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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의 율법은 인간의 죄를 정죄하기 위해 만들어진 법이기 때문에 때로는 상당히 그 법을 시행하고 판결하는데 있어서 잔인하기까지 하고 저지른 죄에 합당한 대가를 치르도록 하는 부분들이 많다.[오늘날 완성된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유대인들이나 모슬렘들이 잔인한 이유도 바로 구약의 비수 같은 율법만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이 자신의 죄에 해당하는 형벌을 받아야 한다면 살 수 있는 인간은 존재치 못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죄를 대신 감당하시고 그 은혜의 십자가 밑으로 사람들을 불러 구원하시는 사랑의 역사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피 흘림이고 새 언약이다.
그러므로 결론부터 말한다면 오늘 본문의 마지막에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 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 하라” 당부 하시지만 이것은 인간 스스로의 힘과 능력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과제이고 애당초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경건을 의지해서 이러한 당부를 주시는 것이 아니다. 至高至善하신 하나님의 온전 하심과 같이 인간이 온전할 수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십자가는 더 이상 필요치 않았을 것이다.
일찍이 이를 깨달았던 바울은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12:10)고 고백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과 같이 온전해 질 수 있는 방법은 자신을 얼마나 부인하고 주님을 얼마나 의지하느냐에 성패가 달려 있다.
오늘도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공로와 경건으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인식 시킬 수 있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을 본다. 그러나 우리 자신의 어떤 수고와 희생도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우지 못한다. 다만 주님의 은혜를 의지하여 자신을 부인하고 주님을 의지하며 매 순간을 사는 것 만이 가치가 있고 진정한 경건이 될 것이다. 오늘도 나 자신이 주님 앞에 머무르고 있다면 그것은 나 자신의 믿음 때문이기 보다는 주님의 은혜 때문임을 감사해야 한다.
Ⅰ.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38~42)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러 오셨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은 정확한 기준이 없다면 혼란할 수도 있는 가르침이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고 인용하시는 본문을 보면 출애굽기21:22~25 말씀이다. 이 부분은 뒤에서 정리하도록 하고 여기에서 중심이 되는 말씀은 역시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신 것이다. 이 것은 한마디로 천국시민의 악에 대한 대응을 가르침이시다.
이 것은 몇 가지의 의미로 이해를 해야 할 것 이다. 다른 곳에서는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4:7) 거나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니라”(벧전5:8~9)는 악이나 어두움에 대한 대적을 분명히 격려하고 있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여기에 [‘대적하다’ 말도 인간이 스스로 대항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anthistmi, 반대편에 서다, 거역하다, ~에 굴하지 않다. (anti, 반대하여, 대항하여) + (histemi, 서다)] 라는 의미로 하나님 편에 서서 마귀의 말은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거역하고 어떤 주문에도 굴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다.(하와는 이것에 실패했다.)
1.인간의 완악함을 인하여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바로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미 앞에서 이혼의 허용이 하나님의 본래의 뜻이 아니지만 사람들의 완악함 때문인 것과 마찬가지다.[예수께서 가라사대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마19:8; 막10:5)]
2.우리가 대적해야 하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뒤에서 그 사람을 움직이는 어두움의 새력이기 때문이다.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신 후에 “너를 송사하여” 라는 말씀이 연이어 오는 것을 보면 이를 더 분명히 이해할 수 있다.
3.악한자를 대적함으로 나 자신이 추해지고 더러워 질 수 있기 때문이다. 법정에서의 판가름은 앞에서도 말한바 있지만 최종적인 방법으로 결국 법으로서 이기고 진 관계는 절대로 회복되기 어려운 관계가 되고 만다. 물론 이 말씀은 신앙의 사람들에게는 法이 전혀 필요 없는 것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결국 흙탕물에 같이 뒹굴다 보면 같이 더러워지는 것은 당연하다. 사도 바울은 “삼가 누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고 오직 피차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좇으라”(살전5:15) 하였고 베드로 사도 역시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벧전3:9) 하였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라”(네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 대며) 거나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라”(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금하지 말라)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라”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네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 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금하지 말라, 무릇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지 말며(눅6:29~30)]는 모든 의미들은 사실상 철저하게 나 자신을 벌거벗기려는 의도로 접근하는 악한 의도들의 구체적인 표현들이지만 진정한 하늘의 백성은 보이는 세계에서나 없어질 것들을 다 잃는다고 해도 의연한 하나님의 백성 됨을 잃어서는 안된다.
사실 우리의 한 뼘을 치는 자에게 액면 그대로 다른 편을 돌려 대면 상대는 더 분노할 수 있고 예수께서도 그러신 적이 없고 바울도 그런 일을 당했을 때 그런 적이 없다.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바울 곁에 섰는 사람들에게 그 입을 치라 명하니, 바울이 가로되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 네가 나를 율법대로 판단한다고 앉아서 율법을 어기고 나를 치라 하느냐 하니”(행23:2~3)
또 실제로 율법시대의 이스라엘에서 옷은 전집물이 되기도 했었다. 그런 예들을 두어 군데 보면 “네가 만일 이웃의 옷을 전당 잡거든 해가 지기 전에 그에게 돌려 보내라, 그 몸을 가릴 것이 이뿐이라 이는 그 살의 옷인즉 그가 무엇을 입고 자겠느냐 그가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들으리니 나는 자비한 자임이니라”(출22:26~27) “해질 때에 전집물을 반드시 그에게 돌릴 것이라 그리하면 그가 그 옷을 입고 자며 너를 위하여 축복하리니 그 일이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네 의로움이 되리라”(신24:13)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진정한 승리는 빼앗고 자신 앞에 무릎을 꿇리는 자가 아니라 영원을 약속하는 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를 갈면서 “두고 보자!”가 아니라 웃으며 “영원에서 보자!” 라고 고백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Ⅱ.너희 원수를 사랑하며.(43~45)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우리는 원수를 맺는 것이 얼마나 비극적인가를 많이 봐 왔다. 부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 자손이 서로 복수의 칼을 가는 우리나라의 이야기나 몬테규 집안의 로미오와 원수인 캐플렛 집안의 줄리엣이 비극적인 사랑이야기를 읽게 된다. 원수는 계속적으로 원한의 사슬을 엮어 내려가는 것을 역사 속에서 보는 것이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는 구약의 직접적인 표현은 성경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동포에 대한 애정이나, 출애굽 시에 괴롭혔던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신23:3), 아말렉(신25:17~19)’이나 기타의 이방인들이나 민족의 숙적(宿敵)들에 대한 보복의 명령은 율법에서 더러 나타나는 사상들이다. 가나안의 일곱 족속에 대하여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붙여 너로 치게 하시리니 그 때에 너는 그들을 진멸할 것이라 그들과 무슨 언약도 말 것이요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 것이며”(신7:2) 라는 당부도 원수로 여겨야 될 대상으로 당부 하셨다.
그러나 모든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도말 하신 이후에는 어느 민족, 어느 인종도 원수로 존재해야 할 대상은 지구상에는 더 이상 없다.[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엡2:16)] 이 말씀 역시 천국시민의 원수에 대한 대응방법으로 이 말씀의 중심 역시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라는 말씀이다.[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눅6:27~28)]
앞에서 이미 우리의 진정한 원수는 사람이 아니라고 고백했다. 바울 사도는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 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롬12:19)고 원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직접 대항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고 경계를 주고 있다.
적어도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지상에 ‘원수’를 둬서는 안된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이 세상에서 원수를 제하여 가는 사람들인데 총칼로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희생의 십자가를 통해서 화평을 이루어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성령을 거역하는 육체의 일을 거론하면서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갈5:19~21) 라고 강하게 질책한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에 자신을 다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 하심으로 서 이러한 가르침에 친히 본을 보이셨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에게 아직 원수 같은 대상이 있다면 죄송하지만 그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 됨을 점검할 필요가 있다. 주님께서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라고 확인하신다.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우리의 아버지께서 그러하심 같이 우리가 그 분의 아들이요 딸이 되었다면 더 이상 육신과 죄의 잔재인 원수 삶는 일은 없어야 한다.
우리가 천국의 백성 된 가장 쉬운 검증은 이 세상에 미워하는 사람과 원수가 없고 다만 불쌍히 여기는 대상만 있다고 하면 확신해도 좋다. 영의 사람들은 원수를 없애가지만 육의 사람만이 원수 맺는 것과 편가름을 좋아 하고 하나님과도 원수로 행하게 된다. 그러한 삶은 십자가의 은혜를 헛되게 하고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이다.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빌3:18)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새겨들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
Ⅲ.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 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 하라.(46~48)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 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 하라”(눅6: 31~35)
이 부분의 말씀은 천국시민과 세상 사람들과의 구별, 천국과 지옥의 차이가 분명하다는 사실을 증거하면서 천국백성의 이웃과의 관계를 정리하고 있다.
우리는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 아버지의 온전 하심과 같이 온전할 수 있을까?’고 의심해 볼 수 있겠지만 주님께서는 불가능을 시키거나 명령하실 분이 아니라는 확신에서 온전할 수 있는 몇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1.세상과 구별된 삶을 삶으로서 온전할 수 있다. 여기서 세리나 이방인들을 비교 하는 것은 결국 썩어질 땅의 가치로만 사는 사람들과 같아서는 온전할 수 없다는 말씀이다. 우리가 세상과 확실히 구별된 삶을 살 대 우리는 비로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온전 하심과 같이 우리도 온전할 수 있다.
2.온전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따름으로서 온전할 수 있다. 지금까지 말씀하신 내용 자체가 우리 인간의 가치나 수준에서 가능한 이야기들이 아니지 않았는가?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12:2)는 주님의 온전을 그를 따르는 우리 모두가 순종하고 따름으로 온전할 수 있음이 확실하다.
3.하나님의 자비를 본받을 때 온전할 수 있다.
누가복음은 이 마지막을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 같이 너희도 자비하라”(6:36)로 기록하고 있다. [자비하심, 은 헬라어로 오이크틸몬(oiktilmon), 인정 많은, 불쌍히 여기는, 동정하는] 등등의 의미이다. 이것은 세상에서 모든 사람을 대상하는 하나님의 모습이며 천국시민의 자세이다.
Ⅳ.말씀의 바른 이해와 적용이 우리의 믿음의 삶을 온전케 한다.(38~39)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 인용하신 출21:22~25 본문은 “사람이 서로 싸우다가 아이 밴 여인을 다쳐 낙태케 하였으나 다른 해가 없으면 그 남편의 청구대로 반드시 벌금을 내되 재판장의 판결을 좇아 낼 것이니라, 그러나 다른 해가 있으면 갚되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데운 것은 데움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 인데 여기서 혼란할 수 있는 소지는 “…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 하신 것이다.
분명히 한편으로만 보면 율법과 주님의 가르침이 상반되게 증거 되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를 혼란케 하시려고 이 말씀을 주시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분명히 말씀의 바른 적용이 천국을 만들고, 또 그 동일한 말씀의 잘못된 적용이 지옥을 만들기 때문에 말씀의 바른 이해와 적용은 대단히 중요하다.
믿음의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어떤 사건에는 분명히 피해를 입힌 사람㉠과 손해를 입은 사람㉬이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이 가해자㉠와 피해자㉬가 어떻게 적용하느냐에 따라서 둘의 관계와 하나님의 관계는 깨어지기도 하고 회복되기도 하며 미움의 관계가 되기도 하고 사랑의 관계가 되기도 할 것이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안타까운 사실은 하나님의 말씀을 삶의 모토로 삼고 산다고 하는 많은 그리스도인이 말로는 희생의 십자가를 지고 산다고 하면서도 말씀을 언제나 자신에게 유리하게만 인용한다는 사실이다. 여기에는 절대로 화해나 기쁨은 있을 수 없다.
반대로 언제나 상대를 위한 말씀의 적용이 된다면 그러한 삶에는 감사와 기쁨이 충만한 평강의 삶을 누릴 것이라는 사실이다. ㉠-㉬
앞에서 이미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20) 말씀하셨던 주님은 천국의 백성으로서 모든 관계에 있어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 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 하라”고 당부하시고 계신다. 이 말씀을 순종하고 잘 적용하여 여러분 모두의 삶에 천국이 풍성한 하나님의 자녀의 삶이 되시기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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