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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마 7:24~29 2004-10-10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우리는 마태의 복음서 중에서 주님의 중요한 교훈 중에 중심인 산상보훈의 말미에 다다랐습니다. 천국백성의 삶의 중심사상에서부터 그것의 실천과 경계의 귀중한 가르침을 나누어 왔지만 사실 그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이 없이는 실질적인 교훈이 되지 못한다는 경계를 예수께서 주고 계신다. 우리는 그럴싸한 이론으로만 끝나버리는 것들을 沙上樓閣이라는 말로 일반적으로 쉽게 말한다. 신앙의 부분도 결코 예외는 아니다. 주님께서 절망의 인생들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온 갓 희생과 수모를 다 감당하셔서 이루어 주신 새 언약의 구원 약속도 그것을 듣기만 하고 믿음의 삶으로 반응하지 않는 인생들에게는 결코 생명이 되지 못하는 것을 역시 성경은 여러 부분으로 경계해 주고 있다.

인간 이성의 최고라고 하는 철학과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구원은 물론 바탕부터 차이가 있다. 바울 사도는 육의 사람의 비극을 한탄하면서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롬7:18) 하여 육의 사람 속에 결코 선한 것이 나오거나 거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있는 것처럼 아무리 지혜를 추구하고 진리와 생명을 구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범죄 한 인간 스스로는 절대로 불가능함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땅에 그리스도가 오시기 이전까지의 철학이라는 것이 인간은 그저 지혜를 사랑할 뿐이라는 이름으로 최고의 밝은 학문인 철학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사람들은 자연과 역사를 통해서 많은 것을 배워오고 터득해 왔지만 인간의 영원한 바램이면서 숙제인 영생의 진리는 솔로몬을 통해서 가르치는 것처럼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전3:11) 라는 갈증을 가질 뿐이었다.

하나님은 이렇게 사람은 끊임없이 사모하고 추구하면서도 가질 수 없었던 생명의 진리, 구원의 확실한 진리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 죄인이었던 인간이 비로소 소유할 수 있도록 은혜와 긍휼을 베푸신 것이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비로소 “…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선언하신 것이다.

그래서 인간 철학과 하나님의 선물인 구원 얻는 믿음과의 차이는 엄청난 편차가 있는 것이다. 철학은 끊임없이 지혜를 연모하여 좇아갈 뿐이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지혜를 소유하고 누리는 간격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확실한 약속을 가진 천국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그 새 언약이 가치를 잃게 되는 것은 ‘행치 않음’이라는 단순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천국이 되고 지옥이 되는 것은 행하고 행치 않는(行, 不行) 차이일 뿐이다.



Ⅰ.말씀을 행하는 자에게 약속된 복. (24~25)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구원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는 것 자체도 엄청난 복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마13: 16~17) 구약의 율법 속에 났던 위대한 많은 하나님의 일꾼들은 실체로 오실 그리스도를 뵙지 못하였고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오늘 새 언약의 약속, 구원의 복음을 들을 수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구약의 어떤 위대한 선지자나 하나님의 종보다도 우리가 복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세례요한을 칭찬하시면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마11:11; 눅7:28)고 율법과 복음 속에 사람의 차이를 이렇게 말씀하신다. 죽을 수 밖에 없었던 사람이 살 수 있다는 소식을 듣는 것 만으로도 대단한 행복임이 틀림이 없다. 그러나 복이 거기에 머물러서는 안된다. 그 귀로 들은 복을 자신의 것으로 삼아야만 하는데 주님은 바로 이 결정적인 사실을 오늘 말씀해 주고 계신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 여기서 ‘그러므로’는 앞에서 이미 말씀하신 천국 백성의 삶의 이유와 방법, 경계를 가리켜 말씀하시는 것이고 ‘누구든지’는 정해진 특정 사람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들은 바 말씀을 자신의 삶에 그대로 행하는 불특정의 모든 사람을 지칭하시는 3인칭 대명사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그러나 그 들은 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지 아니함이라”(4:2)고 안타까워 하고 있다. 여기 들음에 믿음을 화합치 안 했다고 하는 것은 말씀을 따라 순종치 않았다는 말씀과 같은 의미이다.

성경에서는 언제나 양쪽을 다 가르치신다. 믿으므로 구원을 말씀하시고(로마서) 그 믿음은 머리 속에만 있는 믿음이 아닌 행동이 수반되는 믿음(야고보)이라고 역시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여기 주님의 “누구든지 …”는 바로 뒤따르는 말씀 “나(예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로 오늘도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자신의 삶에 그대로 준행하는 모든 사람 즉, 여러분이 될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일 수도 있다.

사도 요한도 미래의 되어질 계시의 말씀을 시작하면서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계1:3)고 경계의 말씀을 주고 있다. ‘그래 그 말씀 참 좋다. 은혜 된다!’ 그러고 앉아 있는 사람은 약속하시는 복을 누리지 못한다. 사도행전 속에서도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행17:11~12) 라는 기록을 보는데 진리의 확인이면서 그것을 자신의 삶 속에서 확인하는 자세이다.



1.신앙을 건축으로 말씀하신다.(24)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모든 사람들은 인생을 건축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인생을 어디다 건축하느냐 하는 것인데 많은 사람들이 뻔히 알면서도 인생을 모래 위에 건축하는 자들이 많다고 하는 사실이다. 그런 사람이 누구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알면서도 순종치 못하는 사람들이다. 여러분 중에는 이런 어리석은 건축자들이 없기를 바란다.

이 역사의 마지막에 주님께서 오셨을 때 한탄할 사람들이 많을 것인데 첫째는 주님의 생명의 진리를 귀담아 듣지 못한 사람들과, 둘째는 그것을 알면서도 행치 못한 사람들일 것이다. 우리가 지금은 선택의 자유가 있다. 순종할 수도 불순종할 수도 있다. 그러나 주님 오셨을 때 “그때 이렇게 했어야 했는데…”는 ‘때는 늦으리’가 될 것이다. 주님께서는 야고보를 통해서 경계하시기를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약4:17) 하셨고 “주인의 뜻을 알고도 예비치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치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눅12:47~48)는 경계도 귀 기울여 들어야 할 교훈이다.

여러분들은 과연 인생의 영원한 건축을 어디에 하고 있다고 확신하십니까? 이 말씀에 두려움이 아니라 확신으로 응답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



2.인생의 풍파를 두려워 하지 않는다.(25)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이 말씀은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그대로 행하는 사람들은 인생의 어떤 풍파도 걱정하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이다. 불치의 질병이든지, 모든 것을 다 하루 아침에 잃는 것이든지, 허리케인이든, 오일 쇼크든 어떤 인생의 굴곡이 와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어떤 인생의 파고나 홍수도 주님의 말씀을 행하는 자의 건축은 무너뜨릴 수 없기 때문이다.

반석은 흔들릴 수 없는 기초를 말하는 것이지만 무엇보다도 반석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말씀을 따라 행하는 사람이 바로 인생의 기초를 불변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위에 두는 사람이다.

오늘도 이 말씀을 듣는 여러분 모두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가 되어서 주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셨을 때도 약속한 생명과 진리의 약속을 여러분 자신의 것으로 풍성히 누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



Ⅱ.행치 않는 자의 비극(26~27)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천국과 지옥의 차이는 큰 데서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삶의 현장 속에서 나누어지고 더 두렵게는 교회 속에서도 나누질 수 있고 한 가정 속에서도 나눠질 수 있다는 데서 깨어 있어야 할 이유가 된다. “이 정도는! 이 것 가지고는 지옥 가는 일은 없을 거야!” 라고 조금씩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어지는 작은 간격은 인생의 마지막에는 엄청난 차이를 내게 되고 마치 애급 땅에 이스라엘과 애급 사람들의 간격 같은 차이를 만들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은 모세를 통하여 내리신 말씀에 순종한 작은 순종으로 인하여 죽음이 비켜간 감격의 떨림이 있었지만 그 것을 두려워 하지 않았던 애급 사람들의 집마다 죽음의 슬픔이 충만했던 차이를 마지막의 이 역사 속에서 또 한번 경험하게 될 것이다. 노아의 호수 때처럼 불현듯 주님께서 이땅에 임하실 때에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마24:40~41; 눅17:34~35)



1.헛된 인생을 건축하는 사람이다.(26)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이 말씀도 역시 불특정의 사람들로 예견되어지고 있다.

역시 이들도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 자들이 아니라 들은 자들이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들은 말씀을 행치 않은 것 뿐이다. 그러나 주님은 이들을 향하여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평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세상의 좋은 약속도 행치 못하면 그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하물며 영원을 모래 위에 짓는 사람이야 얼마나 더 어리석은 사람들인가? 그것도 전혀 듣지 못하고 알지 못한 사람들은 고사하고 경계를 듣고도 행치 못했다면 억울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들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리석은 인생들을 구원해 주시려고 모든 인류의 죄의 문제를 십자가로 해결하시고 절망을 거두실 뿐 아니라 영광의 약속을 주셨음에도 그것을 누리지 못하고 모래 위에 인생(영원)을 건설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된다면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 없다.

오늘 우리의 행하고 행치 않고는 미래의 영원에 관계됨을 잊지 마십시오. 혹 ‘나는 듣지 못해서 그랬습니다.’ 라고 변명치 못할 것이다. 부자가 지옥에 가서 변명하기를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눅16:29~30) 했는데 오늘 이종배를 통해서 듣지 않으면 ‘죽은 자가 살아나서 일러줬더라면 회개했을 것입니다.’ 라는 변명은 역시 통하지 않을 것이다.

인생의 영원을 위한 건축은 한번 밖에는 기회가 없다. 마음에 안들면 헐고 다시 지을 기회가 또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생각으로는 ‘설마 내가 영원을 위한 건축을 모래 위에 세우고 있겠는가!’고 생각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거기에 대한 진단은 생각보다 훨씬 쉽다. 그것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행치 않는 것이다. 기회가 주어지면 순종하겠다고 생각해서도 안된다. 지금 행하지 못하는 사람은 다음순간에 행할 수 있는 기회란 없고 지금 순종하고 행하는 사람은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행할 수 있는 사람이다. 나에 대한 모든 역사와 영원은 지금 이 시간으로 오늘이라는 이 날에 연결되어 있음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 오늘의 순종이 나를 영원한 영광으로 이끌어 가고 오늘의 불순종이 영원한 저주로 나를 끌어갈 수 있음을 경계해야만 한다.



2.평상시에는 차이가 나타나지 않는다.(27)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주님의 말씀에 대한 행함과 불순종은 평안할 때는 그 차이를 별로 느끼지 못한다. 주일날 교회 오는 것은 주님의 말씀을 어느 정도 듣는 누구나 가능하기 때문이다.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믿음의 진정한 가치는 평상시에는 별로 느낄 수 없다. 그러나 가장 사실적인 모습은 인생의 폭풍 앞에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게 될 것이다. 특히 왜 하필이면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 라고 비유를 하실까? 이 비유에도 뜻이 있다고 확신한다. 홍수와 바람의 특징은 남김없이 모든 것을 쓸어가 버린다는 것의 의미이다. 작년의 태풍 ‘매미’가 그러했고 얼마 전 미국의 남부를 강타한 허리케인이 그러했다. ‘예수의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 정도의 믿음이라면 그에게서 욥처럼 한꺼번에 재산을 다 쓸어가시거나 요셉처럼 사랑하는 아버지를 잃어버리거나 아브라함처럼 독자를 잃어버릴 때는 하나님을 향해 항변할 소지가 있는 수준의 신앙일 것이다.

욥의 아내를 봐도 그렇다. 분명히 믿음의 장부인 욥을 남편으로 함께 살았지만 재산을 잃고 건강가지 잃은 남편을 보면서 오히려 그 남편의 믿음을 비웃고 있다. “…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욥2:9) 이런 폭풍우가 욥의 가정에 닥치기 전에는 자식들의 생일잔치 후에 드리는 제사도 같이 돕고 사람들이 보기에 욥과 신앙이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게 할 정도로 우아하고 그럴싸한 신앙의 자세를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재산을 모두 잃고 사랑하는 자식을 다 잃고 남편까지 잃게 된 막다른 골목에 이르자 이 여인의 믿음의 진면목이 여지없이 드러나고 만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22:2)는 명령은 “너에게서 이삭을 뺏어가도 나를 믿고 따르겠느냐?” 하는 질문이었을 것이다. 아비 친척집을 떠나 나그네 생활을 하는 노년의 아브라함에게 어쩌면 그의 생명처럼 귀중한 마지막 그의 희망이었을 이삭이었을 것이기 때문에 그를 앗아 간다는 것은 그의 남은 생명을 빼앗는 것과 다름이 없었지만 아브라함은 이 홍수와 폭풍 같았을 하나님의 명령 앞에서도 순종하는 행하는 믿음은 흔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질문을 성경의 믿음의 선진들이 아닌 오늘 우리 자신들에게 해봐야만 합니다.[이종배-나인이, 강경제-다원종합 건설, 박의종-영신이 등등] 예수 그리스도가 확실히 내 인생을 버티게 하는 기초로 행하고 사는 사람이라면 내 가정에 교회에 어떤 절망적인 일이 일어나더라도 그의 신앙의 기초는 결코 흔들림이 없을 것이다.

오늘 이 말씀을 듣는 여러분 모두가 세상의 흔들릴 수 밖에 없는 가치에 인생의 기초를 두지 않고 영원한 반석이신 그리스도의 생명의 교훈을 듣고 행하므로 어떤 절망적 태풍과 홍수가 여러분 인생에 가진 모든 것들 을 다 쓸어간다고 할지라도 영원한 반석이신 주님이 변함없기 때문이 믿음이 요동 없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복되신 주님의 이름으로 …



Ⅲ.주님 교훈의 권세(28~29)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래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주님의 삶 전체가 인간의 몸을 입고 이땅에 오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신비로 가득하고 선지자들을 통해 대언하는 말씀이 아니라 자신의 것을 직접 말씀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단순히 말씀의 도구로 역할 했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과는 근본적으로 달랐을 것은 너무나 당연했을 것이다.

완전히 적절한 비유는 아니지만 마치 제 개인의 살아온 인생의 과정을 다른 사람을 통해서나 글로 표현하는 것과 제 자신이 직접 들려 주는 것과 다른 것보다 더 다를 것이다. 오늘의 또 다른 비유를 든다면 진리를 입으로만 증거 하는 것과 삶으로 직접 가르치는 것 정도의 차이라고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전4:20)고 이 말씀을 확인해 주고 있다. 오늘 말씀의 강단의 증거이든지 생활 속에서 성도들을 통해서 증거 되는 가르침이든지 성령의 역사와 함께 자신이 삶 속에 실현하는 증거야 말로 사람의 영혼을 움직이는 권세 있는 증거가 될 것이다.



Ⅳ.결론

오늘 우리 시대의 신앙생활은 몰라서 행치 못할 중세 같은 암흑의 시대는 아니다. 그러나 많이 알면서도 행치 못해서 믿음이 위기를 이기지 못하는 연약함을 본다. 유대인이거나 헬라인 이거나 막론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만이 영원히 무너지지 않는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 위에 인생을 건설하는 지혜로운 사람이다. 그런 믿음은 아무리 절망적인 비극이 그 사람의 인생에 부딪쳐도 결코 신앙에 흔들림이 없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그러한 사람의 보호자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말씀을 생명으로 누릴 자는 정해진 특정한 사람이 아니라 단순히 말씀을 듣고 행하는 순종의 상람들이라는 사실이다. 반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수시로 들으면서도 행치 않는 사람은 불치의 난치병의 홍수와 하루 아침에 재산을 다 잃어 버리는 태풍을 만나게 되면 믿음이 무너짐이 심할 것이라는 경고이다.

오늘의 역사 속에서 나(우리) 자신의 순종으로 행함과 그렇지 않음이 영원을 다르게 결정한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 들이고 행하는 믿음이면 더욱 기뻐하고 그렇지 못한 믿음이라면 이 시간에라도 회개하여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의 역사가 여러분 모두의 것이 되시기를 복되신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