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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마 9:20~22 2004-12-19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회당장의 요청으로 12살 된 딸을 살리러 가는 길 가운데서 또 하나의 놀라운 은혜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데 마태는 이 사건을 비교적 간략하게 전하고 있는 반면에 기적의 종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적과 치료를 중심으로 복음서를 기록하고 있는 마가는 이 사실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막5:25~34; 눅8:43~48) 사실 우리 모든 인류는 죄로 인해서 신음하고 괴로워 하며 죽어가고 있지만 이러한 모든 사람을 치료하러 오신 주님은 모든 사람이 다 이 여인과 같이 병에서 놓여 건강하여 평안한 삶을 살기를 원하셔서 우리가 감당해야 할 저주를 친히 십자가에서 감당하실 뿐만 아니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부활하셔서 하나님 우편으로 가시고 성령을 보내셨다.

오늘 본문은 “예수께서 일어나 따라가시매 제자들도 가더니”(19)라고 시작되고 있다. 문제가 있는 곳, 주님을 필요로 하는 곳 어디에도 주님은 부름의 요청을 사양치 않으시고 따라 나서는 주님이시고, 또한 그를 따르는 제자들 역시 주님께서 가시는 길을 함께 가야 하는 것을 오늘 본문의 내용에서 모델로 보게 된다. 예수께서는 지구의 끝이라도 믿음으로 요청하는 곳이라면 친히 임하시는 주님이시고 오늘도 이 약속은 예외 없이 편견 없이 모든 주님을 향해 부르짖는 사람들에게 응답으로 임하시는 주님이심을 확신하며 어려운 문제를 가진 여러분 모두가 주님께 부르짖어 동일한 응답을 맛보는 복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복되신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Ⅰ.강산이 넘는 세월을 비극으로 산 한 인생이 있다.(20)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겉옷 가를 만지니”

어느 역사, 어는 사회에든지 그늘진 곳, 외롭고 힘겨운 인생을 지고 가는 사람들은 늘 있게 마련이다. 오늘 예수 그리스도를 최종적으로 찾은 이 여인도 그 중에 한 사람일 뿐이다. 마태는 안타까워서인지는 몰라도 이 여인의 과거사를 아주 간략한 한마디로 간추리고 있다.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 얼굴은 핏기 없이 창백한 모습이었을 것이고 오랜 기간 사람들로부터 격리된 탓에 대인 공포증까지도 가졌던 것 같다. 마가는 이 가련한 여자의 괴로운 인생내력을 소상히 기록하여 고침을 받은 역사가 인생에 얼마나 큰 변화를 가져왔는가를 오늘 우리에게 일러주고 있다.



1.철저하게 고독과 슬픔에 내 팽개쳐진 인생이었다.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한 여자가 있어,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막5:25~26) 이 여인의 질병으로 시달린 기간이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열 둘이라는 숫자와 상관이 있던 없던 간에 공교로운 것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의 나이도 열 두 살쯤이었다(막5:42; 눅8:42)는 것과도 묘한 연관을 이루고 있다. 오늘 우리가 아무리 힘겹다고 해도 이 여인보다는 났지 않겠는가 생각이 된다.

혈루병을 가진 사람은 율법의 기록으로 미루어 볼 때 부정한 병으로 사람들이 단순히 앉았던 곳이나 환자가 사용한 곳에 접촉만 해도 부정해 지기 때문에 성전에도 들어 갈 수 없었고 이런 입장에서 문둥병 못지않게 사람들로부터 기피를 당하는 질병이다.(레15:25~28)

흐르는 피는 멈추지 않고 사람들은 다 멀리하는 이 여인의 입장을 생각해 본다고 하는 것 만으로 참담하기 이를 데 없다. 할 수만 있으면 고쳐보려고 용하다는 의사들을 다 찾아 다녔고 있는 제산은 다 의원들에게 치료비로 지불해 버리고 이런 일들이 12년간이나 계속 되었으니 얼마나 괴로웠겠는가? 있던 재산은 다 바닥이 나버려서 이제는 치료비는 고사하고 먹고 사는 문제까지도 어려워진 형편에도 불구하고 병의 차도는 고사하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라고 하는 것으로 봐서 이제는 올 데 까지 와버린 막다른 골목의 인생이 되었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그러나 다행인 것은 …



2.이 비운의 여인이 복음을 듣게 되었다.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섞여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막5:27) 이 세상에는 소문이 얼마나 많은가? 그 소문으로 우는 사람 웃는 사람, 가지 각색의 소문이 있지만 이 여인이 그래도 복이 있는 여인인 것은 그의 인생이 파탄 나려는 그 마지막에 예수에 관한 소문을 들을 수 있었다고 하는 것이다.

또 이런 입장에서 우리가 복된 복음의 소망을 흘린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귀한가를 생각케 하는 부분이다. 40일이 지나면 멸망될 뻔한 니느웨성이 요나의 겨우 하루 외친 복음을 소문으로 전해 듣고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서 하나님께서 멸망시키시기로 작정하셨던 형벌을 거두신 역사가 있는 것처럼 복음의 소문이야 말로 [막장의 인생들-세상에서 실패하고 마지막 찾아간 곳이 석탄 캐는 막장이라 해서 그렇게들 말한다.]에게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는 능력이 된다.

예수의 소문을 들은 이 여인은 머뭇거릴 시간이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에[돈도 사람도 없는 이 가련한 여인은 이 세상에서는 더 이상 의지할 것이 없었다고 하는 것이 어쩌면 주님의 은혜를 더욱 갈급 해 하는 이유가 됐다.] 힘없는 발걸음이지만 밀려가는 군중 틈으로 예수의 겉옷 가라도 만지려고 죽을 힘을 다해서 예수께로 다가가게 되었고 세상이 해결해 주지 못한 이 여인의 비운의 운명이 비로소 생명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Ⅱ.예수 그리스도는 은혜와 진리로 충만하신 생명이시다.(21)

“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섞여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 함일러라,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막5:27~29)

이 여인은 세상의 모든 치료의 방법은 다 써보고도 효과를 얻지 못했지만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가서 본문의 표현대로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막5:28)는 확신을 갖고 죽을 힘을 다하여 자신의 가진 믿음의 확신대로 움직였고 그 믿음은 적중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실패를 거듭하면 할수록 부정적이 되어 가지만 여태껏 이 여인이 시도했던 것은 돈을 지불하는 세상적인 방법이었고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방법은 오직 믿음 하나로 행했다. 세상에 대해 철저하게 절망할수록 하나님께 대하여 더 철저한 믿음이 됨을 바울의 고백 속에서도 더러 듣는 사실들이다.

이 생명의 능력은 믿음으로 나아오는 자에게 주어진다.

이 여인은 옆의 사람들을 바라볼 겨를이 없었다. 오직 이 여인에게는 자신을 온전히 낫게 해 주실 예수 그리스도만 보였다. 이것이 바로 믿음이다. 남들이 자신을 스치기만 해도 부정해 질 것이기 때문에 경계의 눈초리로 볼 것이라는 생각도 자신이 힘이 없어 주님께 참으로 다가갈 수 있는지도 이 순간에는 생각치 않았고 오로지 주님만 생각하고 바라보며 나아갔다.

사실 우리가 신앙 한다고 하면서도 얼마나 곁눈질을 많이 하는지 모른다. 어떤 경우에는 예수 그리스도보다도 세상의 어떤 것이 더 크게 보이기도 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게 한눈을 판다는 것은 사실 아직도 덜 다급 하다는 이야기이다. 우리 모두가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만이 마지막 남은 소망이라는 확신으로 주님을 바라보고 섬길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주님의 능력이 나 자신의 능력이 되고 주님의 말씀이 내 말씀으로 들릴 것이다.

이렇게 철저하게 깨어진 믿음으로 나간 이 여인에게 드디어 기적이 일어났다. 12년간을 저주처럼 흐르던 피는 주님의 옷깃을 만지는 순간 거짓말같이 멎은 것이다. 아담이후의 모든 사람들의 몸에 한결 같은 죄의 성품의 피가 흘러서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연약함이 주님을 믿음으로 붙들 때 이 여인처럼 중단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죄의 저주로 괴롭고 힘겨웠던 중압감도 저주스럽게 괴롭히던 죄의 사슬도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에 하나가 되는 세례를 받고 새로운 피조물이 될 때 이제 하늘의 새 언약의 피인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피가 새롭게 흐르게 되는 것이다.

이 생명은 결코 마르지 않는 샘과 같다.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시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니”(막5:30)

예수 그리스도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분이시다. 은혜와 진리는 곧 생명이고 이 넘치는 생명은 우리 각자의 믿음으로 퍼내 쓰는 것이다. 병 속에 담겨 있는 음료수는 빨대(스트로우)로 빨아 먹을 수 있듯이 주님 안에 감춰있는 생명은 믿음이라는 도구로 우리 자신의 것으로 누리는 것이다.

주님 안에 생명은 결코 줄어들지 않는다. 솟아나는 샘물과 같이 계속 솟아나기 때문에 아무리 많이 퍼내도 결코 줄어들거나 가물지 않고 충만하기 때문에 그것을 사용하지 못하는 사람이 사실 불쌍한 사람일 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능력은 모든 인류를 위해 쓰시기를 원하시고, 주시겠다 약속하신 것은 사실이지만 이 여인의 치료의 역사는 순간적으로는 주님의 의사와 상관이 없었다. 순전히 이 이름없는 여인의 놀라운 믿음의 도구로 퍼간 것이다.

주님께는 수많은 사람이 지나가고 스쳐 갔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믿음을 가지고 자신에게서 능력을 퍼가는 사람을 아시고 계셨다.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막5:30f) 여기에 반응하는 제자들은 오늘 우리와 다를 바가 없었다. “제자들이 여짜오되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 하되”(막5:31) “다 아니라 할 때에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무리가 옹위하여 미나이다”(눅8:45)

온 인류가 다 퍼서 누려도 우리 주님의 생명은 결코 줄어들지 않는다. 그런데도 우리는 어리석게 이 생명을 누리지 못하고 있으니 얼마나 어리석은가? 분명히 머리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는 사랑의 초청이 들리는데도 우리는 이 허약한 여인처럼 주님을 향해 가지 못하는 어리석음으로 생명과 평안을 넘치도록 누리지 못하는 어리석음 속에 있을 때가 많다.

예수 그리스도께는 은혜와 생명이 넘친다. “…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요7:37~38)신 주님의 약속은 분명히 그냥 듣기 좋으라고 하신 말씀이 아니다. 누구든지 가리지 않고 믿음으로 나아가는 자는 풍족히 누릴 것이라는 약속을 이 여인처럼 누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복되신 이름으로…



Ⅲ.주님은 믿음의 사람을 찾으신다.(막5: 31~32)

“제자들이 여짜오되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 하되, 예수께서 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보시니”

복음서에서 소매치기에 관한 기록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 것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예수께서는 수많은 군중이 떠미는 가운데서도 믿음으로 자신의 옷자락을 만진 자를 아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많이 몰려 다니는 군중가운데서 소매치기를 당할 만 한데도 그런 기록이 없는 것을 보면 역시 주님의 이러한 능력을 당시의 사람들이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주님의 은혜를 가져가는 것은 도둑질이 아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사용하도록 허락하셨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이 주님의 능력을 가져다 쓰지 않으니 얼마나 우리가 어리석은가?

주님께서는 자신이 이미 허락해 둔 하나님의 능력을 사용하는 이 믿음의 여인을 보시기를 원하셨다. 결코 책망하거나 벌주시려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그녀의 믿음을 칭찬해 주시기를 원하셨고 또 다른 사람들이 이 연인처럼 은혜를 누리게 하시려는 의도에서 그 여인을 보시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이러한 주님의 태도에 “여자가 제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짜온대”(막5:33)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구체적으로 맛본 사람일수록 주님을 더욱 경외하고 존경하게 되어 있다.

마치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본 이사야 처럼 하나님의 역사를 가장 사실적으로 맛본 사람일수록 더욱 깊은 감동과 거기에 합당한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게 되어 있다. 요즘 몇몇 사람들이 읽고 있는 것처럼 예배나 경배를 우리 인간의 생각이나 이성으로만 드린 다면 하나님은 받지 않으실 것이다. 예배는 구원 받은 감격과 기쁨으로 저주에서 자신을 해방시키신 사랑의 역사에 감동하여 성령과 더불어 최고의 가치와 감격을 하나님께 표현하는 행위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배에서 감동을 받기 전에 먼저 구원 받은 감격을 이 여인처럼 주님 앞에 감사와 존귀와 영광을 함께 돌려드리는 것이다. 존귀와 영광은 우리 이성과 감성만으로 드릴 수 없고 성령과 더불어서만 가능하기 때문에 신령과 진정으로라는 조건이 예배에는 붙어 있는 것이다.

요한 사도를 통해서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4:23) 사죄의 은혜와 구원 받음이 너무나 감사해서 은혜 받음을 표현하는 것이 예배이기 때문에 그 사죄의 은혜를 위하여 피 흘리시는 십자가의 희생을 기념하는 것이 예배의 중심에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이 여인은 자신의 믿음과 구원 받은 사실을 모든 사람들 앞에서 주님께 고백하고 있다. “여자가 스스로 숨기지 못할 줄을 알고 떨며 나아와 엎드리어 그 손 댄 연고와 곧 나은 것을 모든 사람 앞에서 고하니”(눅8:47)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믿음의 고백이다.

하나님은 지금도 믿음의 사람을 찾으시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 드리는 자를 찾으신다. 오늘 이 말씀을 듣는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믿음의 사람들 되시기를 주님의 복되신 이름으로…

Ⅳ주님은 우리 모두가 온전하기를 원하신다.(22)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가라사대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시로 구원을 받으니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막5:34)

결국 주님께서 이 여인을 찾으신 이유는 자신을 군중 앞에 자랑하고자 해서가 아니라 사실 이 여인을 위해서 였다. 믿음을 고백하는 여인을 향하여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라고 격려 하시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육신의 고침에서 구원 받는 것에 머물지 않고 영육이 온전히 구원 받기를 원하셨다. 사실 육신의 치료도 중요하긴 하지만 일평생 동안만의 유익이겠지만 영혼이 온전히 사죄를 받아 영원한 영광에까지 들어가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다.

오늘도 예수를 믿는 것이 분명히 육신적으로도 많은 유익이 있다. 건강의 문제, 긍정적인 사고를 가지고 어떤 일이든지 적극적으로 하게 되고, 불신의 사람들보다도 지혜를 갖게 되고, 절제로 재산을 모으는 것에도 분명히 이점이 있다. 바울은 자신의 민족 유대인들의 유익이 무엇인가를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뇨, 범사에 많으니 첫째는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롬3:1~2)고 고백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모든 유익에서 그친다면 다른 사람들과 종국적으로는 무엇이 다른가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이 여인이 12년 동안 고치지 못했던 혈루병의 치료된 사실 만으로 주님과의 관계를 끝낸다면 사실 주님의 은혜를 받은 것은 절반도 되지 못할 것이다. 오늘 여기 있는 우리들도 그냥 건강하고 부자 되고 만다면 십자가의 진정한 가치는 잃고 사는 사람들이다. 분명히 주님께서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53:5)라는 약속이 육신에 그친다면 크게 다른 종교인들과 다르지 못할 것이다.

예수께서 여인을 찾으신 것은 결코 두려움을 주시고자 했던 것이 아니라 평안을 주시기 원해서 였다.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가라사대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시로 구원을 받으니라” 이 내용을 찬찬히 음미해 보면 몇 가지 사실을 이해하게 되는데 첫째는 평안을 주고 계시다. ①딸아 안심하라. 둘째는 믿음을 칭찬해 주고 계신다. ②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마지막으로는 이러한 선언의 결과이다. ③여자가 그 시로 구원을 받으니라. 12년의 혈루병에서 고침을 받음과 함께 주님으로부터 구원의 선언을 듣고 있다.

예수께서 회개한 새리장 삭개오를 향하여 “…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눅19:9)라고 선언 하셨듯이 이 여인에게도 동일한 구원의 은혜를 선언하고 계시다. 마가는 “예수께서 가라사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막5:34)라고 병에서의 완전한 해방을 선언하시는 것으로 마무리를 하고 있는 것이 특이하지만 역시 앞부분에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말씀은 전인적인 구원을 선언하고 있다고 보는 데 무리가 없다.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 내던져진 인생, 남은 것이라곤 한숨과 절망과 사람들을 향한 원망뿐이었을 혈루병의 여인 이 가련한 인생에게 삶을 반전시킨 것은 예수에 관한 소문이었다. 자신의 처지나 남들의 눈도 의식하지 않고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서 믿음으로 주님의 겉옷을 만지는 순간에 이 가련한 운명의 여인의 인생은 저주에서 감사와 복으로 바뀌게 되었다.

세상에 의지할 것이 없는 경우가 어떤 경우에는 더욱 주님을 철저하게 의지하게 되는 이유가 되는 것을 보면 주님을 만나는 이런 고통스런 이유들은 원망할 이유보다는 오로지 주님께로 가야 할 이유임을 배운다.

주님께서는 믿음으로 자신을 의지하는 자들을 절대로 저버리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오늘 이 시간에 이 말씀을 듣는 여러분 가운데 이런 비운의 운명이 있다면 이 여인처럼 주님을 향해 돌진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시고 그런 믿음으로 주님을 향해 나아가는 여러분들에게는 이 여인이 경험한 감격스런 은혜의 역사, 치료의 역사가 영육간에 이루어져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시는 복된 음성을 들으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