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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마 8:5~13 2004-10-24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지난 주에 나누었던 나병환자의 치유와 오늘 이 사건은 분명한 주님의 치유의 역사이면서도 우리에게 주는 가르침이 다르고, 택한 백성과 이방인의 구원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역사를 내다보는 상징을 가진다. 평생의 형벌처럼 여기는 문둥병이 하나님의 택함 받은 백성에게 들어있어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저히 낳을 방법이 없어서 주님 앞에 나와서 치유를 받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형상을 가졌으면서도 죄로 인한 형벌은 절대로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극복할 수 없고 이 인류의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왔을 때만이 해결 받는 것은 택한 백성이든지 이방인이든지 차이가 없음을 바울은 로마서 1~3장에 자세히 선언한 바 있다. 이스라엘의 문둥병자와 백부장의 하인의 중풍 모두는 당시에 치유될 수 없고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해결될 수 없는 문제 였다면 오늘 동일하게 죽음으로 가야 할 운명인 죄의 문제 역시 먼저 주님의 은혜를 입고 도구가 된 우리의 역할 없이는 해결될 수 없다는 데서 우리 각자의 사명을 깊이 인식 해야만 한다.



우리 나라는 임진왜란의 비극적인 역사를 겪으면서 일반적으로 좋지 않게 기억되는 것은 일본 순사였다. 오늘의 드라마 같은 데서도 종종 이러한 아픈 경험들이 묘사되고 하는 것을 보면 언제나 지배국(支配國)의 적은 권력이라도 가진 자는 그들의 지배를 받는 백성들에게 별로 좋은 인상을 남기는 일이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스라엘 속에서는 상당히 달랐던 것 같다. 성경 속에서는 이스라엘이 로마의 압제아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더러 칭찬 받는 로마의 백부장들을 기록하고 있는 것들을 읽게 된다. 오늘 본문과 거의 같은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 누가복음 7:2~10까지의 내용을 보면 이 백부장이 예수께 자기 대신 보낸 장로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대단히 좋은 평을 받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저희가 예수께 나아와 간절히 구하여 가로되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니이다, 저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4~5) 라고 간청 드리고 있는 것을 보면 분명하다. 물론 못된 짓을 일삼은 인물들도 없지 않지만 사도행전의 백부장 고넬료도 역시 그런 인물이었던 것으로 누가는 기록하고 있다.



당시의 시대적인 상황을 보더라도 하인은 자신 소유의 재산정도로 취급되고 있는 역사적 기록을 볼 수 있는데 오히려 자신에게 손해를 끼치고 있다고도 생각할 수 있는 하인의 고난을 안타까워 하는 이 백부장은 이렇게 주님을 믿고 확신하고 순종할 수 있었던 이유가 결국 믿음이 있었기 때문임을 이해하게 된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본문 말미에서는 선택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믿음을 잃고 은혜와 하나님의 약속에서 벗어나는 것을 안타까워 하시는 주님의 탄식을 들으면서 우리 모두의 믿음을 점검했으면 하는 두려움과 안타까움을 갖게 된다.

이 복된 말씀을 듣는 모두에게도 주님께서 이 백부장에게 주셨던 말씀처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라는 칭찬의 선언을 듣게 되고 치유되고 해결되는 은혜의 역사가 함께 하시기를 …



Ⅰ.문제를 주님께 가지고 나아오는 것 자체가 복이다.(5~7)

(5)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6)가로되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와하나이다 (7)가라사대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이 백부장이 주님을 찾는 것은 이 본문의 기록처럼 단순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사실 이 백부장이 주님께 나아온 것 자체만으로도 칭찬 받기에 충분한 자세이다. 당시에 이스라엘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평가는 우리 시대처럼 분명한 것은 아니었다.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 라는 여러 가지 주님에 관한 별명이 있었던 것은 그만큼 주님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는 말도 된다. 그런 입장에서 자신의 지위와 입장도 생각하지 않고 그 막연하게 들리는 이스라엘의 선지자에게 자신의 일도 아닌 하인의 일을 가지고 왔다는 것 자체가 믿음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1.낮은 자의 고난을 자신의 것으로 한께 나누는 모습.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라는 표현을 보면 대단히 적극적이다. ①나아왔다고 하는 말은 그냥 지나가는 예수를 불러 세운 것도 아니고 일부러 주님을 찾아 나아왔다는 즉, 모든 다른 일을 접어두고 이 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일에 시간과 마음을 썼다는 의미이다. 뿐만 아니라 ②간구[헬, parakaleo]하였다고 표현하고 있다. 멀찌감치에서 부탁 드린 것이 아니라 가까이에 다가와서 간절히 부탁을 드린 것이다.

그것도 자신의 일을 가지고 간구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하인을 위한 겸손과 기도였다는데 아름다움이 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기도를 요청해도 이 백부장처럼 주님 가까이에 그 문제를 가지고 나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일반적이다. 사실 기도의 응답은 얼마나 주님 가까이에서간구하느냐가 응답 받는 비결이 될 것이다.(이것은 외형적으로 교회당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가까이 섬기는 삶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과 가까이 사는 사람들의 기도가 효력이 있다고 하는 것은 역사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기록으로 알려주고 있다.

오늘 우리 각자는 사실 자신의 힘겨움으로 부르짖을 때가 많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우리 서로가 이 백부장처럼 자신보다 못한 다른 사람의 아픔을 가지고 주님 가까이 나아가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응답이 분명한 기도가 될 것이다.

이 백부장의 기도의 내용도 주님께서 기뻐하시기에 충분하다.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 하나이다”(6) 먼저 이 문제의 해결의 열쇠를 가지신 주님을 인정하고 고쳐 주십시오! 라는 자신의 욕구보다 있는 그대로를 상황을 아뢰고 있다.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 하나이다” 인생의 괴롬이 결코 주님의 원하심이 아니다.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애3:33)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 모두의 행복이지 괴로움이 아님을 확신할 필요가 있다.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서도 당부하고 계신다.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 길에서 돌이켜 떠나서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겔33:11) 탄식하시는 주님을 뵙는다. 하나님의 원하심은 우리 모두의 평안이지 고난이 결코 아니다. 주님은 우리 모두의 평안을 주시려고 십자가를 지셨다. 할렐루야!



2.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7) 이러한 겸손과 사랑의 모습을 보신 주님께서는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말씀하신다. 오늘도 힘겨운 인생이 있는가? 그런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는 이 음성을 듣기를 바란다. 응답은 우리가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주님께 우리의 문제를 들고 나가면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가서 그 고통을, 문제를 고쳐 주리라!” 그러나 여기에서 백부장의 믿음은 끝나지 않았다.



Ⅱ.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8~9)

(8)백부장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9)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1.감히 영광의 주님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8f)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이 고백은 주님을 대접하고 맞아 드리는 것에 물질적인 부담을 가지기 때문에 드리는 청원이 아니다. 앞에서도 말한바 있지만 이 사람이 군대의 대위 정도의 계급이면 그의 생활이 힘겨울 정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유대인들에게 회당을 지어 주기까지 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호화로운 집일지라도, 아니 남을 위해서 사는 삶이기 때문에 실지로 가진 것이 없어서 누추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고백은 외형적인 그의 형편 때문이기 보다는 죄와 허물로 인한 인간의 비참함을 고백하는 것이라고 봐진다. 사실 주님께는 못 들어 가실 곳이 없다. 우리의 추함을 영광으로 바꾸시기 위하여 영광의 보좌를 버리고 오셔서 가장 초라한 짐승의 우릿간에 오신 주님이시다. 그리고 그 주님께서 오늘 허물 많고 죄 많고 욕심 많은 우리 각자의 마음에 함께 사신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다. 너무나 황송하고 감사하지 않습니까? 그런 주님의 은혜와 사랑에 오늘 우리는 이 백부장처럼 엎드릴 필요가 있다.



2.말씀만 해 주십시오.(8b)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사람들 각자의 믿음은 사람의 수만큼이나 다 다르다. 지난 주에 말한 아람 나라의 군대장관 나아만은 “병든 부분을 손으로 만져” 낫게 해 줄 것으로 생각하고 마태복음9:18 “한 직원은 내 딸이 방장 죽었사오나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으소서 그러면 살겠나이다.” 했지만 이 백부장은 주님께서 말씀으로 천지를 지으신 사실을 어디서 배우지 않았어도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주님을 번거롭게 하지 않으려는 배려도 되겠지만 주님의 말씀 한마디면 모든 것이 가능하리라는 믿음이야 말로 진정한 믿음의 자세이다. 물론 바울은 로마 교회를 향하여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연약한 자는 채소를 먹느니라”(롬14:2)고 신앙의 상태가 다를 수 있음을 가르치지만 이왕이면 말씀만으로 확신할 수 있는 믿음이야 말로 주님께 칭찬 듣는 믿음임을 본다. 언제나 하나님의 성령은 말씀과 더불어 역사한다. 여러분 모두가 말씀이면 확신하고 만족하는 이 백부장 같은 믿음의 소유자들이 되시기를 … 주님께서 칭찬하실 수 밖에 없었던 믿음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3.무엇을 명령하시든지 순종하겠습니다.(9)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 고백은 군대의 위계질서(位階秩序) 속에 있는 자신을 말하고 있는 것이지만 믿음의 의미는 주님께서 명령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 되었던지 쉬운 것이 되었던지 무엇이든지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고백이다. 주님께서 명령하시는 것은 어떤 것이든지 순종하는 것이 복이다. 우리는 말씀을 들으면서도 쉽게 ‘그것은 오늘의 세상 속에서는 불가능하다!’라고 시작부터 금을 그어 버리는데 그것은 은혜 받을 자세가 아니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 말 속에는 여러 가지 의미하는 것들이 있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 어떤 제약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입장이다. 특히 군대의 질서는 상관의 명령에 절대복종이 생명처럼 지켜지는 곳에서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라는 고백은 그 뜻하는 바가 제약을 받을 수 있다는 고백이다. 오늘 우리도 같은 고백을 할 수 있다. “나도 세상의 직장에 있는 사람”이라고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백부장은 그렇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주님을 순종하는 것에 장애가 되지 않겠다는 고백이지만 우리는 오히려 거꾸로 이 말을 사용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이어지는 고백은 앞의 이 조건을 초월한다.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지금 주님께서 어떤 것을 명하시든지 모든 것을 다 동원하여 순종할 자세가 되어 있다는 고백을 드리고 있는 것이다.

주님은 믿음의 백성들에게 이미 모든 좋은 것들을 다 허락하셨지만 그것은 이제 신앙 하는 각자의 순종으로 채워지므로 우리 각자의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럼으로 순종은 제사보다 낫다고 사무엘이 말하는 것이다. “…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15:22) 주님의 명령에 철저한 사람이 더 많은 하나님의 복을 누리게 되어 있는 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귀한 신앙 논리이다. 순종으로 이 백부장의 복이 오늘 우리 모두의 복이 되시기를 …



Ⅲ.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 보지 못하였노라!(10~13)

(10)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 보지 못하였노라 (11)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12)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13)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시로 하인이 나으니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이 위대한 믿음의 조상들을 가졌다고 하는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로부터는 그들의 조상 같은 믿음의 고백을 들어보지 못하셨던 주님은 오히려 이방인의 입에서 나오는 고백으로 인하여 놀라시고 칭찬하시는 모습이다. 오늘 우리도 과거의 믿음의 선진들과 자신의 과거 믿음을 자랑하면서 현실적으로는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은데 이것은 주님을 안타깝게 하는 모습이다. 오늘의 산 믿음이 중요하고 예수께서는 그런 믿음을 칭찬하신다.



1.주님께서 기이히 여기시고 칭찬하시는 믿음이다.(10)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 보지 못하였노라” 全知全能하신 예수 그리스도께 기이한 것이 있겠는가? 그러나 인간의 기준에서 표현한 것이다. 선택된 민족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후예들이라고 큰소리 치는 이스라엘 속에서는 이러한 믿는 자를 만나보지 못하심이 한편으로는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셨을 것이다. 요한은 이 표현을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요1:11) 말씀하고 있다. 오늘 우리 교회에 주님께서 보이는 모습으로 나타나신다면 우리 중 얼마나 “오 주님 감사합니다. 반갑습니다. 제가 얼마나 주님을 기다리며 살았는데요” 라고 고백할 수 있을까 우리 자신들을 살필 필요가 있다. 비록 세상에서는 백부장 같은 지위가 없더라도 주님께는 인정 받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오늘 우리 각자의 믿음을 보시면서 기이히 여기실 수 있는 신앙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



2.이 은혜의 역사 앞에서도 주님의 안타까움이 있다.(11~12)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이 사건을 통해서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믿음 없음을 한탄하시는 내용이지만 이것도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우리의 이야기이다. 믿음으로 산다고 하는 우리 자신들이 과연 주님께서 한탄하실 수 있는 안타까운 모습이 아닐지 살피고 주님의 탄식의 대상이라면 오늘 이 말씀을 들으면서 회개해야 할 것이다. 東西南北 많은 사람들이 영광의 천국에 앉을 것인데 그 때에 그곳에 나 자신이 제외된다면 얼마나 큰 비극일까? 또 평생동안 신앙생활 한다고 해 왔는데 주님의 한탄의 대상이 된다면 누구보다도 우리 자신에게 비극이다.

우리의 각자의 믿음이 반드시 지속적으로 자라야 하고, 교회 역시 살아 있는 유기체로서의 몸이라면 생명을 낳고 기르는 모습을 각 성도의 삶과 함께 당연히 지속되어야 할 것이다. 이름뿐인 믿음, 사데 교회처럼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너는 일깨워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계3:1~2) 라는 주님의 탄식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된다. 우리를 살리려고 주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감당하셨는데 과거 어느 역사에서 보다 진리는 더욱 분명히 이해 하는데 주님의 생명을 나타내지 못한다면 그것보다 안타까운 것은 없을 것이다.

오늘 이 말씀 듣는 여러분들은 한 사람에게도 이 주님의 안타까운 탄식의 내용이 적용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는 주님의 칭찬만 듣는 백성들 되시기를 …



3.모든 믿음을 가진 자들에게 주님은 응답하신다.(13)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시로 하인이 나으니라” 주님의 약속은 조금도 헛됨이나 거짓이 없다.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라는 믿음의 소유자였던 백부장에게는 역시 그 믿음에 상응하는 응답이 주님으로부터 내려지고 있다.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믿고 있든지 반드시 각자의 믿은 대로 우리의 미래는 주어질 것이다. 머리 속에만 있는 믿음의 사람에게 영광은 머리로 상상하는 것으로 그칠 것이고, 믿음이 자신의 삶을 지배한 사람들에게는 사실적인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이다. 주님께는 시간이나 공간이 중요하지 않다.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시로 하인이 나으니라” 주님의 응답은 언제나 즉각적이다. 믿음이 부족한 우리가 늘 저울질하고 앞뒤를 헤아리고 계산하지만 하나님께는 전혀 의미가 없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믿음을 가지는 것이 있어야 주님은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실 것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이 백부장 같은 믿음이 있어야 한다. 나의 믿음이 크면 큰 것을 받을 것이고 작으면 부스러기를 받을 뿐이다. 오늘 우리 각자는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 하나님께서 알아서 주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진 믿음의 그릇대로 받는 원리를 여기서도 우리가 배운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가지는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가! 이 시간도 여전히 관건은 우리 각자의 믿음의 크기이다.

지난 시간에는 같은 믿음을 가진 이스라엘의 문둥병자에게 응답이 주어졌고 오늘은 이방인인 백부장에게 같은 은혜의 역사가 이루어졌다. 응답 받는 것은 인간적인 조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과 우리 각자의 믿음에 따라 좌우된다. 주님은 누가 부르짖든지 믿음으로 구하고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응답해 주실 뿐만 아니라 각자의 가진 믿음의 분량대로 주시는 좋으신 하나님이시다. 오늘 이 말씀 듣는 여러분 모두도 큰 믿음을 가지므로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라는 주님의 음성을 크게 받아 누리시는 모두가 되시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