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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이 시간에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7:7~11)는 말씀으로 말씀을 마무리 했었는데 사실 오는 첫 부분인 12절은 지난 주의 말씀의 말미에 연결되어 지는 황금률이라 일컫는 말씀이다.
그런가 하면 오늘 나머지 두절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의 점검으로 대단히 중요한 말씀이다. 단 두절이지만 이 말씀 속에는 천국과 지옥의 갈림길이 있고 우리가 천국 백성이라면 당연히 어느 길을 가고 있어야 하는가와 미래에도 어떤 길을 선택해야 할 것을 경계해 주고 있다는 데서 대단히 중요한 경계의 교훈이라 생각된다. 이 산상보훈의 마지막 장인 이 7장이 경계의 교훈이기 때문에 지켜질 때만이 복이 되는 말씀이다. 어쩌면 오늘 우리 각자의 가장 분명한 신앙의 삶을 점검하는 말씀이 될 것이다. 좀 더 무겁고 받기 힘든 말씀이 될 지도 모르겠다.
Andre Gide가 1909년 발표한 “좁은 문”은 이 말씀으로 배경을 삼아 작품을 썼다. 알리사는 외사촌 간인 제롬을 사랑하지만 여동생 줄리에뜨도 제롬을 사랑하는 것을 알고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여동생에 대한 염려 때문에 제롬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한 체 사랑의 안타까움과 아픔만을 간직한 채 세월을 보내다가 마침내 죽고 만다. 지드는 사랑하는 연인을 양보하는 것으로 좁은 문을 표현하고 있는데,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 “좁은 문”은 과연 무엇일까? 모두가 편한 길, 넓은 길만을 선택하는 이 시대에 신앙 하는 우리에게 참으로 좁은 문은 어떤 것인가를 생각해 봤으면 한다.
Ⅰ.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이 말씀을 산상보훈 중에서도 “황금률”이라고 하는 별명을 가지면서 구약의 결론[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이면서 신앙의 사람들의 삶의 원칙이라고 말한다. 이런 사상은 신앙에서 뿐만 아니라 세계 도처의 교훈들에 같은 정신이 들어 있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부정적으로 쓰여지고[네가 싫은 일이라면 남에게도 시키지 말라!] 있으나 예수께서는 긍정적으로 가르치셨다. 이 말씀은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 라는 말씀의 보다 적극적인 극복의 방법이다.
우리는 나 자신이 싫은 것을 남에게 시키는 일이 너무나 흔한 것이 사실이고 남에게 주지 않으면서 받기를 바라는 너무나도 육신적인 삶의 형태가 팽배한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이 말씀은 더욱 중요한 교훈이다. 그러나 이 교훈은 단순히 인간 관계에서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 대한 우리 믿음의 사람들의 복 받을 신앙의 자세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늘 하나님께 좋은 것 달라고 매달리고 조르듯이 기도하면서도 사실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고 있는가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에게 최고의 것을 주시고 우리로부터 경배 받기를 원하신다. 가장 귀한 독생자를 주시고 영생을 허락하셨다.
사실 무엇이 생명보다 귀한 것이 있겠는가! 생명을 주셨는데도 우리는 그 하나님 앞에 너무나 계산적일 때가 많다. 주님께서는 약속하셨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눅6:38) 이러한 약속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흔들어 넘치도록 받지 못할까? 그것은 드릴 것을 드리지 않으면서 구하기 때문이다. 이미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 귀한 것을 주셨는데 우리는 여전히 받을 것만 헤아리고 있기 때문에 좋은 것들을 많이 놓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 과거의 시대를 돌이켜 보면 여권 신장이 참 많이 됐으면서도 오히려 여자들의 행복은 참 많이 감소된 것을 느낀다. 우리 어머니들은 이런 명절 때에도 참으로 힘겹기만 했어도 모든 친척들이 모처럼 모여 함께 즐거워 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기뻐했었다. 그러나 요즘은 명절만 되면 증후군 때문에 힘겨워 하는 많은 며느리들을 본다. 분명히 과거보다 일이 더 많은 것도 아닌데 자신들이 혹사 당한다고 생각하는 것으로부터 벌써 스트레스가 되고 만다.
매일도 아니고 매달도 아니고 일년에 두어번 수고하는 것이 그렇게 짜증스럽고 힘겹다는 생각들을 하는 것 같다. 분명히 자유는 많아졌는데 왜 더 행복하지 못할까? 그것은 생각의 차이인 것 같다. 옛 어머니들은 언제나 “임당수(臨塘水)” 형이었다. “이 한 몸 바쳐서 아버지가 눈을 뜰 수 있다면…” 이라는 심청이 처럼 “내 한 몸 수고하여 온 가족이 행복할 수 있다면…” 이라고 희생하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그러나 꼭 같은 입장에서도 “왜 나만, 여자들만 희생해야 하느냐!”는 합리적인 생각이 오늘날 많은 여성들을 불행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이런 생각이 고루하게 들려질 수 있겠지만 분명히 우리가 삶 속에 겪어 본 것은 그러했다.
너무 세상적인 이야기로 치우친 감이 있지만 우리가 하나님께 좋은 것 받기를 원한다면 나의 부스러기로 주님을 섬길 것이 아니라 나의 최고를 주님께 드려야 한다. 하나님은 나에게 최고를 주셨는데 나는 늘 부스러기를 하나님께 드리고 있으니 주님의 가르침과 맞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경멸하는 엘리 제사장의 아들을 향하여 “…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삼상2:30b) 말씀하셨다. 우리 하나님은 참으로 좋으신 아버지시다.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시간이든 물질이든 다 쓰고 남은 부스러기가 아니라 항상 최고를 드림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늘 최고의 복을 받아 누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
Ⅱ.다수를 따라 가지 않는 것이다. (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현재의 시대는 각 개인의 인권이 가장 존중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미션 스쿨 조차도 자신의 학교에 들어와서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조차 마음대로 복음을 가르치지 못하는 시대가 되었다. 당연히 이런 시대에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도 대단히 합리적이다. 쉽게 이야기 하면 계산적이다. 가장 적은 투자를 하고 최고의 부가가치를 얻으려고 하는 기업 논리가 신앙에까지 파고들고 있다. 이런 입장에서 당연히 좁은 문 보다는 넓은 문을 나가고자 하는 것은 너무나 일반적인 추세이다. 십자가의 피를 의지하고 살려고 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어리석은 사람으로 치부된다. “꼭 그렇게 냄새를 풍겨야 하는 거냐? 적당히 믿고 적당히 예배 시간도 참여해라, 뭐든지 지나치거나 미쳐서는 안 된다.” 라고 훈계하기 일수다.
이런 가운데서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울까 이해는 된다. 이런 사회가 되다 보니 하나님도 편하게 섬기려고 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적당주의나 편리주의가 하나님 앞에서는 인정 받지 못한다. 앞에서도 말씀 드렸지만 하나님을 최고로 섬기고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본연의 모습이다. 하나님께서는 최고가 아니면 받지 않으신다. 마음도 시간도 물질도… 왜냐하면 주님은 이 우주가운데서 최고의 지위를 갖고 계시고 또 우리를 위해서 최고를 주셨기(독생자) 때문이다.
이 세상의 정치가들이나 관리들도 좋은 것을 받기를 바라는데 온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는 당연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각오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께는 최고가 아니면 드리지 말자!” 이런 결단 없이는 신령한 은혜를 받을 수 없다. 하나님은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서 책망하신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먼 희생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느냐 너를 가납하겠느냐”(말1:8) 하나님은 최고를 받으셔야만 한다. 세상일이 바쁘지 않으면 드리는 시간이 아닌 황금 같은 시간, 나의 가장 깊은 마음, 재물도 부스러기가 아닌 최고의 것을 드릴 때 주님은 기쁘게 받으실 것이다.
오늘도 우리가 예배를 드리고 있지만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는 가인과 아벨이 드린 제사의 차이는 무엇일까?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히11:4)[…아벨은 양 치는 자이었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이었더라,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창4:2~5)]는 기록을 보면 역시 이해가 된다. 그 차이는 가인은 있는 것 중에 일부를 드렸지만 아벨은 최고의 것으로 드린 것을 이해하게 된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지옥 가는 것이 무서워서 믿음생활 할 뿐이다. 이런 우리의 모습에 결코 생명은 나타낼 수 없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액세서리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조차도 이 세상을 뽐내며 살기 위해 걸치는 액세서리 정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런 일반적인 생각 속에서도 신앙은 우리 인생에 가장 먼저 챙겨야 할 가치이다. “믿습니까?”
Ⅲ.세상적으로는 힘겹고 어려운 문이다. (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여기서도 생명의 길은 모든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가는 길이 아니라 “힘겹기 때문에 찾는 이가 적다”고 인정하고 있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언제나 좁은 문을 선택했던 신앙의 선진들의 모습을 살피면서 오늘 우리들의 선택을 살폈으면 한다. 많은 인물들이 있겠지만 그 중에서 대표적인 인물 두 사람만 살폈으면 한다. 분명히 이 사람들은 당시에 사람들로부터 좋은 평가나, 누릴 수 있는 사회적 권리를 다 누리지 못한 사람들임에 분명하다.
1.신앙 선배들의 믿음에서…
①노아의 삶에서 – 당시의 상황에서 사회적으로는 어울리지 않는 삶을 산 것이 분명하다. 죄는 극에 달했고 하나님께서 세상을 쓸어버릴 것을 말씀하시는 것을 보면 당시의 사회는 오늘의 시대에 결코 뒤지지 않는 정도였음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런 사회적 환경에서 노아와 그의 가족들은 당시의 모든 편리나 제도를 거부하고 하나님의 뜻에 맞추는 삶을 산 것 자체가 그저 놀라울 뿐이다.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창6:9) 라는 기록이 그걸 깨닫게 한다.
우리는 노아의 연대 속에서 많은 것을 짐작하게 한다. 방주를 지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려 했을 때 분명히 여러 가지 비난과 조롱을 받았을 것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전문분야도 아니고 힘에 감당할 것 같지 않은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했다는 사실이다. 한가지 더 신기한 것은 방주를 지으면서도 굶지 않고 살 뿐만 아니라 홍수 때를 넘길 수 있는 동물들과 자신의 가족들의 식량을 비축할 수 있었다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명령을 준행하려고 좁은 길을 들어서는 사람들의 삶을 책임지시는 것을 여기서도 확인할 수 있다. “할렐루야!” 마지막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변명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이 노아도 모델이 될 것이다. 하나님은 “노아를 봐라, 너희 보다 더 어려운 상황에서도 나의 명령을 준행하며 믿음으로 살아냈다.” 라고 자랑하실 것이다. 노아는 그냥 노아가 아니라 오늘 우리 시대에 믿음 생활이 어렵다고 신앙에 등한해 지거나 편리한 넓은 길을 택해버리는 우리에게 경계를 주시기 위해서 존재하는 신앙의 모범이다.
②아브라함의 삶에서 – 갈데아 우르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아브라함 당시에도 오늘처럼 영적으로 음란하고 방탕한 시대였고 특히 ‘네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는 명령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에 옮기려 할 때 주위의 친척들의 회유도 많았을 것이 너무나 분명하다. “가족을 떠난 다는 것은 죽으러 가는 거나 마찬가지로 어리석은 짓이다. 깊이 생각해 봐라!”는 등등 가까운 친척들이 말렸을 것은 분명하다. 사실 하나님의 명령보다, 합리적인 생각을 깊이 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뜻과는 멀어지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아브라함 내외는 이 좁은 길을 택해 나선다. 그것도 장래를 기약할 수 있는 후손도 없는 상황에서 이 무모한 도전을 향하여 발걸음을 옮긴 것이다. 그리고 인간적으로는 모자라기 이를 데 없는 이 아브라함이지만 자식들에게도 같은 믿음을 전해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나중에 이삭이 순종하는 모습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모습을 배워서 일 것이라는 판단을 하게 할 정도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자녀들에게도 그대로 계승되고 있는 것을 읽을 수 있다.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히11:9) 라는 기록이 이것을 증명한다. 어찌 보면 정처 없는 나그네 인생을 봐 왔던 이삭이 “아버지 나는 그렇게 살긴 싫습니다!” 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아브라함의 그 믿음은 子子孫孫 같은 믿음으로 이어지는 것을 보게 된다.
성경 속에서 신앙의 지도자들이 결국 좁은 문을 선택지 못해서 자녀 교육에 실패하는 예들을 더러 보지만 노아와 아브라함의 믿음의 위대성은 그 좁은 길을 선택하는 것을 자녀들도 거리끼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 두 믿음의 선진들은 대표적으로 자녀 교육에 그래도 성공한 사람들이다.
2.오늘 우리 사회에서 신앙의 삶에서 좁은 문.
오늘 우리 시대에도 신앙의 좁은 문은 무엇보다도 선택의 문제이다. 우리는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세상의 온 갓 유혹과 위협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선택하는 사람들이어야만 한다. 우리는 곧잘 “세상이 다 그런데” 라고 변명하지만 하나님 앞에 가서까지 이 변명이 통할 수 있을른지 확신할 수 없다. 위에서 본 신앙의 선진들은 그럴 이유가 충분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리석을 만큼 하나님의 명령 즉, 좁은 문을 선택했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 자녀 교육에 있어서 세상을 하나님의 명령보다 우선적으로 선택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좁은 길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이 시대는 인간 교육의 바른 길을 상실하고 있는 데서 노아의 때나 갈대아 우르 같은 위기의 시대임이 분명하다. 인간 관계의 귀중성에 대한 중요한 부분이 완전히 무시된 체로 지나칠 정도로만 경쟁의 훈련이 강요되고 있다. 터득 되어지는 지식은 다만 어떻게 하면 모두를 누르고 내가 가장 높은 곳에 서는가!에만 철저하게 길들여지고 있고 이것은 관계로서의 삶이 아닌 밀림 속의 짐승의 원리가 있을 뿐이다.
진정한 인간 관계의 따스한 사랑도 기쁨도 무시된 체로 살아 남는 요령만 길들여지고 있는, 그래서 가슴은 차가워지고 머리만 뜨거워져서 기형적인 성장을 해오고 있는 우리의 자녀들을 이러한 세상 속에서만 길들여서는 안 된다. 그러면서도 인내는 전혀 갖지 못해서 참을성을 갖지 못하는 것이 더욱 걱정이다. 오늘 교육을 받는 자녀들이 기성세대를 이룰 때 사회는 어떻게 되고 교회는 어떻게 될까? 신앙을 늘 최우선으로 선택하는 것을 가르치지 못한다면 과연 믿음을 계속 가지고 나갈 수 있을 까? 어려움을 스스로 해결해 가는 것을 전혀 훈련 받지 못하고 자란 아이들이 당면 되는 위기를 좌절하지 않고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다면 참으로 바른 결단이 필요한 때에 우리는 서 있다. 이런 무지막지 한 세상 속에 우리의 아이들을 맡긴다면 우리의 미래는 없다. 오늘의 시대에 전도도 중요하지만 우리의 자녀들을 하나님께로 가까이 만나도록 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넓은 길의 끝은 멸망이지 생명이 아니다. 우리가 늦었다고 할 때가 가장 이르다는 말씀도 있다.
Ⅳ.그러나 생명의 길이요, 영광이 기다리는 문이다.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자녀나 남편, 아내에게 갖는 관심과 투자 이상으로 주님을 섬기고 위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 보다 더 위하는 것이 있다면 그 것이 바로 우상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늘 천국 뿐만 아니라 좋은 것 받기를 원하면서도 우리는 하나님을 최고로 대우하지 못하는 모순된 삶의 자세를 가질 때가 많다.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명령은 분명히 사람 관계 속에서도 그리고 하나님께 대해서도 복된 사랑과 승리할 수 있는 삶의 비결이다.
사실 우리 모두는 남에 대한 배려를 할 수 없었던 죄의 사람들이었고 생각 없이 넓은 문으로 갈 수 밖에 없었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주님은 자신을 십자가에 희생의 제물로 주심으로 우리에게 좁은 문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주시고, 우리가 좁은 문의 귀중성을 알게 하시고, 오늘도 그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계속 격려 하신다.
예수께서는 요한복음10:7에서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하시고 다시 9절에서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고 약속 하신다.
좁은 문과 넓은 문은 언제나 우리의 가장 가까이에 있다. 주님은 이 두문에 선택에 있어서 강제적일 정도로까지 명령하신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왜 주님은 구태여 우리에게 어려운 문을 들어가라고 명하실까? 왜냐하면 이 두 가지 문의 마지막은 너무나 다르고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딤전2:4)
이 말씀을 들으면서도 “우리는 일없어” 라고 마음속으로 자위 한다면 조심해야 한다. 바울은 경고합니다. “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이르리니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살전5:3)
이 말씀이야 말로 사랑의 관계의 기초이면서 생명의 삶을 살아내는 복된 교훈의 말씀이다. 이 말씀을 모두 순종하여 주님의 기뻐하시고 선하시고 인자하신 사랑과 은혜와 생명을 풍성히 받아 누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복되신 주님의 이름으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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