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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의 특징이 이적 중심으로 기록된 복음서이고 또 요한 사도는 단 7개의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으로서의 특별한 표적을 채택하고 있는 반면, 세리 출신인 마태는 복음서를 기록하면서도 대단히 수학적이고 논리적인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이제껏 5~7장까지를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최고의 교훈으로 정리하였다면 이제 나누려는 8~9장에는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증거 하는 이적들을 기록하고 있다. 물론 그 외의 나머지 표적들을 14~15장에서 6가지의 능력 행하심을 기록하는 대단히 짜임새 있는 배열을 볼 수 있다. 그런가 하면 17장에서는 마지막 17번째 표적인 간질 하는 아이를 고치시는 내용을 접할 수 있다.
이 첫번째로 다루는 이적은 모두 10가지의 표적으로 물론 그 중에 둘은 동시에 이루어진 사건으로 9:18~26로서 한 직원의 죽은 딸을 살리러 가시다가 12년을 血友病으로 고생하던 여인을 고치신 일이다.
주님은 육신으로 이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아들이란 증거로 참으로 많은 사람들의 병을 고치시고 굶주린 무리를 먹이시고 죽은 자를 살리는 일들을 하셨다. 물론 이 일들은 그의 사도들을 통해서 성경이 완성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 되심의 증거이고 그러한 일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핵심은 아니었다. 진정한 생명의 이적은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 된 인류를 위하여 자신이 그 형벌을 대신 당하시고 부활하신 십자가 사건이다.
주님께서 육신으로 계실 때도 많은 사람을 질병과 고통으로부터 구원 하셨지만 사실 십자가의 사랑의 역사를 통해서 역사 속에서 구원 받은 사람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물론 그러한 기적을 베푸신 일들도 이 역사 속에 찾아 볼 수 없는 사건들이었다. 이 사건을 직접 경험한 사람들마다 주님의 경계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일들이 많았다.
요한 복음 9장의 나면서부터 시각 장애자였다가 주님의 은혜의 역사로 광명천지를 보게 된 사람이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메시아가 아니라 죄인이라고 몰아세우는 바리새인들에게 너무나 당당하고 당돌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을 들을 수 있다. “…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요9:25) 이렇게 삶 속에 체험 되어진 신앙은 담대한 것을 보게 되는 것이다. 이적뿐만 아니라 우리 각자의 삶 속에서 검증된 말씀도 마찬가지로 위력을 갖게 된다.
오늘 읽은 본문에서 마태가 기록하는 주님의 첫 치료의 사건을 보는데 여러 가지 난관에도 불구하고 주님께 나아온 이스라엘의 문둥병자 였고 그의 소원대로 고치심을 밭은 은혜의 역사이다. 이 사건이 오늘 우리에게 가르치는 분명한 교훈이 있고 또 같은 생명의 역사를 경험하는 은혜의 말씀이 되시기를 주님의 복되신 이름으로 축원한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사실 성경에 문둥병에 걸린 사람들의 기록은 상당히 흔한 편이다. 열왕기하7:3~10의 굶주린 사마리아 성문어귀의 문둥병자 세 사람의 사건은 너무도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 그들이 고침을 받았다는 기록은 없지만 오히려 온통 굶주려 죽어가는 사마리아성을 구원하는 놀라운 역할을 한다. 어떤 경우에 하나님은 낮은 자를 통하여 높은 자들을 가르치시는 일이 많은데 오늘 본문이 바로 그런 교훈이다.
우리는 성경을 읽다 보면 표면적인 사건만을 보고 그 사건이 주는 내면을 이해하지 못하고 지나는 수가 많다. 요즘이야 나병은 거의 극복이 되었고 지금은 옛날처럼 극단적으로 격리는 하는 일도 없다. 그러나 이 말씀이 기록될 당시의 문둥병자는 그 질병이 치료되는 것도 기적이 아니면 힘들었고 치료되어 제사장을 통해서 정결하다는 선언을 받을 때까지는 그야말로 형벌 그 자체였다.
주님께서 산상에서 천국백성의 교훈의 말씀을 마치시고 내려 오실 때는 그 교훈의 가르침을 직접 들은 사람은 물론이고 또 그들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훌륭하신 교훈을 전해들은 군중까지 포함해서 아마도 산 위에서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좇았을 것임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런 와중에 산에서 내려 오시면서 예수와 제자들과 군중이 함께 만난 사람은 바로 예수 앞에까지 나와 절하는 문둥병자였다.
1.문둥병자의 믿음.(2) “한 문둥병자가 나아와 절하고 가로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
우리는 이 문둥병 환자가 예수 앞에 나아와서 절하기까지의 상황을 마태가 침묵하고 있기 때문에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앞뒤정황을 미뤄봐서 짐작은 할 수 있다. 물론 이 문둥병자가 예수께서 교훈을 베푸신 산의 바로 근처의 동굴이나 시설에 머무르고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그것보다도 귀중한 것은 그 많은 군중을 뚫고 예수 앞에까지 왔다고 하는 사실이다. 마태는 단순히 “한 문둥병자가 나아와 절하고”(2)까지만 기록하고 있지만, 우리는 그 과정을 이해하지 않고는 이 은혜의 역사를 우리에게 적용할 수가 없을 것이다. 앞에서도 지적한대로 이스라엘속에서 문둥병자들은 군중 앞에 온다고 하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문둥병자는 건강한 사람들이 살지 않는 진 밖에서 생활해야 했고 만약에라도 보통 사람이 자신의 옆을 지나게 될 경우에는 윗입술을 가리고 “부정하다 부정하다”(레13:45) 라고 외쳐야만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군중 가운데서 발견되면 돌을 맞아 죽게 되어 있다. 그러함에도 이 문둥병자는 예수를 에워싸 미는 군중을 뚫고 예수께로 왔다는 사실 자체가 죽음을 각오 한 것이다. 율법에서는 문둥병자는 부정하다고 정죄하고 있지만 그 죽을 수 밖에 없는 정죄의 율법을 어기고 라도 예수 그리스도 앞에 오면 사는 역사가 생기는 것이다.
바울 사도도 이 사실을 확인해 주고 있다. “…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고후3:6) 이 문둥병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확신하고, 율법을 어기면서 죽음을 무릅쓰고 주님께로 나아온 것이다. 예수께서도 직접 말씀하시기를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요12:25) 그것이 이 사람의 은혜 받을 자세였었다.
여기서도 믿음이 이긴 것이다. 죽으려는 결심으로 행하는 일이면 해결되지 않은 일은 없다. 다만 사람들은 죽으면 죽겠다는 각오를 하지 못하는 우유 부단한 행동들이 대부분이다. 이 문둥병자는 요즘 중국에서 外國公館에 죽음을 무릅쓰고 달려들어가는 탈북자들처럼 죽을 각오로 주님께 나아 온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야 말로 새 언약의 주체이시다. 어떤 무서운 죄에 있다고 할지라도 주님께 나아오면 살게 된다. 믿습니까? 괴로워 하고 갈등하고 힘겨워 하는 인생들이여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 오십시오. 그러면 살게 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2.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역사.(3)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즉시 그의 문둥병이 깨끗하여진지라” 난육(나병이 진행될 때 보통 피부보다 솟아나는 살점)으로 얼굴은 일그러지고 코는 주저앉고 손가락의 매듭들은 떨어져 나가 너덜거리는, 누가 보아도 섬뜩한 모습(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인간은 내면의 모습도 이럴 것이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그러한 외관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그 내면에 주님을 향하여 간절히 기도하는 영혼을 보고 계셨다. 그렇기 때문에 그 애정의 표시로 일그러지고 진물 나는 그 흉한 몸에 손을 내밀어 만지셨다. 말없는 이 행동은 “그래 얼마나 고통과 회한과 눈물이 많았느냐 나는 너도 귀하게 여기고 사랑한단다!” 라고 마음으로 응답하셨을 것이다.
이 문둥병자는 비록 몸은 그 모양이었지만 주님을 향한 믿음은 사지가 멀쩡한 오늘 우리보다 훨씬 건강했기 때문에 주님의 뜻을 깨닫고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라는 고백으로 나아갔고 이에 주님께서는 응답하시기를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응답하셨다. 오늘도 죄로 만신창이가 되고 괴로워 밤마다 잠을 못자고 두려워 뒤척이는 인생이 있을지라도 주님께 확신 갖고 달려 나오면 주께서 치료하시고 받아 주실 것이다. 할렐루야!
사실 이 땅에는 죄를 그대로 지고 영원한 멸망을 향해 치닫는 인생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오늘 암보다, 에이즈 보다 무서운 것은 영혼이 병든 것이다. 문둥병으로 인해 사람들과 격리될 수 밖에 없는 운명은 단지 병으로 부정할 때 뿐이지만, 죄는 천국의 무리와 영원히 격리될 수 밖에 없는 참으로 두려워해야 할 사람의 힘으로 이길 수 없는 질병이다.
어떤 입장에 있든지 그것은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난관이 있다고 할지라도 주님께 나아오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는 주님은 이 인류의 모든 사람이 깨끗함을 받기를 원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믿습니까?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이지만 구약성경 열왕기 하5장에 보면 엘리사 선지자 때에 나아만이라는 사람이 아람 나라의 군데 장관이었는데 자신의 시녀에게서 이스라엘에는 선지자가 있어서 주인의 병을 고칠 수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이스라엘 임금을 거쳐서 엘리사를 찾아 갔지만 내다 보지도 않고 “너는 가서 요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여전하여 깨끗하리라”(v10) 한 것 때문에 그 귀한 약속을 받아 놓고도 그 원수 같은 자존심 때문에 거드름을 피워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가로되 내 생각에는 저가 내게로 나아와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당처 위에 손을 흔들어 문둥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다메섹 강 아바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하고 몸을 돌이켜 분한 모양으로 떠나니”(11~12) 그러나 다행히도 “선지자가 당신을 명하여 큰 일을 행하라 하였더면 행치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13)라는 종들의 말을 듣고 “하나님의 사람의 말씀대로 요단 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 그 살이 여전하여 어린아이의 살 같아서 깨끗하게 되었더라”(14)는 기록을 본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이 말씀은 단순히 이 문둥병자 개인만을 위한 주님의 말씀이 아니라 인류를 향한 주님의 간절한 의지의 표현이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다. 또 이일 을 위하여 주님께서 십자가에 피를 흘리신 것이다. 하나님의 온 인류를 위한 회복의지(回復意志)의 실천이 십자가에 대속적인 희생 제사였고 이제 한번으로 드려진 완전한 대속의 피흘림으로 죄에 대해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는 채워졌기 때문에 그 은혜의 제사를 통하여 모든 사람이 다 깨끗함 받기를 원하시는 것이 바로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의 소원이시다.
주님은 이제 마찬가지로 온 인류를 향하여 “너희들이 문둥병 보다 더 무서운 죄의 형벌에서 자유 할 역사를 이미 이루어 놓았으므로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안타까워 하신다. 이제 순종만 하면 되는데 사람들은 자존심과 잘못된 욕망과 마귀 사탄의 유혹으로 인해서 이 엄청난 은혜를 누리지 못하고 있으니 주님께서도 마음 아프실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면서 그 심령이 여전히 문둥병 같은 죄의 영향으로 나병환자의 코나 입술이 문들어 진 것처럼 참으로 있어야 아름다울 성령의 열매들은 다 문들어져 버리고, 불거진 난육처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갈5:20) 같은 것들로 인하여 일그러져서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갈5:19) 같은 진물로 보는 이들로 하여금 가까이 가기 어려운 영혼의 문둥병 든 나약한 주님의 백성들을 향하여도 주님은 여전히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권면하고 계신다.
3.주님은 완벽하게 회복시켜 주신다.(4)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의 명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 하시니라” 우리 주님은 이런 분이시다. 다른 모든 일보다 그 사람의 명예회복을 원하셨다. 적어도 평생의 저주에서 자유롭게 해 주시고 그렇기 때문에 먼저 일을 시키심 직도 한데 주님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편견을 벗기기 위하여 제사장에게 정결을 증명 받으라고 명령하신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人間回復은 주님을 완전히 신뢰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자녀로 완전히 회복시키신다.
질병조차도 주님께서 치료해 주신 것이라면 절대로 재발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치료를 주셨어도 주님께 성실치 못하면 그 질병이 다시 재발 할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은 죄송하지만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라 거짓말이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회복은 번복이 없는 회복이다. 주님께서 주신 치유가 확실하다면 같은 병은 그의 행위에 관계없이 절대로 재발하지 않는 완벽한 것이다. 사람은 완전히 치료할 수 없어도 주님은 우리의 영육을 완전히 회복시키실 수 있는 권세와 능력을 가지신 분이시다.
인간으로서의 완벽한 회복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이고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이고 그것은 당연히 이웃과 자연과의 회복도 가져오게 될 것이다. “모세의 명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 하라!” 당시에 문둥병 환자가 제사장에게 가서 정결 예물을 들여서 사람들에게 이스라엘의 일원으로 다시 회복을 받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오늘 죄에서 회복된 우리 자신들의 영적으로 육적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됨을 증거 하는 것이다.
문둥병 환자가 자신의 깨끗케 됨을 ‘모세의 명한 예물을 드려’ 증거 했다면 오늘 우리 성도들의 회복의 증거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우리의 영원한 정결 예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념하면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다.
Aiden Wilson Tozer는 “ON WORSHIP AND ENTERTAINMENT”에서 하나님이 사람을 부르신 것은 일하기 위해서 보다는 예배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인을 부르셨다고 증거 한다. “우리는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구원 받았다. 그리스도께서 과거에 하신 모든 것, 그리고 지금 하고 계신 모든 것은 바로 이 한 가지 목적을 위해서 이다. 우리는 참된 예배를 드려야 한다.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이 말씀하는 그런 분이라면, 그리고 우리가 주장하는 대로 우리가 신자라면,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해야 한다. 위로부터의 거듭남, 즉 하나님 자신의 거룩한 영으로 말미암는 중생(重生)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는 개인적 체험이 없는 사람은 그분을 예배하는 데서 아무런 기쁨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1) 라고 증거하고 있다.
사실 예배 하는 것 자체가 가장 신령한 하나님과의 교제이고 하나님과 교제를 바로 갖는 것만이 인간 회복의 가장 사실적인 모습이기 때문에 세상에 어떤 일보다도 예배하는 감격을 모든 그리스도인이 회복해야 한다고 역설하면서 모든 경건한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인간은 예배하기 위해서 부르심을 받았다’고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구원 받은 놀라운 은혜를 증거 하여 그들을 주님의 은혜에 초청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에 앞서서 하나님의 피의 제사로 회복된 지위를 회복하여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회복하고 선포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완전히 깨끗하다는 증거와 확신 없이는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해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지 못한다.
4.결론.
선택된 하나님의 백성으로 불림을 받았으면서도 치료되지 못하는 병을 가진 한 나병 환자는 그 선택된 영광의 권한을 박탈 당하고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것처럼 살아야 했다. 이 문둥병자의 운명은 오늘 하나님의 백성 ‘그리스도인’ 이라는 이름은 있으나 여전히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모임에도 제대로 참여치 못하는, 일에 메이고 세상에 매인 명목상의 ‘성도’ 라고 비유해도 그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마침내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깨닫고 죽음을 무릅쓰는 결단과 행동으로 온전케 하시는 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앞에 와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기를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라는 고백으로 나아간 이 나병환자에게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선언하시고 그의 사회적 지위까지 회복시켜 주신 복된 이야기는 오늘 명목상의 신앙인들 같이 하나님의 영광은커녕 힘겹고 어렵게 겨우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이름을 지키는 우리 자신들에게도 귀한 귀감이 되고 있다.
참으로 주님께서 원 하심은 이렇게 초라하고 더럽고 약한 모습이 아니다. 주님은 우리 모든 교회 속에 있는 성도들에게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지금도 지속 적으로 당부하고 계시고 이 명령은 거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회복된 우리를 도구로 세상에 인생이 무엇인지 모르고 죄의 만신창이가 되어, 하나님 없는 가련한 인생들을 향하여도 동일하게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안타까움으로 초청하고 계심을 헤아리고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라는 고백으로 나아가서 靈肉이 완전히 치료 받고 하나님과 사람들 모두에게 정결하고 거룩함을 증거 하는 나와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복되신 이름으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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