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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마 9:1~8 2004-11-21
인자가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 알게 하노라!  
주님은 갈릴 주변을 배를 타고 이동하시면서 생명의 복음을 전하시는 모습을 오늘의 내용에서도 읽게 된다. 당시의 성경에 능통하다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하고 시험하고 배척했지만 어두움의 세력인 마귀는 오히려 즉시 알아보고 주님 앞에 엎드리고 고백하는 모습을 지난 시간에도 살펴본바 있다. 사실 오늘날도 주님을 알아 본다고 하는 것 만으로도 대단한 복이고 행운이지만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주님을 찬양하고 기뻐하는 삶이 실제적인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게 하는 복임을 배우고 듣는다.

오늘 본문에서는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과 그 은혜를 누리기 위해서 믿음과 협력이 필요함을 배우면서 교회의 역할과 사명을 확인하게 된다. 이 내용 역시 마가복음 2:1~12과 누가복음5:17~26에 보다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는 것을 읽게 된다. 사실 중풍병은 성경에 더러 나타나는 병이고 뇌의 한편이 손상되어 몸의 한편을 사용하는 것이 불가능하고 대개의 경우 혈압이 높아 뇌 속에서 터져서 생기는 병이다. 육신의 기능은 다 잘되어도 영적인 기능은 마비된 영혼의 중풍병이 더 심각한 불구이다. 어떤 경우 바른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는 지체로서의 교회도 중풍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중풍병자와 그를 사랑하는 친구들의 피나는 희생과 노력이 이 사람을 주님 앞으로 이끌고 마침내 영혼과 육신이 완전히 고침을 받고 흔연한 인생이 되는 것을 보면서 오늘에도 역시 이 행복한 수고와 고난을 감당할 자를 하나님은 부르고 찾고 계신 사실에 우리 각자가, 교회가 응답하여 같은 복된 결과를 경험하게 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복되신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린다.



Ⅰ.눈물겨운 믿음과 사랑이 있다.(2~3)

1.어떤 어려움과 힘겨움도 역사하는 믿음은 이긴다. (2f)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 같은 병행 구절인 마가나 누가복음을 보면 여기에 짧게 표현된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 이라는 과정에는 가히 상상을 초월하는 작전이 수행된 것을 본다.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에라도 용신할 수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저희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마치 출근길의 서울 지하철역을 상상하면 될 것 같다),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무리를 인하여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의 누운 상을 달아내리니”(막2:2~4) “… 무리 때문에 메고 들어갈 길을 얻지 못한지라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 채 무리 가운데로 예수 앞에 달아 내리니”(눅5:19)

참으로 기발한 생각을 해냈다. 어떤 경우 ‘야 안되겠다 도저히 들어갈 수가 없어!’ 라고 포기할 수도 있고 ‘다음으로 기회를 기다려 보자!’ 라고 미룰 수도 있었지만 네 사람의 친구는 머리를 짜내고 어려움을 감당하면서 까지도 자신의 주님을 뵙고자 하는 믿음을 실현 시켰다. 이 사건을 생각하면 사람이 마음만 먹으면 못할 일이 있을까 싶다.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 앞에 친구를 만나게 하는 일 외에는 전혀 다른 의식을 하지 않은 것 같다. 그들에게는 오직 말씀하시는 주님만 보인 것 같다.

예수께서는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요15:12~14) 하셨다.

우리는 걸어 다니는 친구도 데리고 오기도 힘드는데 한 발자국도 옮길 수 없는 마치 나무토막 같은 사람을 주님 앞으로 매고 가야만 했다. 이것이 중풍병자를 포함한 네 사람의 믿음이었다. 아마 두 사람이었어도 이 일이 어려웠을 것이지만 그들은 오로지 하나의 목적을 위하여 마음을 모두었다.



2.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셨다.(2b)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주님께서 그들의 행동을 모르실 리가 없다. 예수께서는 이들의 하나된 믿음을 보셨다. 어떤 경우, 아니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이 주님 앞에 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특히 영혼과 육체의 불구로 주님 앞에 혼자 오는 것은 더욱 어렵다. 그래서 친구는 필요하고 그러한 사람들을 주님 앞에 대려 오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이것은 그 때나 오늘이나 다르지 않다.

그러나 사람에게 오해를 산다고 할지라도 주님이 보시면 만사가 OK이다. 사실 이런 믿음을 가져야 한다.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사람들은 몰라줘도 주님은 깊은 곳 까지 보시는 분이시다. 서기관의 생각을 꿰뚫어 보시는 주님은 이들의 믿음도 역시 꿰뚫어 보신 것이다. 네 사람의 친구들의 사랑하는 마음과 다섯 사람의 주님께서 이 친구를 온전케 하실 수 있다는 믿음을 보셨다.

사실 어떤 상황이든지 주님께서 보시면 그것은 곳 해결이다. 백 살에 얻은 독자 이삭을 마음은 힘겹고 어렵지만 묵묵히 말씀을 따라 드리려는 아브라함의 마음을 보셨던 주님은 오늘도 여전히 믿음으로 주님께 다가가는 모든 사람을 아신다. 그래서 “여호와 이래, Provide” 라는 말이 나왔다. 주님이 보시면 이제 그 해결을 준비하신다. 믿습니까? 이들의 믿음을 보신 주님은 벌써 이 중풍병자의 치료를 준비하셨다.



3.그러나 이 은혜의 역사의 자리에도 어두움은 있었다.(3) “어떤 서기관들이 속으로 이르되 이 사람이 참람하도다(이 사람이 하나님을 모독 하는구나)” 성경을 손수 수없이 베꼈던 이 서기관이 바로 안 것은 ①죄를 사하는 권세는 오직 하나님만 가지고 계신다는 사실이었고 가장 안타까운 무지는 ②예수 그리스도를 알아 뵙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은 이런 형식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알면서도 그 분의 십자가의 은혜를 알지 못해서 구원을 얻지 못하고, 막연하나마 하나님은 믿으면서도 그분이 구원을 위하여 이 역사 속에서 하신 일을 알지 못하는 사람 등등.

그렇습니다. 사죄의 권세는 하나님만 가능하다. 어떤 종교로도 수행이나 고행으로도 죄는 씻지 못하는데도 사람들은 사실 이것을 몰라서 주님 앞에 오는 것을 머뭇거리는 사람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죄진 인생들을 향하여 선언하시기를 “주 여호와 내가 말하노라 네가 잿물로 스스로 씻으며 수다한 비누를 쓸지라도 네 죄악이 오히려 내 앞에 그저 있으리니”(렘2:22) 죄는 하나님 한 분만이 사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이 서기관처럼 확신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 죄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림으로만 씻을 수 있다는 사실도 알아야만 한다.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9:22)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만 사죄를 주신다는 사실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확신하는 여러분들은 복된 사람들이다.



Ⅱ.주님은 모든 인류의 사죄를 위하여 이땅에 오셨다.(4~6)

(4)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가라사대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 (5)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6)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1.주님은 우리 모두의 생각을 아신다.(4) “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가라사대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 다윗은 자신의 아들 솔로몬을 향하여 “내 아들 솔로몬아 너는 네 아비의 하나님을 알고 온전한 마음과 기쁜 뜻으로 섬길지어다 여호와께서는 뭇 마음을 감찰하사 모든 사상을 아시나니 네가 저를 찾으면 만날 것이요 버리면 저가 너를 영원히 버리시리라”(대상28:9) 라고 경계하였다.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꿰뚫어 보시는 분이심을 늘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여기 하나님의 뜻을 의심하고 말씀에 대항하는 것을 악하다 말씀하신 것에 주의 할 필요가 있다.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 보이는 물리적인 죄보다도 주님께서 더 악하게 보시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의 뜻과 구원의 역사를 의심하고 가로막는 것이기 때문에 주님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라는 흡족한 고백에도 불구하고 이 동일한 베드로가 주님의 십자가에 달리실 것이라는 말씀에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22) 라고 거역할 때는 “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마16:23)라고 책망하시는 것을 본다.

주님의 사랑은 다른 의심하고 반대하는 자들을 주저하지 않으셨다. 그들 때문에 하시려는 일을 머뭇거리거나 그만 두시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악한 생각을 한다면 두려워 해야만 한다. 그러나 반대로 아름답고 좋은 생각은 사람이 몰라줘도 주님께서 먼저 아신다. 그러므로 선한 생각을 실천 하려는 것을 머뭇거릴 필요가 없다. 억울해서 눈물을 흘리십니까? 주님이 아십니다. 할렐루야!



2.주님은 말과 일에 다 능력이 있으신 분이시다.(5)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우리를 비롯해서 대부분의 고통을 겪는 사람들은 어려움을 당하면 감사할 수 있는 것은 “내가 무슨 죄 때문에 이런 어려움을 당하는가!” 생각하게 된다. 이 말은 어려움은 곧 회개의 기회가 된다는 사실이다. 이런 사실을 아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셨지만 주님의 권세를 알아보지 못한 서기관을 생트집을 잡은 것이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는 선언이나 “일어나 걸어가라!”는 말은 둘 다 권세 없이는 불가능한 명령이다. 이 서기관의 말처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는 선언은 하나님만이 가능한 명령이고 “일어나 걸어가라!”는 하나님의 보내신 능력의 일꾼들은 다 가능한 말이다. 그러나 한계가 있다면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는 것은 외관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일어나 걸어가라!”는 모든 사람이 바로 볼 수 있는 변화이기 때문에 반드시 능력이 역사해야만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이 두 가지 모두 우리 주님께는 문제가 되지않는 가능한 명령이었다. 주님은 이 중풍병자의 사죄를 먼저 선언하시고 그 사실적인 모습으로서의 육신을 치유 하심으로 그 말이 역시 권능 있는 능력이심을 나타내셨다.



3.주님은 모든 인류의 불편을 해소해 주시려고 십자가를 친히 지셨다.(6)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주님께서 이 세상에 육신을 입고 오신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단순한 중풍병을 치유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죄에 매여 고통 하는 인류에게 사죄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오셨고 이것이 주님께서 육신을 입으신 가장 근본적인 이유이셨다.

그렇기 때문에 밤중에 찾아온 니고데모에게도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4~15)고 말씀하심을 읽게 된다. 그럼으로 우리 모두가 주님을 믿는 이유도 이것이어야만 한다. 주님을 믿고 사죄를 받은 감격, 이것보다 더 큰 것은 사실 없고 이보다 중요한 것도 없다. 질병은 이 세상의 의술로도 고칠 수 있고 재물은 부지런하면 모을 수도 있지만, 죄를 용서받는 이 일만은 세상에서는 불가능한 일이고 그 불가능한 공포로 인해서 사람들은 일생을 두려움으로 살다가 두려움으로 이 세상을 하직한다.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히2:15) 이런 세상이 영원히 불가능한 일을 해결하기 위해서 오신 분이 주님이 시라면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를 가져야만 할 것이다. 여러분은 감사합니까?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 주님은 보이는 치유의 목적을 분명히 선언하신다. 예수께서 이 중풍병자의 불편한 육신을 고치시는 것은 단순히 질병을 고치는 의사와 같은 역할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죄의 권한을 사람들에게 나타내시기 위해서 즉, 십자가의 보혈의 은혜를 이루기 위해서임을 알게 하시는 방법인 샘이다.

단순히 육신의 질병을 고치기 위해서 오신 분이 아니라 모든 인류를 향하여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는 선언을 하시기 위해서 오신 주님이시다. 그러나 이 선언은 이 중풍병자와 친구들처럼 믿음으로 주님께 나아 오는 자들에게만 유효하게 된다.



Ⅲ.결국 이 중풍병자는 영육의 회복을 받고 사람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7~8)

1.우리는 모두 회복되어야 하고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야만 한다.(7) “그가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거늘” 모든 인류는 돌아가야 할 집이 있다. 그러나 영혼이 장애자가 되어 유리 걸식하는 노숙자들이 되어 있다. 마치 집을 떠난 탕자처럼 낫선 땅 먹을 것 없는 이방에서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려고 하는 것처럼 세상의 식물로 굶주린 영혼을 채워보려 하지만 그 허기진 영혼의 굶주림은 오로지 만 인류의 아버지 하나님께로 돌아가야만 채워 질 수 있는 것이다.

예루살렘을 예배하러 왔다가도 성경은 여전히 어렵고 힘겨운 여행일 뿐이었던 에디오피아 내시가 빌립으로부터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듣고 오아시스에서 세례를 받은 후 기쁨으로 고국을 돌아 가는 것처럼 이제는 그가 타던 동일한 마차, 비록 흔들리는 마차지만 그 마차는 천국을 가는 마차가 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다.

Swing low, sweet chariot, coming for to carry me home,

Swing low, sweet chariot, coming for to carry me home.

I looked over Jordan, and what did I see coming for to carry me home,

A band of angels coming after me, Coming for to carry me home.

오늘 이 말씀을 듣는 여러분들도 이 에디오피아의 내시처럼 흔연한 인생으로 우리의 영원한 아버지 집으로 행복하고 기쁜 금의환향(錦衣還鄕)의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복되신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죄 아래 난 모든 인류는 자신으로서는 마음대로 움직일 수도 없는 중풍병자가 되어 영적으로는 마음대로 걷지 못하고 활동도 못하는 만신불수와 같은 인생이 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비극적인 운명은 사죄의 주님을 만나야 해결된다. 돌아갈 집이 없는 인생은 불행한 사람이다.



2.이 회복의 역사를 경험한 모두는 영광을 돌리게 되었다.(8) “무리가 보고 두려워하며 이런 권세를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사실 한 인간의 회복은 이 사건 속에서도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다. 친구를 사랑하는 뜨거운 우정과 사랑의 주님의 은혜의 역사로 가능하게 되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눅15:7) 하셨다. 결국 네 친구와 더불어 믿음과 수고를 감당했을 때 발 디딜 틈도 없이 모인 모든 무리가 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었다.



Conclusions: 진정한 사랑과 믿음만이 절망으로 가는 영혼을 건질 수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병든 영혼을 사랑하는 뜨거운 사랑이 있어야 한다. 요한 계시록에 보면 바벨론이 망하기 전에 거래되는 목록의 마지막에 “… 종들과 사람의 영혼들이라”(계18:13b)고 기록하고 있다. 사람의 영혼을 사고 파는 이 세상의 마지막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 시대에 악한 세상은 사람의 영혼을 사고 파는 최악의 상황이 되는데 한 사람의 영혼이라도 어두움의 영혼들에게 팔리기 전에 이미 값을 지불하신 주님께로 대리고 와야만 한다.

비록 하나님 아버지를 떠나 죄로 만신창이가 되고 황량한 세상에 갈 곳 없어 방황하는 영혼일지라도 먼저 된 하나님의 백성들의 희생과 수고로 그들도 주님의 피를 힘입어 사죄를 힘입고 영원한 영광의 집으로 돌아가는 유쾌한 인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여러분 중에 누가 이 네사람의 친구가 되겠습니까?

사랑과 긍휼은 위대한 힘을 가진다. “…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약2:13) 하였다. 네 사람의 친구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과 사랑을 주님께서 보셨다. 주님께서 문제를 보시면 해결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주님의 말씀은 천지를 창조하신 말씀이요, 권세를 가지신 말씀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몸으로 인류의 죄의 문제를 친히 해결하시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고 믿음으로 그에게 나아오는 자마다 병든 영혼을 치료하시고 고쳐 주신다. 어떤 난관도 포기 하지 않는 친구들의 믿음과 수고는 그들의 불편한 중풍병자를 치료 받게 했고 이 놀라운 은혜의 사건으로 인하여 모였던 엄청난 사람들이 놀라며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려 드리게 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본문 말씀을 견주어 말하기를 사람들을 예수 앞에까지만 데려오면 된다고 하는데 이것은 좀 급한 표현이다. 본문의 사건처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일으킴을 받을 때까지, 즉 스스로 일어 설 수 있을 때까지는 우리의 도움이 필요하다. 스스로 일어서지 못하는데 방치 한다면 그것은 요즘 말하는 유기나 마찬가지다. 끌고 주님께 온 것 까지는 좋았는데 스스로 일어서지 못하는 것을 버려 둔다면 그것은 책임을 다한 것이 아니다. 이 중풍병자가 자기 침구를 거두어 스스로 돌아갈 수 있는데 까지 친구들의 도움이 함께 했던 것처럼 사람을 그리스도 앞에 인도하는 의무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스스로 일어서는데 까지 임을 잊지 말자. 우리 모두 이 중풍병자의 친구가 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