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말씀을 클릭하면 성경구절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이종배 전도자
마 9:9~13 2004-11-28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계속되는 치료의 사역 사이에 마태는 자신의 부름 받은 경험과 금식에 대한 교훈을 삽입하고 있는 가운데 주님께서 그의 제자를 부르시는 특이한 모습과 마태의 행동은 부름 받은 자의 순종과 주님을 따르기로 결심한 자로 삶의 회개의 구체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일반적이지 않은 이 주님의 행동에 시비하는 종교 지도자들의 반항을 본다. 그러나 이 사건을 통해서도 역시 귀중한 교훈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본다.

어떤 일꾼을 선택하기 위해서는 아는 사람들을 통해서 사람을 찾고, 그의 이력을 살피고 만나서 인간 됨을 보기 위해서 면접을 하고 말씀을 전하도록 하여 듣기도 하고 하는 것과는 다르게 예수께서 베드로나 요한을 부르실 때도 그러셨고 여기 마태를 부르시는 것도 오늘 우리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마4:18), 거기서 더 가시다가(마4:21), 거기서 떠나 지나 가시다가(9)” 우리의 창조주요 구세주인신 주님은 모든 인류의 인간 됨을 아시기 때문에 일꾼을 부르심에 있어서도 그 사람의 과거의 이력도 주위의 평가에도 신경을 쓰지 않으신다.

본문에 주님께서 주신 귀한 교훈처럼 죄인을 불러 구원하러 오신 주님은 그 죄인들과 상종도 하지 않고 자신들만을 의인시(義人示) 하는 사람들 중에서는 일꾼을 뽑지 않으시고 비록 주변의 평가는 좋지 않을지라도 순종과 확실한 회개가 가능한 사람이면 뽑으시는 것을 본다. 바울 자신은 인간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그렇지 않았지만 진솔한 표현을 빌리면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고전1:26~28) 라는 고백을 본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쓰시기에 부적절한 무식한 자도 없고, 주님께서 쓰시기에 부적절한 죄인도 없다. 주님은 역시 과거보다도 회개와 미래를 보시는 분이심을 이 말씀에서 확신한다.

오늘 이 말씀 역시 공관 복음이 다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보는데 막2:13~17 눅5:27~32에 함께 기록하고 있다. 다만 마가나 누가는 마태라는 이름 대신에 “알패오의 아들 레위, 레위라 하는 세리” 라고 되어 있는 것의 차이를 본다. 성경 속의 많은 일꾼들이 두 가지의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것은 흔한 내용이다. 특히 당시 그리스나 로마의 행정적인 영향 때문에 이런 일이 흔했던 것 같다. 시몬 베드로, 사울이나 바울, 요셉 바나바, 요한 마가 등등이 그렇고 ‘마태’는 아람어로 ‘하나님의 선물’ 이라는 뜻을 가진 이름이다.



Ⅰ.순종과 회개의 모범을 본다.(9~10)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지나 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어떻게 보면 예수께서 행하시는 모습들이 무계획적(無計劃的)이고 즉흥적(卽興的)인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주님의 행동 하나하나는 이미 창세전부터 계획되어 진 것이고 그 행동 하나하나는 절대적으로 아버지 하나님의 뜻과 함께 인간 구원에 맞추어져 있음을 확신할 수 있다. 주님의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심에서부터 성장과 죽으심과 부활, 이 모든 것들은 모두 “때가 차매”(갈4:4)라는 예정 속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주님의 한 걸은 한 발짝이 우리 보통 사람과는 다른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1.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순종의 본이다.(9)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지나 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

이러한 창조주요 구세주인신 주님의 그 사역에 쓰실 사람의 선택은 절대로 즉흥적일 수 없고 구원의 사역에 관한한 주님의 요청에 절대적으로 순종할 사람만을 부르신 것도 당연한 것이다. 오늘 주님을 믿고 따르고 섬기는 우리 역시 이러한 하나님의 계획 속의 존재들이라고 하는 자부심으로 같은 순종과 충성을 드려야 할 것이다. 이미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의 부르심과 순종에서도 이 마태와 같은 모습을 읽은바 있다.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저희가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이 그 부친 세베대와 한가지로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저희가 곧 배와 부친을 버려 두고 예수를 좇으니라”(마4:18~22)

“지나 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

당시의 [세금쟁이]라는 별명을 가진 세관 직원들은 정통 유대인들로부터 [매국노] [민족 반역자]로 지목되어 창녀나 도적과 같이 취급되는 것이 당시의 분위기였다.(눅19:2, 삭개오) 뒤이어 지는 바리새인들의 말을 봐도 그렇다.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왜 신령한 하나님의 구원 사업을 위하여 평판이 좋은 사람을 뽑지 않으시고 하필이면 이런 사람을 택하실까? 하는 것이 다른 사람들에게서도 의심을 받는 이유가 되었고, 마태의 입장에서도 사람들이야 어떻게 평가 하든지 안정된 직장인 세무원 직을 이 가난한 나사렛 목수 출신의 다들 이단이라고 말하는 사람의 “나를 좇으라!”는 한마디에 모든 것을 털고 일어서는가? 둘 다에게 이해하기 어려운 모습을 보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마태뿐만 아니라 오늘의 우리 모두를 아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롬8:29) 그런 순종의 사람이었기 때문에 나중에 이 복음서를 기록하는 위대한 업적을 남기는 주님의 충성 된 일꾼으로 섬긴 것이다.

마태의 입장에서도 세무원이라고 하면 무엇보다도 계산에 밝은 사람이었을 것이고 앞뒤 전후 좌우를 계산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려고 했다면 도저히 계산이 안 나오는 미래였지만 그는 주님의 부르심에 단순히 응답하는 순종을 보임으로써 오늘 우리에게조차 주님의 쓰임 받은 일꾼으로 이야기 되고 있는 것이다.

세상적인 거래로 본다면 예수 그리스도께 마태나, 마태에게 예수 그리스도나 성사가 불가능한 입장이었지만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미리 아심과 앞뒤를 제보는 계산 없이 단순한 순종으로 복음의 기록자가 되는 마태를 배워야 한다. 오늘도 주님은 순종의 사람을 기뻐 하시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의 삶을 명하실 때는 인생의 득실을 계산을 다 해보고 응답하겠다는 자세 보다는 단순히 주님께서 나 같은 죄인을 부르셨다는 감격으로 순종하고 복종한다면 우리를 절대로 손해나게 하실 분이 아님을 확신할 필요가 있다. 믿습니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눅9:62)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을 헤아릴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



2.회개의 구체적인 모범을 배운다.(10)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마태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기로 한 결심을 혼자서 실행할 수도 있었지만 자신의 각오와 결심을 그의 동료들과 같은 처지의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선언하기 위해서 주님을 모시고 지금까지의 모든 인생을 정리하고 새 출발을 하는 잔치를 베풀고 있는 모습을 읽게 된다. 이것이 지나쳐도 문제 이겠지만 어떤 면에서 볼 때 삶의 변화를 분명히 하고 선언함으로써 자신의 결심을 뒤집지 못하도록 하는 장치가 되기도 한다.

OT에서 엘리사에게서 이러한 모습을 보게 된다. 엘리야의 겉옷을 받은 엘리사는 “엘리사가 저를 떠나 돌아가서 소 한 겨리를 취하여 잡고 소의 기구를 불살라 그 고기를 삶아 백성에게 주어 먹게 하고 일어나 가서 엘리야를 좇으며 수종들었더라”(왕상19:21)

이 모습 속에서도 주님과 마태의 같은 의지를 엿볼 수 있다. 주님은 호시탐탐 자신의 꼬투리를 잡고 늘어지려는 종교 지도자들의 비난도 의식하지 않고 회개한 마태의 잔치에 참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마태가 자신의 과거 삶을 확실히 정리하는 모습을 읽을 수 있다는 말이다.

마태는 이렇게 공개적으로 주님의 제자 됨을 선언함으로서 자신의 결심을 흔들리지 않게 하는 동시에 손가락질 받는 같은 처지의 동료들에게 주님의 은혜를 나눌 수 있게 하는 결과를 기대했던 것 같다.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신앙적 각오를 밝힘으로써 주위의 사람들을 스스로의 감시자로 만들어 결심을 흔들리지 못하도록 장치를 하는 것이다.

주님께서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마10:32~33; 눅12:8~9) 말씀하셨다. 우리 각자의 믿음의 흔들림을 방지하는 장치 그것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신앙의 의지를 선언하고 주님을 의지하는 것이다.

오늘도 나를 아시고 부르시는 주님의 요청이 어떤 것이든지 순종하고 우리 각자의 신앙의 변치 않을 장치를 위하여 주위의 모든 사람들의 신앙의 보호자로 인정하고 고백하는 우리모두가 되시기를 …



Ⅱ.자신을 의신 시 하는 죄인을 본다.(11)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예수 그리스도께 직접적으로는 항변하지 못하고 그의 제자들을 물고 늘어지는 야비함을 보이고 있다.

역시 율법적이고 계율적인 종교의 사람들인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은 이러한 주님의 사랑과 마태의 순종도 비난의 대상일 뿐이었다. 주님으로부터 용서 받은 죄인들일지라도 이들에게는 여전히 죄인들의 무리로 밖에 보이지 않았고 이들과 함께 잡수시는 예수도 이해되지 않았다. 은혜에 의지하는 사람들과 행위에 의지하는 사람의 차이가 바로 이런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자신의 민족을 향해 한탄하면서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롬9:30~33) 고백한다.

바울이 이방인이 이해될 수 있었던 이유는 자신의 신앙적 경험 때문이었다. 교회를 핍박하고 그리스도인을 죽이는데 혈안이 되었던 행위에 의지하던 자신을 다메섹에서 부르시고 무조건 용서 하셔서 그 자신이 핍박하던 교회의 일군이 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의 경험 때문에 비상처럼 싫어 했던 이방인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기까지 사랑하는 것을 본다.

주님께서 이러한 경험적 신앙의 원리를 시몬의 잔치 자리에서 죄 많은 여인과 시몬에게 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눅7:47) 하셨다. 자신의 신앙의 행위가 남들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눈에는 자신보다 의인은 결코 없다. 그러나 반대로 주님의 십자가로 인한 죄 사함의 감격을 크게 받은 경험이 있는 사람일수록 사죄를 누리는 사람을 인정하게 되어 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회개한 다른 사람의 과거가 어떠했던지 회개한 사람들의 과거를 들추기 보다는 그 사람의 은혜 받은 사실을 인정하고 설령 그 사람이 미래에 어떻게 변할지라도 그 사람의 현실을 인정하고 받아주고 격려 하는 사람이다. 하나님 앞에 우리 각자의 의로운 행위의 차이는 종이 한 장 차이일 뿐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의 은혜 받은 사실을 인정해 주고 격려할 줄 아는 하나님의 보시기에 의인으로 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



Ⅲ.주님께서 받으시는 사람을 본다.(12~13)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결국 마태의 부르심과 거기에 응답하는 회개의 구체적인 선포로서의 잔치에 참여하신 주님과 제자들, 그리고 거기에 청함을 받은 것 같지 않지만 주님과 제자들과 회개한 마태의 동료들을 비난하는 바리새인들 때문에 또 하나의 주님의 위대한 교훈을 우리 모두가 듣게 된다. 때로 진리는 아주 단순한 데서 확인되어 지는 것을 본다. “…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너무나 평범한 이 진리는 깊은 영적인 어두움을 뚫고 바리새인들의 심령에 비수같이 꽂혔을 것이다.

당시 이 말씀을 듣는 바리새인들 중에도 영혼이 건강한 사람은 사실 하나도 없었고 이 역사 속에 누구도 영혼의 의사이신 주님이 필요하지 않은 완전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를 선언하기를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3:10~12) 때문에 이 세상에 만 인류의 죄를 대신 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필요하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는 말씀이 된다.

다만 문제는 자신이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의 병든 자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자와 부정하는 사람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치료의 시작은 육신의 질병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환자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의사에게 치료를 의탁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만 인류의 죄의 병을 치료하기 위한 유일한 처방전이지만 자신의 죽을 죄의 병을 인정하는 자, 자신의 운명을 만병의 의원이신 주님께 기꺼이 맡기는 자들에게만 유효하다. 그러나 안타까운 사실은 그때의 바리새인들이나 오늘도 죄인 됨을 인정치 않는 사람들에게는 전능하신 주님께서도 억지로 치료를 감행하시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과거도 현재도, OT에도 NT에도 하나님의 긍휼을 바라는 백성을 받으시고 용서하셨지만 자신의 의를 내세우려는 사람들을 받으실 수 없으셨다는 사실이다.

본문에 인용되는 호세아서 6장을 보면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 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1~2) 말씀하시고 (6)에서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고 말씀하신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신 이유 역시 이러한 선언과 무관하지 않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심각한 문제는 우리는 아무 일이 없을 것이라는 거짓된 확신으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 예배 한번 드리는 것 만으로 안심하고 늘 세상 속에서 상하고 찢기는 상처를 고침 받으려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온전치 못하다는 고백으로 늘 주님을 필요로 하고 갈급 해 하고 의지하는 자세야 말로 주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자세이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좋은 것들을 늘 주시기를 바라시고 기뻐 하신다. “예 저는 늘 주님의 치료와 긍휼이 필요한 연약한 존재입니다.” 라는 고백으로 십자가를 붙드는 백성들을 주님은 오히려 기뻐하신다는 사실이다.

오늘도 주님으로부터 은혜를 누리는 사람들은 바로 이런 겸손과 고백으로 주님을 의지하는 사람들이다. 반면에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입술로는 부르면서도 언제나 자신의 지혜와 계획을 의지하고 주님이 제외된 계획과 자신의 능력을 주님보다 더 신뢰하는 바리새인들 같은 사람들과 주님은 사실상 관계가 없다.



주님은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마태처럼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나의 과거의 죄도 주님만이 해결하실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나의 현재와 미래에도 주님의 십자가의 보혈을 의지할 수 밖에 없는 불완전한 존재임을 고백하고 같은 죄의 사람들이 주님을 더불어 의지하고 사랑하는 것을 받아주고 격려하는 그들을 위해서 주님은 이 죄악의 땅에 종의 형상으로 사람이 되어 오셨다.

사람들로부터 죄인이요 민족반역자 매국노 취급을 받던 세리 마태가 하나님의 일꾼으로 쓰임을 받을 수 있었다면… 무식한 갈릴리의 어부들인 베드로나 요한이 귀하게 쓰임을 받을 수 있었다면… 오늘 이 말씀을 듣는 여러분들이 쓰임 받지 못할 사람은 없고 하나님께서 쓰시기에 부적격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다만 한 가지 단서가 있다면 주님의 부르심에 앞뒤를 계산해 보는 스스로의 지혜를 의지하는 것보다는 단순히 순종으로 응답하는 단순함과 과거에 어떤 조롱을 받던 죄인이든지 그 죄를 완전히 회개하고 주님께 절대적으로 순종한다는 것 뿐이다.

오늘 주님을 따르고 섬긴다고 하는 우리 자신들도 마찬가지다. 어린아이처럼 변명 없이 묵묵히 순종하고 우리를 맡기기만 하면 우리의 섬김의 사역을 주님께서 복되게 하실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선을 의지하는 의인들보다 늘 부족함을 느끼고 십자가의 피 흘리심을 의지하여 날마다 자신의 삶을 말씀을 듣고 회개하는, 아니 과거의 적절치 못한 죄를 인하여 회개하고 통회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피 흘려 죽으셨고 이러한 죄인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신다.

과거보다 현실의 순종을 기뻐하시는 하나님 죄로 만신창이가 되었어도 회개하여 주님의 일을 믿음으로 감당할 우리 각자의 미래를 보시는 주님이시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시는 주님의 사랑의 고백 앞에 은혜를 누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