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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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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6:5~8, 14~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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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8-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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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기도할 때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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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는 무엇인가? 기도는 누구에게 하는 것인가? 이 정의만 바르게 되어도 우리의 믿음생활은 대단히 경건하게 될 것이다.
사도 요한은 이 역사의 마지막에 있어질 영광된 계시를 보면서 세 번씩이나 연거푸 짐짓 놀라기까지 했던 것 같다. “책을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어린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계5:8) “또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들과 합하여 보좌 앞 금단에 드리고자 함이라”(계8:3)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지라”(계8:4) 시편의 비롯한 많은 기도가 찬양과 영광이듯이 우리의 기도가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생각하고 하나님께 구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에서는 이런 면만 생각하면 기도를 어렵게 생각하고 부담스러워 할 것 같아서 조심이 된다. 하나님께서 못 들으시는 기도는 없다.(아니 못 들으시는 소리는 없다.) 우리는 잘못 들어서 무엇이라고 했느냐고 묻지만 하나님은 소리 없는 부르짖음도 들으시고 말 못하는 장애자들의 마음도 들으시며 어둠 속에서 한 말도 들으시며 결코 잊지 않으신다. 5~15절까지가 천국백성의 기도 생활이겠지만 기도의 모범 된 내용인 9~13절은 다음시간으로 나눠서 생각하도록 하고 오늘은 기도의 자세를 먼저 생각하고자 한다.
사실 기도에 무슨 자세가 필요한가 라고 쉽게 생각한다면 할말이 없겠지만 성경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기도와 그렇지 않은 기도를 말씀하시고 계시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욥기서에서 엘리후는 “헛된 부르짖음은 하나님이 결코 듣지 아니하시며 전능자가 돌아보지 아니하심이라”(욥35:13)는 경계를 주고 있다.
우리가 기도는 꼭 우리의 형편과 소원을 하나님께 관철시키는 것으로 생각하고 잘 응답 받는 기도를 이야기 하기도 하는데 사실 이것도 대단히 이기적이기 때문에 기도의 자세에 대하여 이야기 하게 될 때마다 조심스럽다. 기도는 엄밀히 말하면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고 어떤 상황에서건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이 가장 기도다운 기도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 6장의 말미에서도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33)는 확신을 주고 있고 다음 장인 7:7~12에도 기도를 말씀 하심으로써 천국시민의 삶은 기도로 시작되고 기도로 진행되어져야 함을 가르치시면서 이 천국시민 헌장의 ⅔가 기도로 연결되어지고 있는 것 역시 결코 우연이 아니다. 천국백성은 기도로 하나님과 끝임 없이 교제하는 삶이 바탕을 이룬다.
Ⅰ.기도는 불신의 사람들과 인생의 차이를 가장 크게 느끼게 하는 부분이다.
사람들이 위기와 어려움을 만나면 절망하고 마는 이유가 다른 이유도 물론 많이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이유는 자신의 고통을 나눌 데가 없어서 포기해 버리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억울하고 서러워도 하소연을 할 데가 있다. 이것 자체가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른다. 363:1.내 모든 시험 무거운 짐을 주 예수 앞에 아뢰이면, 근심에 싸인 날 돌아보사 내 근심 모두 맡으시네; 2.내 모든 괴롬 닥치는 환난 주 예수 앞에 아뢰이면, 주께서 친히 날 구해주사 넓으신 사랑 베푸시네; 3 내 짐이 점점 무거워질 때 주 예수 앞에 아뢰이면, 주께서 친히 날 구해주사 내 대신 짐을 져주시네; 4 마음의 시험 무서운 죄를 주 예수 앞에 아뢰이면, 예수는 나의 능력이 되사 세상을 이길 힘 주시네 (후렴)무거운 짐을 나 홀로 지고 견디다 못해 쓰러질 때, 불쌍히 여겨 구원해 줄 이 은혜의 주님 오직 예수. 우리의 한숨을, 억울함을 하소연할 수 있는 것이야 말로 믿음으로 얻은 놀라운 은혜이다. 믿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갖지 못하는 특권, 천국 백성들만이 누리는 가장 일반적인 은혜요 특권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비싼 통신료를 지불하고 서로의 연락을 하길 원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어떤 통신비도 요구하지 않으시고 필요할 때마다 응답하신다.
설령 믿지 않는 자들이 다급해서 하나님을 불러서 하소연을 한다고 해도 도움을 입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죄인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요9:31) 나면서부터 시각장애자로 비록 바리새인들에게는 죄인 취급을 당했지만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눈을 뜨고 깨달은 사람의 고백이다.
우리들도 예전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하는 헛된 것들에게 하소연하고 절망할 수 밖에 없는 존재들이었다. “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 노릇 하였더니,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더러 하나님의 아신 바 되었다”(갈4:8~9f)고 바울은 고백한다. 다시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다”(엡2:3~5f)고 고백한다. 그 은혜와 사랑을 인하여 하나님께 기도하는 자녀가 되게 하셨다. 할렐루야!
이것은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림으로 찾아 주신 놀라운 은혜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놀라우신 은혜를 거저 받은 우리들은 아직도 하소연할 데가 없어서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기도하는 사람이 되도록 믿음으로 이끄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275:3.저 죽어가는 자 구원해내야 우리의 본분을 다 하리니, 예수의 구원을 전파할 때에 그 크신 능력을 다 주시네, 저 죽어가는 자 예수를 믿어, 그 은혜 힘입어 다 살겠네. 이러한 입장에서도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이 세상에는 속을 끓이면서도 하소연할 데가 없어서 가슴을 치며 탄식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그들은 하소연할 대상을 찾지 못하여 절망하고 좌절하고 있는데 우리만 이 은혜를 누린다면 주님은 결코 기뻐하지 않으실 것이다.
사람들이 위기 중에도 바른 기도의 대상을 찾지 못하는 것은 알지 못해서 믿지 못해서 그러므로 우리의 증거의 삶은 이런 입장에서도 대단히 중요하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롬10:13~14)
Ⅱ.기도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5~6)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왜 당연한 말을 하는가 반문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의 종교지도자 들이었던 바리새인들조차도 사람을 의식하는 기도를 하고있는 데서 주님의 책망을 듣고있는 것을 보면 역사 속에서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사람을 의식하는 기도를 했던 것 같다. 기도는 진지한 자신의 기도가 되어야 하는 까닭에 바울 사도는 “그러면 어떻게 할꼬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고전14:15)고 고백하는 것이다. 외식하는 기도 즉 영화 배우와 같이 자신의 인생이 아닌 다른 가상의 인물의 삶을 대신 연기하는 것은 참으로 극장에서나 방송에서 만족해야만 한다.[어떤 그리스도인 유명 인사의 전단지- 교회간증=술집출연 먹고 사는 직업이라지만 참으로 안타깝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사는 삶은 참으로 자신의 삶을 살 필요가 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의를 행하거나 구제를 하거나 금식을 하거나 배우와 같이 흉내를 내는 것만으로 충분치 않다는 내용들을 이야기 했었다. 영적인 호흡이라고 하는 기도는 더욱 그러하다. 남의 호흡을 쉬어 줄 수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기도를 연기(演技)처럼 할 수 있는 위험성은 충분히 있는 것이다.
어떤 경우의 기도라도 사람을 의식하고 하는 기도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신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 사람들의 칭찬을 의식하는 기도는 이미 기도가 아니며 이미 받을 것을 다 받아 버린 기도로 의미가 없다고 주님은 경계 하신다.[그리스도인이 모인 곳에서는 감격하고 손을 들고 찬양하고 고백하는 것은 잘하는데 세상의 사람들 앞에서는 구별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이지 못하는 것이 오늘 우리들의 안타까운 현실이다.]
구약의 스가랴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였었노라 내가 불러도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은즉 그들이 불러도 내가 듣지 아니하고”(7:13) 라고 말씀하신다. 우리의 기도가 참으로 하나님께 들려지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는 것이 중요함을 말씀하신다.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6) 우리가 주님께 기도하는 것이 항상 은밀할 수 많은 없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사람들이 의식하지 못할 때 일대 일로 만나서 우리 자신의 문제와 하나님의 나를 향하신 뜻을 조용히 묻는 시간은 대단히 가치가 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 조차도 물러 가게 하시고 은밀히 밤에 아버지 하나님을 만났던 모습은 바로 이 가르침의 모범이다.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막1:35) “예수의 소문이 더욱 퍼지매 허다한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나음을 얻고자 하여 모여 오되, 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눅5: 15~16) 늘 은밀히 주님과의 만남의 감격을 여러분 모두가 누릴 수 있기를 주님의 복되신 이름으로 …
Ⅲ.기도는 길이보다 자세가 중요하다.(7~8)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 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여기서는 불신의 사람들과 하나님의 백성들의 기도를 비교하시면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기도가 믿지 않는 사람들의 기도와 구별되어야 함을 가르치신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한 것인데 제가 어려서 들은 이야기가 “정성에는 무쇠도 녹는다”는 말이 있었다. 막연히 분명한 대상도 없이 소원을 끊임없이 계속 하면서 자신의 기도가 ‘어떤 존재가 있다면 듣지 않겠느냐!’는 생각 때문에 끊임없이 지속하였던 것이다. 막연히 하느님께 빌고, 칠성님께 빌고, 산신령께 빌고, 용왕께 빌고 조앙신께 빌고, 삼신할머니께 빌고, 조상신께 빌고 그야말로 이름 붙일 수 있는 모든 신들에게 치성을 들이는 데는 돈과 시간을 아끼지 않고 빌면서 막연히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기대를 갖는 것이 바로 이방 신을 섬기는 사람들의 기도이다.
그들은 막연한 생각으로 기도한다면,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미 약속을 가지고 기도하는 사람들이라는 데서 큰 차이를 갖는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그의 백성들의 필요를 알고 계시며 채우시기를 원하시는 자비와 사랑의 아버지시다. 하나님은 기도의 길이를 계산 하시는 분이 아니라 기도하는 사람의 진실의 깊이를 재시고 기도의 횟수보다는 기도의 무게를 보시는 분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때로 투정하는 것은 ‘그렇게 오랫동안 기도했는데, 섬겼는데…’ 라고 은근히 자신의 공로를 내세우는 것이다. 이것은 이방인들의 자세이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합당한 자세는 아니다. 우리가 막연하지 않고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33:3)는 놀라운 약속을 가지고 사는 사실에 감사할 뿐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기도할 수 있게 된 것이 우리 자신의 공로라면 모르겠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값없이 얻은 은혜이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도 우리 자신의 것을 내세울 것이 없다.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 부언하지 말라” [중언부언하다, 헬, battologeo, = battos (말 더듬는 사람) + logos (말씀)에서 유래하여 ‘말을 더듬다, 생각하지 않고 말하다, 말을 많이 하다, 지루하게 재잘거리다, 쓸데 없는 말을 반복하다’ 등등] 중언 부언 하는 것을 불신의 세계에서 찾는다면 그것은 주문을 외우는 것이다.
모든 이방세계의 종교 행위는 주문(呪文)을 필요로 하지만 참 하나님은 주문에 따라 움직이는 하나님이 아니시다. 이런 입장에서 우리가 겸손히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을 열어 드리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기도의 자세라고 할 것이다. 사실 주문은 기도라기보다는 자기암시(暗示)이고 자기 최면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들이 이런 모습으로 사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인격적인 교제를 통해서 자신께 필요를 요구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하나님께 기도함에 있어서 경계하는 것들이 있다.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시66:18) 말씀하신다.
Ⅳ.하나님은 화평의 기도를 원하신다. (14~15)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주님께서는 왜 기도의 방법과 내용을 가르치시고 이러한 말씀을 덧붙이실까? 사뭇 의아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으실 만큼 경건하다면 이웃과의 관계에도 관용할 것이고 자신이 용서를 받은 것처럼 이웃을 용서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주님은 기도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경계하시는 중에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주시는 말씀을 참고할 필요가 있는데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사1:15) 한 것인데 손에 가득한 피는 바로 이웃을 상하고 괴롭힌 사실을 지적하시는 것이다.
이웃을 받아 주지 못하면서 자신은 받아 주시기를 바라는 독선을 주님께서는 용납치 않으실 것이다. 인과응보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이것은 용서 받은 자의 당연한 자세를 말씀하시고 계시는 것이다. 평생의 과실과 허물을 용서 받고도 이웃의 허물을 받아 줄 수 없다면 그것은 위선이고 거짓일 것이다.
과거부터 동양적인 사고 방식은 나와 하나님 즉, 신과의 관계는 대단히 신경을 많이 쓰면서 나와 이웃의 관계를 별로 중요하게 생각치 않는다는 사실이다.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약2:1)는 야고보의 경계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영광의 주님을 섬기는 복된 삶이 되었으면 옆으로 사람에 대한 가치나 자세도 달라져야만 한다는 가르침이다.[구원 받아야 할 가련한 사람] 성경은 언제나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사람과의 관계도 회복되어야 함을 수없이 강조한다.
그러한 단적인 예를 베드로 사도는 “남편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벧전3:7)는 교훈을 말하고 있다. 가장 가까운 관계가 부부의 관계이고 부모와 형제와 이웃과 자연과도 기도의 사람에게는 회복된 관계여야만 한다. 회복된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당연히 옆으로 화평을 이루고 또 화평을 위하여 애쓰게 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는 환난과 고난 중에도 낙심치 않을 놀라운 은혜를 누리는 자들이 되었다. 바울은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엡3:12) 하였고 히브리서 기자 역시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4:16) 이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원수 되었던 우리의 모든 죄를 도말 하심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시켜 주심으로 가능하게 되었고 이 은혜를 맛본 자들이라면 아직도 억울함을 당하고 가슴을 치며 하소연 할 데를 찾지 못하는 그리스도 밖의 사람들에게 증거 해야만 한다.
그러나 기도는 사람에게 들리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므로 늘 사람들이 알든 모르든 은밀히 주님과 대화하는 자세가 필요하고 기도하기 전에 기도의 내용이나 길이보다 우리의 삶이 참으로 하나님께서 받으시기에 합당한 기뻐하시는 삶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무엇보다도 화평의 기도를 원하시고 중보의 기도를 기뻐하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막9:23) 라거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막11:23)는 믿음의 사람들에게 주신 이 놀라운 약속을 자신의 것으로 누리는 나와 여러분 되시기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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