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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 마태복음 6장에서 개인의 신앙적 자세를 계속 다루고 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행하는 義와 구제와 금식 그리고 기도 생활의 자세들을 계속 다루고 있다. 지난 시간에는 기도의 자세를 이야기 했고 오늘은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의 내용 즉, 기도의 틀을 나누게 될 것이다.
우리가 대부분 신앙 생활을 시작하면서 암송하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이 祈禱文이고 축도를 하지 않는 집회의 말미에 이 기도문을 암송하는 것으로 집회를 마무리하는 예들을 본다. 때로 습관이나 전통적으로 행하는 어떤 종교 행위들은 그것이 옳고 그름의 판단도 없이 의례적으로 행해지는 것들이 많고 사실 이 기도문도 그런 입장에서 잘못 사용될 수 있는 여지를 충분히 가지고 있다. 오늘 이 말씀을 상고하면서 그런 부분도 지적될 것이기 때문에 성령의 도우심을 의지하고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기도에 지속적인 인내를 당부하시는 말씀들이 비유로서 연결되어 있다.(눅11:5~13)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생각하면서 천국시민 된 우리 자신들의 기도의 형태와 생활을 점검하고 또 이 주님께서 친히 가르치신 기도문을 통하여 모범 된 기도의 내용을 생각하며 기도생활에 좀더 바른 믿음의 자세를 점검했으면 한다.
Ⅰ.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가르치신 기도의 모형이다.
1.가르침의 대상이 제자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 제자들에게 가장 절실한 필요의 내용들이었다. 오늘 우리에게 가르치셨다면 다를 것이다. 기도는 상황에 관계없이 같은 문구를 반복해서 암송하는 염불이나 주문과는 다르다. 구체적인 내용을 다루면서 보겠지만 사실적인 상황을 아뢰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은 같지만 그 구체적인 내용은 상황이나 시대적으로 다를 수 있기 때문에 제자들에게 합당한 기도가 오늘 우리에게는 아닐 수 있다. 예수께서 이것을 기도하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이런 형식으로 기도하라 하신 말씀이기 때문에 오늘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형태는 본 받을 필요가 있지만 이미 이루어진 내용들이 있고 그런 입장에서 이미 이루어진 것을 반복적으로 구하는 것은 주님께서 가르치셨던 기도의 자세에서 옳지 못하다.
2.가장 아름답고 균형 있는 기도의 모범이다.
언제나 성경을 이해하는 방법에서 그때 당시의 말씀을 직접 들었던 사람들에게 주는 일차적 의미와 시간적역사를 뛰어 넘은 현재 우리에게 주시는 의미를 바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앞에서 경계하신 부정적인 기도의 자세를 알았으므로’를 전제로 한다.
(9m)①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기도의 대상을 부름) – 본래는 유대인들의 생각은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분으로 고백 되는 성경의 기록들을 더러 본다.(왕상8:39, 43, 49; 대하6:21, 23, 25, 33, 35,39; 스5:12; 욥16:19, 22:12; 시115:3; 전5:2; 애3:41; 단2:19, 28) 첫째로는 당시의 이러한 일반적인 사상에서 이렇게 가르쳐졌을 것이다.
누구든지 기도를 할 때는 먼저 그 대상을 부르게 되어 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자신이 기도해야 할 대상을 이렇게 가까이 대할 수 없다. 하나님이 아닌 대개의 종교의 행위는 항상 진노하는 신들을 위로하고 노하지 않게 하기 위한 이유이기 때문에 절대로 가까이 대하거나 다정하게 대할 수가 없다. 그러나 이 부름에는 이 우주에 충만해 계신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을 찬양하는 고백도 담겨 있으면서도 그분은 우리의 가까운 아버지시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는 창조주요 이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은혜를 얻게 되었다.
(9b)②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영광과 위엄에 찬양) – 다음은 그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역사(役事)에 대한 찬양과 영광을 돌리는 것은 당연한 순서이다. 이것은 이 드리는 기도에도 확신을 더해주는 감격이요 찬양이다. 이 기도를 통해서도 하나님의 영광된 이름, 복되신 이름이 영광을 받으시기를 원하나이다. 그런 바람을 담은 기도의 내용이다.
(10)③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주님의 의를 구함) – 제자들 당시에는 아직 임하지 않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간구였음이 분명하다. 이 때의 “나라”는 “때가 찾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다”(막1:15, 마4:17)는 주님의 말씀에 근거할 때 분명 하나님의 나라이다. 즉,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다는 것은 아직 이 땅에 임하지는 않았다는 뜻이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해 달라는 것이 주님이 가르치신 본래적인 기도의 내용이다. 그러나 주님은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마12:28)는 말씀을 하심으로써 성령의 오심과 능력의 역사는 하나님 나라의 임재의 사실이라는 말씀을 하셨다.
그리스도교는 이 땅 위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하는 운동이다. 당시의 이 기도에서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것은 곧 교회가 이 땅 위에 세워짐을 구체적으로 의미한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그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해 달라는 기도를 하라고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것이다. 그러나 이 하나님 나라는 오순절 날 교회가 이 땅 위에 세워진 이후인 오늘날에는 “나라이 임하옵시고” 라는 기도를 되풀이 할 필요는 없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나라는 장소 개념이 아니고 어디든지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이다. 교회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그 머리로 하는 그의 몸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통치이다. 그 하나님의 나라인 교회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유일한 기관이다.(마 16:10)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한다는 것은 뒤집어 말하면 교회만이 음부의 권세, 곧 마귀의 권세를 이긴다는 말씀이므로 귀신을 쫓아냄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임하였다 하신 주님의 말씀과 같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의 지상 완성이었다. 따라서 원칙적으로 나라가 또다시 임하게 해 달라는 기도를 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것은 이땅에 이미 와 있는 하나님의 나라인 교회를 부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럼으로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는 오늘 우리의 기도 속에서 의미는 우리의 삶에 늘 하나님의 임재를 구하고 하나님의 완전한 통치가 나의 삶 속에 우리의 교회에 사회에 세계에 이루어 질 것을 구해야 할 내용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인생에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누리지 못한다면 그것은 한 마디로 비극이다.
(11)④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육신의 필요를 구함)– 사실적으로 제자들 당시의 상황에서는 하루의 양식은 참으로 쉽지 않은 과제였고 주님의 기적의 떡으로 배 불리고 그러한 예수 그리스도를 임금 삼으려는 모습들을 봐도 그렇다.(요6:15) 주님은 사실적인 이 문제를 하나님께 가지고 나감에 있어서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라고 기도하게 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시대에는 몇 개월 분이 아니면 최소한 몇 일분의 양식이라도 미리 준비해 놓고 살아가는 환경에서 일용할 양식을 달라는 기도는 옳지 않다. 쌀 통에 양식을 쌓아 놓고도 “일용할 양식”을 구한다면 그것은 앞뒤가 맞지 않다.
그럼으로 이 말씀의 오늘의 기도의 모델로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 된 우리의 육신적인 삶의 모든 영역도 하나님 아버지께 가지고 나아가야 할 과제들임을 의미한다. 우리는 세상에 살고 일하지만 삶의 힘이나 가치를 이 세상에서 구하는 자들이 아니다. 이런 입장에서 육신의 양식보다는 영적인 매일의 양식을 구하는 기도가 되어야 할 것이고 다음에 말씀 나누겠지만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는 약속을 확신하고 신령한 것을 구하고 사모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12)⑤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영적인 성결을 위한 기도)– 이 기도 역시 우리 모두는 죄인이기 때문에 할 수 없다. 만약 그렇다면 인간은 영원히 죄 용서를 받을 수 없게 되는 이유는 우리는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다 용서 할 수 없고 완전히 용서하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기에게 죄 지은 사람을 시간적으로 오래도록 용서 못하며 공간적으로도 다 용서 못할 뿐 아니라 분량적으로도 말끔히 용서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사람들을 용서하는 것처럼 용서를 받는다면 그것은 대단히 율법적이고 윤리적인 상관관계 속에 있는 도덕이 되고 말 것이다.
우리의 사죄는 주님을 믿고 순종함으로 세례를 받고 물 속에 죽고 거듭남으로 새사람이 될 때 완전히 해결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럼으로 이 기도야 말로 오늘 우리에게는 합당치 않은 기도의 항목이다.
오직 죄악이 관영 한 세상에서 성령과 더불어 의롭게 살 수 있도록 주님의 능력과 의를 구하는 것이 죄에 대한 기도로는 더 합당한 자세가 될 것이다. 물론 우리가 주님께 용서 받은 것처럼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마18:33) 우리가 남을 용서함으로 용서 받을 수 있는 죄는 존재치 않는 것이 복음 속의 사람들의 삶이다.
바울은 구원 받은 사람들을 향하여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4:32)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골3:13) 라고 가르치고 있다.
(13)⑥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믿음을 바로 지킬 수 있게)– 이 시대에 가장 절실한 기도이다. 주님께서 마지막 때를 말씀하시면서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마24:24; 막13:22)거나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5:8) 라는 위기 속에서 우리 힘으로는 대적할 수가 없기 때문에 우리의 약함을 주님께 의탁하는 기도는 당연하다.
바울도 자신을 위한 기도를 부탁하고 있음을 본다. “또한 우리를 무리하고 악한 사람들에게서 건지옵소서 하라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님이라, 주는 미쁘사 너희를 굳게 하시고 악한 자에게서 지키시리라”(살후3:2~3)
그러나 주님은 약속하신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10:13)
(13)⑦(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최종적인 의탁)– 이 마지막 기도의 종결은 마가복음에는 없다. 우리 모두의 기도의 종결은 이래야 한다. 마치 아버지께 마지막 가지도 순종하며 드리는 겟세마네의 기도와 같은 내용이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마26:39; 막14:36; 눅22:42) 아무리 마음에 맞는 기도를 드렸어도 그 기도의 응답의 권한은 하나님께 돌리는 기도야 말로 우리 믿음의 자세가 되어야 한다.
3.그러나 암송하거나 이 내용으로 구체적인 기도를 대신하는 것은 옳지않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9f)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눅11:2)
본래 이 모형적인 기도가 본문에서는 주님께서 잘못된 기도의 문제들을 경계하신 후에 自意的으로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것으로 나타나지만 병행 구절인 누가복음에서는 제자들의 요청에 의해서 말씀하신 것으로 나타난다.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눅11:1) 라는 요구에 응하신 주님의 답변으로 기록되고 있는 것을 읽게 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하라”(눅11:2~4) 하셨는데 오늘 본문의 내용과 같은 형태이지만 단순화 된 감이 없지 않다.
그럼에도 오늘 우리는 이 누가복음의 내용은 사용하지 않고 본문의 말씀만을 주기도문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도 문제는 있다. 주님께서 너희는 “이것을 기도하라!” 하신 것이 아니라 “이렇게 기도하라!” 하신 기도의 모델이므로 의미를 생각치 않고 반복해서 암송하는 것은 아직 기도할 줄을 모르는 어린 신앙의 사람들에나 필요한 자세일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 기도 바로 앞에서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 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7~8) 하시고 “그러므로” 라는 말씀과 함께 이 기도의 모형을 제시 하셨음을 기억하고 경계해야만 한다.
4.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하는 것이 빠져 있다.
구속의 역사를 완성하기 이전이기 때문에 주님의 이름으로 구하라는 명령이 빠져 있다. 내 이름으로 구하라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최후의 만찬자리에서 구속을 완성하신 후에 약속 하신 것을 본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요14:13~14)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요15:16b)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16:23~24) “그 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 하는 말이 아니니”(26)
이런 이유에서 오늘날의 모든 기도는 예수의 이름으로 드린다. 그러나 이 주기도문만은 그렇게 하고 있지 않다. 기도의 권한은 우리 자신의 경건이나 의 때문이 아니라 오늘 나를 하나님의 자녀 되게 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희생 때문이고 그 십자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 앞에 당당히 나아가는 것이기 대문에 주님의 복되신 이름으로 구하는 것이다.
Ⅱ.그러나 체계적이거나 아름다운 기도를 못한다고 해서 염려할 필요는 없다.
이 말씀을 듣고 낙심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 같다. “나는 그렇게 체계적으로 기도를 못하는데 어떻게 하지요?” 라고 그러나 전혀 염려할 것은 없다. 지난 시간에 우리가 이미 말씀 드렸듯이 하나님은 이미 우리의 마음을 아시고 들으시는 분이시다. 우리의 신앙의 자세만 주님의 뜻에 순종으로 최선을 다한다면 기도의 말이 서투르다고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엡3:20) 그러나 물론 예배중에 회중을 대표하는 기도에서는 준비가 필요하다.
무엇 보다도 우리에게는 기도의 중보자가 계신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롬8:26~27)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8:34)
기도의 말이 아름답지 못하거나 허술하다고 걱정할 필요는 전혀 없다. 어린 아이가 어머니의 젖을 구하는 표현은 아주 단순하지만 어머니는 쉽게 알아 차리듯 하나님의 백성들이 단순하고 진실하다면 기도는 반드시 응답될 것이다.
Ⅲ.기도는 아무리 해도 결코 지나치지 않다.
1.우리는 우리 기도의 영역을 좀더 넓힐 필요가 있다.
이 모범적인 기도는 자기 자신에 한정되지 않았다. 우주를 품고 이웃을 품고 하나님의 뜻을 품은 기도임을 본다. 오늘 우리의 기도도 확대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기 때문이다. 구하는 것을 주시겠다는 약속이라면 좀더 많은 사람들과 일들을 위해서 구할 필요가 있지 않겠는가! “고린도인들이여 너희를 향하여 우리의 입이 열리고 우리의 마음이 넓었으니, 너희가 우리 안에서 좁아진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심정에서 좁아진 것이니라, 내가 자녀에게 말하듯 하노니 보답하는 양으로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고후6:11~13)
2.우리가 감당해야 할 세 가지의 기도를 다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니라, 이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이니,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2:1~4)
①간구[헬, 데에시스(dėesis), 청원, 기도, 청구, 기원] ①현재의 당면한 위기와 어려움에 대한 간절한 청원의 기도; ②하나님의 영광을 구하고 자신이 영적으로 살도록 하는 매 순간의 기도;
②기도[헬, 프로슈케(proseuche), 하나님께 간청하다, 예배하다]
③도고[헬, 엔튜크시스(enteuksis), 회견] ③남들을 위한 중보의 기도를 모두 잘 감당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고 신앙의 삶을 매사에 실행하며 동료 그리스도인과 중보 해야 할 영혼들을 위한 중보의 기도를 잘 감당하므로 주님의 십자가의 희생을 더욱 효력 있게 하는 온 인류를 위한 기도를 감당해 나가야 한다.
오늘날의 신앙인들이 모여서 함께 하는 기도에는 열심을 갖는데 세상 속에 흩어져서 살 때는 하나님의 백성 됨의 모습인 기도를 늘 시행하지 못하는 이 시대의 안타까움을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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