의 주인이신 왕 중의 왕의 명령을 가지고 나가는 것이다. 믿습니까? “전파”되는 복음은 역시 전파 된다. 오늘 내가 전파 하는 복음은 또 다른 사람에게 전파되고 또 다른 사람에게 전파되어 땅끝을 향해서 가는 것이다.



3.복음은 인간의 모든 비극과 고통과 절망을 치료하는 것이다.(23~24)

(23)“…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24)“…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색 병과 고통에 걸린 자, 귀신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저희를 고치시더라”

복음은 치료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믿습니까? 질병이나 불편은 근본적으로 죄가 이 땅에 들어 옴으로부터 왔다.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창3:17~18)는 형벌의 선언은 불편을 모르는 인류에게 고통과 저주를 가져오게 되었다.[Disease] 오늘도 우리의 주위의 모든 부조화는 죄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죄의 저주가 해결되면 불편이 해소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이사야는 이 사실을 예언한 바 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53:4~5) 그러므로 주님의 치료는 육신적인 치료보다도 근본적인 치료를 목표한다. 보이는 모습에서 많은 불편을 치료하시고 온 갓 질병을 고치시는 주님의 사역은 전인적인(영육의) 치료를 보여 주신 것이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눅4:18~19) 출애굽기15:26에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하셨고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같이 뛰리라”(말4:2)

이 불편한 인류의 관계(아랍권과 이스라엘, 서구와의 부조화도)의 해결은 UN이나 NATO나 전쟁이 아니라 복음 뿐이다. 결국 하나님과의 화해(reconcile)는 모든 것에 조화(harmony)를 가져올 것이다. 결국 진정한 “사랑의 묘약[(L'Elisir d'amore G.)”[도니체티(Gaetano Donizetti 1797∼1848)의 희가극. 2막. F. 로마니가 쓴 것으로 특히 곡 중의 테너 아리아 ‘남몰래 흘리는 눈물’은 유명하다.]은 인간의 사랑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사랑, 이것만이 인류를 죽음과 저주와 슬픔과 미움과 반목에서 구원할 유일한 치료제이다.



Ⅲ.오늘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 받은 나(우리)의 모습과 복음의 역사를 확인하자.

1.주님께 부르심을 받았음을 확신하는가? 우리는 적어도 복음을 증거 할 때만은 하나님의 권위와 능력을 힘입는 것이다. 이 엄청난 약속은 주님의 부름 받음에 확신을 가진 자들만이 누리는 권능이다. 주님은 충성 된 자, 일하는 자, 부지런 한 자를 부르시며 하나님은 우리에게 형편을 묻고 오겠느냐고 의사를 물으시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 권위로 우리를 부르시고 여기에 이유없이 순종하는 자를 기뻐하신다. 이것은 부르심 뿐만 아니라 주님의 일에도 마찬가지다. “할 수 있겠니?”가 아니라 “오라, 하라! 그러면 내가 능력으로 같이 하여 감당케 할 것이다!” 약속하신다.



2.우리는 복음을 전파하고 있는가? 죄를 범할 수 밖에 없는 이 죄악의 땅에 복음이 필요 없는 사람은 없다. 복음은 받은 자마다 놀라운 삶의 변화를 일으킨다. 우리는 복음을 누리고 있는가? 그리고 그 변화는 다른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그로 통해서 복음은 확산되어지는 것이다. 복음 만이 이 인류의 비극적인 일들의 유일한 해결책이다. 죄와 죽음과 질병들과 고독과 자살과 고통과 고민과 적대감과 불화와 미움과 아픔, 이 모든 인류에 있어서 죄의 결과로 나타난 부정적인 것들을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은 골고다 언덕에 피 흘리시고 죽으셨다가 부활하시고 승천하셨다가 다시 오실 온 이류의 구세주인신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다.



3.오늘도 주님의 명령에 절대적이라면 우리 모두는 제자의 일을 감당하고 권능의 삶을 살 것이다. 온전히 들여진 순종의 삶만이 이 모든 것들을 가능케 할 것이다. 주님의 복음을 받고 살면서도 세상의 사람들과 다름없이 죄와 절망과 공포와 일에 공부에 시간에 끌려 다닌다면 그것은 복음을 온전히 누리는 삶이 아니다. 주님께서 진정으로 우리 삶의 주인의 자리에 좌정해 계신다면 적어도 이런 일은 없을 것이다. 자신과 확신과 건강을 영육간에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