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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리에 갑자기 일어난 풍랑을 말씀으로 잔잔케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를 통하여 자연의 질서를 움직이시는 주님이심을 확인한 제자들과 주님은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내리시자 그 곳의 귀신으로 인해 광기(狂氣)를 가진 두 사람이 주님을 맞는다. 병행되는 마가(막5:1~20)와 누가(눅8:26~39)는 이 사실을 좀더 자세하게 기록을 하고 있고 내용에서도 약간의 차이가 있다. 그러나 사건 자체는 같은 것으로 이해하는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른 치료의 사역들은 육체적인 질병이었다면 오늘 나누게 되는 은혜의 역사는 사람으로서는 더욱 치료가 어려운 정신적 영혼의 고통에서의 치료 사건으로 불가능이 없으시며 한 영혼이라고 죄와 고통에서 자유하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의지를 보게 되는 동시에 바울 사도의 고백처럼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골1:16)라는 창조주로서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은혜로운 사역에도 인간의 이권으로 인하여 주님을 멀리하는 안타까움을 본다.
Ⅰ.귀신들의 정체.
1.죽은 사람들의 혼령이 아니다.
언젠가도 이런 말씀을 가르친바 있고 이미 앞의 16절에서도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들린 자[daimonivzomai, daimonizomai]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를 다 고치시니”라는 내용을 읽을 수 있지만 우리 대한 민국이라는 문화권 안에서는 그리스도인들 조차도 귀신에 대한 오해가 대단히 많은 것 같아서 정리를 해 둘 필요가 있다.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소위 말하는 악한 세력들은 [귀신, 헬, 다이몬(daimon) (헬, 다오(daio) ‘운을’ 분배하다)에서 유래- 마귀, 악마, 악령; 마귀, 헬, 디아볼로스(diabolos), 중상자, 비방자, 사탄, 악마; 사탄, 헬, 사탄(Satan), 사타나스(Satanas 히, 적, 반대자) 원수, 고소자, 마귀, 사탄]으로 같은 세 부류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것들은 다 하나님으로부터 지으심을 받고 반역한 한 무리의 천사들로서 같은 존재들이다.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 …”(유1:6)로 기록되는 것으로 알 수 있다.
특히 이 마태복음 4:1에서는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 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8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했지만 주님께서 이 마귀를 향하여 “10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단아’ 물러가라”고 명령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성경에 나타나는 귀신은 우리 대한민국 안에서 흔히 말하는 [귀신]이 라기 보다는 ‘마귀’ 라고 이해 하는 것이 옳을 것이고 일반적으로 [귀신]이라고 불려지는 것들도 결국 사람의 죽은 넋이 아닌 사단의 속임임을 알 필요가 있다.
사람이 죽어서 구천(九天)을 떠돌거나 다시 그와 함께 살던 사람들을 찾아와 제사를 받아먹고 가거나 하는 것은 전부가 마귀 사탄의 속임수이다. 우리가 성경에서 이해 하기로는 선한 사람이든지 악한 사람이든지 신앙인이든지 불신자든지 죽은 후에는 절대로 오갈 수 없다는 사실을 확신할 필요가 있다. 누가복음16:22~31의 내용에서 이를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조상신을 운운 하거나 ‘우리 조상들은 물 밥도 얻어먹지 못한다.’는 불신자들의 자세는 다 무지에서 오는 것이고, 이런 잘못된 생각은 마귀가 사람들의 마음을 혼돈케 해서 자신이 숨기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사람들에게 속여서라도 영광을 받으려는 흉계가 숨어져 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죽은 사람을 위하여 음식을 차리거나 기도하지도 않는 것이다.
2.그러나 이 귀신은 주님을 가장 정확하게 알아 봤다.(29; 막5:7; 눅8:28) “이에 저희가 소리질러 가로되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당시의 율법 학자들도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도 결코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했지만 귀신들린 자들은 언제나 예수의 정체에 대해서 분명히 증거하곤 하고 있다.
“더러운 귀신들도 어느 때든지 예수를 보면 그 앞에 엎드려 부르짖어 가로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하니”(막3:11) “여러 사람에게서 귀신들이 나가며 소리질러 가로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꾸짖으사 저희의 말함을 허락지 아니하시니 이는 자기를 그리스도인 줄 앎이러라”(눅4:41) 세상적으로 똑똑하고 성경을 가장 많이 안다고 했던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했지만 오히려 마귀 사탄이 주님을 정확히 알아보고 그 앞에 엎드리는 모습들을 성경 기자들은 증거 해 주고 있다.
그러나 다른 것은 그들은 주님을 두려워 하긴 하지만 마귀는 주님과 상관이 없다.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29m) 라고 말하는 것처럼 마귀는 결코 하나님의 허락하신 복과 관계가 없다. 이 말을 야고보는 단지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두려워 하기만 하고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을 가진 자들을 교훈 하면서 지적하고 있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약2:19)
3.주님의 권세아래 있다.(31) “귀신들이 예수께 간구하여 가로되 만일 우리를 쫓아내실진대 돼지 떼에 들여 보내소서 한대” 주님은 이 우주의 어떤 세력이나 권세보다도 위에 계신 분이시다.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엡1:21)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정사와 권세의 머리시라”(골2:10)
본문에서 귀신은 자신이 돼지에게 들어 가는 것 조차도 주님께 허락을 구하고 있다. 마귀는 아무리 날뛰어도 주님의 권세 아래 있습니다. 할렐루야! 그렇기 때문에 우리 믿음의 사람들, 하나님의 백성들이 두려워 해야 할 대상은 하나님 한분 뿐이시다. 귀신이건 마귀이건 주님의 백성들은 결코 두려워 할 대상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에게도 잘 못 가르쳐져 있는 것들이 더러 있는데 특히 ‘은사’를 주창하는 사람들 간에 그런 부분들을 더러 본다. 어떤 신앙의 사람이 귀신이 들렸다고 하면서 마귀가 지배했다 성령이 지배했다 하는 소위 양신(兩神)이 역사 한다고 하는 주장은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권능을 오해 하는 데서 나오는 신앙적 이론이다. 하나님의 성령이 마귀를 명령하고 다스릴 권한을 가지셨는데 왜 한 사람을 두고 쟁탈전을 벌여 백마고지 전투처럼 한다는 말인가!
누구든지 복음을 듣고 믿고 회개하고 고백하고 세례를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성령이 와 계시기 때문에 결코 마귀 사탄이 들어 갈 수 없다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이다. 만약에 성도라고 하는 사람에게 마귀가 들어 갔다면 그는 아직 하나님의 약속을 바로 순종하고 이행하지 못한 사람일 것이다.
하나님의 성령이 계시는 사람 즉, 빛의 사람에게 어두움의 영이 들어 갈 수 없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모든 저주를 지시고 십자가를 지심으로 인류의 영원한 저주인 죄를 해결하신 십자가의 사건 이후로는 이미 마귀의 머리는 으스러져서 마음대로 하나님의 일을 방해 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이미 마귀 사탄은 묶임을 받은 것이다.[어려서 독사의 머리를 짓이겨 놓은 경험] 이것이 바로 창세기 3:15의 약속이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그러므로 마귀의 영향 하에 스스로 걸어 들어가지 않는 한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이전처럼 귀신은 주님의 백성 중 아무에게나 들어 갈 수 없음이 분명하다.
요한 사도는 이를 더욱 확고히 하고 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요일5:18)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고 한다면, 주님을 확실히 신뢰하고 동행한다면 마귀든 귀신이든 사탄이든 우리의 적수가 되지 못하고 또 우리 속에 마음대로 드나들 수 없음을 확신해도 될 것이다. 물론 이 역사의 마지막에 주님께서 오셔서 무저갱에 잠그실 때까지 영향력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안전한 승리를 위하여 온 갓 병기들을 다 주셨다.(엡6:10~17)
Ⅱ.귀신에게 붙잡힌 사람은 가련한 인생이다.
1.사망의 땅에 거한다. “또 예수께서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가시매 귀신들린 자 둘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28f.) 이 부분의 병행 구절인 마가복음을 보면 “그는 무덤 사이에서 사는데, 이제는 아무도 그를 쇠사슬로도 묶어 둘 수 없었다. 여러 번 쇠고랑과 쇠사슬로 묶어 두었으나, 그는 쇠사슬도 끊고 쇠고랑도 부수었다. 아무도 그를 휘어잡을 수 없었다. 그는 밤낮 무덤 사이나 산 속에서 살면서, 소리를 질러 대고, 돌로 제 몸에 상처를 내곤 하였다.”(5:3~5) “그는 오랫동안 옷을 입지 않은 채, 집에서 살지 않고, 무덤에서 지내고 있었다. 귀신이 여러 번 그 사람을 붙잡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를 쇠사슬과 쇠고랑으로 묶어서 감시하였으나, 그는 그것을 끊고, 귀신에게 몰려서 광야로 뛰쳐나가곤 하였다.”(눅8:27b, 29 표준 새번역 개정)
이 두 부분의 말씀은 그 사람의 상태를 아주 분명하게 묘사를 해 주고 있다. 사람의 마음이 아니라 귀신에 의해서 움직이는 사람의 상태는 ①쇠사슬로도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포악하고,(무정) ②밤 낮을 무덤 사이에 살며, ③다른 사람들에게도 공포와 괴로움을 주고, ④괘성을 질러대고, ⑤돌로 자기의 몸을 상하게 하고, ⑥옷을 입지 않은 체로 부끄러움을 모르고, ⑦미친 듯이 광야를 내리 달렸다. 이 일곱 가지의 모습은 오늘날 創造主를 부정해 버린 일반적인 사람들 속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양들로 로마서 1:18~31에 나타나는 항목들과 다르지 않은 모습이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떠난 사람의 삶이 그러할 것이라 증거하고 있다.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는 사막의 떨기나무 같아서 좋은 일의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광야 건조한 곳, 건건한 땅, 사람이 거하지 않는 땅에 거하리라”(렘17:5~6)
2.다른 사람에게도 괴로움을 끼친다. “저희는 심히 사나와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을 만하더라”(28b) 이런 사람은 괴력을 가졌지만 결코 건설적으로 쓰이지 못한다. 사람이 공포의 대상이 되어 있다는 것은 소외된 모습이고 잃어버린 모습이다. [사람]이라는 표현보다는 [人間]이라고 더 많이 불러지는 것은 관계 속에서 더 큰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때문에 관계를 잃어버린 인간은 더 이상 인간일 수 없고 마귀는 바로 이점을 좋아 한다.
사람들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독립시키고 사회와도 분리시키거나 비정상적인 일그러진 특별 집단을 만들어 하나님을 대적하게 하고 단절시키는, 그러므로 전 인류의 공동의 적이 되어 평화를 깨뜨리고 혼란을 조장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어둡게 하는 것은 마귀가 의도하는 것들이다. 오늘 말씀 속의 귀신들린 사람은 어떻게 그런 입장에까지 오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런 상태로 그곳을 사람이 지날 수 없는 두려움의 장소로 만들어 버렸고 이런 공포는 잘못된 귀신 개념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두려움의 대상으로 존재하게 되었다. 무덤은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배움의 대상일 뿐이다.
3.자신의 의지를 잃어 버렸다.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지르며 돌로 제 몸을 상하고 있었더라”(막5:5); “오래 옷을 입지 아니하며 집에 거하지도 아니하고 무덤 사이에 거하는 자라, (귀신이 가끔 이 사람을 붙잡으므로 저가 쇠사슬과 고랑에 매이어 지키웠으되 그 맨 것을 끊고 귀신에게 몰려 광야로 나갔더라)”(눅8:27b, 29b)
자신의 소리를 잃어버린 사람, 누구나 자신의 몸은 사랑하고 아끼고 보호 할 줄 알지만 스스로 자신의 몸을 상하는 모습, 수치를 모르고 벌거벗은 체로 날뛰는 자세, 무덤 사이도 부족해서 귀신에게 몰려 광야로 미친 듯이 내 달리는 이 사람의 원인은 귀신들렸기 때문이라는 한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오늘도 바른 인간의 정신을 잃어 버린 것 자체가 자신을 상실한 모습이요, 귀신에 홀린 모습인 것이다.
4.짐승과 다름이 없다. 이 사람의 모습은 그야말로 옆에서 먹을 것을 뒤지는 돼지들과 다름이 없었다. 그 사람을 그렇게 만든 것이 군대귀신이 지폈기 때문이라면 이 최고의 문명의 시대에도 이런 모습을 가지고 있는 사람 역시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인류가 제 정신을 가진 사람으로 살기를 원하셔서 자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죽게 하셨다. 마귀 사탄만이 모든 인류를 자신의 수하에 짐승처럼 이성을 잃게 해서 하나님을 대적하게 하고 동물의 삶과 같은 삶을 살게 한다. 그럼으로 진정한 인간 회복은 십자가에서부터 출발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를 흘리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신이 되라고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라 죄와 마귀의 간계로 짐승이 되어 사는 인류로 하여금 온전한 사람으로 살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Ⅲ.그러나 이 군대귀신 지핀 자도 예수를 만남으로 치료 되었다.(28f, 30~32)
“또 예수께서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가시매 귀신들린 자 둘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 예수 그리스도의 육신으로 계실 때의 수많은 치료의 사역은 바로 그분이 메시아 라는 사실의 증거이지만 온 인류를 십자가 아래서 치료하실 은혜의 역사의 예표였고 문둥병과 소경, 중풍병 지체 부자유자 등등 주님을 만나서 치료 받지 못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오늘 이 군대귀신 지핀 자는 그가 원해서가 아니라 주님이 찾으신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오늘도 스스로 주님을 찾아 나오는 사람도 있겠지만 올바른 상태가 아닌, 어두움의 영에 의해 지배를 받는 사람들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주님의 사람들이 찾아 가야만 할 사람이 더 많다. 마귀 사탄은 군대처럼, 벌 때처럼 사람들을 점령하려고 하는데 우리가 안일하게 자신들만의 구원을 즐기고 있다면 자기 때가 얼마 남지 않아서 발광하는 마귀사탄의 세력에 희생당하는 사람들은 주님을 만날 기회를 얻지 못하고 가련한 인생을 이 광인처럼 비극적으로 살다가 갈 수 밖에 없다.
“그 도시 사람으로서 귀신들린 자 하나가 예수를 만나니 … 예수를 보고 부르짖으며 그 앞에 엎드리어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께 구하노니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 하니, 이는 예수께서 이미 더러운 귀신을 명하사 이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눅8:27f~29f) 예수 그리스도의 의지는 모든 사람이 죄와 마귀의 수하에서 자유를 찾는 것이고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만나기만 하면 반드시 가능한 일이다.
“마침 멀리서 많은 돼지 떼가 먹고 있는지라, 귀신들이 예수께 간구하여 가로되 만일 우리를 쫓아내실진대 돼지 떼에 들여 보내소서 한대, 저희더러 가라 하시니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는지라 온 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 들어가서 물에서 몰사하거늘”(30~32) 이 사건 속에서도 두 사람의 인간 회복을 위하여 비록 율법 속에 부정한 짐승이지만 거의 貳千 마리나 되는 돼지가 희생되었다. 어찌 보면 주님께서 귀신의 기도를 들으신 것처럼 오해 할 수도 있지만, 온 천하를 주고라도 한 사람을 구원하시려는 사랑의 주님이심을 이해할 때 이 돼지 치던 자들과 이 지역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Ⅳ.세상 재물과 주님을 비교하는 안타까움을 본다.(33~34)
“치던 자들이 달아나 시내에 들어가 이 모든 일과 귀신들린 자의 일을 고하니, 온 시내가 예수를 만나려고 나가서 보고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인간의 이권으로 인해 복되신 주님을 보내버리는 안타까움을 본다. 우리는 같은 현상을 사도행전16:16~23의 빌립보의 점치는 귀신 들린 여자를 낫게 한 것 때문에 바울을 고소한 사람들을 본다. 그들은 한 사람의 정신이 온전해 진 것 보다는 자신들의 이익을 잃게 되었다는 것으로 더 분노했다. 사실 오늘 같은 실리적인 시대에 ‘그 돼지가 나(우리)의 돼지(재산)였다면 나의 반응은 과연 어떠했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본래 유대인들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았고 치지도 않는 것이 상례이다. 이 돼지 치는 사람들이 이방인이거나 아니면 이방인들에게 팔려고 즐겁지는 않지만 이런 일을 했던 것들을 짐작할 수 있고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가 자신의 재산을 다 잃고 최종적으로 했던 일이 광야에서 돼지 치는 일이었던 것을 보면 그럴 수도 있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하여튼 이 가다라 사람들의 모습은 객관적으로 볼 때 오늘 우리도 그런 일이 있지 않겠는가 짐작이 된다. 자신의 이권과 예수 그리스도 두 사이에서 나는 과연 어느 것을 선택하는가 하는 우리 각자의 모습을 살필 필요가 있다. 만약에 어절 수 없다고 하면서도 주님 대신 잃을지도 모를 세상의 일을 선택한다면 나도 별 수 없이 이 가다라 지방의 사람들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멀리 떠나 보내는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는 바로 그 모습임을 부정할 수 없다.
이 시대에 우리의 귀중한 선택의 갈등은 항상 이것이다. 세상의 재물이나 영광과 예수 그리스도를 두고 저울질 하는 우리 자신들이 진정 믿음의 사람들이라면, 세상의 영화와 재물을 기꺼이 더나 보내고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할 수 있다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해도 괜찮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시대 속에서의 많은 사람들의 선택이 주님께 떠나시기를 간구하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주님 잠깐만 떠나 계십시오, 내가 이것만 잘 해낸 다음에 극진히 섬기겠습니다!”라는 모습들을 더러 보면 안타깝기 그지 없다.
가룟 유다는 주님보다 은 參拾냥을 선택하고 주님에게서 멀어져 가서 자살 했다. 빌라도는 자신의 권좌의 위태함과 예수를 두고 저울질 하다가 결국 자신의 자리를 선택하므로 역사적인 수치의 인물로 남는다. 오늘 나는 주님을 향해 ‘잠시동안만 떠나 게십시오, 제가 다시 극진히 모시겠습니다!’ 라고 은근 슬쩍 주님을 멀리 하지는 않는지 우리 자신들의 심령 속에 물어 볼 필요가 있다.
Conclusions: 정상이라고 여겨지는 모든 사람도 주님 없이는 비정상이기 때문에 주님을 만나야 하고, 비 정상적인 모든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만 바른 인간성을 회복할 수 있는 것은 당연하다. 모든 사람은 완전한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자신을 놓을 때 비로소 가장 사실적인 자신을 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주님을 만나야만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생의 표준이고 기본이며 근본이시기 때문에 사람이면 누구나 만나야 할 목표이다.
상대적으로 평가되는 사람은 절대적 표준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누구를 닮아야 한다’는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때 비로소 한계를 느낄 수 밖에 없다. 아무리 위대하다는 성인(聖人)도 철학자(哲學者)도 귀신들린 비정상의 인간도 주님을 만나야 하는 데는 예외가 될 수 없다.
이 어두움이 짙어가는 역사의 말미에서 정상적인 인간이기를 거부하고 자신의 정신을 다른 것에 잃어버리고[그것이 사업, 異性, 인터넷, 공부(시험), 건강, 취미일 수도 있다.] 하나님과 인간 관계를 생각치 않고 난폭하고 무정하며, 밤 낮을 죽음의 모습으로 살며, 다른 사람들에게 공포와 괴로움을 주고, 자신의 소리를 잃어 버리고 괘성을 질러대고, 마약으로나 다른 것으로 자기의 몸을 상하게 하고, 그러면서도 부끄러움을 모르고, 미친 듯이 시내를 내리 달리는 폭주족들 같은 사람들을 생명의 주님을 만나도록 주님께 데리고 와야만 한다. 특히 십자가에 고난 당하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게 해야 한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에게 경계 되는 한가지는 주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세상에 없어질 것들과 주님을 견주고 있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생명의 주님이요 나를 온전케 하고 인류의 모든 비정상적인 사람들을 온전케 하실 분이 오직 주님 뿐인데도 쉽게 세상의 가치와 생명의 주님을 견주려 하고 저울질 할 뿐 아니라 심지어는 한 순간이라도 주님을 떠나 보내는 어리석음을 회개해야만 한다. 이 말씀 앞에 부끄러움이 없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복되신 이름으로 축원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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