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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마 9:18~19, 23~26 2004-12-12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역동하는 능력의 복음은 OT의 율법과 뒤섞어서도 안되며 인간역사에서 생겨난 낡아질 수 밖에 없는 여러 도덕이나 관습이나 종교와도 섞을 수 없는 오로지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거듭난 생명으로만 감당할 수 있다는 교훈을 주신 주님은 여전히 주변 마을로 복음을 증거 하시기 위해서 길을 재촉하고 계시는 가운데 또 하나의 놀라운 생명의 역사로 절망하는 한 가정에 생명을 찾아 주시는 은혜의 역사를 접하게 된다. 물론 중간에 삽입되어 있는 열 두 해를 혈루병으로 재산 다 잃고 포기해버린 여인의 치료의 사건은 다음 시간에 나눠서 생각하고자 한다.

막5:22~24, 35~43; 눅8:41~42, 49~56 보다는 너무나 간략하게 기록한 이 내용 속에서도 사람에게 희망을 잃게 하는 일들이 가정마다 다르고 사회마다 다름을 본다. 오늘 우리 각자가 당하는 소망을 잃게 만드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종류가 무엇이든지 인간은 그 희망의 끝을 놔 버렸다고 생각하면 절망하고 낙담하여 하던 일까지도 의미를 잃게 되는 것이 곳 인생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능력을 돌릴지어다 아멘,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딤전6:16~17) 라고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이 회당장 야이로에게 하나 밖에 없는 외 딸[눅8:42이는 자기에게 열 두 살 먹은 외딸이 있어 죽어감이러라]이 그의 유일한 낙이었지만 그 딸의 죽어감을 보면서 자신의 희망이 꺼져가는 것으로 안타까워 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복음서에서 죽은 사람을 살리는 이적은 그렇게 흔치 않은 기적으로 나인성 과부의 외아들을 살리신 사건(눅7:11~17)과 마리아와 마르다의 형제인 나사로를 살린 사건(요11장)과 오늘 본문의 내용이 있을 뿐이다. 여기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면 많은 형제들 중의 하나가 아니라 외아들과 외딸로 귀중한 존재들이었다는 사실이다. 어느 생명이 귀하지 않은 생명이 있겠는가 만 그 중에서도 귀중한 존재로 생명이 걸려 있을 정도로 하나 같이 귀중한 존재들이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무엇에 기대를 두고 소망을 삼았던지 또 그것이 흔들릴 때 우리는 이 회당장 야이로처럼 자신의 지위나 입장과 처지에 관계없이 주님을 찾아야 하고 그 일을 온전히 주님께 맡길 때 주님께서는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는 격려와 소망을 주실 것이다.



Ⅰ.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의 주인으로 믿고 간구하는 신앙을 본다.(18)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 한 직원이 와서 절하고 가로되 내 딸이 방장 죽었사오나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으소서 그러면 살겠나이다 하니”

여기 그냥 직원이라고만 기록할 뿐 이 사람의 신상에 대한 기록이 자세하지는 못하다. 그러나 마가나 누가는 ‘회당장 야이로’라는 사실을 공통으로 기록하고 있다. 바벨론 포로기 이후부터 지역마다 회당이 있었고 그 회당의 장으로 세워진 사람이기 때문에 OT의 신앙에 익숙해 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외동딸의 죽음 앞에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를 찾게 된다. 늘 말했듯이 위기는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이다. 마가는 “회당장 중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 아래 엎드리어, 많이 간구하여 가로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얻어 살게 하소서 하거늘”(막5:22~23)라는 상황전달을 해 주고 있고 누가도 비슷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이에 회당장인 야이로라 하는 사람이 와서 예수의 발 아래 엎드려 자기 집에 오시기를 간구하니, 이는 자기에게 열두 살 먹은 외딸이 있어 죽어감이러라 …” (눅8:41~42f)

아마도 최선의 치료를 다 해 보다가 죽어가는 딸을 남겨두고 급하게 주님을 찾은 것으로 나타난다. 이 사람은 자신의 딸을 이미 죽은 목숨으로 생각하고 주님께 살려 줄 것을 구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이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를 살릴 수 있는 생명의 주님으로 인정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환자를 고치시는 기록이야 흔한 일이었지만 자신의 죽은 딸을 살릴 수 있다는 확신은 어디서 보거나, 듣고 드리는 요청이 아니기 때문에 중요한 신앙의 자세가 된다.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으소서 그러면 살겠나이다!”



1.생명을 가지신 주님 앞에 겸손히 엎드렸다.이 사람은 예수께서 생명을 주실 수 있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확신했기 때문에 기꺼이 겸손으로 주님께 의탁하고 있다. 본문에는 “와서 절하고” 라고 했지만 마가와 누가는 둘 다 공통으로 기록하기를 “발 아래 엎드리어”라는 것으로 봐서 최고의 겸손을 드리고 있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자신의 사회적 위치나 지위로 본다면 아직 확실치도 않은 이 이단자 취급을 당하는 나사렛의 청년 앞에 무릎을 꾸는 일은 우리가 상상하는 만큼 쉬운 행동은 아니다. 주위의 눈도 있고 앞으로 자신의 처신도 생각한다면 더욱 그렇다. 요한복음12:42의 기록이 이 사람의 이런 자세가 어려웠을 것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설명해 주고 있는 말씀이다. “그러나 관원 중에도 저를 믿는 자가 많되 바리새인들을 인하여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 이는 출회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 그런데 회당장인 이 사람이 이런 행동을 취하는 것은 이미 자신의 입장은 벗어 던져버린 행동이었다. 주님 앞에 진정으로 은혜 받기를 원한다면 이 야이로와 같은 겸손과 손해를 각오할 수 있을 때 큰 은혜를 받게 된다.



2.주님께 많이 간구 드렸다. “내 딸이 방장(방금) 죽었사오나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으소서 그러면 살겠나이다!” 마가나 누사는 이 모습도 좀 더 상세히 전달해 주고 있다. “많이 간구하여 가로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얻어 살게 하소서”(막5:23) “예수의 발 아래 엎드려 자기 집에 오시기를 간구하니”(눅8:41b)

①먼저는 자신의 집에 오시기를 간구하였다. 이것은 나중에 주님께서 그 소녀를 살리셨다는 확신을 사람들에게 갖게 해서 오히려 주님께 영광이 되었다. 예수는 나사로가 죽을 때에도 멀리 떨어져 계셨고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요11:15) 하셨던 것을 읽을 수 있는데 죽은 나사로를 살렸다는 확신을 사람들로 하여금 갖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지만 이 사건에서는 그냥 계시던 곳에서 “내 딸이 살았다!” 해서 살리실 수도 있었지만 이미 죽은 것을 확인하여 장례식을 치르는 가운데 가서 그 딸을 살리심으로 주님께 영광이 되고 많은 사람이 믿게 되었다.

②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어 살게 해 줄 것을 구했다. 이 역시 앞의 이야기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역시 사람마다 신앙의 형태가 다르다. “백부장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마8:8) 집에까지 오시게 하는 것이 주님을 번거롭게 해 드리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로 인하여 예수께서 사람들이 만지면 부정해 진다는 시신을 만져서 살리시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었다. 이런 정도면 번거롭게 해 드릴만 하다. 결국 야이로는 주님께 “많이 간구”하여 자신의 집에 죽음의 저주를 걷어내고 주님의 빛이 충만케 했다. 여러분 모두도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일도 불가능이 없으신 창조주로 믿고 간구드림으로 어떤 어려움이 되었던지 해결 받는 저와 여러분 …



Ⅱ.지속적인 믿음과 신뢰가 필요하다. (막5:35~36; 눅8: 49~50)

“아직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가로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막5:35~36)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눅8:50b)

믿음으로 나아가는데도 언제, 어디서나 방해 요소는 있다. 이미 죽어가는 딸을 보면서 생명의 주님을 찾아 초청해서 모시고 오는데 그들을 가로막는 일행을 만나게 된다. 어찌 들어보면 대단히 주님을 생각하는 것처럼 들리게 말하면서 야이로의 믿음을 무너뜨리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①딸은 죽었다. ②예수를 번거롭게 하지 말자. 는 것이었다. 우리는 때로 절망적인 상황을 접하게 되면 이런 경우를 더러 만들게 된다.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없다. 해봐야 소용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들이 손을 터는 데서 다시 시작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사실을 확신할 필요가 있다. 가능성이 있는 것을 가지고 해보려는 것은 사실 신앙이라기보다는 인간적 확신이다. 사람이 손을 놔 버렸을 때, 사람이 절망해 버린 곳에서 하나님은 역사를 시작하실 수도 있다는 확신이 믿음이고 이미 백부장은 이것을 감지 하고 주님을 찾았지만 주위 사람들의 부추김으로 인해서 확신이 약해지고 있기 때문에 주님께서 주변의 사람들과는 정 반대의 당부를 주시고 계신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우리는 스스로 감당하지 못할 일을 만나면 믿음은 어디다가 팽개치고 덜컥 두려움부터 나타나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 생명의 주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두려워하는 데신 믿기만 하라!”고 당부하시는 것이다. “모든 것은 끝나버렸다. 소용없다. 안 된다.”는 것은 마귀 사탄의 기뻐하는 주문이라면 성경에 “두려워 말라!”는 약속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수없이 주어지고 있는데 맨 처음 창세기15:1에서 아브람에게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고 말씀하였고 한가지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두려워 말라!”는 약속을 주실 때 그 뒤에 붙어오는 수식어가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 줄을 안다면 우리는 비로소 안심하게 될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사41:10) “내가 너를 도우리라” 하시는 것이다.

사람들의 두려움은 ‘혼자 당한다’라는 공포 때문이다. 우리가 때로는 담대한 마음을 가지고 믿음으로 시작했다가도 주변에 일어나는 일들 때문에 그 확신과 믿음을 잃어 버리는 경우가 많은데 어찌 보면 불도저처럼 꾸준히 밀고 나가는 것이 어리석어 보이지만 같은 믿음을 지속시켜 가는 데는 필요한 요소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 백부장처럼 [처음가진 확신을 끝까지 가져갈 필요가 있다.] 야이로에게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하셨던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도 같은 당부의 말씀을 주고 계신다. 두려움은 불신의 사람들 차지지 믿음으로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몫이 아니다. 하나님은 시편기자를 통하여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열방과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시46:10)고 선포하고 있다. 어떤 절망적인 인간의 비극 앞에서도 “두려워 하는 대신 믿기만 하라!”는 주님의 음성을 확신하는 창조주의 백성 됨을 확신하시기를 주님의 복되신 이름으로 …



Ⅲ.절망을 잠재우시는 주님이시다.(23~24)

“예수께서 그 직원의 집에 가사 피리 부는 자들과 훤화하는 무리를 보시고, 가라사대 물러가라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저들이 비웃더라” 사람들에게 죽음은 최고의 절망이고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것이 죽음이기 때문에 초상집은 어디나 예외 없이 절망과 탄식의 노래로 채워지고 위로하게 된다.



1.주님께서 이 천사 같은 아이의 죽음의 현장을 보셨다. 주님께서 회당장을 격려하면서 찾아간 집은 모든 일반적인 초상집 그대로 였다. 아니 어린아이의 죽음이라는 것 때문에 더 슬픔은 컸다. “회당장의 집에 함께 가사 훤화함과 사람들의 울며 심히 통곡함을 보시고”(눅8:38) “모든 사람이 아이를 위하여 울며 통곡하매”(8:52f) 주님께서도 인간의 죽음을 보시고 탄식하심을 본다. 최근에 우리는 부모가 집을 비운사이 불이 나서 천진한 세 자녀가 죽은 슬픈 소식에 역시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고 있는 것과 일반이다. 요한 사도는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우시는 주님의 죽음에 대한 탄식을 전달해 주고 있다.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요11:35) 죽음 앞에 맥을 못 추는 인간의 나약성에 통탄해 하시는 주님이시고 그 죽음을 모든 인류를 위해서 친히 맛보신 주님이시다.



2.그러나 죽음은 생명의 주님 앞에서는 자는 것과 다르지 않다. 죄의 삯으로 죽는 인간의 죽음은 주님에게는 죽음이 아니셨기 때문에 “들어가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훤화하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막8:39) 말씀하신다. 주님께서 부활을 가지고 주님을 시험하는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눅20:38) 말씀하셨다. 주님은 이 역사의 시작과 마지막을 현재로 보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그러한 무시간의 하나님 앞에 시간에 갇혀서 죽고 사는 인간의 생사가 사실 의미가 없다.



3.그러나 사람들은 비웃었다. “저들이 비웃더라”(24b) 누가복음에서 표현하기를 “저희가 그 죽은 것을 아는 고로 비웃더라”(눅8:53) 거기 모인 사람들 모두는 이 아름다운 소녀가 죽은 사실을 알기 때문에 살았다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말씀에 비웃음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반응일 수 있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러나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시기 때문에 사실은 비웃어서는 안된다.

생명의 권한을 가지신 주님이 하시는 말씀을 비웃는 것은 나중에 심판대 앞에서 그 비웃던 주님께서 바로 심판주로 서 계시는 모습을 보게 될 때 더욱 절망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반응 역시 그때나 이 때나 일반이다. 주님의 말씀에 비웃음을 짓는 사람들은 나중에 절망의 쓴웃음을 짓게 될 것이다. 오늘 우리의 자녀들을 잘못 키우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에 비웃게 되는 데 이것은 대단히 경계해야 될 사실이다.

모든 사람이 죽는 이 죽음의 절망의 땅에서 그 죽음의 그늘을 생명으로 밝히실 분은 역시 인간을 죽음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하여 친히 죽음을 맛보신 주님 뿐이시고 마지막에는 죽음을 향하여 호령하실 것이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15:55)라고 호령하실 때가 오고있다. 죽음을 향하여 호령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기뻐함으로 영광의 주님과 함께 사망과 절망을 호령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복되신 이름으로 …



Ⅳ.죽은 자를 죽음에서 불러 일으켜 세운다.(25~26)

“무리를 내어 보낸 후에 예수께서 들어가사 소녀의 손을 잡으시매 일어나는지라, 그 소문이 그 온 땅에 퍼지더라”

“내 딸이 방금 죽었사오나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으소서 그러면 살겠나이다” 라는 믿음을 가지고 불신의 난관을 헤치고 자신의 사랑하는 외동딸의 죽음 앞에까지 돌아온 이 회장장은 마침내 그 믿음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고 감격하는 모습을 읽게 된다. “예수께서 저희를 다 내어 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한 자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사, 그 아이의 손을 잡고 가라사대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심이라,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 열두 살이라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 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저희를 많이 경계하시고 이에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라”(막5:40~43; 눅8:54~56)

이 놀라운 주님의 생명의 역사에서 우리는 몇 가지 특징적인 부분들을 마가복음의 내용을 중심으로 살피면서 말씀을 맺고자 한다. ①때로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는데 세상의 요란함이 장애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주님은 이 놀라운 은혜의 역사를 위하여 믿음으로 하나된 사람들만을 함께 하게 하신다. “예수께서 저희를 다 내어 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한 자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사” 온통 죽음으로 요란하게 울음소리로 충만한 사람들을 진정시키기를 원하신다. “예수께서 그 직원의 집에 가사 피리 부는 자들과 훤화하는 무리를 보시고, 가라사대 물러가라!” 하셨던 주님은 더 세미한 하나님의 역사를 위하여 믿음으로 하나된 특공대를 구성하신다. 우리는 때로 하나님의 깊은 은혜를 체험하기 위하여 세상의 요란스러운 것을 다 내어 보낼 필요가 있다.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한 자들을 데리시고” 시편기자는 고백하기를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시103:13)라고 가르친다. 다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다. ②구태여 기도가 필요치 않으셨다. “그 아이의 손을 잡고 가라사대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심이라” 우리는 성전 미문의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니”(행3:6~8)라는 기록이 이 내용과 다르지 않음을 보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요 생명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심을 확신하게 된다. ③완전한 회복과 함께 하나님께는 영광을, 함께한 자들에게는 확신과 믿음을 줬다.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 열 두 살이라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 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저희를 많이 경계하시고 이에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라” 이 내용을 자세히 분석해 보면 회복된 사람의 완전한 자연적인 모습이면서 영적인 회복의 모델이기도 하다. 이것이 곧 죽음에서 일으켜 세움을 받은 자의 회복된 모습이다. ⓐ “소녀가 곧 일어나”서 한 것인데 주님께서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신 명령을 의지하여 일어섰다. ⓑ걸으니. 이 소녀는 세움을 받은 것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활동을 시작한다.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 이 소녀의 변화는 많은 사람들에게 놀라움을 선사했고 당연히 그것을 보는 사람들은 영광을 돌리게 되었다. ⓓ먹을 것을 주라. 죽음에 있는 자나 잠자는 자는 먹지 못한다. 그러나 소녀는 살아나서 자신의 활동에 힘이 되는 음식을 필요로 했다.

이 네 가지의 모습은 오늘 죽음에서 일으켜 세움을 받은 우리의 모습이어야만 한다. 주님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명령하신다. “달리다굼!” 즉, “…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엡5:14) 오늘 나는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선 모습인가? 우리는 세상에 어떤 것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주님을 의지하여 걸어야 한다.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니”(행3:6~8) 할 수 있어야 한다. 나의 변화된 모습은 주변 사람들이 놀랄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살아 움직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힘있게 감당하므로 먹을 것을 필요로 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굶주려 하며 사모할 수 있어야 만 한다. 오늘 이 말씀을 듣는 여러분 모두가 이런 회복된 사랑 받는 하늘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복되신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