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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마 5:1~6 2004-07-04
복이 있나니...[1]  
우리는 이 말씀을 산 위에서 가르쳐진 보배로운 말씀이라고 이름한다(5~7장). 그러나 역시 이 말씀의 가치는 우리의 삶 속에서 이루어질 때 그야말로 산상보훈(山上寶訓)이 될 것이다. 같은 내용을 기록하는 누가복음은 이 말씀의 진행을 마태복음과 조금 다르게 기록하고 있는데 이 말씀(6:20~23)이 기록되기 바로 전의 한 마당의 말씀은 산에 오르신 주님께서 밤이 맞도록 기도하시고 12제자들을 택하신 후 산에서 내려 오시다가(6:12~19-17, 예수께서 저희와 함께 내려오사 평지에 서시니-평지의 복음)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말씀(6:20)으로 기록하고 있다. 주님의 가르침은 어디가 되었든 복되고 생명을 풍성히 주시는 사람들의 귀중한 교훈이 되었다.

7장까지 계속되는 이 교훈의 말씀은 하늘나라 백성의 삶의 모습을 말씀하시는 것이라는 데 이의를 갖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하늘나라의 백성다움이 어떤 것이며 삶의 방법과 관계를 가르치신 말씀이라고 보고, 팔복(八福)이라고 하는 이 천국백성의 헌장의 서론 부분에서도 첫 부분을 오늘 상고하게 될 것이다. 결론부터 말씀 드린다면 우리는 이 말씀을 들으면서 나 자신이 과연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 됨을 견주어 비교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여기서부터 말하는 8가지의 복은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서로 연관성이 있으면서 점점 하늘의 핵심으로 나아가는 진행을 보이고 있다. 겸손한 사람만이 복음의 문에 들어서게 되고 그 문안에 들어서면 자신의 비극적인 죄를 깨닫고 탄식하게 되며 애통으로 회개한 삶은 세상과는 다른 온유한 심령을 갖게 되고 의를 목말라 하는 변화된 삶이 되며 진정한 하늘의 의를 맛본 사람은 그렇지 못한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기게 되며 이런 자세에서 마음의 청결은 유지 되며 사람 간에도 화평을 세워가며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 것 조차 기뻐하는 주님의 성품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말씀들은 막연하고 먼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 각자 자신의 삶에 관한 이야기요 간증이 되어야만 한다.



Ⅰ.세상의 삶의 논리가 아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표면적으로 이해하면 아무 가치를 발견할 수 없다. 세상에서야 어찌 되었든 부유한 것이 편하고 웃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고 온순한 사람을 바보취급하고 어떤 수를 쓰든지 싸워서 남을 굴복시키고 이기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라고 하고 의는 관계없고 돈을 사랑하는 것이 편리를 가져다 주는 지금길이라고 해서 로또 복권이라도 계속 사면서 맞기를 바래서 당첨 일을 손꼽아 기다리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모습이고 그런 사람들을 현명하다고 하는 세상에서 육신적으로 볼 때는 정말 어리석게 보이는 이런 사람들이 복 있는 사람이라니 오늘 일반적인 생각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불가능한 말씀들을 주님께서 하고 계시단 말인가?

또 오늘 신앙 한다고 하는 사람들 속에서 조차 이 주님의 가르침이 더 이상하고 어색하게 들릴 정도로 교회가 세상에 가까워 진 느낌이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도 모두 현실 속에서 손으로 만져지고 눈으로 보고 하는 오감으로 느껴지는 행복만을 복으로 여기면서, 내세나 천국을 위해서 현실을 포기하고 고통 하는 사람들은 어리석은 사람으로 취급하는 안타까운 상황들을 보면 이 가르침을 주신 주님께서 이 역사를 어떻게 보실까 심히 안타깝기까지 하다.

분명한 것은 성경이 가르치고 주장하는 것은 언제나 짧은 이 세상의 삶 보다는 영원한 세계에 더 가치를 두라고 경계를 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참으로 사랑하십니까? 이것은 나이 드신 어르신들 만의 기대감이 되어서는 안 된다. 오늘 나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이 분명하다면 이 말씀이 더 호소력 있게 들려야 하고 오히려 그렇게 살지 못함을 탄식할 수 있는 자세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분명히 이 세상의 삶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되며 되는대로 살아서도 안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역시 세상의 영광을 위해서만 사는 사람들이 아니다. 이 땅에서의 삶조차도 오히려 하늘의 논리와 방법으로 살아야 하고 세상과 하늘의 갈림길에서는 언제나 하늘의 것을 먼저 선택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

당시의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도 하나님의 구원은 외적이며 물질적인 것으로 이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가복음에서는 오히려 단순하게 표현하고 있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이제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눅6:20b~21f)

언제나 천국은 이 세상의 것을 뒤집어 놓은 정반대의 논리이다. 언제나 절대적인 진리는 역설적(逆說的-paradox)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뒤집어서 이해를 해 보면 오히려 더 확실해 진다. “육신이 부요한 자는 복이 없나니 지옥이 그들의 것임이요, 웃는 자는 복이 없나니 그들이 책망을 받을 것임이요, 포악한 자는 복이 없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지 못 할 것임이요, 악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없나니 그들이 굶주릴 것임이요”(3~6)

이런 입장에서 진리를 이해 하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것도 아니다. 철학(哲學)을 공부해야 진리와 생명을 이해 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감사할 필요가 있다.



Ⅱ.사람에게 있어서 진정한 복이 어떤 것인가를 가르친다.

[헬, makarios, (makarizo)] blessed; 은총을 내리다, 복을 선언하다. 아름답게 하다. 축복하다(수동적 형태) 그러므로 복(福)이란 스스로 취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지는 것이요, 얻는 것이다.

사람들은 행복을 이야기 할 때 동서양(東西洋)이 다르고 민족간(民族間)에 다 다르다. 우리 문화권(文化圈)에서 최고의 복으로 치는 오복(五福)을 보더라도 ①수(壽), ②부(富), ③강녕(康寧-몸이 건강하고 마음이 편안함), ④유호덕(攸好德-도덕을 지키기를 낙으로 삼는 일), ⑤고종명(考終命-제 명대로 살다가 편히 죽음)을 꼽지만 역시 육신의 삶에 국한 되는 것을 본다. 사실 육신으로 칠 때는 여기에 더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사람이란 존재는 영원과 관련된 존재이고 우리 육신의 삶은 영원으로 가는 출구일 뿐이라는 사실을 성경이 아닐지라도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 하고 있는 부분들이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있어서는 육신의 삶 보다도 무덤너머에 있는 영원(永遠)이 더 중요하고, 진정한 지혜자는 육신의 삶의 성공보다도 영원을 준비하는 자세일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누가 죽어 봤어, 육신 살기도 어려운데 무슨 확실치도 않은 영원을 위하라는 말이냐?”고 항변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죄진 인생은 영원을 볼 수 없고 거듭 난 자라야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다(요3:3)고 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다. 세상 사람들이야 볼 수 없고 알 수 없기 때문에 그렇다고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이야 그렇게 마구 살아서는 안 된다. 사람에게 진정한 행복이 무엇임을 아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 산상보훈에서 주님이 가르치시는 복은 적어도 영원에 관련된 복일 뿐만 아니라 사람이면 반드시 받아야만 할 복을 일깨워 주고 계신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언급하는 복은 하나님 앞에서의 복이요 진정한 복이 어떤 것인가를 가르친다. 진정한 복이란 한 마디로 말해서 하나님의 자녀 즉, 천국 백성이 되는 것이고 천국백성의 삶은 어떤 것인가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땅에 영광은 낡아지는 것이요 반드시 버리고 가야 할 것들이기 때문에 영원에는 가치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일찍이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이를 알려 주셨고(사40:6~8) 베드로 사도는 이를 다시 인용하기를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벧전1:24~25) 우리는 2004년이 시작되는가 했더니 벌써 오늘이 7월 첫 주님의 날이니 절반이 지나가 버렸다. 그러므로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짧은 육신의 삶보다도 영원을 위한 행복에 오히려 육신의 삶을 투자하는 사람들이다.

이 땅에서 우리는 행복을 위해 투자한다고 하는 것이 오히려 불행을 만드는 그런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우리의 입장에서는 지혜롭게 해 보려고 머리를 짜내어 하는 것들이 오히려 비극을 부르고 마는 예는 얼마든지 있다.) 또 미래를 행복하게 살아보겠다고 오늘을 희생해 보지만 그 결과는 보장되지 않는 것도 우리네 짧고 짧은 인생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에게 손해나게 하실 분이 아니오 거짓을 가르치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불행을 영원히 제거하시고자 자신이 십자가에 고난의 피를 흘려 주신 것이고 우리를 영원한 행복으로 대려 가시려고 죄와 상관없이 그를 바라는 모든 자들을 위하여 이 땅에 두 번째 재림하실 것이다.(히9:28) 그 역사적인 순간을 기대하며 사는 사람들, 그리스도인이란 바로 그런 사람들이다. 믿습니까?

주님은 이사야를 통해서 권면 하신다.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55:2) 진정한 기쁨이 되지 못할 것을 위하여 돈을 쓰고 행복이 아닌 것들을 위하여 시간을 소모하느냐? 탄식하시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진정으로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아는 대로라도 살아야 한다. 오히려 그렇지 못한 가련한 사람들을 일깨워야 하지 않겠는가? 주님께서 일깨워 주시는 이 교훈들에 생명이 풍성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 …



Ⅲ.하나님의 아들을 소유한 사람에게는 이 말씀은 자연스러운 말씀이다.(3~6)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슬퍼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다. 온유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땅을 차지할 것이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배부를 것이다.”

이 말씀들은 천국시민의 헌장이라고 했다. 이제 우리는 이 말씀을 좀더 가까이 이해하여 우리 자신들의 말씀으로 소화해가야 하겠다.



1.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3)

이 말씀이 가르치는 바대로는 마음은 비울수록 좋다. 현대인들의 심령은 창고처럼 온 갓 너저분한 것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정치하는 사람들도 ‘마음을 비웠다’고 말하면서도 자신의 욕망을 비우지 못해 언제나 추하고 초라한 모습으로 전전긍긍하는 것을 본다. 온 갓 욕심으로 고물 창고가 되어 버린 인간의 마음은 죄의 결과이다. 죄의 욕구는 절대로 채워지지 않는 지옥과 같다. 조금만 마음을 비울 수 있으면 더 행복할 수 있는데도 오늘 이 시대의 역사 위를 사는 우리 많은 사람들은 그 심령을 비우지 못해서 많은 것을 잃어 버리며 산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가르쳐 말하시기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빌2:5~7) 라고 증거하고 있다. 바울이 왜 예수 그리스도의 이러한 모습을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는가? 그것은 우리가 그와 같이 살아야 하기 때문에 그렇게 살아야 행복해 질 수 있기 때문에 안타까운 마음으로 이렇게 당부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의 우리 그리스도인의 심령은 성령의 전으로 주님께서 계시는 왕좌가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 마음 구석 여기 저기에 세상의 옷 갓 것들로 역시 지저분한 창고를 만들고 있어서 주님께서 우리 마음에 계시기에 숨막혀 하실 정도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주님께서 편히 계실 정도로 깨끗하게 비우지 못하는 이상 우리에게 믿음으로 인해 오는 희락은 감소될 수 밖에 없다.

바울 사도는 경고하고 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전3:16~17)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으로 오셔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시므로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2:9~11) 하신 것처럼 천국은 심령이 가난한자 오로지 주님만을 주인으로 모신 자들의 것이다. 믿습니까?



2.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4)

오늘 죄로 인하여 우리의 감정은 너무나 뒤틀려 있다. 참으로 웃어야 할 것은 웃어주지 못하고 슬픔에 동참하지 못하는 완악하고 거친 마음들이 되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롬12:15)고 왜 너무나 당연한 것을 믿음의 백성들에게 당부를 하고 있는 걸까요? 야고보도 권하기를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약4:9) 라고 권한다.

눈물도 위로 받을 눈물이 있고 얄미운 눈물이 있다. 참으로 자신의 죄를 깨닫고 슬퍼하는 눈물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눈물이지만 동정을 얻어내기 위해서 가식으로 흘리는 눈물은 오히려 가증한 것이다.

오늘 우리는 죄에 대하여 다윗처럼 탄식하지 못한다. “내가 탄식함으로 곤핍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시6:6) 진정한 회개만이 참 위로를 얻는다. 그럼에도 오히려 세상의 다른 사람들이 가진 것을 갖지 못해서 안타까워하고 힘들어 하는 것들을 인내를 잃어 버린 젊은이들에게서 더러 본다.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함에 슬퍼하고 탄식의 눈물을 흘리는 자만이 진정한 용기를 하나님으로부터 받고 날마다 죄를 회개함으로 통분하며 애통하는 자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로를 누릴 것이다. 특히 여기 “위로”는 “보혜사” 라는 성령의 별명과 어근이 같다(parakaleo). 여러분 모두가 이런 이 세상의 죄에 대한 탄식과 자신이 유약함에 탄식함으로 주님으로부터 큰 위로를 얻는 모두 되시기를 …



3.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5)

옛적에 척박한 광야에서도 하나님의 지시와 음성을 온유한 심령으로 순종하던 자들이 가나안을 유업으로 얻었다. 동물의 세계에서도 포악한 동물들은 오래 살아 남지를 못했다. 바다의 생선도 성격이 급한 것들은 올라오자 말자 제풀에 죽어버린다. 그러나 느긋한 성격의 고기들은 오래 사는 것을 본다. 거북이 같이 느린 짐승은 오래 살지만 급한 짐승은 오래 살지 못하는 것을 보면 역시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일 수 밖에 없다. 주님께서 인생들을 자신에게 초청하시면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11:29) 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참으로 한없이 온유하신 분이시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살아 있다.

온유는 인내 즉 오래 참음과 연결되고 베드로 사도는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3:9)는 하나님의 한량없으신 온유를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다. 주님께서 우리처럼 급하시다면 우리 모두는 벌써 죽었을 것이다.

바울 사도는 이 온유를 성령의 열매로 언급하고 있다.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5:23) 구약의 애굽에서 가나안 건너편까지 이스라엘을 이끌었던 모세를 가르쳐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민12:3)고 평가하고 있다.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고 증거 하던 일꾼들도 다 온유한 사람들이었고 시편 기자가 바로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이 말씀을 기록하고 있다.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시37:11) 온유는 우리의 심령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시고 그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전체의 삶이 지배될 때만 가능하다. 온유한 자만이 쇠하지 않고 더럽지 않는 천국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다.

하나님의 선하신 역사를 믿을 수 있는 사람들 만이 느긋하게 온유함을 가지고 기다릴 수 있다.



4.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6)

이 주님의 가르침은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 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시42:1~2) 라는 시편 기자의 고백을 배경으로 하는 말씀이다. 오늘 나는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목말라 있는가?

오늘 우리 시대의 사람들은 술에 목말라 있고, 돈에 목말라 있고, 영광에 목말라 있고, 칭찬에 목말라 있고, 위로에 목말라 있고, 온 갓 것들에 갈증을 가지고 굶주려 있다. 이런 갈증은 채워도 마셔도 더 갈증을 느낄 뿐이다. 그러나 인간이 진정으로 갈급 해 해야 하는 것은 우리 영혼을 시원케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굶주림과 갈증을 느낄 수 있을 때 갈증을 온전히 면할 수 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사55:1)는 주님의 초청에 응답하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하고자 굶주려 있는 그런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으로부터 만족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