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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베 전도자
마 5:27~37 2004-08-01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오늘도 유대인들은 “… 너는 염소 새끼를 그 어미의 젖으로 삶지 말지니라”(출23:19, 34:26; 신14:21)는 율법 조항 때문에 우유나 우유가 들어가는 음식을 다루거나 요리한 그릇과 고기를 담거나 요리한 그릇과 조리 기구들을 각각의 다른 싱크대에서 씻을 정도로 율법 조항에 대해서는 표면상으로 철저하다. 그러나 공식적인 십계명 조차 자신들의 편리에 따라 이용하는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종교 지도자들이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들었고 표면적인 의미보다도 그 법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는 것이 더 중요함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늘 역설하셨다.

주님께서는 계속해서 옛 이스라엘에게 주신 옛 계명을 주님의 가르침과 비교하시면서 복음의 완성을 가르치신다. 특히 언제나 사회 속에서 가장 빈번한 범죄 행위인 제 7계명에 대한 경계와 하나님의 창조질서 속에서의 남녀의 원리로 이혼의 부당성을 지적하시고 인간의 악함으로 범해지는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를 경계 하신다.

다음으로 가르치시는 교훈은 인간 관계에 만연해 있는 불신의 행위들을 지적하시고 거기에 대한 천국 시민의 자세를 선포하신다. 그러나 이 말씀을 상고하면서 사실 또 하나의 도덕강의가 될 것 같아서 두렵기도 하다.



Ⅰ.눈과 마음의 범죄 도구로서의 경계.(27~32)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요9:41)는 말씀을 하신바 있다. 우리가 볼 수 있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그러나 우리의 삶의 중심을 하나님의 성령이 아닌 다른 세력이 지배하게 될 때는 이 복된 도구는 오히려 죄의 도구로 전락하게 되므로 우리가 누구를 섬기며 사느냐 하는 것은 말할 수 없이 중요하다.

예수께서는 인간관계의 계명 중에서 세 번째 계명인 “간음하지 말지니라!”(출20:14)는 옛 계명을 말씀하시고 그것과 더불어 잘못 사용되는 범죄의 도구로서 육체의 경계를 주고 계신다. 뿐만 아니라 결혼의 아름다운 관계를 깨뜨리는 인간의 정욕에 대한 경계까지 주시면서 이혼 자체가 자신의 범죄일 뿐만 아니라 상대나 그 상대를 상대하는 또 다른 사람까지 범죄자로 만드는 것이라는 죄의 확산을 지적하신다.



1.선물이 흉기가 됨에 대한 경계.(27~28)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男女라는 두 가지의 성(性) 자체가 사랑의 하나님의 창조의 조화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이 조화와 아름다움 조차도 추한 것으로 전락시키고 만다. 아무리 아름다운 것일지라도 그것을 사용하는 당사자에 의해서 그것은 또 다른 역할을 할 수 있다고 하는 데서 남녀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오늘날도 부부간의 관계가 원만하고 감사가 되는 사람들은 절대로 겻 눈짓을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맞춰주신 대상이라는 확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바로 섬기는 가정에서만 가능한 것이고, 또 다른 측면에서는 남녀의 문제야 말로 탐닉의 도구가 되고 가장 추한 인간의 어두운 모습이 될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 부분이야말로 정신세계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는 부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사실적으로 외형적인 아름다움이나 그 밖의 요소들은 남녀의 관계에 크게 차이가 없는 것으로 나타나고 정신적인 자세가 가장 남녀의 관계에서 중요하다는 보고들을 의사들은 더러 해오고 있다. 가장 일반적이고 가까운 인간관계의 아름다움은 창조 시에서부터 부부의 관계 속에서 나눌 수 있고 사람들의 성숙 도에 따라 많은 차이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이다.

요즘의 남녀의 문제가 성숙되지 못한 연령에서부터 왜곡되게 경험되어지고 낮은 연령에서부터 관심을 지나치게 갖는 것 자체는 그러한 사람들의 인생을 망치는 방향으로 역할 되어지고 있다는데 문제가 있다. 죄가 관영 하는 세상에서 지나치게 탐닉적으로 왜곡된 체로 추구되는 성의 문제는 잘못된 정보를 흐르게 하고 그러한 잘못된 정보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결혼을 꾸려 가는데 문제를 일으키는 것들을 본다.

구약 성경에서는 대부분 간음을 유부녀에 대한 것으로 취급하고 있지만 주님께서는 그러한 한계를 두지 않고 적용하신다. 또 여성보다는 남성의 입장에서 적용되고 있다는 데서 주님은 역시 약자의 편에 계심을 보게 된다. 어느 시대나 마찬가지로 성으로 인한 피해자는 대부분 여성편이다.

여성의 아름다움을 보는 것 자체를 범죄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아름다움을 범죄의 도구로 꿈꾸는 것을 정죄하고 계신다. 주님을 경외하지 않는 여성들의 과다한 노출도 유행이라고 보기에는 분명히 범죄 요인이 된다. 그럼에도 그것을 자기 표현이라는 말로 합리화 한다. 부부 서로간의 침실에서 서만 있어야 할 노출을 모든 사람에게 보이는 것은 충분히 범죄의 여지를 제공하고 경건치 못한 삶들 속에서 일어나는 노출증이다.

경건치 못한 사회 속에서 언제나 문제가 되었던 제료는 바로 성(姓)의 잘못된 사용으로 수많은 역사 속에서 나타난다. 남녀를 막론하고 하나님의 창조의 아름다운 섭리를 제일로 삼고 사는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의 처신을 바로 하게 되고 노출 할 때와 그렇지 않아야 될 곳을 바로 알고 살아가게 된다. 여자나 남자나 서로의 관점이 영적인 것에 있지 못하고 육적인 것에 있게 될 때 그것은 서로를 범죄의 도구로 사용할 수 있다.



2.범죄의 도구로 사용되기 쉬운 우리의 지체.(29~30)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세상에서 지체 장애는 분명히 불편하고 힘겹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불편한 상태가 되더라도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났다는 말씀을 주고 계신 것을 보면 지옥이 얼마나 불행한 곳임을 짐작케 한다. 이 말씀을 액면 그대로 받아드리게 된다면 나중에는 모든 지체가 없는 완전한 장애자가 되고 말 것 같다. 그러나 그만큼 죄에 대한 두려운 경계를 강조한 표현이다. 여기 특이한 표현은 “오른 눈, 오른손” 과 같은 것이다. 분명히 눈이나 손은 양쪽에 둘을 가지고 있고 한쪽만 보거나 쓰이지 않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른 쪽”을 강조하시는 것은 ‘힘’과 더불어 이해할 수 있다. 사실 이 세상은 의롭게 사는 것이 장애를 가진 자 만큼이나 불편한 세상이다. 그만큼 죄가 관영 하는 세상이다. 나의 가진 지체의 힘을 범죄의 도구로만 사용한다면 그러한 사람은 지옥에 갈 것이 당연하고 이 세상에서 죄를 짓는 자유는 당연히 영원한 세상에서 비극의 운명을 맞을 수 밖에 없을 것이므로 짧은 인생을 불편하게 살더라도 영원을 만족으로 사는 것이 지혜로운 삶이기 때문이다.

차라리 지체를 다 잘라버리는 불편함으로 살더라도 범죄 치 않으므로 천국에 들어 가서 완전한 영광의 변화된 몸을 받아 영생을 누리는 것이 이 짧은 인생을 죄와 더불어 탐닉하며 사는 것 보다 비교할 수 없으리 만큼 행복하다는 주님의 교훈이 실감 되어야 한다.



3.하나님께 하나되게 하신 것을 나누는 범죄 이혼.(31~32)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 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신명기24:1, 3에서 “사람이 아내를 취하여 데려온 후에 수치 되는 일이 그에게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 이혼 증서를 써서 그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어 보낼 것이요, 그 후부도 그를 미워하여 이혼 증서를 써서 그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어 보내었거나 …” 라는 기록을 보게 되는데 여기의 ‘수치 되는 일’은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신 “음행 한 연고”로 나타나지만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나 그를 미워하는” 것 만으로 이혼이 허락된 것은 분명히 사람의 완악함 때문이라는 것이다.(마19:8) 사실 이런 이유에서 남자들이 아내를 내어 버린다면 남아 날 가정이 없다.

이러한 사실은 마태복음19:3~6의 가르침에서 더 자세히 다루고 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가로되 사람이 아무 연고를 물론하고 그 아내를 내어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창조의 질서 속에서 둘이 하나로 만들어진 섭리는 참으로 신비하고 이것이 지켜지는 것 또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것이 확실하다.

주님께서 여성 편에서 이러한 교훈을 주시면서도 먼저 하나님의 질서를 깨뜨린 여성의 보호를 거절하시는 표현이 “음행 한 연고” 라는 한가지의 단서이다. 만약에 아내를 버리고 그 버린 아내가 새로이 혼인을 하는 경우에 그 아내가 간음자가 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 아내와 재혼한 당사자까지 간음이 되어 한 가정이 깨어짐으로 미치는 범죄의 확산은 대단히 큼을 경고하고 계시다. 오늘날에 “시대” 라는 상황이 고려 되고 그래서 이혼이 합법화 되고 재혼이 자연스러운 것은 시대적인 흐름으로서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성경의 가르침으로서는 분명히 부자연스러운 것임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Ⅱ.인간 사이의 불신으로 인한 헛맹세의 책망(33~37)

하나님과의 믿음과 신뢰가 무너져 버린 세상은 더 이상 인간 서로간에 신뢰를 할 수 없는 불신의 관계가 되었고 그러한 불신은 상대에게 자신을 확인시키기 위해 온 갓 것들이 약속의 확신 즉, 맹세의 도구가 되었다. 우리 동양 사람들도 일반적으로 “하늘을 두고 맹세한다”는 식의 모습들을 일반적으로 보게 된다. “만약에 내가 이걸 어기면 후래(호래) 자식이다.” 라는 자신의 비하도 있다. 그러나 대게의 경우 이런 맹세는 술 취한 가운데서나 위급하여 빠져 나갈 곳이 없게 될 때 쓰는 말들이다. 그러나 이 모든 자세는 불신의 대상을 상대로 한다는 데서 주님은 이를 경계하시는 것이다.



1.헛맹세의 경계.(33~34f)

“또 옛 사람에게 말한 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

야고보는 “내 형제들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나 땅으로나 아무 다른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고 오직 너희의 그렇다 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라 하는 것은 아니라 하여 죄 정함을 면하라”(5:12)고 주님과 같은 당부를 주고 있는데 분명히 맹세는 거짓에서 나오는 것이 분명하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너희는 내 이름으로 거짓 맹세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레19:12)는 경계를 주고 계시다. 분명히 믿음의 백성 신민(信民)이라고 하는 이스라엘이 이렇다면 세상 사람들이야 너무나 이런 일은 흔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 주님의 당부는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라고 당부하셨다. 그러나 이 말씀을 지나치게 의식하여 언약 자체를 무시하고 약속하지 않는 것은 지나친 것이다.

맹세 [헬, 호르코스(horkos) ←헬, 헤르고(hergo) ‘가두다, 내쫓다’에서 유래] ≒ 언약, [헬, 디아데케(diadeke), ‘처분, 계약, 언약, 유언’] 약속[헬, 에팡겔리아스(epangellias), 공고, 선언함] 비슷한 것 같지만 ‘맹서’는 단절하는 것이고 ‘언약’이나 '약속'은 관계 속에 이루어지는 열려있는 것이다.



2.맹세의 도구의 부당성.(34b~36)

“… 하늘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땅으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네 머리로도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려워서 하나님으로는 직접 맹세하지 못하면서 하나님과 관련된 것들을 맹세의 도구로 사용했다.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인 바리새인들이 이 맹세를 더욱 악용하는 것을 책망하고 계시다. “화 있을진저 소경된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우맹이요 소경들이여 어느 것이 크뇨 그 금이냐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너희가 또 이르되 누구든지 제단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그 위에 있는 예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소경들이여 어느 것이 크뇨 그 예물이냐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 그러므로 제단으로 맹세하는 자는 제단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으로 맹세함이요, 또 성전으로 맹세하는 자는 성전과 그 안에 계신 이로 맹세함이요, 또 하늘로 맹세하는 자는 하나님의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로 맹세함이니라”(마23:16~22)

교묘하게 하나님을 피하여 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는 맹세는 결국 하나님을 두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지켜지지 못할 맹세를 하는 것은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므로 하지 않아야 하고 맹세가 필요 없는 말 한마디로 보증이 되는 그런 세상을 만들어 가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책임이다. “내 생명을 두고 맹세 한다”는 것도 결국 그 생명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의 이름을 두고 하는 것이고 우리 자신으로서는 우리 자신이 가진 생명뿐만 아니라 몸에 붙어 있다가 빠지는 머리카락 하나도 희거나 검게 할 수 없는 인간임을 기억한다면 결국 자신도 담보할 수 없는 것이 우리네 인생인 것이다.

이래서 십자가의 희생은 필요하고 그래서 주님은 피를 흘리시고 이 약함을 극복하시기 위해서 부활 하시고 주님을 의지하며 진실하게 산 사람들을 데리러 다시 이땅에 오실 것이다.



3.맹세보다 중요한 진실.(37)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

사실 죄성을 가진 인간은 이것조차 어렵다. 옳은 것을 옳다, 그른 것을 틀렸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조차도 우리 사람들에게는 없다. 사실 그런 바른 말을 하기 위해서는 이 죄악의 세상에서 생명을 내놓지 않으면 불가능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 사실을 사실로 그대로 인정하는 것조차 용기가 필요하기 대문에 죄악의 세상에서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살아야 하고 맹세 없이 진실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많아진다면 세상은 그만큼 밝아질 것이다.

진실을 말하고 서로를 신뢰하는 사람들, 그럴 수 있는 삶은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고 자신을 신뢰치 않는 사람들이다. 진리의 하나님. 공의의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만이 참으로 진실 할 수 있고 천국 백성이라면 당연히 그래야 한다.

이 말씀은 진실과 용기를 다 요구하시는 주님의 요청이다. 진실이 용기를 갖지 못하면 도전은 없다. 용기가 진실을 함께 하지 못하면 히틀러와 같은 광기를 가진 자가 될 뿐이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해야 하는 관계 같은 것이다. 그런데 이 진실과 용기는 범죄 한 인간 스스로에게 서는 나오지 않는다. 진정한 진실과 용기 자체이신 주님의 것을 가질 때 가능할 뿐이다.



Ⅲ.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다음 주에도 구약의 복수에 관한 법과 복음의 가르침을 나누겠지만 주님은 “옛 사람에게 말한 바 …”를 지적하시고 연이어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라고 완성된 천국시민의 삶의 자세를 제시하신다. 분명히 율법은 옛사람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두려운 법이요 십자가로 두려움의 형벌을 만족시키신 주님은 용서와 사랑과 화해의 법을 오늘 이 말씀을 듣는 우리에게 주시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움의 대상으로서만 아니라 감격과 기쁨으로 생명이 풍성한 법이 되어야 함을 강조하신 것이다.

주님의 구속의 십자가로 채워진 법 완성된 법 아래 살면서도 주님께서 죄의 형벌을 대신 감당하시고 우리 모두가 아무 공로 없이 사죄의 은총을 입었음에도 여전히 형제에 대해서는 율법조항으로 정죄하고 미워하는 삶은 분명히 십자가의 은혜를 헛된 것으로 만들고 자신을 두려운 심판의 율법 아래로 이끌어 가는 어리석은 행위이다.

나(우리)를 나 되게 하신 십자가의 복음을 나와 하나님, 나와 이웃 형제 사이에 적용하므로 하나님께서 주신 아름다운 은혜가 죄의 도구로 잘못 사용되지 않고 맹세가 필요 없이 성령과 더불어 삶으로 허락된 하나님 나라의 생명을 풍성히 누리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