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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베 전도자
마 5:13~16 2004-07-18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우리는 이 4구절의 말씀에 대단히 무개를 느낀다. 이 말씀은 설교단상에서 참 많이 증거 되고 기도의 요청에서도 드려지는 말씀이다. “소금 되게 해 주시고 빛이 되게 해 주십시오!” 그렇게 기도하는데 왜 안될까? 주님께서 이 좋은 기도를 외면하실까? 전혀 아니다. 입술로 기도는 그렇게 하면서도 삶은 따로 이기 때문이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참으로 듣기 좋은 말씀이다. 그러나 역할을 제대로 못할 때는 부담되는 말이기도 하다. 제 자신이 교회에 역할을 바로 감당하지 못하면 ‘전도자’라는 칭호가 부담스럽고 장로도 집사도 기관장도 구역 총무도 마찬가지다. 역할을 바로 하지 못하면 그 역할이 부끄럽고 죄송스럽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맡기시던 그 역할을 감당하게 하시는 주님이시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도 마찬가지다. 다만 문제 되는 것은 주님의 말씀을 바로 순종하지 못하고 주님의 뜻보다는 내 생각이 앞서고 주님일 보다는 내 일이 더 소중히 여겨질 때는 그 소중히 여기는 나 자신의 일도 안되고 주님 맡기신 역할도 엉망이 되고 말고 사람들에게나 하나님께나 부끄러울 뿐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이러한 교훈을 주셨다고 믿는가? 새 예루살렘 천국에는 모든 것이 빛나는 것 뿐이다. 문마다 보석이고 바닥은 황금과 같이 빛나는 것들이고 무엇보다도 빛이신 하나님이 그 가운데 계시기 때문에 해와 달이 쓸데 없다고 했다. 그 천국의 백성도 빛이 나는 것은 당연하지 않는가? 우리는 이 부패한 세상에서 아파트에서도, 길가다가도, 차를 타고 가다가도, 악취로 인하여 수시로 코를 거머쥐지만 그러나 천국에서는 그런 곳이 결코 없다. 썩은 냄새가 없는 곳 눈살 찌푸릴 필요가 없는 곳도 회복된 새 예루살렘이다.

주님께서 마지막 때가 되면 사랑이 식어지고 불의가 관영 하게 될 것이라고도 말씀하셨지만 연결해서 하시는 말씀이 “…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18:8) 하신 것을 보면 역시 믿음의 사람들이 신앙을 잃어 갈 때 마지막이 온다는 두려운 교훈이기도 하다.

오늘 이 말씀을 다시 상고하면서 우리의 역할과 삶의 자세를 주님의 약속 위에 온전히 세우는 …



Ⅰ.그리스도인의 역할과 그 역할을 하지 못할 때의 결과.(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왜 주님은 역할의 결과를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부정적인 경계를 주실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너희가 소금역할을 잘하면 너도 복되고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인생 사는 맛을 찾을 것이다. 그러니 얼마나 좋으냐?”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 이 말씀 속에는 이미 결과가 다 들어있기 때문에 생략하시기도 하셨겠지만 아마도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처럼 역할을 잘 못할 것을 이 말씀을 주시면서부터 아셨나 보다. 소금의 역할은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쓴다. 나물을 무치면서도 국을 끓이면서도 대부분 간을 잘 맞춘다. 그러나 우리가 세상에서 이러한 소금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즉, 자신을 소금으로 쓰는 데는 너무나 서투르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하고 많은 사람들 중에 왜 나를 택하시고 사랑하시는가를 우리는 말씀과 더불어 깨달아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죽겠다고, 인생 사는 맛이 안 난다고 야단이다. 그 인생의 맛을 찾아 줄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 인 나(우리) 자신이다. 그것은 나 자신이 먼저 맛있는 인생 살맛 나는 삶을 사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것은 그냥 세상 사람들 사는 것 따라서 물결 따라 유행 따라 살라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는 고통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확실히 아닐 것이다.

먼저 소금을 불변하는 언약의 관계 속에서 생각해 보고자 한다.

하나님은 아론에게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는 모든 성물은 내가 영영한 응식으로 너와 네 자손에게 주노니 이는 여호와 앞에 너와 네 후손에게 변하지 않는 소금 언약이니라”(민18:19)는 신기한 말씀을 주신다. 제사장인 레위지파 대대로 하나님 앞에 바쳤던 고기를 응식(應食) 즉, 직무에 따라서 보수로 받는 식물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이를 가리켜 불변하는 언약 즉, 소금언약이라고 말씀하셨다. 분명히 레위 가문의 제사장직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드린 한번으로 완성된 제사로 끊겨졌음에도 이 약속이 영영한 소금언약이라는 사실에 이해가 쉽지 않다.

그러나 이 언약이 끊긴 것이 아니라 오늘도 지속되고 있는 이유는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은 모두가 제사장들이고 그 완전한 희생 제물이신 그리스도를 기념으로 먹는 행위는 갱신된 계약 속에서도 지속되고 있다고 하는 데서 하나님의 약속은 역시 불변하는 소금 언약인 것이다. 불변하시는 하나님의 소금 언약처럼 우리가 처음 받은 은혜와 감격을 잃지 않을 때 우리는 비로소 세상의 부패를 방지하는 소금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신앙 생활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그리스도의 은혜를 인하여 감격하고 이제 영원히 구원을 주신 주님을 위해 살겠노라고 눈물로 언약을 맺은 경험들이 있을 것이고 그런 경험 한번쯤 없이는 신앙의 맛을 모르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렇게 감격에 몸을 떨며 드린 언약을 시간이 가면서 주님은 전혀 변하지 않았는데 나는 시들어지고 권태기를 맞은 부부 관계처럼 밋밋한 상태에서는 결코 세상을 변화 시킬 정도로 쓰임 받는 소금의 역할은 안된다.

이스라엘의 남쪽 유다 왕 아비야는 북쪽의 여로보암 왕이 자신보다 갑절이나 많은 군대(80만)로 쳐들어 올 때 그의 군사들 앞에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소금 언약으로 이스라엘 나라를 영원히 다윗과 그 자손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알 것이 아니냐”(대하13:5) 면서 북조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버렸으므로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능히 승리하게 하실 것이라는 격려로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여 복병까지 배치한 여로보암의 군사 50만을 치고 대승을 거둔다.

이것은 오늘 우리 시대의 교훈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불변하시는 약속을 확신하고 우리를 온전히 하나님께 드릴 수만 있다면 마귀사탄이 어떤 간교한 방법을 동원한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넉넉히 이길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세상의 썩음을 방지하고 맛을 찾아 주는 소금으로 세우신 불변하는 약속에 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주님은 오늘 본문에서 다른 것 보다도 ‘소금의 맛’을 특히 강조하고 계시다. 이 말씀에서 역시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인생 사는 맛을 찾아줘야 한다는 교훈이다. 세상에 아무리 신나고 즐거운 곳이 있다고 하나님의 나라에 비길 수 있을까? 사람 사는 맛이 나는 곳, 사람이 사람 대접 제대로 받는 곳이 천국이다. 그 아름다운 신천 신지(新天 新地)에 합당한 사람이라면 이 땅에서도 그러한 모습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새 예루살렘 하나님의 제단으로부터 흘러 내리는 생명수의 강은 만물을 치료하고 그 생명수 강변의 과목은 달마다 생명과 (生命果)가 열려서 기쁨과 만족을 줄 것이다. 그런 영광의 나라 시민이라면 역시 불편하고 메마른 세상이지만 주변의 사람들에게 사는 맛을 나게 해줘야 하지않겠는가?

그리스도인은 회복된 인생들이다. 더 이상 저주나 미움이나 절망은 벗어 버린 사람들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천국시민의 자격을 회복 받은 사람들로서 인생의 목적이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아는 사람들이다.

물론 고통이 없어진 것은 아니다. 고통이 있다고 할지라도 죄와 싸우는 고통, 의로움을 위한 십자가를 지는 고통이 있을 뿐이다.[시23:4사망의 음침한 골자기]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인생의 맛을 회복 받은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울타리뿐만 아니라 외부적으로도 그렇게 나타나야 한다. 여러분 인생 사는 보람과 행복을 느낍니까?[이것은 반드시 물질 적인 것을 기준해서 헤아릴 필요는 없다. 우리가 모든 것이 다 갖춰져야 꼭 행복한 것은 아니다.] 그래야 다른 사람들이 그 행복한 삶에 참여하려고 할 것이다.

“예수 믿읍시다.” “아이고 예수 믿는 사람들도 꼭 같습디다. 그러니 뭐 시간이나 버는 것이 났지…” 교회는 이 지상에서 가장 행복한 곳이다. 그렇지 못하다면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 이것은 억지로 그렇게 고백하게 만드는 억지 춘향이 되어서는 안된다. 누가 교회를 행복한 곳으로 만듭니까? 주님이 그렇게 만드셨고 오늘 모든 교우들이 그렇게 만든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주님의 교회에 행복을 만드는 도구들이 되어야 한다. 거치는 반석이 되고 쓴 뿌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 서로 만나서 얼굴만 봐도 평안해지고 위로가 되고 격려가 되는 특별한 장소, 그래야 사람들이 오게 되어 있다.

이러한 분위기는 이미 허락되어 있고 자신들은 다 죽고 그리스도로 살고 성령을 의지하여 사는 사람들로 채워져 있다면 당연히 그럴 수 밖에 없다. “교회 나가십시다!” “아이고 그 교회 아무게 보면 가고싶은 생각이 안나요…!” 주님을 믿는 감격으로 교회 오면 모든 세상의 설움과 아픔이 다 사그라지는 그런 행복한 세계, 그곳이 바로 이 절망의 세상에서 따로 불러냄을 받은 행복한 사람들이 모인 교회다. 그래서 초대 교회는 날마다 그런 감격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더해졌던 것이다. 여러분 모두가 우리 교회가 진정으로 행복한 교회가 되시기를 …. 여러분 신앙하면서 사는 보람과 행복을 느낍니까? 그래야 남들을 참여 시킨다. 여러분 모두가 행복한 사람들이 되십시오. 그래야 교회가 행복하고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삶이 되지 못하면 연이어지는 두려운 음성을 듣게 된다.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우리 그리스도인이 인생 사는 맛을 잃으면 세상의 절망하는 영혼들을 누가 건질 것인가? 불교가, 이슬람교가, 구원을 주시는 이름은 하나밖에 없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맛을 잃으면, 그리스도인이 맛을 잃으면 이름으로만 존재하게 된다는 두려운 음성을 들어야 한다. 과거에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 처럼 말이다.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이 말씀을 낱낱이 이해 하지 않아도 끔찍하지 않습니까? 하나님도 천사도 아닌 사람들에게 밟힘을 받는 것 얼마나 초라하고 부끄럽습니까?

여러분들은 날마다 인생의 맛을 회복하는 그리스도의 행복한 도구들이 되시기를 …



Ⅱ.빛의 역할과 위치.(14~15)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하셨던 주님은 다시 우리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선언하신다. 빛은 열을 내게 하는 역할 도 있고, 소독하는 역할도 있겠지만 역시 어두움을 밝히는 역할이 무엇보다도 주임무이다. 이세상에 존재하는 생명 있는 것들 대부분은 빛이 없이는 살지 못한다. 그럼으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는 선언의 첫번째 의미는 세상은 너희들로 인하여 살게 된다는 엄청난 선언이다. 사실 이 말이 불신자들에게는 기쁘게 들리지 않을지 모르지만 세상이 그래도 부지 되는 것은 의로운 하나님의 백성들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자만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아직도 세상에 구원 받아야 할 백성이 남아 있어서 유지된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한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3:9) 그럼으로 역시 신불신 간에 서로 상관관계가 있다.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들로 인하여 산다. 구약의 노아 때문에 그의 자부들도 살았고, 롯은 의인 아브라함으로 인하여 살았고 “하나님이 들의 성들을 멸하실 때 곧 롯의 거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어 보내셨더라”(창19:29) 예수 그리스도 까닭에 오늘 우리가 살고 신실한 하나님의 백성들 때문에 이 인류가 살게 되는 것이다.

역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는 선언은 하나님의 빛을 반사하여 사는 그리스도인을 향하여 말씀하시는 것이다. 아무리 선하고 의로운 사람이라도 죄의 바탕을 가진 인간 스스로에게 서 빛은 나오지 않는다. 다만 빛이신 그리스도를 반사하는 거울의 역할을 할 뿐이고 우리가 지난 시간에 말씀을 상고한바 있지만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8) 했는데 이 말씀은 바로 그리스도를 반사하는 거울을 깨끗이 닦은 것과 같은 의미이다. 그러므로 궁극적으로는 역시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사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는 이 말씀은 심판적인 요소가 있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소금의 역할과는 또 다른 측면이다. 빛은 모든 것을 들어내는 선언의 의미가 있다. 역시 연결되는 말씀에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한 것과 마찬가지다. 의로운 그리스도인이 사는 옆의 불신과 죄악의 사람들의 부끄러움은 자연히 들어 난다는 이야기이다.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아도 의인의 옆에 죄인은 부끄러움을 당하게 되어 있다.

아버지 야곱이 세상을 떠나자 의로운 요셉의 옆에 형들은 자신들의 과거의 죄로 인하여 어떻게 될까 봐 전전긍긍하며 거짓말까지 하는 모습을 본다. “당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명하여 이르시기를,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다 하라 하셨나니 당신의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의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 하매 요셉이 그 말을 들을 때에 울었더라”(창50:16b~17) 그러나 요셉의 모습이 역시 빛이다. “… 두려워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19~21) 다니엘은 가만히 있어도 바벨론의 다른 총리들과 대신들은 기가 죽고 위축이 되었다.

오늘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빛을 제대로만 반사한다면 불신의 사람들이 부끄러워 할 것이다. 그렇지 못하고 세상 사람들과 다름이 없기 때문에 세상은 점점 어두워 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여 하나님을 반사하는 거울로서의 역할을 깨끗이 합시다!

우리는 곧잘 세상이 죄가 관영하고 어두워서 신앙하기 어렵다고 푸념을 한다. 그러나 엄밀히 그렇게 말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지 못함에 대한 변명일 뿐이다. 하나님은 세상을 우리에게 맡기셨다. 우리 자신이 소금역할 하지 못하고 빛의 역할을 하지 못한 것에 대한 원망을 누구에게 하겠는가?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사람들이 선하고 아름다운 덕행은 높이게 되어 있다. 그러나 이 말씀의 말미의 말씀은 우리 각자의 작은 역할을 지나치지 않는다. “이러므로 세상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가 아니라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고 한 것이다. 우리의 중요한 역할은 집안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을 수 있어야 하고 인정을 받아야 한다. 세상의 대단한 사람이 되기에 앞서 집안 사람들에게 먼저 비춰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Ⅲ.우리의 삶의 목적.(16)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이 말씀이 앞의 관념적인 말, 막연한 말씀을 우리에게 가까이 가져온다. 세상에 비치게 해야 할 너희 빛은 결국 “착한 행실”로 좁혀지고 있다. 이 말씀 역시 가볍게 이해하면 도덕적인 삶을 살면 그만인 것으로 오해 될 수 있다. 그러나 이 착한 행실이 인간 의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성경은 죄의 바탕을 둔 인간 스스로가 결코 착할 수 없음을 여러 곳에서 경계하지만 역시 믿음으로 인한 선함도 격려하고 있다. 바울은 경계하여 이르기를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고전15:33) 라고 했고 교회의 구제의 대상으로 선택하는 과부의 기준에서도 선한 행실이 주문되어지고 있다. “선한 행실의 증거가 있어 혹은 자녀를 양육하며 혹은 나그네를 대접하며 혹은 성도들의 발을 씻기며 혹은 환난당한 자들을 구제하며 혹은 모든 선한 일을 좇은 자라야 할 것이요”(딤전5:10) 그리스도인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기 때문에 행위에 있어서 어떠해도 된다는 증거는 성경에서 찾을 수 없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으면 하나님의 자녀다운 모습이 있어야 함을 누누이 강조하고 있다.

이 대한민국의 그리스도인이 바른 역할을 해야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갈 것이다. 우리가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으로 남으면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 가는 것이 아니라 죄송하게도 욕이 돌아가기 쉽다는 사실을 꼭 꼭 기억해야만 한다. 오늘 우리의 초라함은 왜 생기는가? 그것은 우리가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사실은 불신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우리는 우리의 영원한 형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신 주님을 너무나 서운하게 만드는 경우가 많다.

주님은 하루종일 우리와 면담을 한번 하고 싶어 하지만 우리는 세상의 분주함 때문에 하루에 한번도 그 기다리시는 주님을 제대로 찾지도 않고 외롭게 돌려 세워 둘 때가 너무나 많다. 그럴 때마다 주님은 우리에게 물으실 것이다. “내가 진정 너의 주인이냐?” 라고 말이다. 그러한 삶은 세상 사람들과 무엇이 다른가 스스로 살필 필요가 있다.

주님은 “너의 어려움을 나에게 가져와라!, 너의 슬픔과 고통을 내게 가져와라!, 내가 함께 져주마, 해결해 주마!” 하시면서도 나의 인생 한구석에 너무나 쓸쓸히 서 계신다. 그렇게 살 때는 절대로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나오지 않으며 영광도 돌려 드릴 수가 없다. 우리가 주님의 백성이고 그의 기르시는 양이라면 우리는 기꺼이 주님께 우리의 인생을 나눠 질 필요가 있고 주님은 그것을 가장 바라신다. 세상의 불신자들이 하는 것은 다 해보면서도 한번도 구체적으로 주님을 신뢰하고 주님께 맡기지 못하는 나의 인생에서는 절대로 주님을 영화롭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은 우리는 절감해야만 한다. 엄밀히 말해서 그것은 주님을 믿는 것이 아니다.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이것이 사실 우리 자신들에게도 영광이요 감격이 될 것이다. 성경 속의 위대한 인물들은 다 그들의 환경에 관계없이 그렇게 살았고 그래서 성경의 한 부분을 보석처럼 빛내고 있는 것이다. 너희들도 나처럼 해보렴이라고 믿음으로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의 사람들에게 ‘소금이 될 것이다’ 라든가 ‘빛이 될 것이다’ 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너희는 소금이다, 빛이다” 라고 말씀하셨다는 사실이다. 이 두 가지는 탄생부터 성실이지 어떤 다른 것이 시간이 감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1년이 있으면 소금이 되거나 5년이 지나면 빛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나는 순간부터 이미 소금이요 빛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세상에서 갈등하고 방황하며 인생의 의미와 사는 맛을 잃어 버린 사람들에게 인생은 이렇게 사는 것이라고 맛을 찾아 줄 사람도 오는 나요, 어두운 심연들에 소망과 광명의 빛을 비춰줘야 할 사람도 오늘 바로 나인데 그것은 먼저 나 자신이 그러한 삶을 살고 이러한 삶의 원리는 오늘 우리 각자의 인생의 주인 되시는 주님을 우리의 주인으로 바르게 사실적으로 대우하는 삶이 될 대 가능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을 것이다. 오늘 이 말씀이 여러분 모두의 것이 되시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