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태는 예수 그리스도의 치료의 사역 중간 중간에 보석처럼 귀중한 경계의 교훈들을 군데군데 삽입해 놓음으로 복음서의 가치를 더한층 높여주고 있다.
마태의 집에서 바리새인들이 罪人 시 하는 세리와 창기들과 잡수시다가 핀잔을 주는 바리새인들에게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12~13)는 귀중한 교훈으로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러 오셨다는 말씀을 하시자 다시 구약 종교적 행위를 따르지 않는다는 또 다른 시비를 걸고 나온다.
오늘 본분에서는 [요한의 제자들]로 나타나고 있지만 병행 구절인 마가나 누가의 기록을 보면[막2:18~22; 눅5:33~38] 이들 역시 같은 바리새인으로 나타나고 있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있는지라 혹이 예수께 와서 말하되”(막2:18) “저희가 예수께 말하되 요한의 제자는 자주 금식하며 기도하고 바리새인의 제자들도 또한 그리하되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나이다”(눅5:33) 사실 이러한 신앙의 관습에서는 세례 요한이나 바리새인들이 다르지 않을 것으로 보이고 이들의 트집 때문에 또 하나의 귀중한 교훈이 들려지고 있다. 참깨나무 다발을 털어내면 참깨만 쏟아지는 것처럼 은혜와 진리가 넘쳐계신 예수 그리스도는 누가 어떻게 건드리든지[찬양하든지 대적하든지] 생명의 교훈이 쏟아져 나오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주님의 귀한 가르침은 어떤 대상이나 상황에서도 늘 귀하고 소중한 교훈이다. 요한의 표현대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주님이시며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골1:19)라든가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골2:9~10)라는 바울은 고백도 이러한 사실들을 반증하고 있다.
이 말씀 역시 율법에 속한 교훈에 불충 하다는 항의를 듣는 것인데 구약의 율법의 경우는 계명의 강도에 상관없이 인간적인 면이 더 고려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왜 그러냐 하면 절기라든지 날과 시의 제사 문제를 봐도 역시 연약에 싸여있는 인간을 교훈하기 위해 세상에서 사람들이 익숙해 있는 그런 부분들이 많이 고려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구약의 대제사장을 말하면서 “저가 무식하고 미혹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싸여 있음이니라”(5:2)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이 연약하고 한시적일 수 밖에 없는 율법은 하나님이 인간으로 오시면서 패하고 더 이상 인간적인 범주에서의 언약이 아닌 완전한 구원의 새 언약을 하나님의 아들의 피 흘림으로 새우신 것이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8:3~4)고 바울은 선언하고 있다.
하나님은 이 불변하는 새 언약을 새우실 것을 이미 OT의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해서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31:31~32f)이라고 약속하셨고 이 말씀은 그대로 히브리서8:8~12에 인용하고 있고 이 폐기해야 할 인간 범주의 법을 “전엣 계명이 연약하며 무익하므로 폐하고”(히7:18) 라거나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히10:9b)고 계속 강조되고 있다.
오늘 이 말씀은 역시 율법주의자들의 항의에 대한 답변과 아울러 비유로서 이 가르침을 더욱 분명히 하고 계시는 내용이다.
금식의 의미와 내용은 산상보훈6:16~18에서 이미 나눈바 있기 때문에 생약하기로 하고 이 귀중한 교훈과 함께 율법과 복음의 간격과 함께 역시 견고한 복음에서 진정한 천국의 시민의 삶을 사는 데 조금의 혼란도 없는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Ⅰ.종교의 틀에 매이지 않는 복음의 자유.(14~15)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서에서 율법과 복음의 부분들을 많이 다루고 있다. 그것을 율법과 믿음, 종과 아들 등등의 율법에서 자유케 하시는 그리스도의 은혜의 역사를 설명하면서 복음 안에서의 승리를 확신 시켜 주고 있다.
1.자신이 할 수 있다고 하는 것으로 남을 정죄하는 것은 바른 신앙의 성숙이 아니다. (14) “그 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이 때 요한은 잡혀서 옥에 있었던 것[4:12 예수께서 요한의 잡힘을 들으시고 …]으로 짐작이 되나 그 제자들은 금욕과 기도 생활을 하면서 스승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금식이라는 것이 하나님과 개인의 신앙 행위라면 역시 그것을 하고 하지 않는 것을 간섭하는 것 자체가 자신의 권리를 넘어서는 것이다. 사람 사람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이 다를 것이고 모두가 같아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이러한 다양성을 무시하는 교만일 것이다. 계율에 매인 종교의 사람일수록 자신의 경건에 대한 충실보다는 언제나 남들의 행동에 더 예민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오늘날도 자신이 하고 있는 신앙행위를 하지 않는 사람들을 무조건 이단시 하고 정죄하는 것은 이런 입장에서 분명히 문제가 있다. 당돌하게 예수님 앞에 나서서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어떤 종교적인 것들을 행한다고 해서 안심하고 그것이 기준이 되면 예수 그리스도까지도 제자들을 잘 못 가르치고 있다고 훈계하는 참으로 무서운 모습을 본다.
이는 마치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눅18:11~12) 어쩌다 보면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시기를 바라는 것 보다는 자신의 의로움을 하나님 앞에 선전하려 드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되고 마는 것이다.
주님께서 가르치시기를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눅17:10)고 가르치신바 있다. 그래서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는 말씀은 진리일 수 밖에 없다.
오늘 우리의 문제도 나름대로 신앙을 열심히 한다는 사람들이 때로 위험한 것은 나 자신이 남들이 하지 못하는 것을 하고 있다는 자긍심 때문에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정죄하고 아픔을 주는 자세는 조심해야 할 부분이다. 바울 사도는 이러한 사람들을 가리켜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으매 저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저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니라”(롬14:4)고 경계하고 있다.
오히려 약한 자를 책임져야 할 사람은 더 성숙한 사람이다.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만일 누가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니라”(갈6:1~3)고 바울은 가르치고 있다.
2.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기쁨은 계율을 지킴으로 안심하는 것과 비교될 수 없는 기쁨과 능력이다.(15)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뇨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비록 율법 속에 사는 이스라엘 사람들일지라도 혼인예식을 대개 일주일정도 치렀고 또 금식기간일지라도 결혼식에는 예외가 있었다고 한다. 소위 말하는 신랑측의 우인 대표들은 신랑의 혼인예식을 마칠 때까지는 신랑의 기쁨에 함께 참여하고 즐거워하는 것으로 시간을 보내고 신랑을 신부와 만나게 하는 최종적인 의무를 이행한 후에 금식기간이면 비로소 금식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주님께서는 당시의 이러한 풍습의 사실을 들어 말씀하신 것이다.
무엇보다도 요한의 제자들이 이런 질문을 해 왔다면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으면서 자신들의 스승인 세례 요한이 한 고백을 기억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요3:29) 즉 자신을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친구라고 말했던 것이다.
주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물론 나중에 주님께서 죽임을 당하시게 될 때는 시키지 않아도 금식할 제자들을 두고 하시는 말씀이기도 했을 것이다. 오늘 구원 받은 우리의 시대에도 일부러 구차하고 금욕하는 것만이 경건의 삶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바울은 우리가 감격해야 할 이유를 고백하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6:1~2)
우리의 신앙의 삶이 언제나 치우침이 없이 그리스도와 성령과 더불어 함께 하는 삶이야 말로 진정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천로역정의 길이 될 것이다. 우리의 신랑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늘 기쁨과 감사가 충만한 삶이 되시기를 …
Ⅱ.어울릴 수 없는 낡은 것과 새것.(16~17)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이 비유는 분명히 율법과 복음의 간격을 분명히 해주는가 하면 세상의 낡은 사상들에 복음을 함께 수용하려는 잘못된 신앙의 모습도 더불어 경계해 주고 계시는 귀한 말씀이다. 특히 나이드신 어르신들은 과거의 헐벗고 굶주릴 때 낡은 옷을 얼기설기 기워 입던 경험들을 생각한다면 더욱 실감나는 비유가 될 것이다.
1.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다.(16)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요즘의 사람들은 이런 비유에 익숙하지 못할 것 같다. 옷이 낡아서 기워야 할 정도로 입는 사람들이 드물고 오히려 성한 옷을 찢어서 구멍 내는 것이 유행이 되고 있는 것을 보면 격세지감(隔世之感)을 느끼게 된다. 여기서 비유하는 [생베]는 분명히 복음을 말씀하시는 것이고 낡은 옷이란 그 동안 요한의 제자들이나 바리새인들을 포함한 당시까지도 구약의 율법을 지키려고 무던 애를 쓰는 종교의 사람들을 비유하시는 것이 분명하다.
예전에 우리가 어릴 때에는 낡아서 못 입게 된 옷의 성한 부분을 뜯어내어 좀 나은 옷의 구멍 난 곳에 깁고 그러다 보면 색상이나 천의 종류는 울긋불긋 했던 것을 기억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덕지덕지 기운 바느질 자리 밑에는 이가 알을 까거나 숨는 장소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만약에 새 천을 잘라내어 낡은 옷에 대어 기우면 참으로 낡은 옷은 새 천이 당기는 힘으로 인하여 더 오래가지 못하고 못 입게 되는 경험을 한 때가 있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의 피로 세우시는 언약을 가리켜 말씀하시기를 “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눅22:20) 하셨고 히브리서 기자는 “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첫 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 가는 것이니라”(히8:13)고 선언 하였다.
십자가의 복음은 구약의 율법을 수리하고 고친 언약이 아니라 완전히 새 언약이라는 약속이다. 그렇기 때문에 율법과 뒤섞는 것이 옳지 못하고 오히려 복음의 약속을 율법과 같이 섞으면 복음의 가치조차도 흐려지는 사실 때문에 복음은 율법의 완성이지 율법의 변형이 아니라는 사실을 복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 율법 준수자들(守舊者)에게 비유로 증거 하시고 계신 것이다.
오늘 우리가 복음 속에 산다고 하는 사실에 얼마나 큰 감사와 자긍심을 가져야 할지 모를 일이다. 오늘 이 복된 복음의 시대에도 여전히 율법의 어떤 부분들을 복음에 끌어와 붙이려는 어리석은 시도들을 많이 보는데 주님께서 헐으신 것을 세우는 어리석음을 범하는 것이 될 것이다. 십자가의 피 흘림으로 찾아주신 능력의 복음, 은혜의 복음에 살고있다는 확신으로 유치한 세상 초등학문이나 구약의 헐어버린 어떤 것들을 다시 세우는 어리석음을 범치 않고 흔들림 없이 확실한 능력의 복음을 누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
2.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않는 것이 지혜이다.(17)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여기서 비유하시는 새 포도주 역시 술이 발효하는 것처럼 살아서 역사하는 복음의 능력이다. 어려서 어느 때인가 농주를 제조하는 것이 위법인 시대에 술밥을 쪄서 누룩을 섞고 방안의 아랫목에 따뜻한 곳에 이불을 씌워두고 하루를 지내면 마치 불로 끓이는 것처럼 부글부글 거품이 개 오르면서 발효하는 술을 본적이 있다. 옹기 항아리에서 부글부글 개는 것을 밀봉한다면 아마도 떠질 것이라는 짐작을 술이 발효하는 것을 본 사람이라면 쉽게 짐작 할만 한 것이엇다.
비슷하게 이스라엘에서는 양이나 염소의 가죽으로 물통을 만들고 거기에 일상적으로 먹는 포도주를 보관하거나 옮기고 하는 일은 어렵지 않게 일상생활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모습이라고 한다. 그러나 문제는 처음 발효하는 포도주는 팽창하는 압력이 세기 때문에 낡은 가죽부대에 넣어 두었다가는 둘을 다 버리는 것은 아주 평범한 경계가 되었다. 이렇게 이스라엘 사람들은 일상적이고 평범한 삶의 지혜는 알면서도 신앙에 있어서는 대단히 어리석었기 때문에 주님으로부터 비유를 통한 책망의 교훈을 듣고 있는 것이다.
특히 뒷부분에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는 우리 주님의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대단히 중요한 생명의 교훈이다. 여기 [새(헬, neos) 포도주]는 팽창하며 역사하는 비 물질적인 복음이고 시간이 가도 결코 낡아질 수 없는 영원한 새것이다. 사람들은 새것을 좋아하면서도 어리석은 것은 영원한 새것인 복음을 외면한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견주어 기록된 [새(헬, kainos) 부대]는 시간이 되면 역시 낡아질 수 있는 성격의 것으로 [새 포도주]에는 견줄 수 없는 제한적이고 물질적인 도구로서의 것을 가르침이다.
새 언약인 복음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은 그릇 자체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새것이어야만 한다. 과거의 이스라엘이 율법을 담았던 낡은 그릇 즉, 세상인 애급에서 익숙해지고 만들어진 그릇으로는 담을 수 없는 것이엇다. 그렇기 때문에 수많은 율법의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외면할 수 밖에 없었고 복음을 수용할 수 없었다.
이것은 비단 율법만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의 모든 경건하다고 생각하는 다른 모든 것들도 역시 복음을 수용할 수 없는 낡은 그릇들이다. 道德이라는 그릇도 儒敎도 佛敎도, 巫俗도 그러한 바탕에 복음을 담으려 한다면 터질 수 밖에 없다. 오히려 복음마저 터져서 못쓰게 할 터질 도구들을 사람들이 많이 가지고 있어서 오늘 이 나라의 복음은 연약한 모습으로 밖에 나타나지 못하고 있다. 낡은 그릇들을 완전히 버리고 하나님의 약속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으로 받을 때 복음의 능력을 온전히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절대적인 하나님의 복음을 온 갓 세상적인 것들에 담은 결과 터지고 뒤섞여서 세상의 종교와 별로 다르지 않고 구원의 능력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마치 유대인들처럼 유치한 종교 행위를 하고 있는 경우가 더러 나타나고 있다. 복음은 팽창하고 발효하는 살아 있는 능력이다. 그런 복음을 터진 그릇에 수용하니 온전한 능력을 맛볼 수 없다. 복음을 세상의 어떤 것들과 비교될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이다.
[1]새 포도주인 복음을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주님의 첫번째 경계이다. 술 고주망태기 같은 것도 복음을 수용하려면 완전히 버려야 한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헌 가죽 부대와 같은 것들을 버리지 못하고 거기에다 새 술과 같은 복음을 담는 어리석음을 더러 본다. 생명의 복음에 옛 언약인 율법의 요소를 섞는 것들도 그런 것들이다.
[2]만약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이런 것들은 결국 터져서 둘 다 버리게 될 것이라고 경계를 주고 계신다. 신약성경에는 절기라든가 하는 계명들이 명령 되어지고 있지 않지만 구약의 관습처럼 그걸 것들을 만들어 지킴으로서 세상에 어떤 종교와 비교 될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의 다른 성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의 수준으로 끓어 내리고 그리스도의 생명의 능력이 마치 다른 종교와 같은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었다. 벌써 1세에 바울은 자신의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이런 형태가 나타나는 것을 안타깝게 한탄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더러 하나님의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갈4:9~11)
사실 이 12월의 X-mas조차도 그렇다. 그리스도는 이 시간 속에 속박될 분이 아니신 하나님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에 오셨지만 탄생의 날이 의미가 없어서 NT에는 탄생을 기념하라는 명령은 물론이고 탄생의 날도 침묵하고 있다. 그런데도 날을 임의로 정하고 기념하고 부활절 역시 그렇게 함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의 기준으로 끌어내렸을 뿐만 아니라 세상의 다른 많은 이방 신들을 섬기는 관습들이 섞이게 되고 부활절 후면 어김없이 연이어 오는 석가 탄생일로 인해서 그리스도와 석가를 같은 범주에서 생각하게 만든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마치 봄이면 석가와 예수가 경쟁하는 듯한 인상까지 주게 된다.
[3]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된다.
오늘도 내가 능력의 복음을 담고 산다고 하면서 옛 것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들이 있다면 지금 당장에 영원히 던져버릴 필요가 있다. 오! 하나님 이 낡은 부대 같은 자신을 이제 버리기를 원합니다. 완전히 새로운 피조물로 복음을 담고 살게 하옵소서! 라는 간절한 고백이 필요하다. 바울 사도는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 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고전5:7)고 권면하고 있다.
우리가 옛부터 가진 것이 아무리 고상한 철학이나 도덕일지라도 복음을 담기에는 부적합하다. 하물며 부정적인 모든 것은 두말할 필요 없이 복음을 담기 위해는 온전히 버려야만 한다. 만약에 낡아지는 인간의 관습 속에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산다면 해산의 고통을 겪으면서라도 반드시 버리고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새로운 피조물인 도구로서 능력의 복음을 담고 살아야 복음도 천국도 영광도 보존될 것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