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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마 7:1~11 2004-09-19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산상보훈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지난 시간까지 상고한 6장이 천국 백성의 실재적인 삶이었다면 오늘부터 다루게 되는 이 7장은 하늘나라 백성들의 경계해야 할 여러 항목들이 결론적으로 교훈 되어지고 있다. 물론 맨 먼저 공부했던 5장은 천국 시민의 기본적 자세로 분리된다. 그러므로 산상보훈은 대단히 논리적이다. 천국시민의 기본적 자세, 실 생활에서의 관계, 그리고 마지막으로 주어지는 경계의 순이라고 나누어 볼 수 있다.

이런 이유에서 계속 중복되는 감이 없지 않다. 예를 들어 오늘 첫 부분(1~5)이 6:22~23의 내용의 확대 이해라고 한다면[물론 6장에서는 재물과 하나님을 가름하는 데서의 영적인 안목의 중요성이고 오늘 내용은 옆으로 형제를 대함에 있어서 경계의 교훈이지만] 7~11절까지는 6:5~14의 또 다른 기도의 가르침이라는 데서 그렇다.



Ⅰ.천국시민의 눈에 대한 경계.(1~5)

(1)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2)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3)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5)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예수께서는 이 산상보훈의 맨 앞부분에서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5:10~12) 말씀하셨지만 그의 백성들이 비판 받는 것에 대해서도 역시 같은 경계를 주고 계시는 것이다. 죄의 사람들 앞에서 적극적으로 의를 행함으로 욕을 듣고 핍박을 당하는 것은 격려 하시지만 잘못된 말로 인하여 받게 되는 비난에 대해서는 역시 경계를 주고 계신다.

믿음의 사람들이 죄인들 속에서 의롭고 거룩하게 삶으로 어려움을 당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나 자신이 바르지 못한 판단으로 인한 비난은 결코 기뻐하지 않으신다. 특히 오늘 본문에서는 그것이 세상 사람들로 부터가 아니라 형제들 간의 관계 속에서 다루어지고 있다는 데서 주의를 기울여 들어야 할 말씀이다.



1.옳지 못한 비판 받는 것을 경계하신다.(1~2)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우리 중 누구도 자식이 비난을 바는 것을 좋아하는 부모는 없다. 우리의 하늘 아버지도 마찬가지며 우리의 비난 받는 것은 단순히 우리 자신의 욕으로 끝나지 않고 하나님 아버지게 욕을 돌리는 것에 더욱 민감할 필요가 있다. 오늘 우리의 현실은 천국 백성들이라고 하면서도 옳지 못한 삶을 삶으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희생의 피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께 욕을 돌리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늘 우리는 주님께서 이르시는 듯한 찬송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185:1내 너를 위하여 몸 버려 피 흘려, 네 죄를 속하여 살길을 주었다,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무엇 주느냐,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무엇 주느냐]

믿음의 사람들이 늘 기억해야 하는 것은 나로 인하여 하늘 아버지께 욕이 돌아 갈 수 있을 것이라는 경계이고, 특히 같은 믿음의 백성들간에도 같은 경계를 가질 필요가 있다. 바울 사도는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엡4:29)는 당부를 주고 있고 베드로 사도도 같은 권면을 주고 있다.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벧전4:10)

하늘의 백성이라면 불신의 사람들은 물론이고 형제로부터도 비판을 받지 않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하고 또 비판하는 것도 조심할 필요가 있다.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 이라고 할 때 [헤아림, 헬,metreo(메트레오)]은 바로 우리가 오늘날 쓰는 ‘미터 법’을 의미한다. 내가 상대에 대하여 비판이 척도가 되면 상대도 나를 판단하는데 비판이 척도가 되고 반대로 내가 상대를 볼 때 긍휼로 보면 상대도 긍휼로 대해 올 것은 사실 너무나 당연한 인간 관계다.

바로 뒤의 12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는 말씀은 오늘 말씀을 반대로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 상호간에는 비판보다는 긍휼을 더 잘 사용하는 자세가 되어야 한다. 야고보는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약2:12~13)고 교훈 해 주고 있다. 사실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로 용서해 주시고 구원해 주셨음에도 서로 간에 긍휼보다는 비난과 정죄의 기준을 더 자주 사용한다는데 문제가 있다. 우리 모두 용서 받을 수 없는 죄인을 주님께서 피 흘리시므로 받아 주시고 긍휼을 입었음을 날마다, 순간마다 기억하는 모두가 되시기를 …



2.자신의 바르지 못한 판단이 남을 먼저 정죄할 수 있다.(3~4)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이 말씀을 바꾸어 이해 하면 나의 눈에 [들보, dokos(도코스), 큰 나무토막, 대들보-집의 지붕을 밭이고 있는 큰 나무 토막] 같은 큰 것이 가리고 있을 때 형제의 눈 속에 티를 보게 된다는 의미이다. 사람은 어쩔 수 없이 보는 것들이 어떤 것에든지 영향을 받게 되어 있다고 앞에서도 말씀을 드린바 있다..

그러므로 무엇이 그 눈을 좌우하느냐에 따라서 꼭 같은 것을 보더라도 각각 다르게 말하게 되어 있다. 세상적인 가치나 이성이 그 눈을 지배하면 신앙의 문제도 세상적인 기준으로 판단하게 되고 믿음의 눈을 가진 사람은 비록 세상적인 것일지라도 영적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향하여 고백하기를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빌1:8)고 고백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늘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히12:2)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고 어떤 것을 볼 때도 십자가를 통해서 바라 보는 것이 중요하다. 나에게 애매한 말로 마음을 상하게 하는 형제를 보면서도 “주님 저 형제가 진실을 알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하고 불쌍히 여기고 더 기도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상대로부터 역시 긍휼을 입고 나중 하나님 앞에 설 때에 더 큰 긍휼을 입을 것이다.

나에게 같은 믿음의 형제가 잘못 보인다면 상대보다는 나 자신을 먼저 돌아보는 사람이야 말로 천국 시민이 분명하다. 믿음의 사람으로 남을 판단하는 것 경계 되는 신앙의 자세이다.



3.먼저 자신의 삶을 바르게 회복시키는 것이 우선이다.(5)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다른 사람의 눈에 티가 보인다면 “주여 내 눈에 들보를 보게 하소서!” 하고 회개하는 사람들로 교회가 채워질 때 주님께서는 구원 받는 사람을 더하실 것이다. 사실 이런 자세에서 천국 시민은 모든 것을 바르게 보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판단을 받지 않는다. 이런 모습으로 살았던 바울은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고전2:15~16)고 고백하고 있다.

남의 눈에 티를 발견하는 시기는 나 자신의 신앙의 경계를 가져야 할 시기요 나 자신을 영적으로 돌이키기 위해서 더욱 힘써야 할 시기임을 기억하자.



Ⅱ.진리(복음)를 손상시키지 말아야 한다.(6)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이 7장의 경계들은 사실 순서나 논리에 따른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을 향한 판단과 기도의 교훈 사이에 이러한 전혀 다른 교훈이 끼어 있는 것 자체가 어떤 면에서는 좀 이해하기 어렵다. 여기 [거룩한 것, 헬, hagios(하기오스) 신성한, 순결한, 봉헌된, 거룩한, 성도, 정결한]은 여러 가지 하늘에 속한 의미들을 가지는 말이다.

뿐만 아니라 ‘진주’는 가장 귀중한 보석으로 취급되면서 뒤에서 천국으로 비유되고 있는 것을 본다.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마13:45~46)[왜 Diamond 도 Sapphire도 Opal도 비취(翡翠 - Jade)도 아닌 진주일까?]

성경의 교훈들에서 거룩한 것을 거룩한 것으로 이해 못하는 이방인이나 짐승처럼 사는 사람들을 개나 여우 돼지로 이해 하는 예는 신약성경에만 해도 더러 나타나는 것을 읽을 수 있다.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마15:26) “가라사대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낫게 하다가 제 삼 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눅13:32)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손할례당을 삼가라”(빌3:2) “참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저희에게 응하였도다”(벧후2:22)

사실 복음은 모든 사람에게 전하고 가르쳐야 할 구원 얻을 수 있는 귀한 보석보다 귀한 교훈이다.(마28:19~20; 막16:15~16) 그렇다면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는 말씀은 이방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주지 말라는 가르침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과 복음을 받았음에도 지속적으로 거역하고 적극적으로 방해하는 사단에 잡힌 자들에게, 즉 생명의 말씀을 복음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구브로 섬의 ‘엘루마’[“가로되 모든 궤계와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행13:10)] 같은 자들에게는 생명의 십자가를 원수로 여기는 자들에게는 가치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십자가의 은혜가 더 이상 복음이 되지 못한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 바울도 이러한 사람에 대해서 탄식하고 있다.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빌3:18~19) 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의 靈性과 熱誠이 얼마나 복음으로 가르치고 권면해야 하겠느냐는 판단을 하기에는 너무나 부족하기 때문에 복음을 적극적으로 거부하고 방해하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정죄보다는 권면이 중요하다. 다만 복음을 세상의 이성적 논리나 타 종교의 종교적 논리로 뒤섞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복음 되지 못하게 하는 것에 주의할 필요는 분명히 있다.

복음을 전하는 데는 최선을 다하고 그 복음의 변질을 막는데도 우리의 혼신의 힘을 다하는 주님의 의로운 일꾼들로 사는 천국백성 되시기를 복되신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 드린다!



Ⅲ.기도는 적극적이어야 한다.(7~11)

(7)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8)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9)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10)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11)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6:5~14절이 기도의 자세와 내용이었다면 오늘 본문의 내용은 기도가 응답되기 위한 우리 천국의 백성들의 자세이다. 많은 사람들이 기도는 예배당이나 방안에서만 드리는 것으로 대개 이해를 하고 보다 중요한 기도는 산속에서 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 한다. 또 내가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천사나 사람을 통하여 찾아 오는 것으로 생각해서 대단히 수동적이다. 그러나 이 산상보훈의 두 번째 기도의 교훈은 대단히 적극적인 면으로 교훈을 주고 있다. 물론 하나님의 성령을 앞지르는 너무 지나친 행동도 문제는 있겠지만 기도는 결코 감나무 아래에 누워서 입을 벌리고 기다리는 수동적인 자세가 아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기도의 가르침은 단순히 무릎을 꿇고 하는 기도 이상의 것임을 가르친다.



1.응답 받는 기도는 삶으로 하는 것이다.(7~8)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이 구하는데 적극적일 것이고 잃어 버린 사람이 그 잃은 것을 찾으려고 애쓰게 되며 만나야 될 대상이 문을 닫고 있거나 필요한 물건이 있는 곳의 문이 잠겨있을 때 그 문을 열기 위해서 열릴 때까지 두들기는 행동을 멈추지 않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므로 하늘의 것을 충분히 갖지 못했다는 가난한 마음이 지속적으로 구하게 되기 때문에 심령이 가난한 자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다고 한 것이다. 실재로 우리가 필요한 것이 없을 때 기도에 더 적극적인 것은 조지 뮬러를 비롯하여 역사 속에서 증명되는 사실이다. 오늘 우리의 비극은 어쩌면 땅에 것이 필요한 정도로 있다고 하는 것 때문에 정말 필요한 영적인 것을 의식치 못하고 있는 모습이 아닌가 생각된다.

우리는 결혼할 약속으로 열 드라크마를 받고 그 중에 하나를 잃어 버리고 밤낮 쉬지 않고 등불을 켜고 집안을 쓸고 찾는 누가복음15:8~9[어느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도록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또 찾은 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았노라 하리라]의 여인 같은 심령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찾아야 할 하늘의 신령한 것을 잃어버린 안타까운 심정의 찾는 자여야 할 것이다.

아니면 주님처럼 아가5:2의 “내가 잘지라도 마음은 깨었는데 나의 사랑하는 자의 소리가 들리는구나 문을 두드려 이르기를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 문 열어다고 내 머리에는 이슬이, 내 머리털에는 밤 이슬이 가득하였다 하는구나” 라는 신랑의 애절함과 요한계시록3:20의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는 우리의 삶에 참여하시기 위해서 계속 두드리시는 주님의 두드림으로 응답 받았다는 확신을 향해 도전할 필요가 있다. 사실 우리는 많은 부분에서 기도를 쉽게 포기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주님은 우리에게 우리가 천국 백성이라면 결코 기도의 응답을 향한 열심을 중단하지 말 것을 경계하고 계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한 영혼을 찾으시고 두드리시기를 계속 하시는데 우리 자신들은 그렇지 못함을 안타까워 하신다.



2.우리의 하늘 아버지는 육신의 아버지와 비교될 수 없는 좋은 분이시다.(9~11)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우리의 완전하시고 인자하신 하늘 아버지께서는 신령한 것을 확신 시키시기 위하여 가장 일반적인 땅의 원리를 예를 들어 말씀하신다.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세상의 부자간의 사랑의 깊이가 많이 퇴색되어 가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 원리는 적어도 짐승 세계에서도 변함이 없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사실들이고 연이어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말씀하신다. 여기는 다시 구하는 처음 것으로 되돌아 왔다.

이미 앞에서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6:30) 하셨던 주님은 다시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는 확신을 주고 계신다.



우리는 천국 백성으로서 불신의 세계는 물론 형제간에서도 비난 받는 것은 하나님께서 결코 기뻐 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형제의 눈에 허물과 티가 보일 때는 먼저 자신의 신앙 상태를 점검할 때임을 의식해야 한다. 바울은 조심스럽게 경계하여 이르기를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 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갈6:1)고 권면 한다.

우리는 구원의 복음을 함부로 취급하거나 세상 사람들로부터 더럽힘을 당하도록 만들어서는 안된다. 적극적으로 전하는데 힘써야 되겠지만 우리의 삶의 자세에 의해서도 복음이 가치를 잃게 할 수도 있다는 데서 앞의 말씀과 연관이 된다.

기도는 수동적인 것이 아니다. 나의 필요를 의식하고 적극적으로 구하며 어떻게 응답하실까 찾고 두들기는 확신과 행동이 다 함께 할 때 기도는 더욱 효력을 나타낼 것이다.

신실함도 의지함도 모자라기만 한 우리에게 변함없이 “…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며”(히13:8) “…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신”(약1:17) 우리의 좋으신 사랑의 하늘 아버지께서 이 세상의 어떤 아버지 보다도 비교할 수 없는 우리의 형편을 살피시고 더 좋은 것들로 풍성히 채우시는 주님이심을 확신하고 받으시고 감사 드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