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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마 8:23~27 2004-11-07
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고…!  
많은 사람들은 주님 없이 어떻게 인생의 위기를 견딜까! 그런 것을 생각케 하는 말씀이다.

v18 “예수께서 무리가 자기를 에워쌈을 보시고 저편으로 건너가기를 명하시”면서 자신을 따르겠다고 하는 서기관과 제자의 요청에 답하시고 배에 오르셔서 건너편으로 가시는 중에 갑자기 일어난 이 사건은 앞의 치료 이적의 사건들과는 전혀 다른 경험을 제자들에게 주었고 저들의 믿음을 더욱 견고케 하는 개기가 되었다.

개인이나 무리의 질병을 고치신 일들과 차이가 나는 이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이 자연조차도 다스리고 주관하시는 분이심을 선포하고 창조주요 주관자임을 나타내 보이신 사건이었다. 구약의 모세, 엘리야나 엘리사의 이적들은 신약성격의 표적들 못지않게 놀라운 것들이었고 엘리야나 엘리사는 둘 다 죽은 사람을 살리는 이적까지 나타내었고 엘리야는 하늘을 닫고 여는가 하면 엘리사 역시 식물이 자라지 못하고 먹지 못할 물을 고치는 자연의 변화까지도 일으켰던 능력의 사자였다.

신약의 대표적인 인물인 베드로나 바울도 죽은 사람을 살리는 기적까지도 나타낸바 있다. 그러나 다른 것은 자연을 호령하고 변화 시키는 이적은 없었고 오직 주님만 가능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Ⅰ.인생의 항로에는 언제나 풍랑이 있다.(24)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물결이 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는 주무시는지라” 마치 노아의 8가족을 실은 방주가 불어난 물에 떠올라 요동치는 것과 같은 형상이 상상 되고 고해를 헤치며 인생항로를 해치는 사람들의 삶에 비유되는 모습이다. 이 세상 어디에서나 또 누구에게나 감당하기 어려운 폭풍우는 일어나기 마련이고 이것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것들이다. 특히 여기 “큰 놀이 일어나”라는 표현은 큰 지진이 일어났다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헬, seismos, 소동, 지진, 흔들림] 큰 폭풍이나 지진은 그 동안 애써 쌓아놓은 모든 것을 흉하게 깨뜨리고 부숴지게 하는 것들이다. 어떤 이들에게는 건강을 무너뜨리고 다른 이들에게는 그 동안 쌓아놓은 명성을 무너뜨리고 재산을 무너뜨리는 지진 같은 인생의 폭풍우는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은 “내가 이렇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라고 안타까워 하는 것을 더러 듣게 된다. 그럴 때 믿음의 사람들은 고백하여 이르기를 “큰 풍파 일어나는 것 세상줄 끊음일세, 주께서 오라하시면 내 고향 찾아가리”(534:4)라고 찬양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예상치 못한 불행을 피해 보려고 종교에 귀의 하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의의 통치가 완전히 실현되지 않은 이 땅에서는 불행이 누구를 찾아갈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음 순간에 누가 불행의 희생물이 될지 범죄 한 이 후의 인간 역사는 그야말로 다음을 예측할 수 없는 위기 속에 사는 것이 인생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이 제자들의 큰 위험과 불행 속에 주님께서 함께 계셨다는 사실이다. 인생에 갑자기 닥치는 큰 지진 같은 불행의 순간에 초연할 수 있는 인생은 아무도 없다. 그만큼 우리 인생은 약하디 약하다. “하물며 벌레인 사람, 구더기인 인생이랴”(욥25:6) 마치 조용히 기어가다가 발로 비벼 버리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는 벌레와 구더기에 비유되는 것이 인생이라는 고백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고만장(氣高萬丈)한 인생들이 있으니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다. 큰소리치는 사람일수록 불행 앞에 더욱 작아지는 모습을 본다.

우리가 예수님을 모시고 살면 모든 불행이 피해가고 순풍에 돛 단 듯이 만사가 태평하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이 세상에 육신을 입고 사는 이상 불행은 사람을 가리지 않고 달려든다. 그것이 불신의 사람이든 신앙의 사람이든 가리지 않는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산다고 하는 것의 낳은 것이 무엇인가? 불행이 피해 가는 것이 아니라 꼭 같이 당하지만 나 홀로 당하면 감당할 수 없는 불행을 모든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자이신 주님께서 함께 감당해 준다는 사실이다. 할렐루야! [폭풍우 속에 모두가 웃고 있는 그림] 우리 인생의 키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쥐고 계신다.

그럼으로 믿음의 사람들은 행복자들이다. 다 당할 수 있는 큰 지진 같은 불행이지만 나약하기 이를 데 없는 나 혼자 당하도록 버려 두지 않으시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당하는 불행을 우리의 앞에서 막아 주신다. 아니 이미 자신이 그 불행을 십자가 위에서 모두 감당하셨다. 믿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고백한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8:37)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물결이 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는 주무시는지라” 이 말씀을 어떤 신앙의 사람들은 세상의 교회에 비유하기도 한다. 주님을 모셨으되 큰 풍랑을 만났고 한 순간 술렁이는 제자들의 모습은 오늘 이 지상에 존재하는 교회에도 있을 수 있는 상황이라는 데서 그렇게 이해를 한다. 지상의 교회는 늘 어려움에 노출되어 있다. 그러나 그 교회가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신부된 교회라면 그러한 풍랑을 헤치고 마지막 안식의 항구인 천국에 무사히 안착하리라는 것은 당연한 기대이다.

제자들은 주님의 명령으로 배에 올랐고 주님께서 함께 계셨음에도 풍랑은 있었다. 그럼으로 우리는 세상에 살면서 풍랑을 만나는 것은 인생의 항해자들에게 당연한 것이다. 이 거친 세상의 바다를 건너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것이라는 각오가 필요하다. 오늘도 인생의 큰 풍랑이나 지진 같은 괴로움을 만나서 괴롭게 노를 젓는 인생이 있습니까? 그러려니 하고 넉넉히 마음을 먹을 필요가 있다. 그리고 주님을 의지하는 이상 반드시 주님께서 잔잔케 해 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질 필요가 있다. 참 고백적이라서 좋아 하는 노래가 있다. 김석균 詞,曲

“왜 나만 겪는 고난이냐고 불평하지 마세요, 고난의 뒤편에 있는 주님이 주신 축복 미리 보면서 감사하세요, [왜 이런 슬픔 찾아왔는지 원망하지 마세요, 당신이 잃은 것 보다 주님께 받은 은혜 더욱 많음에 감사하세요] 너무 견디기 힘든 지금 이순간에도 주님이 일하고 계시잖아요, 남들은 지쳐 앉아있을지라도 당신만은 일어서세요, 힘을 내세요 힘을 내세요 주님이 손잡고 계시잖아요, 주님이 나와 함께함을 믿는다면 어떤 역경도 이길 수 있잖아요. [어떤 고난도 견딜 수 있잖아요]”

이 세상에 사는 언제, 어느 곳의 누구에게나 있는 고난의 풍랑을 주님과 함께 감당하는 우리는 얼마나 복된 사람들인가? 할렐루야! 모세는 고백하기를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뇨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너의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신33:29) 우리가 주님과 함께 하는 한 반드시 대적의 높은 곳을 밟게 될 줄을 확신한다.

그런 와중에서도 “예수는 주무시는지라”는 모습이 이 풍랑과 뱃전에 쏟아지는 물결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20) 하셨던 어느 곳에 편히 머리를 누이실 수도 없으셨던, 육신을 입으시고 우리와 꼭 같은 요구를 필요로 하시는 주님을 생각하면 감사하고 황송하기까지 하다. 오죽이나 피곤 하셨으면 제자들이 깨우기까지 이런 상황에서 주무실까? 하는 안스러움과 한편으로는 이 난리법석에도 불구하고 고요히 주무시는 주님의 모습의 평화는 오늘 주님을 모신 우리들의 모습이어야 한다는 마음도 가지게 한다. [466:1 나 어느 곳에 있든지 늘 맘이 편하다, 주 예수 주신 평안함 늘 충만하도다, 나의 맘속이 늘 평안해 나의 맘속이 늘 평안해, 악한 죄 파도가 많으나 맘이 늘 평안해]

어떤 인생의 풍랑과 지진 속에서도 주님과 함께 평안과 고요를 누리는 나와 여러분 되시기를 …



Ⅱ.모든 문제는 주님께 가져 가야 한다.(25)

“그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 가로되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사실 이 갈릴리에서 뼈가 굵고 자란 어부 출신의 제자들이 여기 최소한 4사람이나 있었음에도 이들은 늘상 겪어 왔던 이 갈릴리의 풍랑에 방황하고 있다. 우리가 자라면서나 살면서 경험 되어진 것들도 절대적 위기에는 도움이 되지 못함을 깨닫게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부분에서 ‘위기와 절망의 순간에는 주님을 깨워야 한다’고 가르치지만 사실 주님은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시는 분이시다. 시편기자는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121:4)고 고백하고 있음을 본다.

그렇다면 주님은 왜 그렇게 육신으로 주무시고만 계셨을까? 제가 믿고 확신하기로는 제자들이 자신들의 노력보다는 그 문제를 주님께 가지고 오기를 기대하고 계셨다고 믿는다. 우리는 벳세다의 동산에서 기적의 떡으로 5천명을 먹이시기 전에도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하시니, 이렇게 말씀 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고 빌립을 시험코자 하심이라”(요6:5~6)는 기록을 읽을 수 있다. 오늘도 우리가 살고 있는 모습을 눈동자와 같이 지켜보고 계시는 우리 주님은 어떤 문제이든지 그것을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것 보다는 주님께 아뢰고 맡기기를 원하신다. 믿습니까?

그런데 이 상황에서도 오늘의 시대나 다르지 않게 흔히 말하는 제자들의 모습을 보게 된다. “우리가 죽겠나이다” 우리들의 입술에 死亡의 言語가 붙어 있는데 그것은 조금만 어려워도 습관적으로 “죽겠다!”고 한탄하는 것이다. 우리 입술의 열매는 그 사람의 내면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습관처럼 내뱉는 말들은 더욱 그렇다. 별로 심각하지 않은 상황에서도 쉽게 “죽겠다!”는 말이 튀어 나오고 이것이 불신의 세계에서는 그렇다손 치더라도 믿음의 사람들의 입에서 나와서는 안되는 말이다. 주님께서 가르치시기를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마12:37)고 선언 하셨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죽겠네!” 보다는 “주께 있다!” 라고 말하란다. 그러나 이것도 억지가 되면 별 의미가 없다. 믿음은 자연스럽게 표현되어야만 한다.

우리는 죽음의 땅에서 이미 생명으로 옮김을 받은 사람들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5:24) 그러므로 이 약속이 진실하다면 우리의 입에서는 생명의 언어가 나와야 하고 생명의 냄새가 자연스럽게 나와야 한다. 바울은 선언하기를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고후2:16) 라고 했다. 냄새는 숨길 수 없는 것이다. 여러분 모두가 “죽겠네!” 보다는 생명의 냄새가 풍성 하시기를 …

주님은 우리의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과 우리가 당하고 당면하는 모습들을 모두 보고 계신다. 때문에 어떤 어려움이든지 혼자 당하지 말고 주님께 가지고 나감으로 해결 받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 [중국의 허드슨 테일러의 기도-미지의 전도자들과 함께 하시는 기적의 약속] 하나님은 우리가 위기를 만나는 것을 허락 하시지만 그 위기를 통해서 더욱 주님께 가까이 나아오도록 기대하고 계신다. 어떤 절망적 위기를 당하더라도 그 문제를 기도로 주님께 가지고 나아감으로 해결 받고 믿음을 키우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Ⅲ.주님의 책망조차도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신대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주님은 주님과 항상 함께 있지 않았으면서도 자신의 하인의 중풍병을 말씀만으로 고칠 수 있다고 고백하는 이방인 백부장을 칭찬하셨었다. 반면에 항상 주님과 함께 다녔을 뿐만 아니라 어떤 어려움도 해결하실 수 있으신 주님의 역사를 수없이 경험하면서도 무서워 소동하는 제자들은 책망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뵈올 수 있다. 주님의 이 책망하신 내용에서도 우리는 귀중한 신앙의 논리를 배울 수 있다.



1.두려움은 믿음이 적은 연고에서 온다.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이 말씀을 거꾸로 적어봐도 역시 뜻이 같이 통하는데 “믿음이 적은 자들아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두려움과 공포는 언제나 나약한 자들의 전유물이다. 그리고 강하다고 하는 것은 꼭 자신이 강한 것 만이 아니다. 자신이 의지하고 있는 대상이 강하면 그로 인해서 강한 것도 인간이다. 사무엘상 17장에 보면 사울과 이스라엘이 엘라 골짜기에서 골리앗이 나타나 이스라엘과 하나님을 모욕할 때마다 벌벌 떨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좌절하고 있을 때 요즘 말로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다윗이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형들의 음식물을 가지고 왔다가 이 광경을 보고 흥분한다.

온 이스라엘이 낙담하는 가운데서 다윗은 평상시 양을 지키며 사용하던 물매를 가지고 이 천하의 장사 골리앗을 향해 가면서 “…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45)고 돌진하는 용기는 바로 자신을 사자나 곰의 발톱에서도 건지셨던(34~35) 하나님의 임재를 늘 경험했기 때문에 그와 같은 엄청난 용기로 대항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확신의 고백은 현실로 나타나 절망하는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나라를 구원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이 공포를 갖고 있다면 ‘믿음이 적은 연고’라고 주님으로부터 책망 받을 수 밖에 없다. 이 우주의 주인이시면 운행자 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사는 사람이라면 사실 두려워 해야 할 대상은 아무것도 어디에도 없다. 우리의 가장 절박한 순간 속에서 가장 사실적인 자신의 모습을 표현하게 된다. 매일매일 믿음을 키워서 적어도 주님으로부터 “믿음이 적은 연고” 라는 책망은 듣지 않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

사실 믿음의 사람들에게 “믿음이 적은 연고” 라는 책망은 저주나 다를 것이 없다. 하늘을 움직이는 권세와 능력을 가지신 주님과 함께 산다고 하면서 두려워 하고 걱정하는 모습은 믿음의 사람들에게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다.



2.믿음이 적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사람들을 구원해 주신다.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신대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바람과 바다의 풍랑을 꾸짖을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그리고 만약에 어떤 반응도 없으면 어떻게 될까? 그러나 이런 우려는 예수 그리스도께는 어울리지 않는 우려에 불과하다. 그리고 제자들의 믿음의 부족에도 불구하고 단순히 주님께 기도했다고 하는 것 즉, 그들의 문제를 주님께 가지고 나아갔다고 하는 것 만으로 주님은 이 사태를 해결해 주셨다.

주님께서 약속하시기를 “…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아니하면 …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될 것이요”(마21:21) 라고 말씀하셨고 다시 “…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눅17:6)고 약속하셨다. 오늘 우리에게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이라도 하나님의 큰 역사를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여기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이라는 표현은 맨 앞의 “큰 놀이 일어나”라는 말과 대조가 되는 표현이다.

모든 무질서와 혼란은 주님의 말씀으로만 최고의 평온함과 화평의 상태로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여러분의 마음에 가정에 일터에 인간관계에 폭풍우 같은 소요가 있는가? 주님께 아뢰고 주님께 의뢰하십시오. 평안과 화해가 회복될 것이다. 여러분 모두가 믿음으로 주님께 내어 놓음으로 우리의 적은 믿음에도 반응하시고 외면치 않으시는 은혜의 역사가 삶에 함께 하시기를 …



Ⅳ.주님과 함께 감당하는 어려움은 우리에게 믿음을 더해 준다.(27)

“그 사람들이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고 하더라” 우리 모두는 너무 이기적이어서 다른 사람이 어떤 일을 당할지라도 적어도 나의 삶에는 그러한 어려움이나 고난이 없기를 기대하고 소원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기대는 처음부터 버려야 한다. 주님을 옆에 모신 제자들에게 이런 어려운 일이 일어 났다면 오늘 우리들에게야 당연하지 않겠는가! 라는 각오도 있어야 한다. 고난과 역경은 내가 신앙인이기 때문에 피해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 인식할 필요가 있다. 다만 어떤 어려움일지라도 주님과 더불어 해결되는 경험을 갖는다면 그런 역사를 통해서 우리의 신앙이 제자들처럼 성장한다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어려움이 없는 인생은 사실 너무 무미건조(無味乾燥)한 삶이라고 까지 말한다.

사실 우리네 인생은 어려움을 겪는 만큼 성숙해 진다는 사실도 받아드릴 수 밖에 없다. 분명히 어려움, 그것도 우리 삶을 근본부터 뒤흔드는 지진 같고 폭풍 같은 어려움은 만나고 싶지 않은 것이 사실이지만 그런 고비를 겪으면서 인생의 가치를 깨달아 가고 삶의 깊이를 더해가기 때문에 우리가 믿음으로만 반응한다면, 주님을 가까이에 모시기만 한다면, 오히려 더 큰 간증거리를 만들 수 있는 인생의 폭풍우는 우리를 더욱 천국 가까이로 이끌어 가는 도구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 놀라운 주님의 역사를 통해서 제자들은 비로소 주님께서 우주의 창조자시며 운행자이심을 깨닫게 되었다.



오늘도 우리 인생 항로의 뱃전에 폭풍우는 쏟아질 수 있다. 그것이 언제건, 어디에서건, 불신의 사람이나 믿음의 사람, 원하건 원치 않건 닥칠 수 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이 다른 것을 그 지진이나 폭풍우 같은 위기의 강도에 관계없이 주님과 함께 한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언제나 믿음으로 그 위기를 주님께로 가져 가야 한다는 사실이다. 때로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믿음이 적다고 책망 받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믿음으로 자신에게 가져오는 성도의 문제를 반드시 해결해 주신다는 사실이다. 이 우주의 창조자요 운행자이신 하나님과 함께 감당하는 우리 인생의 절대 위기는 때로 우리의 연약한 믿음을 더욱 강하게 키워 주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오늘도 절대 위기 같은 고난으로 울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주님께 믿음으로 가지고 나가 해결 받는 복된 경험의 기회로 삼으시기를 주님의 복되신 이름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