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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마 8:14~22 2004-10-31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우리는 이 마태복음 8장에서 계속 주님의 치료 사역을 나누고 있고 9장까지 계속 될 것이다. 오늘 읽은 본문은 두 부분으로 내용이 다르게 나눠져 있고 베드로의 장모와 각색 영육의 질병을 치료하신 은혜의 역사와 함께, 여기에는 사뭇 어울리지 않을 듯 한 ‘주님을 따라야 할 제자의 자세’에 대한 가르침을 주고 계신다.

이런 형태도 역시 이 마태복음의 특징 중의 하나로 이해 된다. 이 8~9장에서 계속 주님의 이적을 기록하면서 거기에 군데군데 교훈들을 삽입하고 있는 것이다. 9장에서도 마태를 부르심과 함께 의원의 비유를 통한 복음을 누릴 수 있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 그리고 금식하지 않는 것의 논쟁에 대한 교훈과 마지막 부분에서는 목자 없는 양같이 고생하는 선택된 백성과 함께 추수할 일꾼에 대한 요청이 이어지고 있다.

주님께서 육신으로 계실 당시 뿐만 아니라 면면히 흐르는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인간을 괴롭히는 것은 수를 헤아리기 조차 어려운 질병이고[약 7,000種] 의학이나 과학의 발달에도 불구하고, 소위 일반 은총이라고 하는 의학의 발달로 사람의 수명은 많이 연장됐음에도 질병은 좀처럼 잡히지 않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경제의 호황이나 불황에 관계없이 綜合病院은 언제나 북적대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나 종합병원이라고 모든 사람을 온전히 치료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성경 속에서도 이러한 사례들이 나타난다. 9장에 연이어 나타나겠지만 “열 두 해 동안이나 하혈증으로 앓고 있던 여자는 여러 의사에게 보이느라고 고생만 하고 가산마저 탕진했는데도 아무 효험도 없이 오히려 병은 점점 더 심해졌다.”(막5:25~26-공동)

사실 우리 주님만이 진정한 치료자이시다. 예수께서 고치지 못한 질병이나 어떤 종류의 사람도 차별하지 않으시고 치료해 주셨다. 예수 그리스도께 못 고칠 질병은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을 [만병(萬病)의 의원]이라고 칭하고 주님이야 말로 진정한 종합병원(綜合病院) 이시다. 사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을 향하여 자신을 치료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셨다.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여호와 라파- 출15:26)

그러므로 오늘 우리도 모든 것을 주님께 믿음으로 가지고 나아가기만 하면 주님은 여전히 우리의 연약함을 감당해 주실 것이다.

범죄하기 이전의 에덴에 질병이 있었을까? 그것은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고 범죄 후 하나님은 하와와 아담에게 고통을 선언하시는 것을 보면(창3:16~19) 역시 이 질병의 뿌리는 죄와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질병을 치료하시면서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마9:2)는 말씀을 하시는 것을 보면 역시 그렇다. 오늘도 사람들의 과도한 욕심으로 인하여 건강을 잃게 되는 사례들을 보면 역시 질병은 현실적으로도 인간의 죄성과 관련되어 있음을 본다.[창3:17땅이 저주를 받은 환경적인 요인도 있고, 지금도 경건치 못한 사람들은 관리자라는 청지기 자세보다는 보다는 파괴자로 자연을 마구 훼손하는 일들은 건강한 환경을 망치고 있고 이러한 환경의 제해는 고스란히 사람에게로 되돌아 오고 있다.]

인간은 결국 죄로 인하여 만신창이가 되었고 이것은 어떤 세상의 의술로 고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무엇보다도 사람들의 보다 치명적인 질병은 내면적인 부분이고 이 분야는 세상에 치료책이 전혀 없다고 하나님의 말씀은 선언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치지 못한 질병이 없으셨고 사실 그것은 주님께서 대신 자신이 짊어지신 것이라는 사실을 오늘 마태는 우리에게 증거 해 주고 있다.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17)

그러나 이 질병 조차도 받아들이는 사람의 차이에 따라서 잘 감당하면 오히려 복이 되는 경우도 성경은 우리에게 더러 소개해 주고 있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119:71) 질병을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따라 복과 거룩한 삶을 회복할 수도 있다. 이런 입장에서 믿음으로만 소화하면 그것이 설령 우리에게 저주같이 보이는 것들 조차도 성도들을 거룩하게 하며 경건하게 단련시키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여기서도 역시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는 말씀이 입증되는 것이다. 할렐루야!



Ⅰ.고침 받은 자의 자세.(14~15)

“예수께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사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 누운 것을 보시고, 그의 손을 만지시니 열병이 떠나가고 여인이 일어나서 예수께 수종들더라”

예수께서는 천국복음을 전하시면서 믿음으로 그를 영접하고 섬기는 자들의 집을 찾아 잡수시고 머무르셨던 것으로 여겨진다. 예루살렘 부근에서는 마리아의 집이었다면 북쪽의 갈릴리 부근에서도 이 베드로의 집 같은 곳이 그런 곳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뒤에서 자신을 따르겠다고 고백하는 제자에게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는 고백을 봐도 참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고후8:9)는 바울 사도의 고백이 실감이 난다. 그럼으로 우리가 여유를 누린다면 주님께서 나를 위해 가난하게 되셨음을 감사하고 쓰는데도 주님을 의식해야 할 것이다.

또 여기의 기록은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이 없겠느냐”(고전9:5)는 바울 사도의 고백과 함께 일부 사람들의 주장처럼 베드로가 독신이 아니라 일찍부터 결혼하여 장모와 더불어 살고 있었다는 사실을 증거 해 주고 있다. 어쨌든 주님은 역시 잡수시고 쉬러 들어 가셨을 터인데 그곳에서도 치료의 사역을 감당하신다. 주님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충성 된 사람들은 어디를 가나 감당해야 할 일들이 기다리는 것을 경험하곤 한다.

열병으로 알아 누운 것이 어떤 종류의 질병이었던지 사람들은 예수께 치료를 구했고(막1:30; 눅4:38) 주님의 치료의 능력은 회복기가 필요 없이 완전히 고치셨다. 우리는 오늘날 육신의 열병보다 다른 많은 것들의 열병을 앓고 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주님의 일을 등한히 하면서까지 다른 어떤 것에 열정을 쏟는 것도 사실 치료 받아야만 할 열병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교훈을 얻고자 하는 중요한 영적 원리는 치료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상고하기보다는, 치료 받은 베드로의 장모에게서 배워야 할 것도 크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열병으로 누워 있다가 치료를 받자 말자 일어나 주님께 수종 들었다는 사실이다. 주님으로부터 회복 받은 것이 무엇이 되었던지 치료 받은 사람이 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 여인처럼 예수 그리스도께 수종 들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영원한 사망의 질병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씻음을 받으므로 치료를 받았다면 무엇보다도 주님을 수종 드는 일이 먼저 이어야만 한다.[수종의 종류들] 뒤에 이어지는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다른 중요하다고 하는 것에 눈 돌림에 대한 지적도 사실은 같은 맥락에서 이해 할 수 있다.

복음 성가 가사를 보면

“내가 너를 믿고 맡긴 사명 너는 왜 잊어 버렸나, 나만 따르리라 하던 약속 너는 왜 잊어 버렸나,

내가 너를 믿고 맡긴 재물 왜 너의 배만 채우나, 나를 위해 다시 바치리라 그 약속 잊어 버렸나,

위로받기 보다는 위로하고 사랑받기 보다는 사랑하고, 십자가만 면류관만 바라보며 의의길 간다더니, 위로하기 보다는 위로받고 사랑받기만 원하네.”

주님께서 우리의 저주 받은 영원한 죄의 질병을 치료 하셨다면 나는 당연히 주님을 섬기는 것을 가장 우선으로 해야 한다. 이것은 베드로의 장모를 통해서 우리를 일깨우시는 주님의 당부다. 섬기는 복은 사죄함 받은 감격, 치료 받은 감격을 가진 자들만이 할 수 있는 믿음의 행위이다. 믿습니까?



Ⅱ.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신 예수 그리스도.(16~17)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를 다 고치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저무는 시간은 더 이상 정상적인 사람들의 활동시간이 아니다. 1차 산업인 농경 사회에 살았던 우리 조상들은 어두움의 때는 사람의 활동할 시간이 아니라고 믿었다.

그런데 성경에서도 이를 증거해 주고 있다. “주께서 흑암을 지어 밤이 되게 하시니 삼림의 모든 짐승이 기어 나오나이다, 젊은 사자가 그 잡을 것을 쫓아 부르짖으며 그 식물을 하나님께 구하다가, 해가 돋으면 물러가서 그 굴혈에 눕고, 사람은 나와서 노동하며 저녁까지 수고하는 도다”(시104:20~23) 뿐만 아니라 어두움은 당연히 어두움의 세력이 활동할 시간이다. 그래서 우리의 조상들은 밤 12시를 귀신이 활동하는 시간이라고 해서 제사를 12시가 넘어서 지냈다.

이 역사의 어두움이 짙어질수록 사람이 어두움에서 활동하게 되는 것 같다. 보이는 시각적인 어두움뿐 아니라 靈界의 어두움은 어두움의 세력이 활동할 시간이다. 그래서 역사의 밤이 깊어 갈수록 어두움의 세력들이 어두움 속에서 마치 자신들이 광명의 천사인양 속이면서 활동하게 된다고 바울 사도는 경고한다.(고후11:14) 그런 어두움의 세력들은 이제까지 가르쳐진 바른 복음을 뒤바꿔 다른 복음을 전하면서 온통 하나님의 집인 교회를 엎드러치는 짓들을 하게 될 것이라고 바울은 디도에게 경계를 주고 있다.(딛1:11)

그럼으로 이 어두움의 때일수록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이 아닌 다른 영에 잡힌 자들, 즉 귀신들린 자들과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정상적이지 못한 모든 사람들을 주님의 말씀 앞에 데리고 나와서 고침을 받게 해야만 한다. 이 어두움의 부조화를 치료할 수 있는 능력은 하나님의 말씀밖에 없다. 주님의 섞지 않은 말씀이야말로 영육의 질병을 치료할 수 있는 유일한 능력이다. 믿습니까?

그러나 이러한 놀라우신 약속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거져 되어진 것이 결코 아니다. 하나님은 이미 이사야를 통해서 예언 하시고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사53:4) 때가 차매 이루신 것이다. 오늘 우리나 또 다른 사람이 악한 어두움의 세력과 모든 시달리는 것들로부터 자유 하게 된 것은 자연이나 우연히 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당하셨기 때문에 가능하게 되었다고 마태는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주님께서 이 역사의 중간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시므로 그리스도 이전의 모든 구약의 성도들과 그리스도 이후의 신약시대의 모든 죄 아래 신음하는 인류의 저주와 고통을 모조리 자신이 감당하시고 우리를 해방시키신 것이다. “이를 인하여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히9:15)

마태가 인용한 다음 말씀은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5~6) 내가 마땅히 당해야 할 저주를 주님께서 대신 담당하시고 온 갓 수치와 고통과 저주를 십자가에서 참으셨다. 할렐루야!

그럼으로 우리는 이제 함부로 살아서는 안된다. 그 희생의 가치를 헛되게 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내가 유쾌하게 죄와 죽음의 저주에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은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한다. 그래야 다시 오실 주님 앞에 부끄럽지 않을 것이다.



Ⅲ.주님을 따를 자의 각오와 자세.(19~22)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말씀하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19~20) “제자 중에 또 하나가 가로되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21~22)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놀라운 이적들을 목격하면서 또는 예수께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등극할 것이라는 주변의 무성한 소문들 때문에 주님을 따르겠다고 나선 사람이 많았고 오늘 여기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라는 고백을 서슴없이 하고 있는 서기관도 그 중의 한 사람이라고 봐진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은 나중에 주님께서 가룟 유다의 은 삼십에 팔려 군인들에게 잡혀 채찍을 맞고 십자가를 질 때 모두 도망가고 말았던 사람들이다.



1.세상의 영광을 바라고 주님을 따르겠다는 자세는 주님의 제자로 합당치 않다.(19~20)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말씀하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이 내용을 보면 예수께서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라고 칭찬을 기대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의 속마음을 간파하신 주님께서는 칭찬 대신 자신의 형편을 말씀 하심으로 서 자신을 따르려면 어떠해야 하는가를 증거 하셨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이 말씀은 동일하게 오늘 우리에게도 주님을 따르는 목표를 바로 제시하고 계신다. 이미 서귀관쯤 된 사람이라면 이스라엘 속에서의 자리가 확고했을 이 사람이 다음 행동은 언급되고 있지 않지만 오늘 날도 예수를 끝까지 따르고 섬기겠다고 고백하고 각오 했다면 이 땅에서 영광을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주님을 따르는 자들에게 약속된 영광은 이 세상에서 가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의 영광이다.

또 역사가 이렇게 마지막으로 칠흑처럼 어두울수록 광명의 아침을 기약하는 자세로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대할 수 있어야 한다. 주님을 섬기기 때문에 곤란과 어려움을 당한다면 이 말씀을 묵상한다면 큰 위로가 될 것이다. 또 주님의 속히 오심을 확신할 때 위로가 될 것이다. “그래 얼마 남지 않았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왔음이니라, 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13:11~14)

“주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이 고백은 즉흥적으로나 세상의 영광을 바라고 드릴 수 있는 고백이 아니다. 비록 세상에서 불이익을 당하고 어려울지라도 이런 각오로 믿음 생활 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늘에서 큰 영광이 예비 될 줄로 믿는다. 믿습니까?



2.주님을 섬기는 자에게는 어떤 일이라도 주님의 일보다 우선 될 일은 없다.(21~22) “제자 중에 또 하나가 가로되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 앞의 고백이 주님을 따르겠다고 시작하는 것이라면 이 말씀은 이미 믿음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 중에서 주님께 드린 부탁이었다. “제자 중에 또 하나가 가로되” 라는 표현으로 미루어 이해할 수 있다.

언 듯 이 제자의 기도는 문제가 없는 것 같이 보이기도 한다. 예수를 따를지라도 부친을 장사 하는 것은 당연한 것 같고 오히려 오늘 우리 시대에 믿는 사람들이 冠婚喪祭에 등한 하다고 싸잡아 비난하는 것을 듣기도 하기 때문이다.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어찌 보면 주님을 따르지 않겠다는 것도 아니고 주님의 허락을 받고자 하는 자세가 인간적으로 볼 때는 가상하게까지 보여 진다. 그러나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는 주님의 말씀에는 단호함이 보이지만 핑계만 있으면 주님을 섬기는 것을 등한히 하려는 미온적이고 소극적인 오늘의 그리스도인에게 경계가 되는 말씀이다.

이것은 세상에서의 사람에게 있어서 최고의 의무사항을 보이시면서 그것 조차도 주님을 섬기는 것 보다는 우선할 수 없다는 경계이다. 솔로몬도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 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가 이것에 유심하리로다,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자의 마음은 연락하는 집에 있느니라”(전7:2, 4) 하였다.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영적으로 죽어 있는 사람들은 육신의 죽음 앞에서 모두가 겸손해 지고 자기 반성을 하게 되기 때문에 초상을 치르면서 자신의 인생을 돌아 보는 사람들이 많고 믿음의 사람들도 이것에서 예외는 아닐 것이다.

결국 이 말씀의 가르침은 이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 보다 더 긴급하고 소중한 것은 없다는 가르침이다. 오늘 여러분들의 삶은 어떻습니까? 이 말씀을 듣는 여러분들도 진정 하늘을 소망하고 사는 믿음의 사람들이라면 예외는 될 수 없을 것이다.



Conclusions. 세상의 많은 사람이 어떤 것들에 너무 강하게 사로잡혀 열병을 앓고 있고, 우리도 예외 없이 다 이런 열병에 붙잡혀 있었을 텐데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로 치료 받은 자들이고 치료 받은 자의 자세는 무엇보다도 주님을 섬기는 삶이 첫째가 되어야 한다. 나는 주님을 서기기 위하여 고침 받았다는 고백으로 살아야만 한다.

하나님만이 진정한 만병의 의사로 모든 영육의 질병을 치료하실 수 있고, 오늘 나의 허물과 죄가 사함을 받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즉흥적이거나 세상의 영광만을 바라고 예수를 따라서는 안된다. 어떤 고난과 어려움이 있다고 할지라도 주님께서 나를 위하여 나의 죄와 허물을 대신 감당한 사실을 기억하면서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누리는 것이 있다면 주님의 희생을 감사할 필요가 있고 그런 삶의 자세는 주님을 섬기는 일보다 더 긴급하거나 귀중한 일이 있어서는 안될 것이다. 이 말씀에 부끄러움이 없는 나와 여러분 되시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